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2)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32화(32/388)
32화. 차트 조지기 (3)
정해진 프로토콜.
환자의 상태를 기록하고 경과를 지켜본다.
자신이 시킨 일이기도 했고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이었지만, 문제는 그 양이었다.
‘나한테 보고한 것도 다 적어 놨어. 환자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소름 끼치는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오태상이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딸깍.
“어. 나야, 오태상.”
[선배님.]“당장 ER로 내려와.”
[저희도 지금 바쁜데요.]“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네?]“아. 당장 내려오라고!!”
[네.]뚜욱.
그 말을 끝으로 오태상이 몸을 돌렸다.
장길만이 왜 이진혁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 * *
각 과의 정규 업무만으로도 벅찬 레지던트들.
새벽에 콜을 받고 ER에 다녀오면, 다음 날 컨디션이 엉망이 되는 걸 알기에 웬만해선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사정을 봐준다고 환자를 외면할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세운 계획이었지만, 큰 파장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NS 레지던트 이상민이 차트를 확인한 뒤 차가운 목소리로 진혁을 불렀다.
“이진혁 선생.”
“네, 선생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예?”
“이거 말입니다, 이거.”
다짜고짜 얼굴에 차트를 들이미는 이상민.
진혁이 한없이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일도 하느라 킵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중간중간 다른 일을 하느라 전부 기록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화내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일이 몰려서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
또다시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자.
이상민이 황당해했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이 새끼 대체 뭐야! 그냥 찐따인가. 아! 시발!!’
이상민이 불같이 치솟는 화를 억눌렀다.
“차트를 왜 이렇게 자세히 적었냐고.”
“네?”
“이렇게 적은 이유가 뭐냐고!!”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오 선생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오태상 선생님?”
“네. 정해진 프로토콜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
“이벤트가 있으면 차트에 전부 적게 되어 있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 됐어요.”
손을 휘저은 이상민이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 * *
“선배님, 저놈 뭡니까?”
이상민은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그의 반응을 예상했던 오태상이 곧장 되물었다.
“왜? 뭐라는데.”
“선배님이 시켰다는데요?”
“뭐? 내가?”
“네. 선배님이 프로토콜대로 하라고 했다던데요. 아닙니까?”
“하!”
오태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토콜대로 하라고 강조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얼굴이 붉어진 이상민이 또다시 따지고 들었다.
“저 정도 수준이면 Conservative treatment(보존적 치료)가 원칙 아닙니까. 그래서 지켜보자고 한 거고요. CT도 다시 찍기로 했는데 뭐가 문제인 겁니까!”
“내가 시킨 거 아니다.”
“저한테 직접 전화까지 하셨잖아요.”
거듭된 항의에 오태상이 고개를 저었다.
“저놈 꼴통이야. 꼴통. 말리그(Malig)라고.”
“네?”
“나도 몰랐는데, 오늘 알겠더라. 대책 없다, 저놈.”
“이 선생이 혼자 했다는 겁니까?”
“그럼 내가 시켰겠냐?”
“!!”
순간 이상민이 고개를 휙 하니 돌렸다.
여전히 차트에 뭔가를 적고 있는 이진혁.
순진한 얼굴로 자신을 조지고 있었다.
‘말리그라고? 아, 시발.’
이상민이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말리그(Malig)
악성종양을 뜻하는 Malignancy의 줄임말.
무턱대고 후배를 혼내는 레지던트나 사고만 치는 꼴통들을 뜻하는 은어였다.
그들과 엮이면 피곤해지는 법이거늘.
말리그와 된통 엮인 셈이 됐다.
“말리그고 뭐고, 저 이대로 못 넘어갑니다.”
“뭘, 어쩌려고.”
“잠깐 여기로 데려오겠습니다. 잠시만요.”
말릴 틈도 없이 다시 진혁에게 다가가는 이상민.
그 모습에 오태상이 고개를 저었다.
* * *
오태상과 장길만, 이상민까지.
세 명의 레지던트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진혁은 태연했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갈 일이었다.
이상민이 진혁을 몰아붙였다.
“문제 생기면 걸고넘어지려고 한 거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봐요. 이진혁 선생. 말 똑바로 해야 할 거야. 일부러 엿 먹이려고 한 거 아니냐고.”
“아닙니다.”
“그럼 뭔데? 왜 이렇게 자세히 적었는데?”
이상민이 큰 소리로 따지고 들자.
간호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다른 과 레지던트가 ER 소속 인턴을 상대로 소리를 지르는 상황이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진혁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차트를 너무 자세히 적어서 오해하신 거라고 봐도 될까요?”
“오해? 이게 오해라고?”
“예, 오해입니다.”
“어째서?”
“환자를 완전히 인계하기 전까진 제 책임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제가 자세히 적은 차트로 인해 이슈가 생기더라도 이상민 선생님께는 문제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직 환자를 인계하기 전이니까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답변.
맞는 말이었지만,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환자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보호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고, 의료 소송에서 차트는 중요한 증거로 활용될 터였다.
“아. 미치겠네.”
“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신 병원 인턴진료지침서에 있는 내용인데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요.”
“!!”
순간 이상민이 움찔거렸다.
‘이 새끼가 진짜. 원칙주의자야 뭐야.’
꼭 기수마다 이렇게 꽉 막힌 놈이 한둘은 있었다.
원칙만 내세우는 놈들이.
* * *
그 시각, 옆에서 진혁과 이상민을 지켜보던 장길만은 다른 의미에서 기막혀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할지 다 생각해 둔 거다. 순진한 척하면서 원칙주의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어!!’
멘탈이 약한 장길만은 안 그래도 원주에서 된통 당한 경험이 있기에, 지금 상황이 감당되질 않았다.
그때, 장길만의 시야에 자신들을 쳐다보는 간호사들이 들어왔다.
‘설마, 간호사들까지 노리고??’
사실, 간호사들은 타과 레지던트에게 불만이 많았다.
당장 환자가 ‘의사 불러와!’라고 소리치는데, 새벽만 되면 움직이질 않으니까.
그 사실까지 떠올리자.
장길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간호사들의 환심도 사고 콜을 거부하는 레지던트를 혼내 주기 위해 벌인 일일 터.
눈앞이 아득해져 간다.
‘어째서 이런 놈을 후배로. 하……. 미치겠다.’
장길만이 눈을 질끈 감으며 한탄할 때.
이상민이 또다시 버럭거렸다.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네, 타과에 컨설트한 시간과 타과 레지던트가 찾아온 시간을 기재하라고 인턴 교육 때 배웠습니다.”
“!!”
교육수련부 주관으로 인턴 교육 때 배우는 내용까지 언급하자, 장길만이 움찔거렸다.
‘이 자식이 하루 종일 자 놓고서는…….’
진혁이 수업을 듣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이상민만 여전히 열 낼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 잘못이 없다?”
“…….”
“배운 대로 했을 뿐이고, 정해진 절차를 지켰을 뿐이다? 난 원칙대로 했을 뿐이다? 뭐 이거 아니냐고!”
“환자가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건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진혁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하지만, 풀릴 리 없는 마음.
이상민이 다시 소리 지르려던 찰나.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경증처치구역에 있던 간호사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아, 씨발.’
이상민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어나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일어나라고요.”
“기분이 풀리실 때까지 이러고 있겠습니다.”
“이이익!!”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진혁.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제발 내려와 달라고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어디서 어깃장이야.”
“남의 과까지 내려와서 웬 행패야.”
“맨날 늦게 와서 우리만 힘들었잖아.”
“환자가 걱정돼서 그런 거지. 인턴이 뭘 알고 그랬겠어.”
간호사들은 이상민을 성토했다.
진혁이 ‘제발 내려와 달라’며 몇 번이고 애원하다시피 콜했다는 걸 알고 있던 탓이다.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이 커지자.
이상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해 안 할 테니까 일어나요.”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진혁이 다시 허리를 일으키자 이상민이 곧장 움직였다.
* * *
Acute Subdural Hemorrhage(급성경막하 출혈)로 진단한 환자.
환자 상태를 살피다 그 증상이 심해지면, 두개골 내압을 감압하기 위한 개두술을 시행해야 했다.
이상민은 곧장 브레인 CT를 찍었다.
이전에 촬영했던 영상과 비교해 보기 위함이다.
잠시 후, 판독 결과를 받아 든 이상민이 얕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출혈이 계속돼?!”
정중선 편위가 4mm로 길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출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말.
이상민이 곧장 차트부터 다시 확인했다.
처음에는 들어오지 않던 수치들.
진혁이 워낙 꼼꼼히 적어 놨기에 시간대별로 환자 상태가 나빠지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이상민이 서둘러 오태상을 찾았다.
“NS로 전원시켜야겠습니다.”
“사람 붙여 줄게.”
“예.”
“여기 11번 베드 NS로 옮겨 주세요.”
잠시 후.
이송팀 직원이 달려와 베드를 옮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이 쓰게 웃었다.
일명 차트로 조지기.
이상민의 반응만 봐도 얼마나 민감해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른 파장은 자신이 감당해야 했다.
‘뭐, 그래도 환자를 위한 일이니까.’
자신의 염려와 다르게 환자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어느덧 새벽 5시.
응급실은 환자로 포화 상태였다.
거꾸로 말하면, 신환(신규 환자) 처리가 어느 정도 끝났다는 말.
진혁이 스테이션에 들르자.
김지연 간호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 쌤. 커피 한 잔 드실래요?”
“저야 좋죠. 프림 좀 많이 타 주세요!”
“오오. 우리 이 쌤. 달달한 거 좋아하시는구나.”
“당도 보충해 줘야죠.”
“잠시만요!”
선생님에서 쌤으로 호칭이 격상된 상황.
일 못 하는 의사를 싫어할 순 있어도, 일 잘하는 의사를 싫어하는 간호사는 없었다.
게다가 이상민을 물 먹이는 걸 보지 않았던가.
곧, 진혁이 커피를 홀짝였다.
인공감미료가 주는 단맛이 입안을 가득 메우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우와. 맛있는데요?”
“막내 솜씨예요. 커피 하나는 기가 막히죠.”
“이야. 종종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커피도 얻어먹고 좋네요. 이 정도면 성공한 거죠?”
“?”
“인턴을 싫어하시는 분도 많잖아요.”
“아!”
진혁이 3월 인턴에 대한 간호사들의 불신을 언급하자, 김지연이 희게 웃었다.
“우리 이 쌤 정도면 완벽하죠.”
“이젠 인정하시는 겁니까?”
“어머, 저는 첫날부터 알아봤는데요?”
“에이, 못 미더워하셨잖아요.”
“그야. 뭐. 이렇게까지 잘하실 줄은 몰랐죠. 그보다 아까 어떻게 된 거예요?”
김지연의 물음에 진혁이 주위를 살폈다.
이젠 여론전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