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21)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321화(321/388)
321화. 오더 쳐 내기 (3)
의사는 보수적이다.
아니, 폐쇄적이다.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고.
바꾸려 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의사가 모인 종합 병원은 보수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무언가를 할 때 중요한 건 세 가지.
논쟁을 피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진혁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어떻게 나올지 몰라 시뮬레이션도 하고.
대화 플로우까지 체크했다.
그렇게 소모한 게 하루.
다음 날 진혁이 내분비외과 치프를 찾았다.
“힘드시죠? 여기 커피요.”
“이야~ 천하의 이진혁이 커피 심부름까지 하고. 이 정도면 성공한 거냐?”
“그럼요. 치프인데요.”
“치프는 무슨. 야야. 허울뿐인 감투야, 감투. 위에선 누르고. 아래선 욕하고. 그냥 뭣도 아니라고. 뭐,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잖아.”
“치프가 많긴 많죠.”
“그래. 원 오브 뎀이다. 원 오브 뎀.”
분과별로 치프가 있다는 말.
진혁이 방긋 웃자, 내분비외과 치프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300원짜리 캔커피.
믹스 커피 만큼이나 사랑받는 레뜨비였다.
“이야~ 달다, 달아. 안 그래도 당 떨어졌는데. 좋다. 어? 좋다고.”
“뭐, 당 보충은 필수죠. 그나저나 수술은 어떠셨어요?”
“수술? 수술이야 여전하지. 자, 이제 뇌물은 먹었고. 뭔데?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끝내자. 졸리다, 졸려.”
“뇌물은 아니고. 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음. 그냥 그래서요.”
“왜? 뭐가?”
“…….”
“아, 뭐냐니까.”
성질 급한 외과 의사답게 치프가 곧바로 추궁 모드로 돌변했다.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
속 시원히 말하고 빨리 끝내자는 말투까지.
성질머리 하나는 급하기로 소문난 외과 의사다운 태도였다.
진혁이 일부러 침묵하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게. 음…….”
“1절만 하자, 1절만.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간단하게. 오케이?”
“네. 사실, 어제 구내식당에 갔는데요. 내과 애들이 우릴 싸잡아서 욕하고 있더라고요.”
“뭐? 뭐라고 했는데?”
“무식한 놈들이다. 대책없이 오더만 깔아 둔다. 제대로 고치지도 않고. 복붙만 한다. 간호사가 없으면 반푼이다. 뭐,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너한테 직접?”
“아뇨. 자기들끼리 떠드는 거죠. 근데, 뭐. 아시잖아요. 다 들으라고 하는 거.”
“하!”
당장 혀를 찬 내분비외과 치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과의는 외과의를 가리켜 무식하다 일컫고.
외과의는 내과의를 가리켜 좀생이라 욕하는 건 일상.
그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였다.
“썩을 놈들. 그래서 그걸 듣고만 있었어?”
“뭐, 내과는. 음. 오더 하나는 깔끔하잖아요. 그게 본업이기도 하고. 뭐, 추가 오더가 많긴 한데. 그래도 우리처럼 깔아 두는 것도 아니고. 할 말이 없더라고요.”
“야야. 걔네도 복붙은 똑같아.”
“그래도요. 디테일이 다르잖아요.”
“디테일은 무슨. 나, 걔네 맘에 안 든다. 우리보고 툭하면 개복한다고 지랄인데. 지들은 뭐. 잘난 줄 아냐. 약으로 다 될 거 같으면 메스가 왜 있겠냐. 수술방은 왜 있고. 어!?”
한참 계속된 욕지거리.
거짓을 살짝 보탰지만, 아주 없는 소릴 한 건 아니었다.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진실.
외과의가 오더를 깔아 둔다고 욕하는 건 간호사뿐만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지금 치프가 내뱉는 욕은 그냥 감정 섞인 배설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와 동조하며 내과를 한참 욕하는 진혁이었다.
아, 욕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이 또한 상대를 존중하는 행위였다.
* * *
소문이 빠른 만큼 금세 다른 과에도 퍼질 터.
치프끼리 친목을 다지는 모임까지 있었으니.
가만있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목적은 하나.
진혁이 명분에 명분을 더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음 주면 차세대 EMR 오픈인데요.”
“뭐, 순차적으로 하기로 했잖아. 우린 다다음 주고.”
“네네. 근데 걱정되는 게 있어서요. 그게…….”
“그러니까 네 말은. 음. 내과에서 지랄할 거다?”
“네, 편의성을 극대화하긴 했는데. 결국, 지금처럼 오더 깔아두고. 간호사 쌤들이 걸러내고. 그러다 문제 생기면. 뭐, 아시잖아요.”
“음.”
“욕먹는 건 뭐. 사실 상관없는데. 괜히 환자한테 피해갈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제가 많이 관여해서…….”
“너도 곤란해질 거 같다?”
“네. 뭐, 어떻게 보면 제 책임이기도 하니까요. 치프도 아시잖아요. T/F 시작할 때부터. 말 많았던 거.”
아직 레지던트에 불과한 그 자신이 들어갔기에 시끄러웠던 병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한바탕 난리가 났으니까.
뭐, 의사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괜한 말을 했다가 오지호가 그런 조치를 했던 것이었지만.
내밀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한참 수선스럽게 떠들어 댔었다.
“그야 그렇긴 한데…….”
“왠지 저쪽에서 밑밥을 까는 거 같기도 하고. 이게 참…….”
“밑밥?”
“네. 부원장님, 요즘 너무 조용해서. 뭐, 차세대 오픈하면 난리 날 텐데. 그때 같이 작업 들어올까 봐요.”
“…….”
“에이. 아니겠죠. 그냥 제 생각이었어요.”
진혁이 지극히 후배다운 태도를 보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계면 쩍인 표정부터.
걱정된다는 듯 살짝 구긴 미간까지.
사랑스러운 후배다운 연출이었고.
이는 완벽했다.
거기에 더해.
“에이, 제가 괜한 생각을 한 거 같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익게에 올려서 다구리치고. 뭐, 그러진 않겠죠.”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연출까지 보인다.
강약조절.
일종의 밀당이었다.
연인 관계만 통하는 비법이 아닌 만큼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일리가 있어.”
“…….”
“걔들 입장에선 기회다 싶은 거지. 어? 솔직히 분원에서 올라온 애들. 몇 안 되잖아. 친한 애도 아직 많이 없고. 커버쳐 줄 사람도 별로 없다고.”
“그렇죠. 거기다 선동 들어가면. 임상 쪽도 흔들릴 테고. 조금…….”
“이거 가만있으면 안 되겠는데? 그렇다고 애들한테 오더 깔아두지 말라고도 할 수도 없고. 음.”
“…….”
“뭐, 좋은 방법 없냐?”
그 누구보다 듣고 싶었던 말.
결국, 듣고 싶은 말을 끌어낸 진혁이 속으로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 * *
통합외과장인 최재원을 찾아가 담판을 짓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보고라인.
철저하게 절차를 지키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다.
환자 리뷰를 강화하자고 말하고 실제로 그게 시행된다면 원망이 쏠릴 테니까.
그러니 그 방법을 내분비외과 치프에게 말한 다음 곧바로 다른 분과를 돌기 시작했다.
그 자신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만큼 다른 과의 치프와도 친분이 있는 상황.
대장항문외과부터 돌며 똑같은 얘기를 전했다.
명분은 두 가지.
내과에서 외과를 욕하고 있다는 거.
그 자신 또한 차세대 EMR 오픈과 함께 구설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물론 간호사 얘기는 철저하게 뺐다.
괜히 논점을 흐릴 수 있으니까.
아니,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의사 중에는 간호사는 의사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 우려를 표하는 이도 많았다.
“야야. 환자 리뷰를 강화하자는 건데. 컨퍼런스 시간만 괜히 길어지는 거 아니야? 이미 하고 있잖아.”
“오더 걸러내기? 그거 관행이야, 관행. 수술할 시간도 부족한데…….”
“간호사? 원래 더블 체크하는 게 걔네 일이라고.”
분과가 많기도 했고.
일정을 어레인지 하고 각종 행사를 주관하는 게 치프의 일.
귀찮아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진혁의 정리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그러니까 랜덤으로 한 명만 하는 거죠. 하루에 한 명이요.”
“음.”
“수술을 앞둔 환자. 지금도 디테일하게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환자를 한 명만 고르고. 그냥 바이탈만 브리핑할 게 아니라. 오더도 보자는 거죠. 간호사가 걸러낸 거 말고. 최초 오더부터요.”
“그래? 그럼 로딩이 걸릴 거 같진 않은데.”
“네, 업무 버든도 없을 테고. 뭐. 예방도 되고요.”
한참 계속된 설득.
비번을 알려 주고 간호사한테 최초 오더까지 고쳐달라고 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반쯤의 예방은 된다고 여겼다.
그렇게 설득을 이어갈 때.
의외로 수부외과 치프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긴 한데. 요즘 내 밑에 애들. 내 말 잘 안 듣는다.”
“왜요?”
“뭐, 말년 병장인데. 내 말을 듣겠어? 나, 군 면제야, 면제. 전문의 따고 바로 부산으로 갈 거고. 아버지 병원에서 일할 거야.”
“아…….”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있다가 가고 싶다.”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
하극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에 거짓말이나 다름없었다.
진혁이 곧장 당근을 내밀었다.
“누가 개기는진 모르겠지만. 맘에 안 드시죠?”
“뭐, 하. 됐다. 됐어. 말해 뭐하냐. 내 얼굴에 침 뱉기지.”
“이거 무기에요, 무기.”
“뭐?”
“랜덤으로 환자 한 명만 고른다는 건데. 랜덤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누군간 정해야 하는 거잖아요.”
“지정을 치프가 한다? 그럼 랜덤이 아니잖아.”
“에이. 뭐, 치프 무서운 줄 알아야죠. 안 그래요?”
“무기로 쓰라고?”
“네. 휘두를 때는 휘둘러야죠.”
잠시 망설이던 수부외과 치프의 눈이 변했다.
사실 웃긴 일이었지만, 분과가 많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고.
분과를 뒤섞여 돌다가 세부 전문의를 이수할 과로 Fix 한다는 건데.
어차피 다른 과로 갈 거라는 이유로 척을 지는 놈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외과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 * *
결국, 모든 치프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 새롭게 만든 안은 곧바로 각 과의 과장님께 보고가 됐다.
워낙 준비도 철저히 했고.
본질적으로 그 자신이 사랑받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물론 과장 중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환자를 디테일하게 보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냥 기특한 생각을 했다며 좋아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게 정해진 시행일은 고작 이틀 후.
이제 공지만 남은 상황.
진혁은 모든 게 잘 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당장 내분비외과에서 파란이 일었다.
수술하던 환자가 죽었기 때문.
테이블데스였다.
* * *
“하. 진짜. 이게 아닌데. 하…….”
한숨을 내쉬고 수술모를 집어 던진 교수님.
모탈리티 컨퍼런스 일정을 잡고.
뭐가 문제였는지 리뷰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까지 떨어지자.
수술실에 들어갔던 레지던트 2년 차가 뒤늦게 인상을 썼다.
환자가 죽은 것도 찝찝한데.
분과원 전부가 모여있는 자리에서 리뷰를 하자니.
정말 최악이었다.
기분이 풀리지 않아 담배나 태우러 가려고 했던 그 앞에 신규 간호사 서유정이 뒤늦게 나타났다.
“선생님, 김광태 환자. 디아베트(Diabetes, 당뇨)있는데요.”
“…….”
“선생님?”
“아, 이거 지금 꼭 해야 하는 거예요? 저, 방금 수술실에서 나왔는데요.”
까칠한 반응이 나왔지만, 서유정은 물러서질 못했다.
물론 그녀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방금 전에 환자가 죽었다는 걸.
하지만 잘못된 오더는 걸러내야 했다.
“저, 일반식 먹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오더 수정 좀 해 주세요.”
“하……. 그건. 음. 제 비번 아시죠?”
“네? 네네.”
“그럼 그냥 좀 알아서 고쳐 주시면 안 돼요? 하……. 이런 거까지 진짜. 그냥 위에 물어보고 하세요.”
한참 계속되는 짜증.
불똥이 엄한 곳으로 튀고 있었지만, 유도리 있게 알아서 고치기엔 서유정의 짬이 부족했다.
“저, 죄송한데. 선생님. 김광태 환자. 아스피린도 D/C(중단) 해 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어? 그거 아직 안 바꿨어요? 제가 오더 넣었잖아요.”
“네? 기록에 없던데요.”
“아, 진짜. 그런 건 확실하게 해 주셔야죠. 구두 오더도 오더 아니에요! 기록만 따지면 어쩌자는 거예요!”
“…….”
“아, 짜증 나. 진짜. 비켜 봐요.”
수술할 때 출혈 위험이 있는 항혈소판제인 아스피린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니.
짜증이 폭발할대로 폭발한 레지던트 2년 차가 당장 컴퓨터 앞에 섰다.
다다다닥.
다다다닥.
빠르게 오더를 수정하는 그.
빠르면 수술 5일 전부터.
늦으면 수술 2일 전부터 아스피린을 D/C 하는 게 옳았기에 처방을 뚝딱 고쳤다.
문제는.
“어? 이거 왜 이래?”
다른 환자도 이슈가 있다는 거였다.
“네?”
“하. 서유정 선생님. 진짜. 황선일 환자. 티카글레러(항혈소판제), 이거 안 걸렀어요?”
“아.”
“아는 무슨 아에요. 진짜. 이러면 곤란해요. 신규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일은 똑바로 하셔야죠.”
“…….”
“진짜. 저, 80시간 근무라고 해도. 교수님이 내주신 숙제도 해야 했고. 응급도 잡혀서 이번 주에 거의 100시간 찍었다고요.”
“죄송해요. 선생님.”
“아, 짜증 나. 1시간마다 I/O 노티 해요.”
보복 오더를 내리고 담배를 태우러 가는 레지던트 2년 차.
서유정이 당장 울먹거렸지만, 아무도 그녀를 달래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또다시 다음 날.
내분비외과 치프가 컨퍼런스 때 누군가를 호출했다.
전날 보복오더를 내리고 한참 짜증을 부렸던 2년 차를 불러내 리뷰를 하라고 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