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24)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324화(324/388)
324화. 오더 쳐 내기 (6)
촬영 첫날.
내분비외과는 분주했다.
“어때?”
“너무 화려한데요.”
“그래?”
“아이라인부터 손 봐야 할 거 같은데.”
“입술은? 입술도 별로야?”
“네, 3호는 좀 밝은 거 같은데…….”
서로 화장을 고쳐 주는 이들.
『외과의사 24시』를 찍으면서 촬영에 익숙해졌다지만, 간호사가 조명되는 건 처음.
그러니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서유정만이 홀로 맹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힝…….”
앓는 소릴 하면 안 되는데.
이미 다 정해졌는데.
머리마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그 자신이 주인공이라니.
운영회의까지 통과하고 촬영이 시작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서유정이 얼떨떨한 마음에 잠식돼 있을 때.
메인 PD인 이현아가 소리쳤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내추럴하게 해 주세요!”
촤아아악!
장내를 울리는 슬레이트 소리.
그리고 빨간불이 들어오는 카메라.
곧바로 인수인계가 시작됐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서유정이 다음 듀티 간호사한테 다가갔다.
“선생님, 정인수 환자, 메레나(Melena, 흑변) 있고. 이진혁 선생님한테 노티했는데, 노멀살라인 300mL 풀 드립하자고 하셨어요!”
“그건 알겠고. PRBC(적혈구) 2 unit은 뭔데? N/S(생리식염수)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하고 있었잖아.”
“아, 그건 환자가 어지럽다고 해서요!!”
“어지럽다고? CBC(혈액 검사) 검사 결과 때문이 아니고? HB(혈중 헤모글로빈 수치) 8.2g/dL 나왔던데.”
“그게 맞습니다!”
서유정이 꽥하니 대답하자.
선배 간호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와 같지 않은 톤.
심상치 않았다.
당장 혼내고 싶었지만, 카메라를 의식한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후배 간호사를 가르치는 멋진 선배 간호사.
그림이 좋았다.
“호호. 얘가. 인수인계할 때는 시나리오대로 해야지. 시나리오대로.”
“넵!”
“자, 봐 봐. CBC 검사(일반 혈액 검사) 결과 혈중헤모글로빈 수치가 낮게 나왔어.”
“넵!”
“그래서 수혈한 거고. 메레나(흑변)는 그 이후 문제라고.”
“네엡!”
“그래서 N/S는 달았어?”
“앗! 지금 달고 오겠습니다!!”
“아냐, 아냐. 인수인계하고 퇴근해야지. 호호.”
다분히 카메라를 의식한 말투.
입을 가리며 호호거리는 게, 화가 난 걸 참는 걸로 오해한 서유정이 침을 꼴깍 삼켰다.
‘조직에 잠식되지 말고 나다움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했지. 이럴 때는…….’
“죄송합니닷!!!”
“……!”
“다음부터 잘하겠습니다!!”
“어머, 얘가. 누가 보면 내가 갈군 줄 알겠다. 호호.”
“아닙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닷!”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이 녹아 있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크기도 했고.
사과 또한 거듭됐기에, 고참 간호사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림이 나와야 하는데.
엉뚱한 그림이 나올 판이었다.
* * *
첫 촬영을 지켜보는 사람은 많았다.
PD와 FD.
조명팀 감독.
VJ까지.
거기에 더해 병원장인 오지호와 외과장, 그리고 내분비외과장까지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큰 목소리로 대답하다니.
이대로 방송에 나간다면 그 결과야 뻔했다.
간호사의 태움 문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죄송은 무슨. 빨리 다음 환자나 보자.”
“예, 선생님. 정병태 환자는 속이 너무 쓰리다고. 너무 심하게 클레임 걸어서요!”
“그래?”
“넵!”
“간호 기록지 줘 봐. 내가 직접 볼게.”
또다시 사고를 칠까 싶었던 고참 간호사가 냉큼 간호 기록지를 뺏어 들었다.
다음 날 수술 예정인 환자.
금식하는 건 당연했지만, 속 쓰림을 호소하고 있었다.
공복에 위산이 올라왔기 때문.
“호호. 신규. 아니, 서유정 선생님.”
“넵!”
“혹시 안타시드(Antacid, 제산제) 들어갔어? 기록에 없는데.”
“아…….”
당연히 해야 할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뉘앙스.
순간 발끈한 고참 간호사의 눈이 잘게 떨렸다.
평소라면 화를 냈겠지만, 화를 낼 수 없는 상황.
카메라를 다분히 의식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또다시 참사가 벌어졌다.
“죄송합니닷!!”
“……!”
“죄송합니닷! 제가 앞으로! 잘하겠습니닷!”
빼액거리는 소음.
나다움을 찾는 건 좋았지만, 그 소리가 무척이나 컸다.
다른 이들이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을 정도.
당장 얼굴이 창백해진 고참 간호사가 속삭였다.
“야, 너. 진짜. 내가 네 이모 때문에. 갈구지도 않았잖아.”
“그, 그게.”
“나 죽는 거 보고 싶어? 이러다 악플 달린다고.”
“죄송합니닷!!”
“죄송하지 마! 죄송하지 말라고!”
나다움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진혁의 가르침이 엉뚱하게 번지고 있었다.
* * *
오전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밥을 먹으러 가야 했지만, 진혁은 곧장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궁금했기 때문.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이션에 도착한 진혁이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간호사한테 다가갔다.
“촬영팀이 안 보이네요?”
“액팅하는 거 찍는다고. 지금 병실 돌고 있어요.”
“그래요? 와. 그나저나 깨끗해 졌는데요.”
“네? 뭐가요?”
“포스트잇이요, 포스트잇.”
“아, 그거 저희가 치운 건 아닌데. 선생들이 다 가져갔어요. 일부러 내버려 뒀거든요. 기겁해서 가져가더라고요.”
바쁘디바쁜 외과 의사들이 남긴 ID와 PW가 적힌 포스트잇.
전부 사라져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의사들이 전부 치워 버린 것이다.
전말을 파악한 진혁이 당장 피식거렸다.
“『외과의사 24시』 촬영할 때는 치우지도 않더니…….”
“이번 촬영은 다르죠. 간호사 중심이니까요.”
“그나저나 암호 외우라는 사람은 없죠?”
“에이, 없죠. 차세대 시작하면서 설정도 복잡해 졌잖아요. 1234나 QWER 같은 건. 이젠 안 된다고요. 이제 해방이에요, 해방.”
“좋네요.”
“오더 걸러 내는 거. 별로 안 해도 될 거 같긴 한데요. 근데…….”
한참 계속된 쑥덕거림.
서유정의 만행을 전해 들은 진혁이 혀를 찼다.
그 자신이 했던 것처럼 선배들을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터.
그냥 진짜 진상.
아니, 의사로 따지면 말리그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는 거죠?”
“네, 그래도 좀. 나다움을 지키는 거. 다 좋아요. 그래도 눈치는 챙겨야죠.”
“죄송해요. 그럴 의도로 말해 준 건 아닌데. 아마 긴장해서 그랬을 거예요.”
“이 쌤이 죄송할 건 아닌데. 그래도 말 좀 해 주세요. 진짜 이러다 저희 다 죽어요. 아시잖아요.”
“네네.”
진혁이 씨익 웃으며 EMR을 열었다.
획기적으로 빨라진 속도.
그 자신이 기획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UI/UX도 훨씬 진일보했고.
빠르게 차트를 훑던 진혁이 물었다.
“정병태 환자. 바이탈 흔들리는데요.”
“아, 그거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내일 수술이죠? 갑자기 BP(혈압)가 조금 흔들려요. 안타시드(제산제) 들어간 다음에요.”
“일단 다시 CBC 돌리고 조금만 지켜보죠.”
오더를 밀어 넣은 진혁이 곧바로 움직였다.
제산제를 복용할 때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수치가 경계 선상에 있는 상황.
크게 신경 쓸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알려 준 대로 하는 거야.”
“옙.”
“정 교수한테도 이렇게 대답하는 건 아니지?”
“…….”
할 말이 없었기에, 진혁이 계면쩍게 웃었다.
자신을 두고 다투는 교수님들.
괜한 말을 꺼내 봤자, 크게 번질 뿐이었다.
곧, 집도했던 교수가 자리를 피하자, 진혁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3시네. 일단 밥부터 먹을까.’
그렇게 도착한 수술실 라운지.
구내식당을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식당이었다.
문제는.
“야야. 죽겠다. 죽겠어.”
“으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선배부터 동기들까지 자신을 보며 볼멘소리를 한다는 거.
복붙만 하다가 갑자기 랜덤으로 지적당하고 있었고.
촬영까지 시작하고선 다들 제대로 신경 쓰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내과처럼 오더까지 신경 써야 할 판.
일이 확 늘어난 것이다.
잠시 후 자리에 앉은 진혁을 향해, 선객이나 마찬가지인 장혁준이 눈을 치켜떴다.
“이거 우리가 벌컨 당한 거죠?”
“네?”
“벌컨, 몰라요? 미국에 있는 마을이요.”
“…….”
진혁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제육볶음을 먹기 시작하자, 장혁준의 설명이 시작됐다.
버지니아주에 있는 벌컨 빌리지.
탄광이 고갈되며 사람이 다 떠나가 20가구도 안 되는 사람만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문제는 하나밖에 없던 다리조차 무너졌다는 거.
외부로 나가려면 철길을 따라 1시간 넘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진혁이 물었다.
“결국, 다리를 다시 지어야 하는데. 정부에서 무시했다는 거죠? 미국이면 돈도 많을 텐데. 의외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래서 촌장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어떻게 했는데요?”
“소련에 편지를 보냈어요. 기자 보내 달라고. 그래서 진짜 취재가 시작됐죠.”
“소련에서 벌컨까지 진짜 기자가 왔다고요?”
“네, 프로파간다로 딱이죠. 미국은 망했다! 정부가 국민을 버렸다! 뭐, 선동하기 딱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궁금증이 치솟은 진혁이 수저를 놀리는 것도 멈추자.
장혁준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음식물이 사방으로 튈 정도.
“취재가 끝나자마자 촌장이 바로 주 정부에 편지를 보냈죠. 소련에서 취재해 갔다. 이제 끝이다.”
“와.”
“당장 연방 정부가 뒤집혔죠. 바로 다리 지어 주고. 예산 밀어 넣어 주고. 소련한테 선동당할 순 없으니까요.”
“진짜 천재인데요. 그 촌장이요.”
“지금이 딱 그런 경우잖아요! 촌장은 이 선생. 우리는 주 정부. 딱이라고요. 딱.”
이제야 장혁준의 말이 이해가 된다.
엉망진창인 오더를 간호사가 걸러 내는 것도 없애고.
태움 문화도 잡고.
진상 보호자나 환자를 향한 은밀한 보복.
그러니까 불러도 못 들은 척한다거나.
액팅을 할 때 무조건 꼴찌로 해 준다거나.
당연히 해 줘야 할 배려도 해 주지 않는 간호사의 보복도 잡아 버렸다는 것.
진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노리고 시작한 건 아닌데.”
“이제 2호 동지 별명은 벌컨이에요.”
“네네. 벌컨. 좋네요.”
“으으. 너무 얄미워. 타격도 없고. 패는 맛도 없고. 으으.”
장혁준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진혁이 조용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짜 몰랐다.
벌컨에 그런 천재 촌장이 있었는지.
* * *
또다시 시작된 수술.
이번엔 네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생각보다 수술이 길어졌다거나.
촬영이 예정되면서 내분비외과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서유정이 놓쳤던 환자.
그러니까 고작 제산제를 쓰지 않아 속 쓰림을 호소했던 정병태의 바이탈이 출렁거렸다는 거였다.
스테이션에서 차트를 확인한 진혁이 당장 미간을 찌푸렸다.
“39도 찍었는데. 해열제 들어갔죠?”
“네.”
“알레르기 검사는요.”
“일단 인턴 쌤한테 노티했고. 검사 들어갔어요.”
“음.”
“저, 그리고.”
“……?”
“인턴 쌤이 내과에 협진 의뢰했어요.”
“그래요?”
“네. 다들 수술방에 있어서. 내과에서 바로 온다고 했데요.”
너무도 빠른 반응.
촬영 중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병실에서 정병태를 보고 있을 때 당장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폴리클(PK, 실습나온 의대생)로 보이는 이들이 네 명.
한 명은 그 자신도 모르는 내과의였다.
“정병태 환자 때문에 왔습니다.”
“빨리 오셨네요.”
“그럼요, 빨리 와야죠. 알레르기 검사는 아직 안 나왔죠?”
“네네.”
한참 계속된 대화.
대화 자체는 평이했다.
문제는 공기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 실습생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끼어들었다는 거였다.
“저, 선생님. 이런 케이스는 보통 왜 발생하나요?”
“……?”
“안타시드(제산제)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 거면. 그, 그게.”
“편하게 말해도 돼요.”
“예, 보통 호흡 곤란이 오거나. BP가 떨어지고. 발진이나 가려움. 부종 같은 증상이 있어야 하는데요.”
“…….”
“피버(열)가 튀는 건 또 처음 봐서.”
“…….”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섣부르게……. 일, 일반적인 알레르기 반응이랑 조금 다른 거 같아서요.”
위에서 시켜서 물어본 게 분명한 상황.
당장 진혁이 고개를 휙 돌려 내과의를 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야야. 누가 나서래. 여긴 외과라고. 외과. 메스만 들 줄 알지. 뭐. 모른다니까.”
“…….”
“요즘 유행하는 말 알지? 왜, 스타 할 때 하는 말 있잖아.”
“아, 요즘 유행하는 말이면. 그거요?”
“……?”
“그 실력에 잠이 오냐? 아, 이게 아닌가. 그 티어에 잠이 오냐? 이거죠?”
예전에 환자한테 들었던 말을 내뱉으며 진혁이 악당처럼 웃었다.
아, 진짜.
조용히 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