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348)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348화(348/388)
348화. 아듀, 일반외과
나도 이렇게 살 줄 몰랐어!
어렸을 땐 나도 꿈이 있었다고!
나이가 들면 흔히 하는 말이다.
그것도 소주를 마시면서.
사실 누구나 꿈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드높기 마련.
뒤늦게 부모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좌절하기 일쑤였고.
그만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게 인생이었다.
어렸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 여정인 것이다.
그러니 타인 혹은 사회가 부여하는 영향력까지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당장 군의관만 해도 그랬다.
여러 설득에 상근으로 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던가.
물론 결정적으로 결심을 굳힌 건 환자를 보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해외 연수는 너무 당황스러운데…….’
오지호의 제안은 정말이지 뜻밖이라 할 수 있었다.
“저, 고민 좀 해 보겠습니다.”
진혁이 당황스러움을 감춘 채 담백한 어조를 내보였지만, 오지호는 고집스러웠다.
[고민도 좋긴 한데. 알게 모르게 반발이 심해. 괜히 부딪칠 이유는 없다고.]“음…….”
[왜, 그. 뭐야. 전문의 시험 때 삼선 병원 외과랑 충돌도 있었다며.]“별일 아니었습니다.”
[별일이 아니긴. 김석준이 전화까지 했다고.]“네?”
[삼선 병원 외과장이 일부러 방해한 게 아니냐고 전화까지 했다고.]“아…….”
이지훈이 위에 보고한 모양.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박살 났지만, 어떻게 보고했을지는 안 봐도 훤했다.
높은 확률로.
‘내가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고 했겠지.’
거짓 보고를 했음이 틀림없었다.
연고전이니 고연전이니 명칭을 두고 다투는 것처럼, 삼선 병원과 아신 병원은 원래 그런 관계였으니까.
“……사실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저는 일단 ER에서 수련한 다음 더블 보드를 따고. 군의관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전공의 해외 파견도 전부 수련 기간으로 인정돼. 일단 나갔다 와.]“…….”
[요즘 상황이 안 좋아. 일단 신청부터 해.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라고.]뚜욱.
대답도 하기 전에 끊긴 전화.
진혁이 쓰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
한데 알려 주질 않으니 무슨 일인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잠깐 나가 있으라는 말만 할 뿐.
애들은 몰라도 된다는 투였으니까.
아니, 그보다.
‘미국에서 보고 배우고 돌아오면 된다고 했는데, 그 대상이 될 줄은…….’
전문의 시험 때 언급했던 일이 이렇게 번질 줄 꿈에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미국에 간다면 부모님과 당장 떨어질 터.
여전히 뽀글머리를 유지하는 어머니.
명도(세입자를 내보내는 일)가 성격에 맞지 않음에도, 묵묵히 일하는 아버지.
안 그래도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내키지 않았다.
그뿐이랴.
이현아 또한 마음에 걸렸다.
아직 임신 중인 상황.
휴직계도 내지 않은 그녀였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질 때.
인턴이 다가왔다.
“프리 옵 끝났습니다.”
“교수님께 연락드려!”
“넵!”
인턴이 수화기를 드는 사이.
진혁이 짧게 문자를 남겼다.
먼저 어머니한테 한 통.
아버지한테 한 통.
그다음엔 이현아였다.
* * *
어느덧 오후 4시.
짬이 난 만큼 저녁을 먹으러 가야 했다.
하지만.
[엄마는 찬성이야! 길게 가는 것도 아니라며!] [아빠도 찬성이다! 더 큰 세상에서 보고 배우는 것도 좋아. 미국 병원 응급실, 한국 응급실이랑 배우는 게 다를 거다.] [진혁 씨, 저도 좋아요! 안 그래도 입덧이 심했는데. 어차피 휴직도 해야 했어요. 우리 같이 가요.]부모님.
그리고 이현아의 문자.
셋 다 찬성이었다.
아니 오히려 묻고 있었다.
다들 가고 싶어 안달 날만큼 좋은 기회인데, 왜 거부하냐고.
굳이 안 갈 이유가 뭐가 있냐는 말에 말문이 떡 하니 막힌 진혁이 쓰게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회귀자의 처지는 고독했다.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은데.
예전에 못다 한 효도를 다 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마음은 그 자신과 달랐다.
남들은 Empty nest syndrome(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다는데.
장성한 아들이 독립하는 게 오히려 좋다는 투였다.
진혁이 섭섭한 마음을 감춘 채, 문자를 보냈다.
[보통 아들이 떠날 때 상실감이나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던데요.] [응? 뭐라고?] [아니, 보통 장성한 아들이 떠나면…….] [어후. 언제까지 엄마랑 같이 살려고 그래! 엄마도 자유야! 자유라고!]‘도비는 자유에요!’도 아니건만, 어머니의 뜻이 가득 담긴 문자.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며 고집부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평생 뒷바라지만 하며 살았으니까.
하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진혁이었다.
* * *
핸드폰을 집어넣은 진혁이 곧바로 병실로 향했다.
유종의 미.
퇴사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지만, 지키기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뭐, 지금은 퇴사도 아니었지만.
곧이어.
“으아아앙!”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귀를 적셨다.
“아이고. 우리 정택이. 울음소리가 크네요.”
“오셨어요, 선생님.”
“예, 어머니.”
“지금 바로 가야 하나요?”
“10분 후에는 들어가야 합니다. 수술 전에 체크할 게 많아서요.”
진혁의 대답에 보호자가 당장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수술실에 들어갈 아들.
못내 걸리는 게 많은 기색이었다.
“저……. 애가 수술하는 걸 아는지 보채는 게 너무 심해져서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갓난아기처럼 구네요.”
“우리 정택이. 괜찮을 겁니다.”
“괜찮겠죠?”
“그럼요.”
진혁이 씨익 웃어 보인 다음 차트를 확인했다.
배꼽 탈장.
이른바 Omphalocele.
탯줄이 있던 자리가 막히지 않아 창자가 튀어나온 케이스였다.
물론 대기한 세월은 3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었다.
감돈(탈장된 장이 꼬이면서 혈액 순환이 되지 않는 상황)도 없었고.
합병증 또한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아물기를 기다리다가 병원에 온 것이다.
진혁이 차트를 내려놓을 때.
뒤늦게 누군가 들어왔다.
“저, 선생님. 저희 애 수술하실 예정이시죠?”
“저희 남편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혁이라고 합니다.”
진혁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상대 또한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선 곧바로 의외의 말을 꺼냈다.
“저, 유명하신 건 아는데……. 이게 좀……. 교수님으로 바꿔 주실 수는 없는 건지 해서요. 전문의를 따신 건 뉴스에서 봤는데. 이게 좀…….”
“여보!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어허! 가만있어 봐! 이게 쉬운 게 아니라고!”
“내가 일정 당겨 달라고 했다니까! 어린이집에서 애를 놀리는 애도 있는데. 어떻게 더 기다려!”
“아니, 이놈의 여편네가!”
갑자기 애 앞에서 서로 싸우는 이들.
수술을 앞둔 보호자만큼 예민한 경우도 없었기에, 진혁이 끼어들었다.
“제가 못 미더우신 거죠?”
“크음, 큼. 이게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 뭐야. 불임 가능성도 있다던데요.”
“불임이요?”
“네,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크음, 큼.”
“그건 사타구니 탈장일 때 그런 건데……. 배꼽 탈장은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네. 사타구니 탈장은 인공 그물막을 덧대는 경우가 많은데. 소아는 매시(Mesh, 인공 그물막)도 안 써서요. 그리고…….”
한참 계속된 설명.
교수님들이 제일 싫어하는. 그러니까 ‘내가 좀 찾아봤는데’라며 아는 척하는 환자였지만, 진혁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혈관을 박리할 때 대미지를 입는 경우라면, 사타구니 탈장의 경우 소아 환자도 불임될 수 있다는 말.
배꼽 탈장은 위치부터 다르니 전혀 무리 없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자.
“저, 근데 복강경으로는 왜 안 하는 겁니까. 복강경으로 해야 흉터가 적다는데요.”
“그렇긴 한데……. 개복하는 게 재발률이 적어서요. 어머님께 전부 설명드렸는데. 혹시 복강경으로 바꾸실 건가요? 그럼 수술은 오늘 하기 어렵습니다.”
“아…….”
보호자가 짧은 침음성을 토해 냈다.
집을 팔아야 할지,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자신의 선택으로 혹시 모를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건, 사람을 겁먹게 하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애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할 테니까.
아니, 그건 그렇고.
흰머리로 염색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노교수님이 자연스럽게 주는 신뢰감.
오늘만큼은 정말이지 부러울 따름이었다.
* * *
집도의는 카인(Car-in, 수술방에 환자를 들이는 행동)이 끝나고 들어오는 게 관례.
마지막 수술인 만큼 진혁은 곧바로 수술실을 찾았고.
먼저 와 있는 마취과 의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수술이지?”
“예.”
“이제 가면 언제 보나? 응?”
“뭐, 그만두는 것도 아닌데요.”
“군대 가야 되잖아, 군대.”
“바로 갈 건 아니라서요. 일단 ER을 먼저 돌 겁니다. 더블 보드 따야죠.”
해외 파견에 응할지 말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ER에서 움직일 건 분명하기에 하는 말.
2년만 더 고생하면 더블 보드를 딸 수 있었고.
시간이야 후딱 갈 게 분명했다.
ER의 장점은 그 무엇보다 교대근무에 있었으니까.
곧.
“환자 들어갑니다!”
환자가 수술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를 수술대 위에 옮기는 걸 도와준 다음.
마취과 의사가 타임아웃(신원 확인)을 하는 걸 온전히 지켜봤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성인 환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일.
거꾸로 이름을 말한 뒤 맞는지 확인하며 간단히 타임아웃을 끝냈다.
거기에 더해.
복부, 제대(배꼽), 낭.
베타딘으로 드랩(소독)하는 일 또한 끝나자, 마취과 의사가 소리쳤다.
“마취 시작합니다! 정택아 조금만 참아!”
그렇게 시작된 마취.
아직 4살밖에 안 되는 소아 환자가 고개를 떨구자 진혁이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죽는 아이가 없게 하겠다는 다짐.
그런 연유로 소아외과에 머물렀고 이젠 마무리할 때였다.
그것도 아름답게.
진혁이 당장 소리쳤다.
“지금부터 옴팔로셀(Omphalocele, 배꼽 탈장) 교정술 시작합니다! 보비!”
* * *
복강 내 장기가 탯줄 기저부를 통해 탈출한 상황.
벌써 다른 아이들이 놀릴 만큼 환부는 움푹 튀어나와 있었다.
곡물을 저장하는 일종의 사일로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툭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니 진혁이 수술 도구를 건네받자마자, 어시로 들어온 이들이 먼저 손을 놀렸다.
어차피 튀어나온 장기는 피부 안쪽에 있는 상황.
이를 종이 접듯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어시로 들어온 레지던트가 빠르게 마킹을 진행했다.
동그란 원형 모양의 점선.
진혁을 향한 배려였다.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진혁이 움직였다.
먼저 배꼽 탈장낭 둘레를 따라 절개해야 했기에.
왼손엔 포츠포셉을.
오른손엔 연필 모양의 전기소작기(보비)를 쥔 채 먼저 피부를 걷어 냈다.
지이이익.
지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
그리고 냄새.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손을 놀린다.
스케치북에 드로잉하듯.
색채를 더 진하게 더하듯 왔던 곳도 되돌아가며 계속해 왕복했다.
물론 왼손도 가만있지 않았다.
벗겨진 피막을 포츠포셉으로 조금씩 드러내고 걷어 올리는 일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끝난 박리.
수술 도구를 넘긴 진혁이 곧바로 복강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후복벽부터 전복벽까지.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복강을 넓혀 준 다음 임시로 집어넣은 장기를 정복(손으로 조작해 탈장된 장기를 제자리로 환원시키는 것)시켰다.
이어진 건 추가 절개.
진혁이 짧게 지시했다.
“아미(Army Navy).”
작은 상처나 깊이가 깊지 않은 표면부를 쓸 때 쓰는 리트렉터.
곧바로 어시스트들이 손을 놀렸다.
양옆으로.
다시 위아래로 리트렉터를 걸고, 조금씩 힘을 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에 진혁 또한 움직였다.
피부에 가해지는 장력을 느끼며 시작된 추가 절개.
결손 부위.
그리고 근막 경계부.
조심스레 박리하고.
또 분리한다.
안전한 근막 봉합을 위해 하는 사전 작업.
흉터가 길어지겠지만, 피부를 충분히 박리해야 봉합할 수 있는 법이었다.
* * *
어느덧 끝나 가는 수술.
이젠 백선(Linea alba)을 피할 차례였다.
복부 중앙 선상.
위로는 검상돌기.
아래로는 치골까지 뻗어 있는 섬유성 띠.
이른바 백선만이라 부르는 곳에 봉합하면 안 됐다.
헤르니아(탈장)가 추가로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
진혁이 매의 눈처럼 환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곧이어 손을 놀리려 할 때.
“저.”
“어, 왜.”
“이쪽은 스킵하시는 겁니까?”
“어?”
“이쪽이요, 이쪽.”
절개된 상부.
그러니까 늑골 모서리 쪽을 어시가 가리켰다.
이에 진혁이 싱긋 웃었다.
손놀림만 보고서 스킵할 거라는 걸 알았다는 건 센스가 있다는 말.
싹이 보이는 1년 차였다.
“거긴 스킵이야. 스킵.”
“네?”
“제일 끝에 있기도 해서, 양쪽 근막을 붙이는 것도 어렵고. 리버(간)가 크면서 자리할 거라.”
“아…….”
“그래서 거긴 빼고 여기부터 할 거야.”
니들홀더와 봉합사를 건네받은 진혁이 곧바로 손을 놀렸다.
석상봉합.
이른바 연차봉합으로 빠르게 복벽을 이었다.
물론 스킵한다고 했던 부위는 그대로 남긴 채로.
그다음에 이어진 건 피부 봉합이었다.
이번엔 봉합사를 바꿔 연속봉합을 하며 횡으로 피부를 닫기 시작했다.
어느덧 절개하기 전으로 돌아온 환부.
긴장이 풀린 진혁이 어시를 서던 후배들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배꼽을 만들어 줄 거야.”
“배꼽이요? 여자도 아닌데요.”
“애들이 의외로 민감해. 설명하는 것도 힘들고. 환자 사연 들어서 알잖아.”
“좀 더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어린이집에서 애들이 놀려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5년까지는 기다려도 돼. 자연스럽게 탯줄이 있던 곳이 막힐 수도 있으니까.”
3년 만에 병원에 온 환자의 상황을 상기시키며, 진혁이 다시 손을 놀렸다.
배꼽 모양으로.
조금 들어가게.
정교하게 손을 놀리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T자형.
타원형.
세로형.
가로형.
참외형.
등등.
배꼽의 모양만 수십 가지가 넘었고 배꼽 성형만 전문으로 하는 병원도 있을 정도로 그 모양에 신경 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하지만 흡수성 봉합사로 펄스 스트링 수처를 하며 최대한 모양을 흉내 냈다.
이에.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집도의를 향한 인사가 쏟아졌다.
그 옛날 흉부외과장으로 돌아간 느낌.
진혁 또한 웃으며 인사했다.
고생했다고.
이젠 진짜 끝이라고.
* * *
회복실로 옮긴 다음.
정택이 부모님께 경과를 말씀드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자신을 불신하던 보호자도 연신 허리를 숙이자, 진혁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수술 후 감사 인사를 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는 일.
이젠 교수님들께 인사를 다녀야 했다.
인수인계도 전부 마쳤고.
수술마저 끝냈으니.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하지만.
“흐으으윽. 왜……. 대체 왜…….”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또 다른 보호자가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무너져 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수술 중에 아이가 죽은 모양.
후련한 마음에 밝게 웃던 진혁의 표정이 곧바로 사라졌다.
그냥 조용히 고개를 숙여 애도를 표한 다음 움직일 뿐이었다.
누군간 살고.
누군간 죽었다.
그게 우리네 병원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수술복까지 환복 후.
다시 의국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비가 내렸다.
거짓말처럼.
이에 진혁이 한참 멈춰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오열했던 보호자.
그리고 연신 고개를 숙였던 집도의.
차라리 비가 오길 다행이었다.
의료진의 눈에도 눈물이 그득했으니까.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던데…….
빗물이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자기방어 기제 중 하나인 억압(Repression, 무의식적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억누르는 행태)이 발현될 수 있지 않을까.
길게 보면, 아니 짧게 보면 정말이지 덧없는 인생이었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필멸자의 행태.
아등바등 사는 게 덧없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일찍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삶이 덧없음을 알았더라도 충실해야 한다고.
물론 그 이유만큼은 명상록에 기재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게 인간이란 존재였다.
비가 오는 마지막 날 밤.
괜한 감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 *
그리고 그날 밤.
『영닥터』에 글이 올라왔다.
[이진혁이 천재인 이유]└ 30분 만에 1차 통과한 이진혁. 그것은 천재라서 그런 것이었다.
└ 무슨 시 쓰냐?
└ 난 떨어졌다.
└ 2%에 당첨? ㅋㅋㅋㅋ 난 붙었는데.
└ 더러운 세상. 누구는 30분 만에 풀고. 으으.
└ 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 나도 이진혁처럼 살고 싶다.
[소식 들었냐? 이진혁 사고 쳤다.]└ 사고 쳤다. 사고. 애 가졌단다.
└ 와. 능력자네. 여자 친구도 있었어?
└ 대박!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 ER로 간다던데? 더블 보드 딴다잖아.
└ 아니, 그거 말고. 군대 어떻게 되는 거냐고.
└ 상근으로 가겠지. ㅅㅂ. 부럽다. 다 가졌네.
[상근으로 간다고? ㅅㅂ. 배 아프다.]└ 술기도 잘해. 공부도 잘해. 아는 것도 많아.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
└ 배 아파. 불행했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냐고!
└ 그럴 자격 되지. 왜? 꼽냐? 500명 늘려줬잖아. 이번에 우리 과. 드디어 TO 채웠다.
└ 님 무슨 과임?
└ GS.
└ 으으으. 말도 안 돼.
부러워 죽겠다는 반응이 태반.
하지만 곧.
[일부러 사고 친 거 아니야?]진혁이 제일 싫어하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시기 질투는 원래 인간의 본성.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참된 친구라는 말은.
거꾸로 그런 경우가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반응을 확인한 진혁이 당장 혀를 찼다.
상근으로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니, 그보다.
오지호의 권유대로 해외로 파견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머리를 적셨다.
어딜 가든 계속 엄한 말들이 따라다닐 테니까.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아, 이건 롱디 커플한테만 쓰는 말이던가?
뭐, 아무튼.
‘CS’라는 태명을 가진 아이까지 걸고넘어지는 대중을 향해 진혁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으응? 우리 CS. 아빠가 맘마 줄까?”
태동이 느껴지자, 이런 말이 절로나왔고.
이현아가 질색해 소리쳤다.
“아직 태동할 때 안 됐잖아요!”
팔불출이라 할 수 있는 진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