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44)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44화(44/388)
44화. 응급실 사람들 (8)
잠깐의 침묵 끝에 반박이 터져 나왔다.
“언론 리스크 때문에 무상으로 수술해 주자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적자는 누가 메꾸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언론은 홍보팀이나 재단 차원에서 대응하면 그만입니다!”
“하. 지금 외과 계열 적자가 얼만 줄 아십니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무상으로 수술해 주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쏟아지는 반박.
박영진이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적자 문제야 수가가 낮게 책정된 탓이지, 우리 문제가 아닌 거로 아는데요.”
거기에 더해.
외과 계열 과장들도 힘을 보탰다.
“맞습니다. 여기서 왜 적자를 문제 삼는 겁니까.”
“언제부터 수익성만 좇게 된 겁니까!! 우리는 의사입니다, 의사!!”
사실, 외과 계열 과장들은 피해 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적자 현황을 볼 때마다 울화통이 터졌다.
일은 일대로 고되게 하는데, 적자를 내는 과라고 무시당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내과 계열을 대표하는 부재일이 입을 열었다.
외과 계열과 척을 지고 있는 부원장이었다.
“이번 한 번은 그렇다고 칩시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겁니까? 병원 재정이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이사장님께서 승인해 주실 리도 없지요.”
“맞습니다. 괜히 소문이라도 나서 행려자들이 몰려든다면 일반 환자만 피해를 볼 겁니다.”
“한번 예외를 두면 끝도 없을 겁니다.”
내과 계열 과장들의 지원 사격이 이어진다.
그러자 박영진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아직 발표가 끝난 게 아닙니다만?”
곧, 화면이 바뀌자 웅성거림이 극에 달했다.
『응급실 사람들(KBC 방영 예정)』
“어제 KBC에서 공문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송을 하자더군요. 다음.”
또다시 화면이 바뀌며 기획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신 병원의 위상을 제고하고.
후원을 통해 의료비 문제로 고통받는 이도 돕자는 기획안이었다.
박영진의 브리핑이 끝나자.
한참 말이 없던 이들이 중구난방으로 의견을 쏟아 냈다.
“뭐, 병원으로선 손해 볼 게 없겠군요.”
“허어! 행려 환자가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야 적절히 통제하면 그만 아닙니까!”
“통제가 가능하겠습니까? 방송과 다르다고 난리가 날 겁니다.”
“적당히 조율하면 되는 거지요.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십니까. 행려 환자만 촬영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또다시 시작된 논쟁.
이를 지켜보던 병원장이 나섰다.
“자자. 우리끼리 논쟁하기보다, 이사장님께 보고드리는 걸로 하지요.”
“병원장님!”
“말씀하시지요. 부원장님.”
“이사장님께 보고드리기 전에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의사는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만.”
부원장의 말에 병원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과 계열 의사들도 본분에 충실히 임하고 있습니다만. 매번 적자를 문제 삼고 계시지요?”
“그건.”
“아아. 방영일이 당장 다음 주예요, 다음 주. 여기서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합니까? 이사장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병원장인 오지호의 반응에 부원장인 부재일이 침묵했다.
박영진이 이런 안건을 갖고 나올 줄 예상도 못한 상황.
제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 * *
흔히 말하는 티타임 시간.
병원에서 권력 암투가 가장 심한 시간이었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영진이 고개를 숙이자.
병원장인 오지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어요! 아주 속이 시원합니다. 허허. 이사장님께는 따로 말씀드려 놨습니다.”
“벌써 보고하신 거군요.”
“뭐, 정식 보고야 지금부터 해야지요. 우리 박 과장님이 회의 전에 먼저 찾아온 거랑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박영진이 흡족한 얼굴로 녹차를 들이켰다.
컨퍼런스도 빠진 채, 병원장을 미리 찾아가 브리핑한 보람이 있는 거다.
물론, GS(일반외과)부터 촬영하자는 요구가 나와 진땀을 뺐지만.
“그래. 잘만 되면 GS도 촬영할 수 있다고요?”
“사실 GS가 더 격동적이지 않습니까. 수술 장면이야 쓰기 어렵겠지만, 깊이가 있지요.”
“허허. 뭐, 일단 그쪽에서 이진혁 선생 때문에라도 ER을 먼저 원한다니. 잘 진행해 봅시다.”
“예, 병원장님.”
박영진이 곧장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이진혁의 유명세를 핑계로 간신히 GS 출신인 병원장의 요구를 방어한 상황.
누가 보면 병원장이 왜 그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위로 올라갈수록 제 몫을 찾기 바쁜 법이었다.
* * *
보통 때라면 이미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
그러나 퇴근할 수 없었다.
통과가 안 된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으니.
어찌 그러지 않을까.
기왕 시작된 거 결과가 좋기만 바랄 뿐이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김상혁이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딸깍.
“예, 과장님.”
[진행해.]“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고생했어. 잊지 않을 거야.]“아……!”
뚜욱.
그대로 끊긴 전화.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은 김상혁이 밝게 웃었다.
환자도 살릴 수 있고.
인정도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역시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니까. 하하.”
“통과된 겁니까?”
“컨펌 떨어졌어. 이 PD한테 전화해.”
“알겠습니다.”
진혁이 곧장 전화기를 들었다.
* * *
이현아의 표정은 비장했다.
풀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다시 한번 화장을 정돈하며 전의를 다졌다.
이젠 자신이 국장을 부러트려야 하는 거다.
곧, 병원장 명의의 공문까지 도착하자 이현아가 국장실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
“옙!”
“뭐야. 또 너야? 나가!”
“국장님!!!”
이현아가 고함을 꽥 지르자 국장이 귀를 막았다.
“귀청 떨어지겠다. 놓고 나가!”
“저 못 나가요.”
“?”
“사고 쳤습니다!”
“또 무슨 사고?”
의아하다는 국장의 반응.
이현아가 다부진 얼굴로 결재판을 들이밀었다.
기획안과 공문을 확인한 국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은 나올 거 같은데.”
“이거 진짜예요. 진짜.”
“그 말은 벌써 수십 번 들었어!”
“진짜라니까요. 딱 봐도 견적 나오잖아요.”
“그건 그렇고. 사고 친 건 뭐야?”
“그게…….”
이현아가 지난 일을 늘어놓았다.
물론, 포샵질을 한 이유에 대해선 자기변명이 한가득이었다.
전말을 전해 들은 국장이 당장 책상을 내리쳤다.
“나가! 당장 나가!!”
“왜 나가야 하는데요!”
“너 미쳤어!? 어디서 공문을 위조해!!”
“기획안은요!”
“엎어!!”
“국장님! 그럼 저 죽어요!!”
“밖에 나가서 죽어!! 안에서 죽지 말고!”
“차라리 여기서 죽겠습니다!!”
이현아가 절대 못 나가겠다는 식으로 버티자 국장이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나가면 그만이었다.
* * *
자리로 돌아온 이현아가 곧장 키보드를 붙잡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타닥.
타다닥.
그 모습에 누군가 우려를 표했다.
포토샵으로 공문을 위조했던 후배 정아름이다.
“그러다 잘려요, 잘려.”
“안 그래도 잘릴 판이야.”
“와, 국장님 아시면 노발대발할 텐데.”
“이미 갈 데까지 갔거든?”
“그렇다고 보도자료부터 뿌리면 어떻게 해요.”
“아, 몰라. 어차피 아직 편성 확정도 안 됐잖아? 빈자리에 내 새끼 밀어 넣겠다는데 이게 죄야?”
황금시간대 빈자리.
기획안을 두고 여러 명의 PD가 경쟁하고 있었고.
촬영 일정이 촉박했지만, 확정만 되면 촬영에 편집까지 날밤을 새우면 그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방송계는 철야가 기본이지 않던가.
“전 이제부터 장님입니다. 장님.”
“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도 자료 뿌렸어?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먼저 내보낸 거지.”
“흘리기를 하시겠다? 차라리 아신 병원에 연락해서 보도자료를 뿌려 달라고 하세요.”
“오케이. 그럼 같이 움직여 볼까.”
이현아가 곧장 최규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기사를 확인한 국장이 소리쳤다.
“야, 이현아. 너 당장 들어와!!”
* * *
어느새 퇴근한 상황.
꿀 같은 수면 뒤에 찾아온 건 아버지였다.
“김진철 씨 만나고 왔다.”
“벌써 만나셨어요?”
“그래, 고맙다고 인사를 그렇게 하더라.”
“어떻게 됐어요? 빨리 좀 말해 봐요!”
갑자기 끼어든 어머니의 성화.
아버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잘됐네. 잘됐어! 여보!”
갑자기 아버지를 부둥켜안는 어머니.
그 모습에 진혁이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까.
매일같이 산에 가는 남편을 보는 것도.
무기력함과 배신감에 시달리며 화를 삭이는 남편을 보는 것도.
전부 힘들었으리라.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당분간 무급으로 일하기로 했다.”
“뭐, 뭐라고요?!”
어머니가 냉큼 아버지를 밀쳐 냈다.
도끼눈을 뜨며 노려보기까지 하는 어머니.
아버지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쪽 일은 전혀 모르는데 돈을 받을 순 없잖아.”
“그쪽에서 먼저 무급을 제안했어요?”
“아니, 내가 먼저 말했어.”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아이고~!!!”
울화가 그득 담긴 곡소리.
훈훈했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싸늘함과 원망만이 그득해진다.
“아들 팔아서 돈 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
“!”
“한 사람 몫을 하게 되면 그때 돈 받겠다고 했어. 뭐, 경매 일이 어디 쉬운 것도 아니고. 차근차근 배워야지.”
더 이상 뭐라 반박할 수 없는 말.
어머니는 애써 말을 삼켰고.
진혁은 가슴 아픈 표정으로 이를 지켜봤다.
* * *
저녁 식사 시간.
항상 싱겁기만 했던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도 없었다.
멸치볶음과 김, 그리고 김치가 전부였다.
확 줄어든 반찬 개수는 어머니의 심경을 대변했고, 식사 자리에서도 다들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띠리리링.
갑자기 울리는 전화.
안 그래도 입맛이 없어 하던 김명숙 여사가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뭐? 방송?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 석간신문에 나왔던데 아직 못 봤구나. 이야, 김명숙이. 내 친구! 어, 아들 하나 잘 키워서 방송도 타고. 축하해!]“아……! 호호. 우리 애가 말을 안 해서.”
한참 이어지는 전화.
전화를 끊기 무섭게 또다시 벨이 울린다.
띠리리링.
“어머. 얘도 참. 날 닮아서 그렇다니까.”
또다시 시작된 자식 자랑.
거기에 더해.
아버지한테 걸려 오는 전화도 있었다.
아버지의 자식 자랑 또한 못지않았고.
이를 지켜보던 진혁은 희게 웃었다.
벌써 언론에 내보냈다는 건 성사 가능성이 100%라는 거니까.
이제 최익진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
진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딸깍.
“PD님. 무슨 일 있으세요?”
[지금 시간 되세요?]“혹시 불발된 건가요?”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지금 쏘겠습니다!]뚜욱.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
진혁의 얼굴이 굳었다.
이제 와 불발된다면 큰일이었다.
* * *
어떤 상황인지 몰라 다시 전화했지만, 통화 중이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와 석간신문을 산 뒤, 커피숍으로 향했다.
이현아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펄럭.
[삶과 죽음을 그린다. 응급실 사람들!]자극적인 타이틀.
커피를 홀짝거리며 기사를 읽었다.
기획 의도뿐만 아니라 촬영 취지는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인턴 이진혁이 어떤 활약을 할지 지켜보는 게 Key Point! 그는 권력의 불의에 맞서 싸운 백의의 천사로…….]과장된 멘트로 범벅되어 있는 기사가 문제였다.
‘뭐, 원래 이런 건가.’
쓰게 웃은 진혁이 이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
다시 전화.
또다시 통화 중.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일부러 전화를 피해?’
커피숍 주소를 문자로 찍은 뒤.
한참 고민하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교토삼굴(狡兎三窟,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판다)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이현아가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그보다 어떻게 된 겁니까? 혹시 불발된 겁니까?”
“에이, 불발은요. 땄어요, 땄어. 우와. 우리 이 선생님. 쫄리셨구나.”
“아…….”
이현아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진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풀메이크업을 한 그녀의 미모가 눈부셨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잠시만요.”
딸깍.
“최 팀장님, 불발 안 됐답니다. 컨택 멈춰 주세요. 네. 네.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뚜욱.
그 모습에 이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지금 그 전화 뭐예요?”
“혹시 엎어졌을까 봐 조치한 건데요.”
“양다리를 걸치셨다? 어디까지 연락했어요? SBC, MBS? 와. 양다리가 아니라 삼다리네!”
“전화 연결이 안 돼서 그랬을 뿐입니다.”
“에이. 절 어떻게 보시고. 섭섭한데요?”
이현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짓자, 진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초에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든 건 그녀였다.
“뭐, 삼다리 걸친 건 나중에 따질게요. 일단 내일부터 촬영 들어가려는데 괜찮으시죠?”
“네? 내일부터요?”
“다음 주에 바로 첫 화 나가잖아요. 여기 오면서 전화를 수십 통 했어요. 촬영팀 어레인지하는 거 때문에요.”
“일단 위에 보고드려 볼게요.”
“지금 바로 쏘실 거죠?”
바로 전화하라는 말.
진혁이 곧장 김상혁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이현아가 궁금한 듯 되물었다.
“왜 과장님한테 바로 보고 안 하세요?”
“절차가 있으니까요.”
“에이, 급하다니까요. 빙빙 돌아갈 시간 없어요. 아, 촬영 방식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한참 설명을 들은 진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다시 전달해야 하는데, 이럴 거면 치프 선생님도 부를 걸 그랬네요.”
“어차피 이 선생님이 기획하신 거 아니에요? 그냥 바로 직보하세요.”
“네? 제가 기획했다니요?”
“제 촉은 맞다고 하는데요?”
“에이. 근무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뭐, 며칠 안 되시긴 했죠.”
“그러니까요.”
“근데 직접 동생한테 연락하셨잖아요.”
“강기재 기자님한테 연락드렸습니다만.”
“그게 그거죠. 사수나 부사수나 뭐.”
뭔가 논리에 맞지 않는 말.
진혁이 양손을 들어 억울한 제스처를 취했다.
방송에 나와 유명해지는 것과 별개로, 기획안을 제 몫으로 가져오면 안 됐다.
자칫 김상혁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위에서 시켜서 연락한 거예요. 뭐, 막내니까요.”
“네네. 막내 선생님. 일단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VJ들이 따라다닐 건데요, 고정 캠은 어떨까 해서요.”
“그럼 환자한테 전부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는데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러니까…….”
* * *
어느새 어둑해진 밤.
여의도에 있는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택시 안이었다.
이현아가 문자를 보냈다.
그 대상은 동생인 이현정이다.
[갑자기 의사 가족이 되고 싶어졌어.]진혁을 소개해 줘서 고맙다는 함의.
답장은 바로 왔다.
[뭐, 의사 가족 찬스는 몇 번 쓰게 해 줄게. 이제 아신 병원이 내 전담 병원이야.]욱하는 마음이 든 이현아가 바로 답장을 써 내려갔다.
[직접 보니까 탐나더라. 마스크가 일단 돼.] [뭐래.] [생각보다 몸도 좋더라. 일단 어깨가 넓어.] [미쳤어? 언니보다 어리거든?] [요새 연하남이 대세야. 대세.] [ㅉㅉ. 사심 가득 방송 사절.] [뭐래? 꺼져.]욕설로 마무리한 이현아가 눈을 감았다.
사실 반은 장난이었지만, 호기심이 돋는 건 사실이었다.
* * *
다음 날.
이사장마저 정식으로 촬영을 승인했다.
컨퍼런스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우리도 유명해지는 거 아니야?”
“뭐, 그럼 좋지!”
“이러다 누가 사고 치면 끝인데.”
“에이, 평소처럼만 하면 되지.”
다들 흥분된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수선스러울 때.
박영진이 컨퍼런스룸에 들어섰다.
갑자기 조용해지는 좌중.
허나, 이도 잠시.
눈치 빠른 누군가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그 소리가 도화선이 됐을까.
뒤늦게 모든 이들이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짝짝짝짝.
그들 나름대로 예를 표하는 것이다.
박영진이 손을 들어 화답했다.
“자자. 오늘 오후부터 촬영이 시작되니까 준비들 하고. 이사장님한테 공식 보고된 사항이니까 다들 실수 없도록 하지.”
“축하드립니다. 과장님.”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부교수와 조교수들이 아양을 떨자 박영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벌써 언론사 몇 군데에서 연락받은 상황.
기사에 박영진이라는 이름이 턱 하니 박힌 채 보도될 터였다.
“치프!”
갑작스러운 박영진의 호출.
김상혁이 벌떡 일어났다.
“예, 과장님.”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김 선생한테 다들 박수 한번 치지.”
짝짝짝짝!
짝짝짝짝!
공개적인 칭찬.
김상혁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최익진을 치료할 수 있다는 목적도 달성했고.
칭찬도 받으니 기쁜 거다.
이번엔 박영진의 시선이 진혁에게 향했다.
진혁이 갑작스러운 시선에 당황해했지만,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자신의 개입을 알고 있을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진혁 선생도 일어나지.”
“예?”
“우리 이진혁 선생한테도 박수!”
“!”
영문 모를 상황.
김상혁과 다르게 한 박자 늦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짝짝짝짝!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말리그가 또?’
‘근무 시간에 안 보이더니 치프랑 같이 한 건가?’
‘와. 대박인데. 2연타 홈런 아냐.’
다들 손뼉을 치긴 했지만, 혼란스러워했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종합 병원 특성상 인턴이 활약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하물며 3월 초턴이 아니던가.
물론, 그 와중에도 얼굴을 굳힌 이들이 있었다.
김현수와 오태상이었다.
* * *
요란한 박수갈채가 끝나자.
박영진이 주위를 아울렀다.
“교대 시간을 조정했으면 좋겠는데, 다들 괜찮겠나?”
다들 놀란 기색을 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파열음을 낼 수 있는 문화도 아니었다.
“24시간 근무 후 12시간 오프로 조정 좀 하지. 기왕 방송에 나오는 거 깔끔한 모습을 보이자 이거야.”
“좋은 생각 같습니다.”
“고생이 대수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 과의 명예를 드높일 기회가 아닙니까.”
통보나 다름없는 근무 조정과 쏟아지는 찬성.
ER의 유일한 장점인 오프 체계가 흔들렸다.
물론,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인턴들은 애써 표정을 삼켰다.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망했다.’
‘어차피 ER에 지원할 것도 아닌데.’
‘뭐야. 왜 이렇게 되는 건데.’
하지만, 공기와 같은 인턴의 처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박영진의 훈시 아닌 훈시는 계속됐다.
음주 금지, 상시 대기, 여행 금지, 당연한 말이지만 음주 운전 금지까지.
방송을 명분으로 속박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뜻하지 않게 ER의 장점을 파괴한 진혁이었다.
* * *
컨퍼런스가 끝난 뒤.
곧장 김상혁을 찾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과장님이 아시는 거 같아서요.”
“아. 그거? 어제 보고드렸더니, 갑자기 PD 좀 바꿔 달라고 하시더라.”
“!”
“뭐, 갑자기 그러시는데 어떻게 해. 네가 컨택하고 있다고 했지.”
어쩔 수 없이 진혁의 개입을 밝혔다는 말.
별로 달갑진 않았다.
‘입방아에 오르겠네.’
안 그래도 타과에 적이 많은 상황.
실무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유명세만 좇는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방송에 나와 유명해지는 것과 궤가 다른 것이다.
진혁의 표정을 확인한 김상혁이 피식거렸다.
“왜? 소문날까 봐 걱정돼?”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오해?”
“네, 안 그래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뭐, 그런 이유라면 우리 과에 남든가. 그럼 다 해결되잖아?”
진혁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2회차 인생을 사는 만큼 충분히 고민한 뒤 선택하고 싶었다.
“뭐, 일단 됐고. 행려 환자 동의서부터 받자. 바로 간암 센터에 콜하고. IM(일반내과)부터 다른 과에도 노티하고.”
“알겠습니다.”
“보도 자료도 추가로 내보낸다니까 잘 챙기고. 아니다, 나랑 같이 가자.”
“네.”
그렇게 찾아간 행려 환자의 베드.
김상혁과 진혁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 * *
행려 환자인 최익진이 사라졌다.
김상혁이 당황한 낯빛으로 말했다.
“서 간호사님!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환자가 없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방금까진 있었는데요.”
“링거는 누가 뽑아 준 건데요.”
“혼자 뽑고 나간 거 같은데요?”
“하……!”
김상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미 행려 환자의 의료비를 무상 지원하겠다고 보도 자료까지 나간 상황.
방송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최익진의 안위가 걱정됐다.
“아, 미치겠네.”
절로 나오는 욕설.
진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다 같이 찾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일단 B조 오프 취소하고. 애들 모아서 찾자! 얼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방송은 방송대로 나가고.
이번 일을 촉발했던 행려 환자가 죽는다면 어찌 될까.
위선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터였다.
그렇게 나서게 된 수색.
다들 사방으로 흩어져 한강고수부지로 이어지는 굴다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뭐야. 죽고 싶어!”
“죄송합니다.”
신문지를 들쳐 자고 있던 노숙자를 깨운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딜 가나 노숙자 천지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병나발을 불며 세상에 대한 원망을 쏟아 내는 이들이 수두룩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들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이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 재기하고자 하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세상의 가혹함이 새삼 온몸을 휘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헤매고 다녔을까.
천호동 근처 굴다리에서 최익진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