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58)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58화(58/388)
58화. 마지막 잎새 (7)
폭풍 같은 시간이 끝났다.
EICU는 다시 안정을 찾았다.
아니, 안정을 되찾았다는 말은 틀렸다.
그 대상이 달라졌을 뿐.
다들 분주히 움직이느라 바쁘다고 해야 맞았다.
물론, 그중엔 진혁도 있었다.
바쁘게 몸을 놀리는 진혁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당장 테이블 데스로 죽을지도 모르는 환자를 앞에 두고 왜 그러냐고도 할 수 있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으니, 시원섭섭한 것이다.
밀린 액팅을 하고 난 뒤, 진혁이 윤희철을 슬쩍 확인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왜 그런 걸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오태상처럼 나오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궁금증이 돋는 건 사실.
아니,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진혁이 윤희철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
끝까지 흉부 압박을 하려고 했던 그의 마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흐음.”
윤희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되레 침음성을 토해 냈다.
그러다가 얕게 속삭였다.
“괜히 그럴 거 없어요.”
“아닙니다.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뭐, 다 환자 살리자고 한 건데요. 오히려 내가 더 고맙죠.”
“?”
“아까 촬영 얘기한 거 말하는 거예요. 만약 그대로 액팅했으면 죽을 뻔했으니까요. 그보다 우리 잘해 봅시다.”
“옙.”
진혁이 인턴답게 대답했다.
그러자 윤희철이 희게 웃었다.
“자자, 서두릅시다.”
“네. 저, 근데…….”
“?”
“CS는 어떤 곳입니까?”
“방금 보고도 몰라요?”
그 말을 끝으로 어깨를 으쓱거린 윤희철이 자리를 옮겼다.
그래, 방금 보고 알았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환자만 살리는 곳이라는 걸.
혹시 CS의 구호는 ‘전진 앞으로’가 아닐까.
* * *
한편, 윤희철은 남몰래 숨을 몰아쉬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와, 분원으로 쫓겨날 뻔했네. 아니지, 아니야. 나가서 개업이나 하라고 했겠지.’
만약 그대로 흉부 압박을 했다면, 환자는 죽었을 게 틀림없었다.
이진혁이 자신을 막지 않았더라면, 환자도 죽고 자신도 죽는 그런 상황인 거다.
‘동귀어진이라고 했거늘……. 아, 아닌 게야. 아니야. 허허.’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옛 구절을 떠올리던 그가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이진혁에 대한 평을 정정했다.
CS에서 찍은 타겟이면서, 말리그이자, 원칙주의자에, 괴물이었다.
그래.
원래 별칭은 길면 길수록 좋은 법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진혁의 별칭이 끝도 없이 늘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내흉동맥 럽쳐(Rupture, 파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곧, 윤희철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괴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거늘.
쓸데없이 생각이 길었다.
* * *
어느덧 새벽 5시.
다들 정신없이 움직였다.
프리라운딩(Pre-rounding) 준비로 바쁜 거다.
회진(Rounding) 전에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드레싱을 비롯한 처치를 해야 했다.
진혁은 여유롭게 처치를 마친 뒤 김순덕을 살피고 있었다.
어디 사연 없는 이가 없을까만은, 그냥 사람으로서 안타까웠다.
그도 그럴 게.
사고는 그의 잘못이 아니지 않던가.
보복 운전과 음주 운전을 한 운전자의 잘못이었다.
현장에서 즉사했기에 누군가는 천벌을 받은 거라고 말할 테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사람이 여럿 다치고 죽었다.
총기를 난사한 후 자살한 거나 마찬가지인 거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언제 바뀌려나……. 뭐, 미래에도 음주 운전은 바뀌지 않았지.’
씁쓸한 마음이 가슴을 메운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건 어쩌면 오만이요.
만용이되.
헛된 망상일 수도 있었다.
주체와 객체를 바꿔 보는 거다.
언제까지 더딘 사회 발전을 탓할까.
그 발전이 더디다면, 내가 주체가 돼서 바꾸면 되지 않을까.
뭐, 이런 류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방법이야 있었다.
더 유명해지면 그만이었다.
곧, 진혁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던 이번 사고.
혹시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된 자신이 안전벨트 착용에 대한 캠페인을 하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언 발에 오줌 누기처럼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않던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고는 점차 확대된다.
과연 안전벨트 착용 캠페인만 있을까.
다른 건 더 없을까.
문득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떠오른다.
‘봄이 되면 나타나는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리었던 질환.
그 자신도 숱한 이들을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사건이었다.
CS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아니, 전 국민이 알지도 몰랐다.
꽈아아악.
진혁이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환자를 살리는 일을 하는 의사.
처음부터 발병 기전을 없애 버리는 것도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밑져야 본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다.
부모님과도 시간을 보내야 했고, 환자도 살리고, 유명해지고, 다시 사회적 변화도 이끈다.
그뿐이랴.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돈도 열심히 벌어야 했고, 가정도 꾸려야 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여러 마리의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 거 같다고 후회했지만, 진혁이 다시 한번 다짐했다.
원래 인간은 후회와 다짐을 반복하는 존재니까.
어쩌면 그래서 과거로 돌아온 걸지도 몰랐으니까.
권태롭고, 여유가 넘쳤으며, 마냥 희희낙락거리던 진혁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아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해야 맞았다.
* * *
진혁이 다시 라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순덕의 몸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라인이다.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
하지만 정성을 담는다.
그러고는 펜라이트를 꺼내 들었다.
딸깍.
김순덕의 눈꺼풀을 억지로 휘감아 올린 뒤, 안구 반응을 확인한다.
전정안구반사(Vesti-bulocular reflex).
각막반사(Corneal reflex).
동공반사(Pupillary light reflex)까지.
반응 소실 여부를 확인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데…….’
안구 반응이 소실되면 예후가 좋지 않다는 징후.
아직은 괜찮았다.
그때, 정신없이 움직여야 할 윤희철이 다가왔다.
진혁에 대한 호감이 듬뿍 생긴 그였다.
“아직 반응 살아 있죠?”
“네,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뭐, 그래도 아직 모르니까 지켜봐야죠. 일단 3일 내로 의식이 안 돌아오면 예후가 나쁘다는 거니까요.”
“네, 계속 팔로업 하겠습니다.”
“근데 공부 많이 했나 봐요? 왜 아까 그거 말이에요. 그거.”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요?”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숙이자 윤희철이 희게 웃었다.
겸손한 놈이라는 별칭도 추가해야 했다.
* * *
곧 시작될 회진.
마지막으로 김순덕을 살핀 진혁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어!?”
진혁이 얕은 침음성을 토해 냈다.
김순덕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걸 봤기 때문이다.
자리를 뜨려던 진혁이 급하게 달라붙었다.
바로 김순덕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물론, 말을 붙이는 건 기본이다.
“환자분? 정신이 드십니까?”
의식을 깨우려는 행위.
그 모습을 보고 간호사가 달려와 반대편 팔을 주무른다.
“환자분, 김순덕 환자분! 정신이 드십니까?”
“…….”
“김순덕 씨! 따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수현 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계속 그를 부른다.
진혁도 간호사도 계속 말을 걸었다.
신경 자극을 통해 그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그렇게 한참 마사지를 하고 있을 때.
주치의인 윤희철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깨어난 거예요?”
“네, 방금 손가락이 움직였습니다.”
“착각한 건 아니고요?”
“아닙니다. 분명히 봤습니다.”
단호한 진혁의 대답.
윤희철도 김순덕 옆에 달라붙었다.
그가 펜라이트를 꺼내 동공반사를 확인하려던 순간.
김순덕의 눈꺼풀이 먼저 움직였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도 않았건만, 스스로 움직인 거다.
그리고 그건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
조금씩.
아주 더디게.
조금 더.
눈꺼풀이 좀 더 확연히 떨린다.
“어어어!!!”
저도 모르게 나오는 탄성.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며 이를 바라본다.
또다시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그건 갓 태어난 새끼 새가 처음 날갯짓을 하는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당장 윤희철이 소리쳤다.
“억제대 체스트 주세요!”
“네!”
“혹시 모르니까 로라(로라제팜)랑 할돌(할로페리돌)도 준비하고요.”
“알겠습니다.”
다들 정신없이 움직였다.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
깨어나자마자 인지 장애로 섬망이 발생하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곧, 억제대 체스트로 김순덕을 결박한다.
그러고는 다들 기다렸다.
아기새의 어설픈 날갯짓을 어미가 말없이 기다려 주는 것처럼, 김진철이 천천히 의식을 차리길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후.
김순덕이 완전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진혁이 말했다.
“김순덕 환자분! 병원인 거 아시겠어요? 아시겠으면 눈을 살짝 감아 보세요.”
“……!”
“힘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으…….”
호흡기 너머로 들리는 괴음.
그리고 천천히 감기는 눈꺼풀까지.
생각보다 빠른 의식 회복이었다.
진혁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은데요?”
순수한 기쁨에서 나온 말.
감정을 일체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환자를 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적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서신대 CS에서 버텼을지도 모른다.
물론 기뻐하는 건 윤희철도 마찬가지.
“일단 신경학적인 손상이 없다고 할 순 없으니까 검사부터 해 보죠.”
“EEG(뇌파 검사) 의뢰할까요?”
“바로 푸시하세요.”
“넵.”
“아, SEP(체성감각유발전위검사)도 의뢰해요.”
“알겠습니다.”
쉴 틈 없이 떨어지는 윤희철의 오더.
곧 있으면 회진이 시작되기에, 서둘러야 했다.
* * *
잠시 후.
두 명의 임상병리사가 EICU를 찾았다.
장비를 들고 내려오느라 함께 움직인 모양.
몇 명이 내려오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그들의 외모다.
‘너무 힘준 거 아니야?’
당직실에 구비해 둔 무스를 얼마나 많이 발랐는지, 머리카락이 떡이 져 반들반들 빛이 나는 이들.
방송에 얼굴 한번 비추고 싶은 마음의 발로로 보였다.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김순덕이 깨어나며 마음의 짐을 덜었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바로 검사 부탁드립니다.”
“SEP(체성감각유발전위검사)부터 하겠습니다.”
“네.”
임상병리사가 김순덕의 목과 머리, 척수에 전극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말초 감각 신경에 전기 자극을 준 뒤, 감각 신경계의 이상을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20분 뒤.
진혁이 임상병리사를 찾았다.
“결과 나왔나요?”
“네, 판독 결과는 곧바로 확인하실 수 있게 입력해 놓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이게 다 환자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요.”
VJ인 김석대를 흘깃거리는 임상병리사.
말투 또한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다분히 방송을 의식한 멘트가 분명했다.
그가 자리를 떠나기 무섭게.
다른 임상병리사가 이동형 EEG 모니터링 장비(뇌파 감시 장비)를 세팅했다.
뇌 손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 진정제 투약하신 건 아니죠? 수면 유도제 성분이 있으면 뇌파에 영향을 줘서요.”
“투약 오더 없었습니다.”
“예.”
그렇게 시작된 검사.
진혁은 한참 EEG 모니터를 지켜봤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윤희철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뭘 그렇게 보고만 있어요? 환자가 걱정돼서 그래요? CS에서 다시 내려오기로 했잖아요.”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뭐가요?”
윤희철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진혁이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Continuous EEG monitoring(지속 뇌파 감시)이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지금 실시간 모니터링되는 것들은 전부 심폐 기능에 국한돼 있어서요.”
진혁이 그 말을 끝으로 동맥산소분압, 심전도, 호흡수 측정기 등을 가리켰다.
“피지컬에만 너무 초점이 가 있다?”
“네.”
“그게 왜 아쉬운데요?”
“대뇌의 기능적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면, 중환자를 치료할 때 더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아서요.”
“사실, 우리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럼 설치 계획도 있는 겁니까?”
“아뇨. 비용 문제가 있으니까요. 장비값도 만만치 않고요.”
“…….”
“EICU에 워낙 장비가 많아서 전기 차폐도 잘 안 되는 거 알죠? EEG 장비를 베드마다 설치한다고 해도 일단 세팅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결국, 어렵다는 말.
미래에는 기본적으로 세팅된 장비였기에, 진혁의 표정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 모습에 윤희철이 말을 삼켰다.
‘허허, 인재로다, 인재.’
그는 또다시 별칭을 추가해야 했다.
이상한 놈.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 판국에, 저런 고민과 생각을 한다니 진짜 이상한 인턴이었다.
아니, 어쩌면.
누가 볼까 부끄러워, 혼잣말로 애늙은이 말투만 쓰는 그 자신도 이상한 놈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