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61)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61화(61/388)
61화. 마지막 잎새 (10)
얼마나 지났을까.
이태희의 떨림이 잦아드는 게 느껴진다.
“이제 됐어. 고마워.”
“……괜찮아?”
“응.”
대답과 동시에 이태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엉망이 된 얼굴이 그제야 생각난 모양이다.
“쳐다보면 죽는다?”
“뭘, 이제 와서 그래. 이미 다 봤거든?”
“죽을래?”
“뭐, 원한다면. 됐지?”
진혁이 고개를 돌려 컴퓨터를 바라봤다.
화장을 고치는 건지, 한참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방금 들었던 저 거친 말투는 제 감정을 숨기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테니까.
꼬르르륵.
꼬르르륵.
순간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뱃속이 진동했다.
간밤에 먹은 간식 외에 아침과 점심을 걸렀으니 그럴 수밖에.
잠시 민망해하던 진혁이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컴퓨터를 향한 채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맛있는 거?”
“배고프기도 하고. 여자들은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이 풀린다며.”
“누가 그래?”
“책에서 봤는데?”
“맨날 엄마만 찾더니, 여자 심리도 공부하고. 우리 진혁이 많이 컸네?”
창피한 걸 숨기기 위한 도발.
진혁이 희게 웃으며 말했다.
“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와. 나도 갈아입게.”
“오케이. 콜!”
이태희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여자 탈의실로 향했다.
* * *
호감?
호감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뭐랄까.
까마득한 후배나 다름없는 이태희가 환자의 죽음 앞에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밥이나 먹으며 격려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어머니도 밥 먹고 들어오라고 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온 삼겹살집.
낮에 여는 곳을 찾다 보니 둔촌동까지 와야 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이태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부터 찾았다.
진혁이 황당한 듯 되물었다.
“소주를 먹는다고? 낮술?”
“그럼 삼겹살에 물 말아 먹어?”
“그러다 걸리면?”
“뭐, 그럼 넌 물이나 마시든가.”
박영진이 내린 금주령을 어기겠다는 말.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진혁이 말을 삼켰다.
이태희가 소주병을 흔들었다.
“그래도 한 잔만 같이 할까?”
“뭐, 나야 상관없지.”
“또 그런 말투다.”
“?”
“난 아무래도 좋아, 난 전부 할 수 있어. 이런 말투, 별로야. 별로.”
뜬금없는 비난에 진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투가 거슬린다는데 뭐라 변명한단 말인가.
그녀가 술잔을 꺾었다.
“캬아아~! 좋다.”
“출근했는데 냄새나면 끝인 거 알지?”
“남이사 뭔 상관?”
“하…… 그래. 마시고 죽어라.”
졸졸졸.
졸졸졸.
진혁이 곧바로 술잔을 채웠다.
사실, 이태희의 심정이 이해됐다.
저 거친 말투는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가리려는 걸 테니까.
아니, 소아 환자의 죽음만큼 심금을 울리는 일도 없으니까.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닳고 닳은 교수 때 겪은 일도 아니고, 그녀는 고작 인턴이었으니까.
연신 소주를 마시는 이태희를 보며, 진혁도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부교감 신경을 자극했지만, 상관없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절제할 자신이 있었다.
그때 식당 아주머니가 삼겹살을 내려놓는다.
“낮부터 왜 이렇게 달린대~! 둘이 싸웠어?”
“아, 아뇨. 싸운 건 아닌데요.”
“에이, 아가씨가 화 풀어.”
“!”
“남자 친구가 잘못했나 보네~!! 삼겹살도 아직 안 구웠는데 무슨 술을 이렇게 퍼마셔~!!”
“아…….”
순간 진혁이 얕은 탄식을 내뱉었다.
졸지에 여자 친구를 화나게 만들어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게 한 남친이 돼 버린 탓이다.
변명할 틈도 없이 이태희가 말했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이모~! 여기 껍데기도 맛있어요?”
“호호~! 맛있지 그럼.”
“그럼 껍데기 1인분이랑 소주도 한 병 더 주세요.”
“어머, 나야 좋지. 호호.”
오랜만에 올릴 매출 생각에 신나서 돌아가는 이모님.
그 모습에 진혁이 혀를 찼다.
“아직 다 안 마셨거든?”
“킵해 놓고 먹을 거야.”
“소주가 무슨 양주야?”
“뭐 해? 빨리 술 안 따르고.”
진혁이 짧은 탄식을 내뱉은 후, 그녀의 술잔을 채웠다.
그렇게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길 수차례.
삼겹살이 익어 가는 소리는 그저 배경 음악일 뿐이다.
“나 열심히 할 거야.”
“…….”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할 거라고.”
“이미 열심히 하고 있어. 평가 좋게 받은 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다고.”
“알아, 그래도 더 열심히 할 거라고.”
“…….”
“내가 더 능력을 키워서, 꼭 살릴 거야. 다 살릴 거라고.”
소아 환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털어놓지 않은 채.
이태희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만 반복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늘로 떠나 버린 소아 환자를 기리는 다짐이 아닐까.
“근데 메뉴를 골라도 어떻게 그렇게 골라?”
“뭐가.”
“갈비탕,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부대찌개.”
“그게 뭐.”
“그게 기분을 풀어 주는 메뉴야?”
“나보고 골라 보라며.”
진혁이 황당하다는 듯 반문하자 이태희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여자를 달래 주는 법을 책을 보고 배웠다더니 엉망인 탓이다.
“근데 무슨 책을 읽었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푸웃!”
킥킥거리며 웃는 이태희.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두고 왜 웃는 걸까.
책의 저자인 존 그레이와 대면시켜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꿀 같았던 오프.
ER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갔다.
오태상과 장길만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덤덤한 반응.
완전히 데면데면한 사이가 돼 버렸다.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치프인 김상혁과는 사이가 좋았으니까.
EICU(응급중환자실)로 향할 때였다.
김지연 간호사가 길을 막았다.
“이 쌤~! 또 사고 치셨다면서요?”
“?”
“에이, 다 들었는데요?”
“저 요새 조용하게 지내고 있는 거 아시잖아요. 콜 때문에 싸우는 일도 없는데요.”
“에이~! 그건 촬영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이젠 벨 소리가 울리기만 해도 바로 내려오니까요. 그거 말고요. 호호.”
김지연 간호사가 묘하게 웃었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약속 지키실 거 아니면 빨리 털어놓으세요. 민증 보여 주기로 한 거요. 왜, 그때 정보도 드렸잖아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와. 또또! 또 그러신다~!! 그럼 털어놓는 거죠? 어떻게 된 거예요? CS가 지금 난리예요. 서약도 하고 왔다면서요?”
“네? 무슨 서약이요?”
“뭐, 도장 찍고 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아니에요? 그래서 콜폰 TO도 미리 배정했다면서요.”
순간 진혁의 눈이 커졌다.
내기를 빌미로 뜬금없이 콜폰 TO를 준다고 하더니.
다 계략이었다.
닥술(닥치고 수술)만 할 줄 알았던 이들이 조금씩 머리를 쓰기 시작한 거다.
게임으로 따지면, 바바리안이 방패가 아니라 책을 든 느낌이랄까.
* * *
외과 계열은 어딜 가나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이 없으니 퇴근을 할 수 없고.
퇴근을 할 수 없으니, 지원하지 않는다.
선순환을 이뤄도 모자랄 판에, 악순환의 연속인 거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반가울까.
똘똘한 후배 한 명이 추가된다면, 업무 로딩이 경감될 테니까.
하지만.
‘이러다 괜히 실망하는 거 아니야?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조금 미안했다.
나중에 다른 과를 선택한다면, 얼마나 실망이 클지 알기 때문에 더 그런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저 함부로 공수표 남발하고 다니는 사람 아닙니다. 요새 도장 함부로 찍으면 큰일 나는 거 아시죠?”
“에이~! CS 몫으로 나온 통신비 TO도 받으셨다면서요.”
“내기에서 이겨서 받은 겁니다.”
“정말요?”
“네. 한동수 교수님하고 내기했어요. EICU에서요.”
“흐음. 믿기 힘든데…….”
“뭐,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되잖아요.”
디테일한 소문에 맞서는 단호한 대답.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연이 웃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구미회 간호사한테 확인해 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른 생각도 떠오른다.
적이 많은 상황.
앞으로 협진을 많이 할 텐데, 이대로 계속 둘 순 없었다.
“한 교수님이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그런 소문이 난 거 같은데요. 틈틈이 논문도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내기에서도 이길 수 있었고요.”
“그래요? 논문을 대체 얼마나 보시는 거예요?”
“네?”
“아니, 논문을 본다고 바로 필드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말이 많아요. 못 믿겠다는 사람도 많고요.”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시술에서 특출한 모습을 보였기에 하는 말.
진혁이 손을 휘저었다.
“에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제 사정 아시잖아요.”
“?”
“저 국회 의원한테 찍힌 놈입니다. 인터뷰도 했잖아요.”
“아!!”
“살아남으려면 공부해야죠. 외압이 있을 수도 있고. 인턴만 하고 쫓겨나는 건 싫거든요. 저 퇴근하면 맨날 공부만 합니다.”
“그, 그래서 그러셨던 거군요. 어머~! 진짜 그건 생각도 못 했어요!!”
“레지던트도 아신 병원에서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안 그래도 타교생인데요.”
타교생이라는 신분까지 강조한다.
아신 병원은 폐쇄적인 문화로 유명했으니까.
거기에 더해, 감정에 호소한다.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저도 힘들어 죽겠어요.”
“그럼 잠은 언제 주무세요?”
“거의 못 자요. 오늘도 몇 시간 못 잤어요.”
“와……. 이 쌤 진짜.”
“그러니까 교수님들이 물어보실 때 대답할 수 있는 거예요. 안 그러면 저도 대답 못 하죠.”
진혁이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자, 김지연이 안쓰러워했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뒤 쐐기를 박는다.
“사실, 아버지가 일 년 전에 명퇴하셨어요.”
“어머!!!”
“사실상 제가 가장이죠.”
“……!!”
“그렇다고 페닥(페이 닥터)은 하긴 싫고.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아야 해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레지던트도 못 하고 잘리면…….”
진혁이 씁쓸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리자.
김지연이 언성을 드높였다.
“어머! 그건 말도 안 되죠!!!”
“……!”
“외압이 아니면 이 쌤이 어떻게 잘려요!”
“뭐, 모르는 거니까요.”
“와, 이 쌤! 저흰 다 이 쌤 편인 거 알죠? 힘내세요!”
안 그래도 레지던트와 충돌하며 간호사들의 환심을 산 상황.
김지연은 진심으로 진혁의 상황을 걱정하며 응원했다.
이제 소문이 날 차례였다.
* * *
CS에서 퍼트린 소문도 잠재우고.
혹시 모를 외압에 맞설 수 있는 소문을 흘린다.
그간의 행동에 당위성까지 부여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이른바 일거삼득.
그렇게 다음 날이 됐을 때.
소문의 진원지이자 교환의 장소인 흡연장과 구내식당이 진동했다.
“야, 이진혁이 가장이라며? 뭐, 집에 돈이 없어서 통신비까지 지원받기로 했다던데?”
“그런 놈이 핸드폰을 쓰냐?”
“그건 프리인턴 교육 때 상으로 받은 거라더라.”
“그래? 손은 빠른가 보네.”
“뭐, 장난 아니게 노력하나 봐. 이번에도 CS에서 날렸다잖아.”
“야. 그게 말이 되냐. 인턴이 무슨.”
진혁을 두고 한참 떠드는 이들.
구내식당은 한참 시끄러웠다.
“잠도 안 자고 매일 논문 보면서 공부한다더라.”
“근데 진짜 걔는 뭐냐. 원래 인턴 때는 로딩 걸린 거 처리하는 것도 힘들어하잖아.”
“뭐, 레지던트를 여기서 못 할까 봐 그런다던데? 외압을 아직도 걱정하나 봐.”
“솔직히 다른 병원 가면 그만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페닥 하면 금방 돈 모으잖아.”
“말리그잖아.”
“아……!”
말리그라는 말이 주는 의미.
평범한 이들과는 그 행동이 다르기에 불리는 부정적인 별칭이, 이럴 땐 좋았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도 전부 설명되니까.
“그건 그렇고 CS 가기로 한 것도 아니라더라.”
“어? 정말?”
“그래. 한 교수님이 그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혼자 그러는 거라던데?”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거 같던데.”
“그보다 이진혁이 컷 하지도 못하겠더라. 컷 하는 순간 외압이라고 소문 돌 거 아니야.”
“뭐, 그건 모르지. 어!! 이진혁이다!!”
퇴근을 앞둔 진혁이 아침을 먹으러 나타나자 장내가 울렁였다.
안 그래도 방송국에서 촬영 중인 상황.
CS에서 낸 소문과 맞물려 그에 관한 이야기로 병원이 진동했다.
* * *
그 시각, 응급의학과 과장인 박영진은 김상혁을 불러 지난 일을 캐묻고 있었다.
윤희철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한 김상혁의 보고는 깔끔했다.
하극상은 아니라는 것.
되레 사고가 날 뻔했고.
그대로 방영됐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말이 주를 이뤘다.
박영진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이진혁 선생이, 내흉동맥 럽쳐를 미리 예상했다?”
“예, 과장님.”
“흐음.”
“미리 알고 만류한 게 분명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논문을 봤다고 합니다.”
“흐음.”
“꼭 잡았으면 합니다. 아직 한참 촬영 중인 상황. 이 선생이 ER에 어플라이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정중하지만 딱딱한 김상혁의 말투.
ER의 왕이나 다름없는 과장한테 하는 보고니,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 말속엔 진혁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었다.
막내를 다른 과에 뺏길 순 없지 않던가.
한참 책상을 두들기던 박영진이 말했다.
“원래, 남이 뺏으려고 하면 더 뺏기기 싫은 법이지. 사탕은 그래서 사탕인 게야.”
막내 쟁탈전의 서막을 여는 말이었다.
아, 사탕 VS 양아들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