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82)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82화(82/388)
82화. 잡았다. 요놈! (2)
어머니 옆에 놓인 서류의 제목.
『샴푸 용기 디자인 선호도 조사』
그건 어머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설문지였다.
진혁이 떨리는 눈빛으로 서류 맨 밑에 있는 업체명을 확인했다.
『코리아 리서치』
설문을 의뢰한 업체가 분명했다.
조심스레 서류 뭉치를 들어 올린 다음.
진혁이 다음 장을 펼쳤다.
그러자 수없이 많은 설문이 눈에 들어왔다.
선호하는 색상, 모양, 버튼 형태.
샴푸 용기에 대한 선호도를 묻는 설문으로, 제품 개발 전 조사를 한 것 같았다.
곧이어 눈에 들어온 건, 설문에 응한 사람의 인적사항이었다.
연령, 성별, 사는 지역, 소득 수준 등.
개인을 특징 지을 순 없지만 나름의 계층을 구분한 인적사항이 각기 다른 펜으로 체크돼 있었다.
곧, 진혁이 서류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피곤한 듯 엎드려 주무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진혁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몰래 일을 하고 계신 거였어?’
얼마인진 정확히 모르지만, 많아 봐야 장당 오천 원일 터.
누군가에겐 길가에 떨어져도 줍지 않을 오천 원을 위해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설문에 응해 달라고 사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이들.
고생한다고 무심한 표정으로 설문에 응하는 이들.
귀찮게 하지 말라며 화내는 이들까지.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
진혁이 끝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와 통화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 아이, 밥은 먹고 들어오라니까.
– 엄마도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야지.
–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괜찮다니까!
노년의 삶을 꿈꾸며 친구들을 만나고 계신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되레, 극성스럽게 말했던 모든 것들은.
일하고 있다는 걸 밝히기 싫어서 그래 왔던 건지도 몰랐다.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왜 몰랐을까.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대체 왜!
아버지가 명퇴하신 뒤, 어머니가 따로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서신대에 있을 때는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아신 병원에 있을 때는 이젠 다 키웠으니 제 삶을 살겠다는 그녀의 거짓말을 믿어 버렸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하……. 세상천지에 이런 바보가…….’
진혁이 굳은 얼굴을 한 채 방에 들어왔다.
혹시나 어머니가 깰까 봐 겁이 난 탓이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진혁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누군가는 욕심쟁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목표가 하나 더 추가됐다.
어려운 집안 형편, 돈도 벌어야 했다.
* * *
어느덧 출근 날.
뜻하지 않게 오프가 길었기에 조금 더 일찍 출근한 진혁에게 장혁준이 다가왔다.
쭈뼛쭈뼛하는 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치도 못한 그의 고백에 진혁이 도끼눈을 떴다.
“범인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더니!”
“아니, 그 기자님이 진짜 자기만 알고 있겠다고 했다니까요!”
장혁준이 손사래를 치며 변명하자 진혁이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뭐? 가장 친한 동료로서 인터뷰를 해 줬는데, 기사에 안 실렸다고?
친절히 진혁의 번호까지 알려 줬다는 말은 덤이었다.
문제는 하필 그 기자가 구재완이라는 거다.
‘안 그래도 앙심을 품고 있었을 텐데.’
진혁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면박을 당한 구재완.
감히 기자의 권위에 도전한 자신을 향해 보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치졸하게.
아니, 그보다.
제 번호를 유출한 장혁준이 더 괘씸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번호가 유출돼서 얼마나 피해를 봤는 줄 알아요?”
“와, 나도 억울하다니까요!!”
“뭐가 억울한데요.”
“그럴 줄 몰랐죠. 보통 단독으로 인터뷰하고 싶어 하지, 누가 전화번호를 뿌려요.”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죠. 하…….”
“아, 처음엔 몰랐어요. 근데 왠지 생각해 보니까 그놈일 거 같더라고요. 뭐, 나 때문에 휴가 갔다 왔잖아요!”
말도 안 되는 변명.
거기에 더해, 장혁준은 되레 당당하게 나왔다.
“원래 혁명 인사는 유명해져야 하는 법입니다.”
“그놈의 혁명 놀이!”
“헙. 100호 동지 벌써 변절한 겁니까!!”
“몰라요, 몰라.”
진혁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장혁준이 그제야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에이, 그래도 내가 알아봐 줬잖아요. NS에서 정보 캐낸 거 벌써 잊었어요!!”
“서신대 비전 때문에 그런 거겠죠. 대가로 비전을 주겠다고 했으니까요.”
진혁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장혁준이 괘씸해서 한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장혁준이 억울해했다.
“와!! 비전이고 뭐고 진짜 목숨 걸고 한 거라니까요. 배신자 소리 들을까 봐 잠도 못 잤다고요!!”
“하…….”
진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와 드잡이질하는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때, 장혁준이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뭐, 그건 그렇고 약속은 지켜야죠. 비전은 언제 줄 거예요. 복사만 해서 주면 되잖아요.”
“지금 비전을 달라는 말이 나와요?”
“나오죠, 잘만 하면 혁명 자금을 모을 수 있잖아요.”
뜬금없는 혁명 타령.
흰소리인 게 분명했기에,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진혁이 침묵했다.
하지만, 자꾸 ‘자금’이라는 말이 걸린다.
“혁명 자금은 뭘 말하는 거예요?”
“아, 이걸로 돈을 벌 수 있다고요.”
“무슨 돈이요?”
“그거 출판합시다. 비전을 책으로 출판하자고요.”
뜬금없이 출판이라니.
진혁의 입에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비전을 제대로 본 적도 없잖아요.”
“에이, 뭐, 우리 이 선생 실력 정도면 진짜배기겠죠. 그거 출판하는 거예요. 어때요? 혁명 자금을 모을 수 있다니까요~!”
거듭된 설득에도 진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비전은 애초에 없었다.
전부 제 머릿속 지식일 뿐.
장혁준과 김현수와 거래를 하기 위해 만든 가상의 책일 뿐인 거다.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비전을 믿어. 하긴, 장혁준은 처음부터 믿었지.’
진혁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장혁준이 그새를 못 참고 떠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인턴들이 볼 만한 책이 없잖아요.”
“?”
“뭐, OSCE(의사국가고시) 술기집이나 전공 서적밖에 없죠. 안 그래요? 게다가.”
“게다가?”
“의사는 돈이 많죠. 책이 없어서 못 사는 거지,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솔직해지자고요.”
“!”
“제대로 출판만 하면 대박이라니까요!”
순간 진혁의 눈이 커졌다.
비싸디비싼 의대 등록금.
과외를 하며 버티던 동기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잘사는 집안 출신이 많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니까.
‘나 같은 예외 케이스는 별로 없었지.’
마음이 잘게 흔들리는 가운데, 장혁준이 쐐기를 박았다.
“아버지 친구분 중에 출판사 하시는 분도 계시거든요.”
“컨택이 가능하다?”
“그럼요.”
“흠.”
“와, 이거 진짜 비싸게 팔아먹어도 팔릴 거 같은데. 돈이 얼마야. 진짜.”
순간 마음이 동한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어려운 집안 환경.
돈이 정말 절실했다.
“1호 동지!”
“오오오오!! 웰컴 투 컴백~~!!”
장단을 맞춰 주자 신이 나 흥얼거리는 장혁준.
때로는 젊은이의 목소리도 들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 * *
비전도 없었건만, 급격하게 나간 진도.
아직 근무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벌써부터 책 제목을 고민했다.
『인턴 필독서』
딱 하나의 제목만 적은 진혁.
하지만 장혁준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며 열심이었다.
“책이 잘 팔리려면 제목이 중요하다고요.”
“얼른 보여 주고 끝내죠. 곧 출근해야 하는 거 알죠?”
“서로 비난 금지입니다!”
“알죠. 알아.”
그렇게 교환한 제목 초안.
조금 전에 제가 한 말을 까마득히 잊었는지, 장혁준이 불만을 터트렸다.
“와, 진짜 이 노땅 같은 제목은 뭐예요!”
“비난 금지라면서요.”
“어지간히 해야 비난을 안 하죠.”
“?”
“이런 쓰레기 같은 제목으로 어떻게 혁명 자금을 모아요!!”
“와…….”
진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대체 자기는 얼마나 잘 썼길래 저러나 싶었다.
곧장 장혁준이 건네준 메모지를 확인한 진혁이 기함했다.
‘뭐야, 이게 대체!!’
정말, 낯부끄러운 제목들이 한가득이다.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최고! 인턴 필독서』
『엄마, 성형외과가 가고 싶어요!』
『아빠, 요즘은 안과가 최고래요!』
『당신도 사랑받을 수 있다. 인턴 필독서』
『인기과를 가고 싶습니까? 당장 시작하세요.』
『레지던트한테 사랑받고 싶습니까?』
품격을 떨어트리는 제목.
정말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이런 걸 책 제목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수준이 떨어져도 보통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진혁이 말을 더듬었다.
“이, 이런 제목을 쓰자고요?”
“이 정도는 해야 어그로를 끌 수 있다고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케팅의 기본도 모르시네. 와.”
평소에도 영어를 섞어 쓰는 의사답게 어그로라는 아직 유행하지 않는 용어까지 쓰는 장혁준.
어지간히 자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잖아.’
자신이 쓴 책이 저런 제목으로 유통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했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렇지.
의사의 품격마저 저버릴 순 없었다.
자신이 누구던가.
한때 서신대 병원에서 흉부외과장을 역임했던 이가 아니던가.
한심한 제목은 집어치우라고 말하려던 순간.
장혁준이 메모지에 숫자를 적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지금 의대 정원이 3,300명이니까 한사람한테 3만 원씩만 받아도 1억이…….”
“!”
“이번에 의대 4개가 신설됐으니까. 아, 아니다. 매년 팔 거니까 대체 돈이 얼마야. 몇억인데? 10년만 지나도 10억인가??”
“!!”
덜컹!
진혁이 벌떡 일어났다.
원래 의학 서적들은 전부 가격이 비싼 법.
그러니 3만 원에 팔아도 잘 팔릴 터였다.
아니, 반드시 잘 팔리게 만들어야 했다.
어차피 모든 건 제 머릿속에 있는 상황.
그저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러면 어머니도 일하지 않을 수 있었고.
무급으로 일하는 아버지도 마음 편하게 회사에 다닐 수 있을 터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진혁을 보며 장혁준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와, 진짜. 아니, 구재완 그 나쁜 놈이 잘못한 건데. 갑자기 또 왜요.”
또 뭐라고 할 거라고 생각하는 장혁준.
진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엄마, 성형외과가 가고 싶어요!』 이걸로 합시다. 이걸로.”
부모님을 위해선 못 할 게 없었다.
* * *
부모님 앞에서, 체면이 중할까.
그런 의미에서 진혁은 다짐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사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방법이 좀 막막하던 차였다.
코인?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주식?
종잣돈이 없었다.
부동산?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인턴을 위한 제대로 된 책 한 권이라면.
거기에 사진도 박아 넣고.
Tip이라는 형식으로 인턴들이 어려워했던 부분을 제대로만 긁어 준다면!
수학의 정석도 부럽지 않을 터였다.
‘이제 가난도 끝이다!! 끝!!’
소리 없는 아우성!
환호성과 웃음이 절로 나왔다.
물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먼저 머릿속 지식을 인턴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 써야 했다.
그뿐이랴.
누구 이름으로 출간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사실 이게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인턴이 인턴을 위한 서적을 써?
쉽지 않은 문제였다.
자칫하다간 팔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자 문제를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돌덩이를 등에 지고 등산하는 것처럼 괜히 신경이 쓰였다.
돈을 벌 수 있는데.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데.
고작 저자 문제 때문에 망설이다니, 빨리 이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며칠 후.
『응급실 사람들』 2회차가 방영된 순간 그 고민조차 사라졌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