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96)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96화(96/388)
96화. 죽음이 예정된 환자 (6)
김상혁의 동기이자 PSY(정신의학과) 레지던트인 이도운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명 최예린의 병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이진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레지던트에게 물어봤다.
혹시 이진혁을 못 봤냐고.
그랬더니 혼나고 있단다.
숫제 GI 레지던트 휴게실로 끌려갔단다.
그래서 그냥 와 봤다.
레지던트랑 트러블이 있다는데, 자신이 뭘 할 수 있겠는가.
대충 상황을 지켜보다가 빼내 올 수 있으면 빼내 오려고 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바라본다.
“크음. 큼.”
민망함에 나오는 헛기침.
그리고 이어지는 반문.
“그냥 와 본 건데. 다들 왜 그래요?”
딱히 누군가를 지정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박영진의 뒤에 서 있던 김상혁이 냉큼 손짓했다.
“이 선생!”
“어, 어!”
“여긴 왜 내려온 거야?”
“이진혁 선생이 혼나고 있다고 해서.”
“아니, 왜 GI(소화기내과) 병동에 내려왔냐고.”
“혹시 환자가 상담을 거부할 수도 있으니까 약식으로라도 해 줄 수 있냐고 하더라고.”
“…….”
“왜 그때 기억 안 나? 밥 먹을 때 이진혁 선생이 부탁했었잖아.”
“!”
“나도 자신 없는데. 그냥 얘기나 들어 주려고 왔지. 뭐, 김 선생도 알잖아. 내 주제에 무슨 상담이야. 진짜 얘기나 들어 보려고 온 거라니까.”
갑자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이도운.
주변 시선도 부담됐고.
아직 4년 차에 불과한 자신이 당당히 환자를 상담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도 웃겼다.
뭐,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최예린의 딱한 사정.
그냥 얘기나 들어 보자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도운의 말이 거듭될수록 희비가 엇갈렸다.
* * *
갑자기 나타난 박영진과 이도운 때문에 전세가 역전된 상황.
진혁이 시선을 돌려 박태준을 바라봤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그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넌 이제 죽었다.’
사실 박영진이 그를 어떻게 처분할지는 몰랐다.
으레 그렇듯, 정치적인 거래로 일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곧 진혁이 상념을 털어 냈다.
자신은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예린한테 가서 일단 설득해 보자.’
그렇게 잠시 후.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자 박영진에게 말하고 당장 최예린의 병실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안 된단다.
‘아니, 왜 안 되는 건데!’
뭐라 항변할 틈도 없이.
따라오라는 박영진의 뒤를 따라 병원장실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방문.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비서는 놀란 눈을 했지만, 박영진의 발걸음엔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들어간 병원장실.
오지호조차 눈을 뻐끔거렸다.
“허허, 갑자기 오셔서 놀랐습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영진 뒤에 서 있는 진혁과 박태준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설명.
박영진의 말이 계속될수록 오지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문제가 있군요.”
“문제가 있지요.”
“흐음.”
“우리 이 선생이 폭행을 당했습니다.”
“!!”
순간 오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이아몬드 원석이라고 여겼던 이진혁.
잘 다듬어야 했건만, 감히 깨부수려고 했던 놈이 눈앞에 있었다.
* * *
불과 10분 전.
오지호는 험난한 산의 정상에 올라, 그간 걸어왔던 길을 내려다보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오르가슴에 가까운 가슴 벅찬 짜릿함이었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때로는 윗사람에게 아부해야 했고.
사생활도 없이 불철주야 노력해야 했다.
그뿐인가.
각 과의 과장들을 한 명이라도 포섭하려고 갖은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왔고, 성취감에 몸이 찌릿찌릿했다.
뿌듯함이 밀려와 절로 신이 날 정도였다.
이 모든 건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 오 원장님. 참으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 이사장님께서 잘 봐주신 덕분이지요.
–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고생이 많더군요.
–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 허허, 우리 오 원장님이라면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겠습니다. 언제 한번 식사라도 하시지요.
짧은 통화에 담긴 함의는 컸다.
어디 이사장이 먼저 전화하던 양반이던가!
항상 자신이 먼저 전화해야 했고.
바쁘다는 이유로 연결이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거꾸로 전화가 왔다.
방송을 잘 보고 있단다.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겠단다.
이게 전부 『응급실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의학의 ‘의’ 자도 모르는 이사장이 저렇게 흡족해할 리 없었다.
사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재단을 소유하곤 있지만,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하나도 모르는 이사장.
그저 문서로만 모든 걸 접했으리라.
그런데 방송은 달랐다.
다들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이진혁 덕분이었다.
방송의 중심엔 그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진혁을 업고 다녀도 시원찮은 판인 지금.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단다.
그뿐이랴.
폭언도 했단다.
그것도 타 과 레지던트가.
항상 품위를 지키던 오지호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네놈이 감히 우리 애를 건드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박태준은 얼이 나간 표정을.
박영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진혁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그는 입을 벌리며 기함했다.
외과 소속도 아니건만.
어느새 ‘우리 애’가 돼 버린 탓이다.
* * *
어느덧, 병원장실엔 사람들로 그득했다.
소화기내과장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해요? 무슨 오해 말입니까?”
“자초지종을 먼저 설명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허허,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인 게 아닙니까.
박영진과 소화기내과장이 투덕거리자 오지호가 손을 휘저었다.
“자자. 우리끼리 이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사자한테 직접 들으면 될 일입니다.”
곧, 좌중의 시선이 진혁과 박태준에게 향했다.
그렇게 시작된 박태준의 변명은 구구절절했다.
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
그는 얼굴이 시뻘게져 진혁을 비난했다.
이미 궁지에 몰린 상황.
살려면 진혁을 깎아내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진혁은 달랐다.
사회생활이 늘 그렇듯 가면을 썼다.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허허, 사과할 게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지.”
“죄송합니다. 전부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뭐? 허허.”
오지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사죄를 청하는 이유가 능히 짐작됐기 때문이다.
‘역시 물건은 물건이라 이건가.’
오지호가 흡족한 듯 손을 내저었다.
“다들 바쁘니까, 있었던 일만 얘기하지.”
“네, 병원장님. 그게 그러니까…….”
진혁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사건의 전말을 전했다.
부원장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말은 잘하는군. 더 들을 것도 없겠습니다.”
“허허, 더 들어 보시지요.”
오지호가 부재일을 만류했지만, 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도운 선생과 밥을 먹었다지요? 뭐, 그때 작당한 게 아니겠습니까. 타이밍 좋게 내려와서 증인이 돼 달라고 했겠지요.”
“허허, 작당이라니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이유 말입니까?”
“박태준 선생이 제 뒤를 판 게 싫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지호가 황당한 듯 반문했다.
“그런 이유라면 이도운 선생은 동기가 없지 않습니까.”
“뭐, 그야 모르는 일이지요.”
“?”
“내밀한 속사정이야 당사자만 알지 않겠습니까.”
“결국 작당질이다, 이겁니까?”
“게다가 웃었다지요? 일부러 폭행을 유도한 겁니다.”
“허허.”
오지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일에는 명분이 중요했건만, 폭행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이를 뒤집으려 하고 있었다.
* * *
프레임을 씌우며 되치기를 하는 부재일.
그가 진혁을 매섭게 추궁했다.
“왜 웃었지? 박태준 선생이 때리길 원했나?”
“아닙니다.”
“그럼 뭐지?”
“그냥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을 뿐입니다.”
“뭐?!”
“…….”
진혁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숨을 고르며 좌중을 훑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박태준 선생과 저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박태준 선생이 제 뒷조사를 했습니다.”
“해서.”
“이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일. 박태준 선생도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정곡을 찌르는 진혁.
순간 적막이 흘렀다.
인턴 주제에 감히 묻고 있었다.
네가 시킨 일이 아니냐고.
네가 시켜서 일이 이렇게 된 거라고.
의사는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네 말은 모순덩어리라고.
이는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사죄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뭐, 순순히 당해 줄 순 없지.’
진혁이 부재일을 빤히 응시하자, 그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오지호가 나섰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더없이 존중하겠노라.”
뜬금없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읊는 진혁.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아직 인턴입니다. 졸업식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던 게, 아직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해서.”
“병원에서 근무하며 이런 일에 휘말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환자만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씁쓸했다?”
“예.”
일부러 폭행을 유도한 건 아니라는 말.
이마저도 부족했던 걸까.
부재일이 당장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도 잘하는군.”
“!”
“인터뷰를 하고 다니니까 언술이 많이 늘었어.”
그의 반박에 오지호가 기막힌 듯 반문했다.
“허허, 못 믿겠다는 말이군요.”
“믿을 이유가 없지요.”
“작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도 가져오라는 겁니까?”
“그런 증거가 있겠습니까?”
부재일이 비릿하게 웃자 진혁의 눈이 번뜩였다.
증거라면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 * *
20분 후.
김상혁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로그는 전부 뽑아 왔나?”
“네, 전부 뽑아 왔습니다.”
김상혁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오지호에게 건넸다.
전산실에서 뽑은 로그 데이터.
지난 며칠간 인트라넷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였다.
곧 오지호가 서류를 뒤적거렸다.
[청소년 자살, 위험요인과 보호 요인] [청소년의 자살 구상과 변인 분석] [청소년 자살 충동에 대한 다변적 요인] [자살을 예측하는 변인 간의 다차원적 분석] [청소년 자살 고위험 집단의 심리적 특성] [이혼 가정 청소년의 학교 적응] [한국 이혼 실태와 자녀들의 문제 연구] [이혼 가정 자녀의 정신 건강] [부모 이혼에 대한 자녀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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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논문.
진혁의 ID로 열람한 논문의 숫자가 백 편이 넘었다.
외과나 내과 계열 논문이라면 공부를 병행해야 했기에 이렇게 보는 건 불가능했다.
술술 읽기만 하면 되는 정신의학과 논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이도 봤군.”
오지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부재일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무슨 증좌를 가져왔길래 이러십니까?”
“왜? 궁금하십니까?”
“보여 주시지요.”
곧, 서류를 건네받은 부재일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게!!”
“이래도 작당한 거라고 하시겠습니까?”
“허허.”
“말씀을 해 보시지요.”
부재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최예린을 위해 공부한 흔적이 너무도 명백했던 탓이다.
그때, 김상혁이 또 다른 문서를 꺼내 들었다.
원래 상대를 조지기로 했으면 확실히 조져야 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