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Doctor Just Wanted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97)
회귀 닥터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97화(97/388)
97화. 죽음이 예정된 환자 (7)
『복강경 술기 교육 불참 사유서』를 확인한 오지호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물론 증좌로 활용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교육을 펑크 낸 진혁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강경 대회에 나가라고 했거늘…….’
허나, 부원장 앞에서 티 낼 순 없는 일.
오지호가 김상혁에게 물었다.
“DI(약물 중독) 환자 케어 때문에 불참한다고 적혀 있군.”
“맞습니다.”
“교육수련부에서 가만있진 않았을 텐데?”
“안 그래도 담당자와 실랑이를 벌인 모양입니다.”
“그래?”
“네, 담당자와 오간 이메일도 출력해 왔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상혁이 또 다른 서류를 건넸다.
이를 확인한 오지호가 혀를 찼다.
어떻게든 짬을 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담당자와 시간이 없다는 진혁의 대립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예선전 전날에 받기로 했군.”
“네, 날짜를 최대한 뒤로 미뤄 달라고 고집부린 탓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흐음.”
“사실, 이날 교육을 받겠다는 건 대회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겠지.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이 선생은 그만큼 환자에게 진심이었습니다.”
“…….”
“안 그래도 인턴이 복강경 대회에 나간다면 말이 많을 터. 환자를 위해 망신을 각오한 셈입니다.”
진혁을 변호하는 김상혁.
그의 말이 끝나자 오지호가 서류를 부재일에게 건넸다.
“자, 어떠십니까. 그토록 바라던 증좌가 여깄습니다. 이래도 작당했다고 주장하실 겁니까!?”
“아직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뭐, 천천히 살펴보시지요.”
부재일이 오지호가 건넨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답할 말이 궁색했기 때문이다.
“작당은 없는 것 같군요.”
“이제야 인정하시는 겝니까.”
“인정은 합니다만……. 뭐, 폭행이야 비일비재한 일이 아닙니까?”
“뭐요?!!”
“암암리에 많이 일어나는 일이지요. 게다가 고작 조인트입니다. 조인트! 막말로 박 선생이 주먹질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흔하게 있는 일이 아니냐는 말.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오지호가 앞으로 몸을 숙였다.
“자자, 정리를 좀 해 봅시다.”
“…….”
“우리 박 선생이 누군가의 사주로 이 선생의 뒤를 캤습니다.”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 아닙니까.”
진혁이 교수를 사칭했던 일을 덮고 신경외과(NS)에서 고대하던 예산안을 통과시켜 줬기에 하는 말.
오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끝난 일이라니요.”
“?”
“이번 일도 연장선상에 있지 않습니까?”
“!”
“뭐, 월권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고등학교 후배가 걱정돼서 찾아간 겁니다. 한데 다짜고짜 화를 내더니 발길질을 한 게지요. 안 그렇습니까?”
부재일이 침묵하자 오지호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이건 단순 폭행이 아니라 사적 보복입니다!”
“허허. 사적 보복이라니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병원장님!”
“이사장님께서 아시면 참으로 좋아하시겠습니다!!”
“!”
“이 선생이 한참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당사자를 폭행한 게 아닙니까!!”
“일을 키우시겠다 이 말씀입니까?!”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증좌가 명확하지 않습니까!”
묻어 뒀던 건과 연계해 보고하겠다는 함의.
물론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하필 당사자가 이진혁이었다.
‘이사장님이 아시면 우리가 불리하다.”
부재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과 계열의 위신 추락이 걱정되는 상황.
또다시 무언가를 양보해야 했다.
* * *
이제는 윗분들의 시간.
병원장실 옆 대회의실에서 논의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김상혁이 한탄했다.
“바람 잘 날 없다. 바람 잘 날 없어.”
“죄송합니다.”
“됐어. 근데…….”
“?”
“진짜 작당한 건 아니지?”
순간 진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날 어떻게 보고!’
“와……!!”
“농담이야. 농담.”
“진짜 치프까지 이러실 줄 몰랐습니다.”
“네가 하도 정치적이라서 그래. 뭐, 그런 놈이 술기 연습도 안 하고 이렇게 매달리는 걸 보면 진짜인 거 같다만.”
“또다시 자살을 기도할까 봐 겁납니다.”
“그 정도야?”
“네. 그래서 직접 설득하려고 했었습니다.”
순간 김상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혁이 무슨 근거로 확신하는진 몰랐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설득하는 건 이제 힘들지 않을까. 이제 와서 내려갈 수도 없잖아.”
“?”
“아니,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GI(소화기내과)에서 널 반기겠냐고.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고 하겠지. 아마 병동에 내려가는 순간 다들 몰려나올걸?”
“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황.
또다시 소화기내과 병동을 찾아간다면, 파란이 일 게 분명했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문제였다.
* * *
한 시간 후.
진혁이 다시 병원장실을 찾았다.
인사를 받는 오지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정치적 이득을 봤다 이건가?’
이사장한테 보고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원장의 양보를 끌어냈을 게 분명한 상황.
뭘 받았는지 물어볼 법도 했지만, 진혁은 묻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앉을 뿐이다.
그 모습에 오지호가 부담스러울 만큼 진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야. 왜 이래?’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분위기.
하지만 먼저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
“역시 이 선생이야!!”
“……?”
“윗분들 일은 궁금하지도 않다?”
“……!”
“이런 게 바로 본분에 충실한 모습이지!! 역시 훌륭해! 훌륭하다고!”
타악!
타악!
연신 팔걸이를 내리치며 좋아하는 오지호.
진혁이 황망해했다.
‘왜 이렇게 확대 해석 하는데!!’
최예린에 대한 생각만 가득할 뿐.
의도적으로 무관심한 스탠스를 취한 게 아니었기에, 그의 반응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래, 그렇게 후배가 걱정됐나?”
최예린에 대한 말이 나오자 진혁이 냉큼 그녀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오지호가 또다시 팔걸이를 내리쳤다.
타악!
타악!
“역시! 우리 이 선생이야!”
“?”
“한창 촬영 중인데 괜히 구설수가 생길까 봐 걱정한 게 아닌가!!”
“!”
“그래. 그래서 애를 썼던 거야!”
또다시 제멋대로 해석하는 오지호.
박영진마저 이를 거들었다.
“혹여나 다시 자살을 기도한다면 시끄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암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한참 방송 중이지 않습니까. 서둘러 조치하시지요.”
“그래야겠지요.”
최예린에 대한 걱정은 찾아볼 수 없는 말투.
그녀가 끝내 죽을 거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제가 PSY(정신의학과)에 연락하겠습니다.”
“아아, 그럴 것 없습니다. 내가 바로 전화하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지호가 전화기를 들었다.
최예린이 상담을 거부하더라도 어떻게든 사람을 붙여 얘기를 들어 보라고 지시하는 그.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어머니도 상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모녀가 둘 다 자살을 기도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지시.
근원적인 문제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진혁이 보기엔 왠지 부족해 보였다.
병원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대응하겠지만, 어디 사람 마음을 돌리는 게 그리 쉽던가.
하물며 제 목숨을 버리려고 들었던 이들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저, 병원장님.”
“그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GI 병동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싶습니다.”
“뭐?”
“혹시 모르니까 저도 환자를 설득해 보고 싶습니다. 이번 일 때문에 아무래도 운신이 어려울 거 같아서 그렇습니다.”
“병동 출입이 어려울 거 같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충돌이 우려됩니다.”
김상혁에게 들었던 우려를 전하는 진혁.
그 모습이 기특해 보였던 걸까.
오지호가 다시 손잡이를 내리쳤다.
타악!
타악!
“역시! 우리 이 선생이야! 바로 조치하지.”
곧바로 수화기를 꺼내 드는 오지호.
또다시 트러블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섬뜩한 경고를 했다.
거기에 더해, 진혁이 GI 병동에 가더라도 내버려 두라는 엄포가 이어졌다.
* * *
어느덧 비서가 차까지 내온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녹차였다.
“자, 차나 한잔하지.”
“예, 병원장님.”
당장 최예린에게 달려가고 싶은 속내를 감춘 채, 진혁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
.
.
짧은 침묵을 깬 건 오지호였다.
“박태준 선생은 분원으로 내려갈 거야.”
“…….”
“공식적으로 이 선생에 대한 폭행은 없던 일이 될 거고. 징계 또한 없어. 그냥 근무지가 바뀌는 것뿐이야.”
“…….”
“왜? 마음에 들지 않나?”
“아닙니다. 병원장님께서 결정하신 일이 아닙니까.”
으레 하는 말을 늘어놓는 진혁.
분원으로 내려가는 건 사실상 징계나 다름없었고.
부원장을 적으로 돌린 이상 병원장이라도 제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뭐, ‘우리 애’라고 불린 것을 보니 그의 마음을 이미 단단히 사로잡은 것 같았지만.
“그래? 역시 우리 이 선생이야! 허허.”
“…….”
“뭐, 박 선생이야 괜한 사감 때문에 언론에 이상한 소리를 떠들 수도 있고. 부담이 좀 있어. 그러니까 이 선생이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예, 병원장님.”
앙심을 품은 박태준의 폭로를 염려한 결정이라고 포장했지만, 정치적인 거래로 더 큰 양보를 얻어 냈다는 함의.
‘뭐, 그래도 복수는 한 건가. 그건 그렇고 이런 얘기를 왜 인턴한테 하는 건데!’
의아함도 잠시.
오지호가 빙긋 웃으며 박영진을 바라봤다.
“우리 박 과장님께 큰 선물이 될 거야.”
“?”
“중독분석실 구축 비용을 대신 얻어 냈지. 다음 운영회의에서 바로 통과될 거야.”
“……!!”
“구축이 끝나면 중독 전문 응급실로 지정 신청을 할 거고.”
순간 진혁이 입을 벌렸다.
짧은 시간에 대체 얼마나 뜯어냈단 말인가.
중독분석실을 구축하려면 중량계측 장비부터 원심분리기, 볼텍스믹서가 필요했다.
그뿐이랴.
시료의 미세 분석을 위해선 가스 크로마토그래피(Gas Chromatography)부터 헤드스페이스 오토샘플러(Headspace Autosampler) 같은 고가의 장비도 필요했다.
진혁이 자신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박영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종의 처세술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박영진이 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괜히 억울해하지 말라는 게 병원장님 말씀이야.”
“예, 과장님.”
아직 나이가 어린 진혁이 오해할까 싶어 하는 마음 관리.
그들이 길게 주절거린 이유를 깨달은 진혁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날 어린애로 보고 있구나.’
진혁이 다시 침묵하자, 박영진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우리 ER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게 됐어. 이게 다 이 선생 덕분이고.”
“…….”
“중독분석실을 구축하면 다른 병원에서 의뢰가 쏟아질 거고. 우린 환자의 시료를 받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다시 회신하겠지.”
“서울에 있는 사립병원 중에는 최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국립중앙의료원을 제외하곤 없지.”
박영진의 자랑은 한동안 계속됐다.
구축비는 몰라도 운영비는 국비 지원이 된다는 말.
임상독성학을 수련하는 ER의 의료진들에게 큰 힘이 될 거라는 말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진혁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어느새 박영진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 같았다.
정말 뜻하지 않은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