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110)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10화(110/269)
110화 뭘 또 만들어요? (1)
“자, 손바닥 확실히 찍어라.”
지셀이 노예 계약서를 내밀었다. 굵게 쓰인 ‘10년’이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와 알포이, 마법사들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여기 서명하면 그때부터는 진짜 노예가 된다.
클로드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무, 무승부로 하지 않으실래요?”
“뭔 개소리야, 내가 이겼는데. 얼른 찍어라.”
“아니, 그냥 무급으로 열심히 하면 안 돼요? 꼭 노예 계약서를…….”
무급이면 노예나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줄 알았지, 진짜 노예 계약서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었다.
“어허, 찍소리 말고 열심히 하기로 했잖아? 그러자면 이게 확실하지. 못 견디겠다면서 도망갈 수도 있는데.”
“크흑…….”
겁도 없이 영주와 내기를 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 와서 거부했다가는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다.
클로드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천천히 계약서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오, 내가 진짜 도박을 끊어야지. 더러워서 정말. 찍는다, 찍어. 사람이 울면서 사정하는데 봐주지도 않고!”
콰앙!
클로드는 손바닥 도장을 찍자마자 금세 눈물 연기를 접어 버렸다.
“됐죠? 에잉, 어쩐지 영 찝찝하더라. 영주님 도박 좀 하시네. 다음에 두고 봅시다.”
클로드는 도박에 지는 데 익숙한 만큼 포기도 빨랐다.
하지만 마탑의 후계자로서 고고하게 살아온 알포이는 달랐다.
이런 끔찍한 취급을 받게 된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것도 고작 내기에 졌다고.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 어린 눈물이었다.
“나, 난 못 찍어! 싫어! 싫다고!”
알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클로드가 옆에서 깐족거리며 혀를 찼다.
“원래 도박이 그런 겁니다. 손모가지 잘리고 발모가지 잘리고……. 그러고 나서야 죽을 때까지 후회하는 거지.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하지 말걸! 하면서 말입니다. 으하하하!”
“이 새끼야! 내가 너랑 같아? 너랑 같냐고! 너는 원래 도박쟁이고! 나는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누가 처음부터 이렇게 판돈이 큰 내기에 끼어들랬나. 이런 건 고수들이나 하는 거라 초보자가 낄 판이 아니었다고요.”
“너 때문이잖아! 네가 자신만만하니까 믿었지! 네놈이 이길 줄 알았다고!”
“몰?루?”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이었다.
뻔뻔한 태도에 알포이는 더 열이 뻗쳐 발악하기 시작했다.
“난 잘못 없어! 다 총관 때문이라고! 난 몰랐단 말이야! 난 사정이 다르다고! 봐줘! 봐 달란 말이야!”
“아, 도박장에서 이러면 진상인데.”
“닥쳐! 너 때문이잖아!”
클로드는 지셀에게 진 빚이 있으니 어차피 반은 노예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다르다.
벌써 이곳에 온 지도 반년이 지났다. 앞으로 반년만 더 있으면 마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씩이나 이 거지 같은 곳에 버려지다니.
“죽어도 못 해!”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죽어.”
“싫어어어억!”
우당탕!
도망가려는 알포이를 옆에 있던 용병들이 붙잡고 억지로 눕혔다.
바닥에 깔려서도 바둥거리던 알포이는, 용병들이 목에 검을 들이대고 나서야 몸부림을 멈췄다.
“야! 이건 너무하잖아! 나 마탑의 후계자라고!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바락바락 악을 쓰는 그에게 지셀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너 깝죽댈 때 가만히 있었는지 알아?”
“뭐?”
“내가 거기서 두들겨 팼으면 그냥 죄송하다고 하고 물러났을 거 아냐. 그러면 안 됐거든.”
“너, 너 설마…….”
알포이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고 보니 까불면 다짜고짜 매타작부터 하던 영주 놈이 내기를 할 즈음부터는 줄곧 조용했다.
요 근래 지셀은 알포이가 아무리 비웃고 놀려도 미소를 짓기만 했다.
알포이는 지셀이 아주 체념해 버린 줄 알았다.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가 좀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허세라 여겼다.
그런데 설마…….
“너……. 설마 일부러 날 내기에 끌어들였냐?”
“이제 좀 알겠어?”
지셀이 히죽 웃었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
저 성질 더러운 놈이 평소와 다르면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했는데!
내기에 이길 거라는 기대감에 정신이 팔려 지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내기를 취소하지 않는 것도 그저 자존심을 세우는 줄로만 알았다.
정말로 질 것 같았으면 그냥 다 쥐어패고 닥치라고 했을 놈인데. 그 생각을 못 했다.
지셀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좀 기대했는데, 걸려드는 놈이 별로 없더라고. 그래도 총관 하나에 마법사 여섯이면 꽤 성적이 괜찮지?”
“으으으, 악마…….”
“무슨 소리야. 나처럼 양심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내기하자고 강요한 것도 아니잖냐. 정당한 결과일 뿐이다. 자, 어서 찍어라. 어차피 비밀 유지 계약서도 썼어야 했는데 잘됐네.”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지셀이 걱정한 건 딱 하나였다.
마법사들이 이번 작업에 쓰인 술식과 마법진들을 다른 데 퍼트릴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마법사들이 노예가 되었으니 최소한의 억제는 될 것이다.
노예가 주인의 비밀을 누설하면 무조건 목이 베이니까. 목숨이 아깝다면 입을 열지 않을 거다.
“싫어! 싫다고!”
알포이가 끝까지 버티자 지셀은 한숨을 쉬더니 허리춤에서 손도끼 하나를 꺼냈다.
“그래, 그렇게 싫으면 할 수 없지. 그간 도움도 됐고 정도 들었으니 손목 하나로 대신하마.”
“어? 자, 잠깐! 굳이 그래야겠어?”
“그래도 영주인데 그냥 넘어가면 체면이 구겨지잖아. 명예가 떨어진다고.”
“체면? 명예? 그런 거 원래 신경 안 썼잖아! 관심도 없잖아! 무슨 영주가 손도끼를 들고 다니면서 그런 소리를 해!”
“이제부터 신경 좀 쓰려고. 슬슬 다른 귀족들하고 친분도 쌓아야지. 손 하나 없어도 마법 쓰는 데는 문제 없지?”
클로드가 깐족거리며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렇죠. 손목 하나는 날아가야 도박을 끊죠. 그래도 못 끊으면 다음은 발목이지.”
“넌 닥치라고오!”
“자, 그럼 손목 하나 날아갑니다.”
지셀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알포이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놈은 일단 결정하면 주저 없이 밀어붙이는 미친 새끼다.
지셀이 도끼를 내려치려는 순간, 알포이가 울먹이며 외쳤다.
“찍을게! 계약하면 되잖아!”
* * *
지셀은 나머지 마법사들에게도 계약서를 받아 내고는 잘 챙겼다.
알포이는 지셀이 서류를 어디에 두는지 눈을 빛내며 지켜보았다.
‘저걸 찢어야 해.’
마법적 제약이 없는 계약서더라도 기록은 남는다.
마탑의 후계자인 자신이 노예 계약을 했다는 증거를 남길 수는 없었다.
알포이가 꿍꿍이를 꾸미는 사이, 지셀은 클로드에게 새로운 서류를 건넸다.
“자,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추가로 해야 할 일.”
“농담이시죠? 지금도 일 개많은데요!”
“아니야. 보니까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것도 더 해 봐. 금방 끝날 거야.”
“……끝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새 일이 시작되지.”
클로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지셀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바로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건 뭡니까? 사람 이름만 잔뜩 적혀 있는데…….”
“어, 거기에 쓰여 있는 사람들 좀 찾아서 우리 영지에 데리고 와. 오기 싫다는 사람은 절대 강제로 끌고 오지 말고.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얼마든지 줘도 돼. 중요한 사람들이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해. 알겠지?”
명단에 적힌 예상 위치를 확인하며 클로드가 눈을 끔뻑였다.
“정말 이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요? 위치는 정확한 거예요?”
“아마도. 뭐 지금은 다른 데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지셀이 준 서류는 그가 전생에 데리고 있던 수하들의 명단이었다.
수천이 넘었던 수하들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역시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재능이 있고 영지에 꼭 필요한 사람만 추렸다.
그의 기준으로는 아주 소박하게.
“백 명이 넘는데요?”
“응. 얼마 안 되지?”
클로드는 화를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손에도 힘이 들어가 쥐고 있던 서류가 구겨졌다.
사실 사람을 찾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강제로 데리고 오는 것도 아니고 자리에 없으면 억지로 찾을 필요도 없다고 하니까.
문제는 그 일을 할 사람 자체가 없다는 거다.
“우리 영지에서 일할 사람도 부족하다고요!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들을 어느 세월에 다 찾아옵니까? 보낼 사람이 없는데!”
“다른 영지에서라도 구해서 써. 정보 길드를 쓰든가.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니까?”
“아오…… 씹!”
클로드는 욕을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노예가 되기 전에도 기분 나쁘면 주먹부터 들던 인간인데, 노예 계약까지 했으니 대놓고 때려도 막을 수가 없었다.
‘하, 피곤해 죽겠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아서 잠도 못 자고 죽을 거 같은데 끊임없이 일을 던져 준다.
이렇게 지독한 놈인 줄 알았으면 은혜고 뭐고 절대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그냥 최대한 피해 다니는 수밖에.’
클로드가 지셀의 눈치를 보며 한 걸음 슬쩍 뒤로 물러섰다.
일을 떠맡기 전에 도망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지셀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클로드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 버렸다.
“흠, 식량은 해결됐으니 이제 돈을 벌 만한 사업을 시작해야겠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요! 마나 집속진인지 뭔지로 밀도 잔뜩 키웠잖아요. 영지민들한테 먹고살 만큼 나눠 줘도 많이 남습니다. 그거 팔면 되지, 뭘 또 시작합니까? 이 거지 같은 땅에 팔 만한 게 있기나 해요?”
“그건 건드리지 마. 최대한 비축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쓸 거야.”
“와, 답답해 뒤지겠네.”
클로드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해결됐다.
이제 그걸 이용해 돈을 벌면 끝나는 일인데, 갑자기 왜 구두쇠 흉내를 내는 걸까?
“비축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요. 밀이라는 게 그렇게 오래 묵힐 수 있는 작물이 아닙니다. 그거 다 썩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느 영지에서나 흉년이나 전쟁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 둔다.
하지만 지셀이 개량한 밀은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 번만 수확해도 몇 년을 버틸 수 있을 정도다.
다 먹지도 못할 텐데 그걸 뭐 하러 비축한다는 말인가?
지셀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우리 식량은 쉽게 안 썩어. 그냥 창고에 박아 놔도 몇 년 정도는 버텨.”
“그게 말이 됩니까?”
“비축해 놓다가 썩기 직전에 싸게 팔거나 나눠 주면 된다. 알이 크니 그때 가서 팔아도 잘 팔릴 거야.”
클로드는 무심코 반박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그 미친 밀알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섣불리 말을 얹기도 어려웠다.
어차피 몇 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다.
“그래요, 뭐 좋습니다. 하지만 식량을 비축하면 결국 룬스톤을 계속 가져다 팔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뭐로 돈을 버시게요?”
“자원을 만들 수는 없으니……. 특산품을 만들어야지. 그걸로 돈을 벌자.”
“우와, 역시 우리 영주님 못 하는 게 없으셔……라고 할 줄 알았습니까? 특산품이 뭐 만들자 하면 바로 나오는 건 줄 아십니까!”
자원도 없고 기술도 없는 곳에서 뭘 만들 수 있겠는가. 따로 확보해 둔 기술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특산’은커녕 ‘생산’도 안 될 게 뻔했다.
클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노려보았다.
“밀 그거야, 마나를 써서 가능했던 거라고 칩시다. 하지만 뭘 만드는 건 그거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기술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지금 우리 영지에 그런 게 있어요?”
“아직은 없지.”
“그런데 만들긴 뭘 만들어요! 쓸데없이 시간 낭비, 돈 낭비 하지 말고 그냥 식량이나 팝시다. 제발 좀 상식적으로 살자고요!”
그러자 지셀이 다시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기할래? 이번에는 20년 걸고.”
“코……. 엇! 잠시만요. 어휴, 씨.”
콜이라고 외치려던 클로드는 오싹한 예감에 간신히 말을 끊었다.
도박쟁이의 머릿속에 제동 장치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