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141)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41화(141/269)
141화 기다리고 있어라. (4)
가끔 이런 멍청한 놈을 보면 답답해졌다.
쓸 만한 재능을 쥐고 태어났으면서도 방향을 잘못 잡아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놈들 말이다.
‘뭐 어쩌겠는가. 눈치 없이 태어난 걸 원망해야지.’
라울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오는 잘 들었네. 다음에 만날 때는 이렇게 좋은 분위기일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군.”
“그런가요? 저는 분위기가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지셀을 보며 라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저 말이 절절한 진심으로 들리는 걸까?
굴러들어 온 기회도 스스로 차 버린 놈이 다음에 봐서 뭐 하려고.
그때는 어차피 목이 날아갈 텐데 말이다.
라울은 속으로 혀를 차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네. 기회가 되면 또 볼 수 있겠지.”
“예. 다음에 꼭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지셀 또한 일어나서 라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지셀의 눈빛에는 이글거리는 살의와 파괴 욕구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 눈빛을 보고 라울은 깨달았다.
‘이놈, 진심이구나.’
그가 진심으로 친왕파와 손잡고 공작가에 대항하려고 하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의아함이 치솟았다. 아무리 친왕파와 손잡았다 한들, 시골에서 막 수도에 온 자가 보이기에는 너무 과한 적개심이었다.
‘설마……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라울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른 의문에 지레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친왕파의 유력 귀족들도 자신들이 어디에 어떻게 세력을 뻗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렇기에 브리반트 영지를 지원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자, 가면을 쓴 남자가 끼어들었다.
“악수가 너무 길군. 볼일이 끝났다면 이제 돌아가지.”
“그래, 눈빛이 묘해서 계속 보게 됐군.”
라울은 손을 놓고 밖으로 향하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려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펜리스 남작, 다음에도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눈을 뽑아 버리겠다.”
지셀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 눈빛 그대로 답했다.
“남은 다리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예의 없는 말에도 라울은 의외로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하군. 앞으로 얼마나 활약할지 기대하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울과 가면의 남자는 방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떠나자마자, 힐긋대며 별실을 훔쳐보던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브랜포드 후작도 자리를 지키는 대신 톨레오를 보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듣고 오라 했다.
“음…….”
일단 다들 몰려오긴 했지만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남의 얘기를 대놓고 캐묻기는 창피했기 때문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결국 제일 성질이 급한 모리스가 지셀을 압박하듯이 물었다.
“그래, 저 절름발이 놈이 무어라 하던가?”
지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구경하는 귀족들은 더 애가 타 재촉했다.
“어서 말해 보게! 무슨 얘기를 나누었나?”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와 제 아버지를 델파인 공작가의 봉신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귀족들이 흠칫 놀라며 표정을 굳혔다.
친왕파의 연회에 찾아와서 이렇게 대놓고 영입 제안을 하다니.
델파인 공작가가 친왕파의 귀족들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모리스는 눈을 부라리며 크게 노성을 토해 냈다.
“북부와 남부는 거리가 멀어 제대로 교류할 수도 없다! 너는 세금만 뜯기는 꼴이 될 것이야!”
“남부에 좋은 영지를 새로 마련해 준다고 했습니다. 저와 제 아버지 둘 다에게 말입니다.”
“허어!”
영지를 새로 주겠다니? 말도 안 되는 조건에 놀라 귀족들은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모리스도 당황해 눈을 내리깔았다.
친왕파는 그런 제안을 쉽사리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런 애송이한테 그런 후한 조건을 거는 건 무리였다.
브리반트 영지에 갈 지원을 그쪽으로 돌린 것만으로도 그들은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아버지한테까지 영지를 주겠다니, 이놈이 그럴 정도로 가치가 있나?’
이제 막 합류한 귀족을 대놓고 뺏기는 건 큰 망신거리는 맞다.
하지만 아무리 공작가에 여유가 있더라도 그저 적 파벌에 망신을 주겠다는 이유만으로 영지를 떼어 줄 리는 없다.
모리스는 침음을 흘리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였나? 공작가의 봉신이 되기로 한 거냐는 말이다.”
젊은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었다.
거기다 페르디움은 토지도 척박하고 항상 야만인과 싸워야 하는 영지다.
그 고생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거절하는 건 바보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툭 내뱉었다.
“거절했는데요.”
“역시 제안을 받아들였구나! 네놈이……. 응? 뭐라고? 거절했다고?”
“네, 거절했습니다.”
“……어째서냐?”
“이미 친왕파에서 후원을 받고 있는데 굳이 그쪽으로 갈 이유는 없죠.”
모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의심스럽군. 공작가는 강력한 뒷배경이 되어 줄 거다. 조건도 너 같은 애송이에게는 아까울 정도로 후하지. 그런데도 굳이 제안을 거절하고 친왕파에 남는다고?”
“의심스럽다는 말씀은……?”
“공작가에 속하기로 하고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지셀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가와 그의 악연을 모르는 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제가 정말 공작가와 손을 잡았다면, 영입 제안을 받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겠죠.”
일리 있는 말에 같이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후작님. 악의를 품었다면 굳이 의심을 사진 않겠지요.”
“아직 젊어서 눈앞의 이득에 연연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 조건을 거절하다니, 이렇게 의리 있고 기개 넘치는 청년은 오랜만에 봅니다!”
귀족들은 부러 과장되게 감탄을 토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점점 공작가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많아지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셀이 친왕파에 남은 건, 친왕파 또한 공작가에 뒤지지 않는 세력이라는 방증이 되어 줄 터였다.
과할 정도로 쏟아지는 칭찬을 한 귀로 흘리며 지셀이 말을 이었다.
“돌아갈 때 경고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저와 제 아버지의 영지를 가만두지 않을 모양입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으음……!”
귀족들은 다시금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게 대놓고 협박을 하다니. 전혀 귀족답지 않은, 품격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요제프 자작이라면 그럴 만한 놈이었다.
‘그놈에게 찍힌 사람을 돕다가 자칫 발목이 잡힐 수도 있는데…….’
몇몇 귀족들은 내심 불안해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위험을 생각하면 지셀과 엮이지 않는 것이 좋지만, 정치는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법이다.
어쨌든 이 젊은 귀족이 친왕파의 체면을 살려 줬으니 피할 명분은 없었다.
몇몇 귀족이 앞에 나서며 말했다. 주로 에일즈버 백작 계파와 노튼 백작 계파의 귀족들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만약 공작가가 수작을 부린다면 내 최선을 다해 도와주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시게나.”
“공작가도 함부로 북부를 도모하지는 못할 걸세.”
여러 귀족들이 앞다투어 지셀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셀은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막상 때가 되면 지금 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약속을 받아 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 약속이야말로 차후에 지셀이 이용할 수 있는 명분이 될 테니까.
그렇기에 모리스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지셀만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귀족이 살짝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젊은 친구가 의리 하나는 대단하지 않습니까? 공작가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새 젊은이 중에 저런 사람은 보기 드물죠.”
“덕분에 친왕파의 체면이 살았으니, 저희도 어느 정도는 힘을 실어 주는 것이…….”
하지만 그런 말에도 모리스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됐네. 애송이 하나가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 브랜포드 후작과 노튼 백작이 밀어주기로 했으니 알아서 잘들 하겠지.”
모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눈치를 보던 같은 계파의 귀족들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모리스가 떠나갔음에도 귀족들은 지셀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의외의 소득이네. 오늘 연회에 참석하기를 잘했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라울 덕분에 다른 귀족들에게서 지지와 호감을 이끌어 냈다.
솔직히 연회랍시고 모이는 건 귀찮기만 했는데, 지금은 참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아깝군.’
라울을 실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만남이 더욱더 아쉽게 다가왔다.
방해꾼만 없었다면 라울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지셀은 라울 옆에 서 있던 남자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랬다.
‘설마 그놈이 옆에 있을 줄이야.’
다들 라울의 호위 정도로만 생각했겠지만, 자신은 그가 누군지 잘 알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 거지. 잊자.’
지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라울을 만난 것도 큰 소득이지만 가면의 남자를 본 건 더 큰 수확이었다.
공작가를 부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존재를 직접 대면하고 실력을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올 줄이야.
‘네놈이 그 정도였구나.’
지셀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 * *
라울과 가면의 남자는 마차를 타고 천천히 후작가를 빠져나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조용한 마차 속에서 가면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떤가? 직접 본 소감은.”
“역시, 아무리 꼼꼼하게 알아보고 정보를 모아도 직접 한 번 보는 것만 못한 거 같아. 정보와는 많이 달라. 해럴드가 실수한 건가?”
“그건 더 알아봐야겠지. 그래서 평가는?”
“그간의 활약과 나이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 중급 변수라 생각해도 될 거 같다.”
“너답지 않게 후한 평가로군.”
“뭐, 아직 젊어서 그런지 혈기도 왕성하고 겁도 없는 거 같지만……. 그게 단점일 수도 있겠지. 티 나게 적개심을 내보이는 걸 보면 말이야.”
가면의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위험 평가를 한 단계 더 올려라.”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놈, 아까 널 죽이려고 했던 거 같다.”
그 말에 라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사람들이 잔뜩 모인 저런 자리에서? 애송이 남작 주제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게 정말인가?”
“확실하지는 않다. 단지 얼핏얼핏 희미한 살기를 느꼈다. 너, 저놈한테 원한이라도 산 일이 있나?”
“오늘 처음 보는 놈인데 원한은 무슨.”
“이상하군. 잠깐이었지만 분명 살기를 느꼈어. 그리고 중간중간 내 실력을 가늠하는 듯했다.”
“당신을?”
“그래, 나를 뚫고 널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시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놈, 정말 소문대로 미친놈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