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182)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82화(182/269)
182화 어때? 금방 구했잖아? (2)
남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다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홍의 마탑에서 온 글렌입니다. 식량은 가능한 만큼 전부 구매하도록 하지요.”
그의 정체를 듣고 사람들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홍의 마탑은 현재 북부 제일의 마탑이라 불리는 곳이다.
거기다 글렌 본인도 꽤 유명하다. 5서클에 이른 마법사로 마탑의 대외적인 일을 도맡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글렌은 이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다른 사람들은 마른침만 삼킬 뿐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밀 한 자루에 1골드를 내겠다고? 북부 제일의 마탑이라더니, 정말 돈이 많긴 많은가 보구나.’
‘미친놈들! 그 가격에 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가난한 북부의 영지들로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가격이었다.
어떻게든 다음 수확기 때까지 버티려고 식량을 사는 건데, 그 가격으로 샀다간 수확기가 오기도 전에 영지가 파산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마탑은 사람 수도 상대적으로 적고, 돈도 넘쳐 나게 많으니 여력이 충분했다.
마탑에서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글렌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아, 룬스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것도 전부 우리가 사겠습니다.”
룬스톤 얘기가 나오자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탐욕스러운 빛이 깃들었다.
‘정말 이 애송이 영주가 룬스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아, 그걸 진작에 뺏었어야 했는데.’
‘크으, 그런 보물이 이딴 놈에게 있다니. 아깝다. 정말 아까워.’
다른 이들도 룬스톤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당시 소문을 들은 영주들이 다들 그걸 어떻게 뺏어 올까 고민했었기 때문이다.
지셀이 마탑하고만 거래를 해서 확신하지는 못해도, 아예 근거 없는 소문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의 후견인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포기했지만 말이다.
글렌은 지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은 무조건 식량이 최고야. 시간이 지나면 돈을주고도 못 구한다. 겸사겸사 룬스톤도 얼마나 남아 있는지 봐야겠어. 돈이야 나중에 다시 뺏어 올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이지, 진홍의 마탑은 델파인 공작가가 키운 곳이다.
당연히 데스몬드 백작이 언젠가는 지셀을 칠 걸 알기에 돈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공작가와의 관계를 제외하고서라도, 진홍의 마탑 입장에서 지셀은 무척이나 거슬리는 놈이었다.
‘적염의 마탑이 아직도 버티고 있어. 이놈이 룬스톤을 제공해 주는 게 분명해.’
그들은 적염의 마탑을 망하게 하려고 많은 돈을 들여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룬스톤을 구했는지 아직도 멀쩡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니, 진홍의 마탑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지셀은 피식 웃었다.
‘진짜 웃기는 놈들이네.’
진홍의 마탑은 어차피 공작가에서 부족한 걸 지원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뻔뻔하게 찾아와서 식량과 룬스톤을 팔라고 하다니.
역시 여러 의미로 대단한 놈들이긴 했다.
‘조금이라도 더 식량을 수급하려고 하는 거겠지. 룬스톤의 남은 양도 확인할 겸 말이야.’
룬스톤 함정에 당했으니 더 치가 떨릴 것이다. 어떻게든 남은 양은 모두 뺏고 싶을 터였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많이도 왔네.’
진홍의 마탑처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공작가의 꼬리들이 꽤 있었다.
이미 공작가와 손을 잡은 곳, 영주도 모르게 가신들이 전부 넘어간 곳, 아니면 선만 대 놓고 간만 보는 곳 등 다양하다.
지셀은 진홍의 마탑을 포함해 공작가와 관련이 있는 영지를 모두 호명한 뒤 말했다.
“이 영지들에는 식량을 안 팔 테니 모두 돌아가도록.”
글렌은 물론이거니와 호명이 된 영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격 협상도 안 하고, 돈을 몇 배나 더 주겠다는데도 안 팔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왜 우리한테만 안 파신다는 겁니까!”
“이유라도 말씀을 해 주십시오!”
대전을 가득 채우는 항의 소리에도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 이유는 묻지 말고. 내 마음이니까. 모두 끌어내라.”
지셀이 손짓하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호명된 사람들을 끌어냈다.
끌려가던 자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협박을 하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인정에 호소하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는 절대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브랜포드 후작을 믿고 이러시나 본데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소!”
“제발 부탁드립니다. 영지민들이 굶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만히 듣고 있던 지셀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땅이 척박한 만큼 악덕하기로 유명한 북부의 영주들이다. 그들에게 식량을 팔아 봐야 절대 영지민들에게는 식량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굶은 영지민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우려하며 군대를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을 쓸 게 뻔했다.
그들에게 영지민들은 노예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페르디움이 가난해도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즈발터가 영지민들을 착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지셀에게 그런 호소가 통할 리 없었다.
호명된 사신들은 다 끌려갔지만 글렌은 기사들의 손을 쳐 내고 꿋꿋하게 버티며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시오, 남작! 지금 진홍의 마탑을 무시하는 것이오! 내가 누구인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글렌의 전신에서 험악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은 북부 제일 마탑의 장로다. 어지간한 귀족들도 예의를 지키고 한 수 접어 준다.
한데 한낱 남작에 불과한 애송이가 이렇게 방자하게 구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셀의 답은 더 가관이었다.
“네가 누군데?”
“뭐, 뭐요? 나를 모른단 말이오?”
다른 지역이라면 몰라도, 이 북부에서 어찌 자신을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직접 본 적은 없어도, 마탑의 외교를 담당하는 자신의 이름을 못 들어 봤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나온다는 건 자신과 마탑을 싸잡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드높은 자부심에 금이 간 글렌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대우는 처음이라 도무지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남작! 다시 한번 나를 보고 똑똑히 말해 보시오.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소?”
지셀은 뚱하니 그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다가 말했다.
“정말 모르겠는데……. 클로드, 넌 누구인지 알겠어? 유명한 사람인가?”
‘아이 씨,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클로드는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글렌이 누구인지 잘 안다. 유명인들의 신상 명세를 파악해 놓는 건, 영지를 다스리는 자들의 기본 소양이니까.
아무리 막 나가는 사람이라도 영주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구는 건 상대방을 도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지셀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글쎄요…….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스크롤 파시는 분인가? 시장에서 본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자의식이 좀 강하신 분 같네요. 나는 창피해서 저런 말은 못 할 거 같은데. 어우, 지금 대리 수치심 느껴서 손이 막 오그라들잖아요.”
지셀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대충 이러라고 눈치를 주긴 했지만,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역시 깐족거리는 실력은 이놈이 대륙 최고였다.
툭.
글렌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마탑의 장로인 그는 이런 굴욕을 절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놈들!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구우웅!
5서클에 이른 마법사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분노로 머리가 돌아 버린 글렌은 아예 힘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이까짓 허접한 남작령에서 누가 감히 자신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으허헉!”
주변에 있던 사신들은 그 기세에 놀라 멀찍이 물러났다.
쿠웅!
글렌이 악귀와도 같은 표정을 지은 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차차창!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가 갑자기 나타나 글렌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동시에 대전의 문을 기사들이 막았고 모두가 검을 뽑아 사방을 포위했다.
클로드는 웬디의 뒤로 잽싸게 숨었다.
“헛!”
뜨겁게 끓어오르던 글렌의 가슴이 순간 차갑게 식어 버렸다.
너무 흥분한 탓인지, 세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만약 전쟁터였으면 바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펜리스에…… 이런 실력자들이 있다고?’
군사력도 형편없고 기사도 제대로 없는 영지라고 들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실력자들을 구했단 말인가?
글렌의 목에 검을 들이댄 세 사람이 지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죽여도 돼요?”
“영주님, 명만 내려 주십시오.”
“야, 다들 봤어? 내가 제일 빨랐지? 그렇지? 나 존나 쩔지 않냐?”
글렌은 몸이 굳어 입술만 깨물 수밖에 없었다.
확연한 살기가 느껴진다. 만약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도, 아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
“이, 이 미친놈들이 감히…….”
마탑의 장로에게 이따위로 구는 놈들은 난생처음 보았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못 이겨 몸을 떨고 있는 와중에, 지셀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더 할 건가? 나야 환영인데. 주변에 증인도 많고 말이야.”
그 말에 글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무시를 당한 건 처음이라 너무 흥분했다. 만약 정말로 손을 썼다면 상당히 문제가 커졌을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자신들은 공작가의 숨겨진 칼이다. 친왕파와 싸울 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그들의 뒤를 칠 비밀 무기.
지금은 친왕파의 눈에 들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언제 공작에게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힌 글렌은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마탑에서는 절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각오하시오, 남작.”
“기대하지.”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소.”
글렌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데스몬드 백작이 이 영지를 칠 예정이다. 그때 기필코 한 손 거들어 직접 지셀을 죽여 버리기로 다짐했다.
마법사들은 절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이 애송이에게 마법사들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쫓겨나고 글렌마저 자리를 뜨자 남은 사람들은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뭐지? 저 사람들은 왜 쫓아낸 거지?’
‘우리는 왜 남긴 거지?’
‘북부 제일의 마탑과 척을 지다니! 정말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쫓아내는 기준을 모르니 이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딱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외교 관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 미친놈과는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불안해하는 그들을 보며 지셀이 부드럽게 말했다.
“분위기가 잠깐 좋지 않았네. 사실 나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야. 북부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잠도 못 잘 지경이지. 난……. 평화주의자거든.”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생각했다.
‘진짜 미친놈인가?’
‘그러면 아까 그 사람들은 왜 쫓아낸 건데?’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진짜일 줄이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지셀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돈은 받지 않겠다.”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지금은 식량값이 금값이다. 아니, 금을 가져다 바쳐도 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돈을 받지 않겠다니?
눈치를 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살짝 물었다.
“그, 그러면 영지의 다른 자원과 교환할 생각입니까?”
펜리스 영지도 자원이 부족하기로 유명하니,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셀은 그 질문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원도 받지 않겠다.”
그 말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돈도, 자원도 안 받는다면 이쪽에서 줄 건 관심과 사랑밖에 없다.
‘이놈 참 기특한 놈이다. 이렇게 마음 약한 놈이면서 처음에는 센 척한 거였구나.’
‘어휴, 젊어서 그런지 하는 짓이 참 귀엽네.’
사신들은 멋대로 생각하며 시꺼먼 속내를 숨겼다.
‘일단 식량만 얻으면 된다. 방위비야 무시하면 그만이지.’
‘이번 가뭄만 버티면 되는 문제니까. 버릇은 나중에 고쳐 줘야지.’
‘지금이야 운 좋게 식량이 쌓였을 뿐이지. 네가 계속 그렇게 잘나갈 거 같으냐?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사신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볼을 씰룩였다. 그때, 지셀이 툭 던지듯 말했다.
“돈 대신 병사를 받겠다. 각 영지의 크기에 맞춰 적당한 수의 병사를 보내도록.”
그 말을 들은 사신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