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185)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85화(185/269)
185화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2)
카발디 백작은 제 귀가 잘못되었는지 잠시 의심했다.
지금 막 그놈과 식량 거래를 하자고 결정한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놈이 쳐들어왔다고?
도저히 믿기 어려워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펜리스 남작? 그놈이 왜?”
“……모르겠습니다.”
“그놈이 왜! 감히! 그까짓 놈이 내 영토에 군대를 끌고 왔다고!”
당혹감에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자신은 곧 대영주의 자리에 오르게 될 북부의 강자다.
풍부한 철 생산량과 발전된 제련 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무장병들을 운용하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뒷배는 바로 왕국 최고의 권력자인 델파인 공작이다.
그런 카발디 백작을 노리고 군대를 끌고 왔다는 것이다. 고작 변경이나 지키는 거지 같은 페르디움 놈이, 심지어 백작도 아닌 그 자식새끼가!
“도대체 경계 요새에서는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적이 이곳에 올 때까지 소식 하나 전하지 못하고!”
카발디 백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가 감히 카발디를 치겠냐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다 보니, 요새에 머무는 병력도 감시병 몇 명뿐이었다. 상대가 작정하고 기습을 했다면 당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요새가 점령당한 것도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지만, 가신들은 뻔히 알면서도 입 밖으로 진실을 내뱉지 못했다.
“그 건방진 놈의 낯짝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카발디 백작은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당황하던 가신들이 뒤따라가며 말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펜리스 남작이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명분은 충분합니다.”
“보급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바로 군대를 끌고 나가 밀어 버리면 됩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 상황입니다. 친왕파와 공작가도 우리 탓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카발디 백작도 가신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참에 당장 쓸어 버리고 펜리스까지 점령한다. 지금 영지의 최대 가용 병력은?”
“기사 42명, 무장병은 전부 끌어모으면 1천8백 명입니다. 전역에서 징집병을 소집하면 3천 명 이상도 모을 수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무장병으로만 승부를 봐야 합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군.”
“그렇습니다. 가난하기로 유명하고, 크기도 작은 남작령일 뿐입니다. 병사를 끌어모아 봐야 500명이 채 되지 않을 겁니다.”
카발디 백작과 가신들의 대화를 들은 기사는 당황하며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존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카발디 백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상대를 쓸어 버리고 펜리스까지 점령할 생각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생각보다 쉽게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겠군.”
만약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왔다 해도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기분 좋게 나간 그들은 성 밖의 상황을 보자마자 당황해 걸음을 멈추었다.
카발디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뭐냐……. 저 병력은.”
많다. 얼핏 봐도 3천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온 병사들도 아니었다. 곳곳에서 휘날리는 깃발은 펜리스의 것이 확실했다.
이쪽이 압도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오히려 상대의 병력에 압도되고 말았다.
“저게 뭐냐! 저 애송이의 병력이 왜 저렇게 많냐는 말이다!”
“…….”
카발디 백작의 외침에도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일개 남작령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치고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 이, 이주민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징집병을 잔뜩 끌고 온 게 아닐까요?”
“보, 보십시오! 대부분이 보병들입니다! 징집병인 게 분명합니다. 상태가 형편없을 겁니다.”
“그래도 기마병이 300은 넘어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정보가 부족한 이들은 그저 눈앞의 상황만 보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카발디 백작은 손톱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된 거지? 공작가에서는 분명 몸을 사리라고 했었는데. 친왕파에서 손을 쓴 거라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 아니면 양측 사이에 무슨 협상이 있었던 건가?’
제대로 된 선전 포고도 없었고, 페르디움 쪽과는 공식적으로 시비가 붙었던 일도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왜 공격받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애송이가 거느릴 수 있는 병력이 아니야. 친왕파에서 지원해 준 건가?’
아직 지셀이 다른 영지와 거래해서 식량과 병사를 맞바꾸었다는 정보는 제대로 퍼지지 않았다.
지셀이 시간제한을 두고 빠르게 움직인 것도 그 소문이 퍼지기 전에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애초부터 모든 걸 준비해 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이렇게 클 수밖에 없었다.
카발디 백작이 손톱만 깨물며 식은땀을 흘리던 그때, 상대 쪽 진영에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여유롭게 다가왔다.
지셀과 길리언이었다.
그들은 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잠시 숨을 고른 지셀이 카발디 백작을 항해 크게 외쳤다.
“어이! 데스몬드 백작 따까리!”
마나를 머금은 지셀의 말은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잘 들렸다.
지셀의 도발을 들은 카발디 백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 저 새끼가! 감히!”
천박한 말투도 문제이지만, 말의 내용 자체도 도무지 참고 들어 주기 힘들었다.
자신과 데스몬드 백작은 같은 위계에 있는 귀족이다. 하지만 데스몬드 백작은 은근히 자신을 아랫사람처럼 부리곤 했다.
아무리 부탁으로 포장하더라도 그 지저분한 속내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지금도 보라. 그간 철을 실컷 뜯어간 주제에 상황이 어려워지자 바로 식량 지원을 멈춰 버렸다.
지셀의 말은 카발디 백작의 속에서 자라나고 있던 열등감을 자극했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데스몬드 백작과 자신과의 관계를 저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아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머리에 열이 뻗친 것이다.
“당장! 당장 성문을 열어라! 내가 직접 군대를 끌고 나가서 저놈의 목을 쳐 버리겠다!”
옆에 있던 가신들이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안 됩니다! 정면으로 맞붙으면 피해가 큽니다! 적의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이, 일단 왜 왔는지 얘기나 들어 보시지요. 무슨 오해가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이, 이이익!”
카발디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신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왜 왔는지는 알아야 공작가에도 할 말이 있었다.
카발디 백작이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말을 옆에 있는 기사가 크게 외쳐 전달했다.
“펜리스 남작! 도대체 무슨 일로 이곳까지 군대를 끌고 왔느냐! 이렇게 갑작스럽게 군대를 끌고오다니, 가난하게 살다 귀족의 명예도 잃어버린 것이냐! 그렇게 전쟁을 하고 싶다면 돌아가서 제대로 된 명분을 준비하고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한 뒤에 다시 오거라!”
한 마디로 지금은 싸우기 싫으니 나중에 다시 오라는 뜻이었다. 그래야 그사이에 뭐든 준비를 할 거 아닌가?
“이유도 없이 우리 영지를 공격한다면 공작가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파멸을 피하고 싶다면 당장 물러가라!”
공작가의 이름도 살짝 팔아서 겁도 줘 봤다.
성벽 위에서 기사가 외치는 말을 듣고 지셀이 피식 웃었다.
“선전 포고라……. 그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지셀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길리언이 활과 화살을 건네주었다.
화살에는 하나의 서신이 묶여 있었다.
기습적으로 쳐들어오긴 했지만, 친왕파와 공작가에서 대놓고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면 최소한의 명분은 필요했다.
이제 이걸 적당히 전달만 하면 된다.끼이익.지셀이 활의 시위를 크게 당겼다.
카발디 백작의 호위 기사들은 이미 지셀이 활을 받았을 때부터 움직인 상태였다.
그들은 백작의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순간, 지셀은 방향을 바꿔 성벽에서 말을 전달하던 기사를 향해 활을 쏘았다.
파아악!
“커억!”
갑작스러운 공격에 가슴이 뚫린 기사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화살은 정확히 반만 박혔다. 딱 그렇게 되도록 지셀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쓰러진 기사에게 사람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확인한 지셀이 활을 뒤로 휙 던지며 웃었다.
“이게 내 선전 포고 방식이다.”
* * *
수도의 친왕파 귀족들은 연일 모여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했다.
브랜포드 후작가와 에일즈버 백작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식량을 필요한 만큼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쌓아 둔 것도 얼마 되지 않는데 그마저도 빠르게 소모되고 있으니 걱정만 토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후 위기는 사실이다!”
시끄럽게 떠들고는 있지만, 누구도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가뭄의 피해는 왕국 전역을 강타했다.
“그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소!”
쉬지 않고 떠들던 귀족들은 브랜포드 후작의 호통에 모두 입을 닫았다.
지금 이들은 모두 브랜포드 후작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엄청난 식량을 쌓아 뒀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보니, 그에게 잘 보여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지셀의 경고를 듣자마자 식량을 쌓아 뒀던 에일즈버 백작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어휴, 마누라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다음부터는 무조건 마누라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메리엘은 남편의 반대를 무시하고 엄청난 식량을 구매했다.
덕분에 친왕파 내 다른 파벌의 대표들에 비해 한 끗발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던 에일즈버 백작은, 현재 브랜포드 후작 다음가는 권위를 얻게 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까운 일이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잘된 일일 수 있소.”
왕국군의 총사령관인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흠, 어째서요? 다들 굶고 있고 상황이 심각한데 뭐가 잘됐단 말이오?”
“공작가를 따르고 있는 귀족들도 굶고 있으니까.”
“……?”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왜 공작가를 견제해 왔소? 언제 공작가가 내전을 일으킬까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 아니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리 공작가라도 내전을 일으킬 수 없지. 그쪽도 사태를 수습해야 하니까.”
“으음…….”
“만약 우리 쪽에서 식량을 쌓아 두지 않았다면 공작가는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였을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 말에 귀족들은 아무런 반론도 내지 못했다.
브랜포드 후작의 말대로, 만약 왕실 쪽에 식량이 부족했다면 공작가에서는 분명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전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과 왕실, 에일즈버 백작까지 대량의 식량을 쌓아 두었으니 공작가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 움직여서 서로 큰 피해를 볼 바에는 조금이라도 빠르게 같은 편을 추스르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지셀이 의도한 대로였다. 전생과는 다르게 공작가의 움직임이 잠시나마 억제된 것이다.
방어하는 처지인 친왕파에서는 차라리 지금 같은 상황이 훨씬 나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영원한 소강상태지, 확실하게 결판을 내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을 향해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이 상황이 언제까지고 유지될 리는 없소. 어느 쪽이 먼저 사태를 먼저 수습하느냐에 달려 있지. 공작가는 분명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우리를 압박하려 할 것이오.”
귀족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렸다.
어느 쪽이든 사태를 먼저 수습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말은, 브랜포드 후작 또한 친왕파 귀족들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역시나 브랜포드 후작은 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왕실의 비축분뿐 아니라, 나와 에일즈버 백작이 비축해 두었던 식량도 일부 지원해 주겠소이다.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을 것이오.”
“오오!”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
“후작님과 백작님이 큰 결단을 내리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다들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량이야말로 군대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지원받은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려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은 천한 자들의 삶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안도하는 귀족들을 보며 브랜포드 후작은 조금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펜리스 남작의 말대로 식량을 미리 준비하지 그랬소이까.”
“끄응…….”
그 말에는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누가 그런 말을 믿겠는가? 그걸 믿고 준비한 브랜포드 후작과 메리엘이 이상한 거였다.
귀족들은 말이 나온 김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펜리스 남작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입니까?”
“무슨 점성술로 천문을 읽는다는 소문도 있더이다.”
“그런 재주가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중에 하나가 운 좋게 걸린 거지요.”
가장 불쾌함을 내비친 건 당연히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었다.
점 보는 것도, 미신도 아주 좋아하는 그는, 지셀이 날씨를 예측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상한 사술을 쓴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크흠! 그놈은 분명 흑마법사거나 마녀를 곁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하외다! 당장 잡아서 오리와 무게가 같은지 저울에 달아 봐야 해! 흑마법을 익혔다면 그놈은 오리와 무게가 같을 것이오!”
“…….”
정작 그 말을 하는 본인이 더 흑마법사 같다는 점은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 무식한 인간하고는 대화해 봐야 말이 안 통한다.
그나마 명문가 출신이고 군사학에 제법 조예가 있다고 알려져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도 그의 말 중 딱 한 가지는 공감했다. 지셀이 대체 무슨 능력을 지닌 건지 의심스러웠다. 단순히 날씨가 더워서 가뭄이 올 거라고 예측했다 믿기는 어려웠다.
‘그거야 천천히 더 알아 가면 되겠지. 어쨌든 그놈하고 로잘린 덕분에 겨우 위기를 넘기게 되겠군.’
두 사람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안색이 거무죽죽한 귀족들을 둘러보며 내심 흡족해했다.
‘흐음……. 이 기회에 우리 집안에 직접 들이는 것도 한번 생각을 해 봐야겠어. 로잘린하고 잘 어울릴 거 같기도 한데.’
지셀이 듣는다면 기겁할 생각이었지만, 후작을 잘 아는 로잘린마저도 그의 머릿속을 훔쳐보지는 못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자꾸 옆길로 새는 사고의 흐름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귀족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건넸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당분간은 공작파의 귀족들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조심해 주시오. 혹여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피하는 게 좋을 것이오.”
귀족들도 모두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비가 붙으면 서로 죽자는 얘기밖에 안 되지요.”
“다른 이들에게도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설마 그 정도로 생각 없이 시비를 걸 사람이 있겠습니까? 전쟁이라도 나면 다 같이 죽자는 건데요.”
“그럼요,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우리 쪽에 없습니다. 하하하하!”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었다.
이들은 그저 조용히 이 사태가 넘어가기만을 바랐다. 이번 위기만 성공적으로 넘기면 공작가와 대등하게 맞설 수도 있다는 희망도 품었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를 깨고, 후작가의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회의장으로 난입했다.
브랜포드 후작이 눈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는 찰나, 기사의 입이 열렸다.
“펜리스 남작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절규에 가까운 보고에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