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08)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208화(208/269)
208화 난 진짜 평화주의자인데. (1)
아무리 카오르라도 지셀과 벨린다, 길리언 등의 실력자들이 동시에 밟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알포이는 중간중간 사람들에게 강화 마법도 걸어주었다.
“악! 그만! 지금이라도 멈추면 살려 주겠다! 잠깐만 멈춰 보라고! 크어억!”
목 놓아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누구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밟힌 카오르는 결국 정신을 잃고 실려 갔다. 피오테는 끝까지 치료해 주지 않았다.
엘프들은 대부분 세상 달관한 모습으로 만사 귀찮아하고 있었지만, 몇몇은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그 난리를 지켜보다가 환호를 내질렀다.
“뭐야? 여기 제법 화끈하게 노는 동네잖아?”
“오, 조금 기대되는걸? 우리가 노는 건 또 끝내주게 잘 놀거든.”
“저분이 영주님인가? 얼굴은 괜찮은데 성질은 좀 더러워 보인다. 그거 나름대로 로맨틱할지도?”
자기네들끼리 또 몇 번 깔깔거리더니 별짓을 다 했다.
먹은 술을 토하거나 연초만 태우고 있는 놈은 그나마 나았다.
한 남자 엘프는 벨린다를 보더니 윙크를 하고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느끼해도 이렇게 느끼할 수가 없었다.
다른 남자 엘프는 알포이를 보고 입술을 핥았다. 은근히 세상 물정 모르는 알포이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눈만 껌뻑거렸다.
보다 못한 지셀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모두 주목!”
엘프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모두가 지셀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지셀이 물었다.
“혹시 여기서 정령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
그러자 멍한 표정을 짓던 엘프들은 갑자기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정령? 그게 뭔데? 먹는 거야?”
“우리 조상님들은 쓸 줄 알았다는데, 우리는 그런 거 몰라요. 정령사 노예? 그거 너무 로맨틱하다.”
“정령 말고 정력은 잘 아는데!”
다시 자기들끼리 천박한 소리를 하며 웃고 떠들고 난리다. 다들 황당해서 무례고 뭐고 나설 생각도 못 했다.
지셀도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엘프들이 왜 다 이따위야……. 노예상 그 새끼는 도대체 뭘 가져온 거야…….’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 클로드가 지셀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영주님…… 이런 놈들은 도무지 쓸데가 없습니다. 다시 팔아 버리시죠? 인부나 병사로 쓰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워낙 비싸서 죽일 수도 없고 몸에 상처를 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돈 아까워요.”
벨린다도 옆에서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진짜 아닌 거 같아요. 이야기로 듣던 엘프들하고는 너무 다르네요.”
이번만큼은 지셀도 할 말이 없었다. 이 정도로 개판인 줄은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와, 미치겠네! 전생에 만났던 엘프들은 절대 이렇지 않았다고!’
모두가 품격 있고 우아한 자연의 수호자이자 정령의 친구들이었다. 대륙을 덮친 환란에 함께 맞선, 믿음직하고 훌륭한 전사들이었다.
‘오랫동안 인간들 사이에서 노예로 굴러서 좀 다를 거라고 각오는 했지만…… 이건 너무 예상 밖인데?’
고고하고 자존심이 강한 종족들이기에 드워프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설득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건 설득이고 뭐고 할 단계가 아니었다.
상태가 심각해도 너무나 심각했다. 조금 전 어디 아픈 엘프들을 데리고 온 건지 의심했던 게 딱 맞았다.
굳이 틀린 점을 꼽자면 몸이 아니라 정신이 아파 보인다는 점이랄까.
‘이 노예상 새끼가 정말 나한테 사기를 쳤단 말인가? 그래서 빨리 도망간 건가? 감히 나 용병왕에게 사기를 쳐? 당장 잡아 와서 죽일까?’
뒤늦게 구경 온 갈바릭과 드워프들도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푸하하핫! 이거 보니까 영주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엘프 노예들을 사 온 모양이네! 아무리 천재라도 모르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구먼!”
지셀이 주먹을 쥐고 노려보자 갈바릭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엘프 노예들은 대부분이 저렇단 말이오!”
“뭐?”
“정확히는 오래 산 엘프들이 저렇소. 인간들하고 지낸다고 해도, 노는 거 말고는 할 게 없거든. 한 마디로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한테 더럽게 물들었다고 보면 될 것이오.”
“오래 살지 않은 엘프들은 다른가?”
“세상 물정 모르고 말 잘 듣는 엘프들은 귀족들이 절대 안 팔지. 거래되는 엘프들은 다 상태가 조금씩 안 좋다고 보면 되오. 우리랑은 조금 다른 입장이라.”
드워프들은 노예로 전락하더라도 종족의 정체성을 크게 잃지는 않았다.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그 솜씨와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을 벗어난 엘프들은 그 아름다움 외에는 쓸모가 없었다. 결국 엘프 노예들은 일종의 장식품, 살아 있는 인형 정도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수명이 긴 만큼 아이도 잘 생기지 않으니 쉽게 수를 늘릴 수도 없었다. 워낙 가격이 어마어마하니 함부로 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상태가 그나마 멀쩡한 엘프들은 시장에 나오지 않고, 통제가 힘든 엘프들만 팔리는 것이다.
드워프들은 같은 고급 노예라서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젠장, 거기까지는 몰랐네.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알아 두지를 못했어. 어쨌든 노예상이 사기 친 건 아니라는 거지?’
엘프 노예들은 수가 적고 가격이 비싸 거래 자체가 드물다. 거기에 귀족들이 쉬쉬하면서 끼고 도니 우연히 보기도 힘들었다.
상태들이 왜 저런지는 이해했지만, 계속 저렇게 개판으로 지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 계획대로만 하면 되니까. 일단은 좋게 얘기해서 협조를 끌어내 보자.’
몇 번 한숨을 내쉰 지셀은 다시 엘프들을 보며 물었다.
“다 같이 잘 노는 걸 보니 여기까지 오면서 친분은 좀 생긴 모양이네. 대표는 누구지?”
그 말에 모든 엘프가 세상 권태란 다 가진 듯 늘어져 있는 남성 엘프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걸 느낀 엘프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앞으로 나섰다.
과연 엘프답게 생긴 게 예술이었다. 훤칠한 키와 몸매, 조각 같은 얼굴에 펜리스 사람들은 다들 깜짝 놀랐다.
그는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아스콘입니다. 일단은 제가 대표……인 거 같군요.”
엘프들은 모였을 때 가장 연장자를 대표로 삼는 문화가 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서로 깊은 친분은 없다 보니 그냥 가장 연장자인 아스콘이 억지로 대표가 된 셈이었다.
지셀은 그를 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앞으로 네가 당분간 엘프들의 대표로, 다들 영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싫은데요?”
“뭐?”
“아, 대표 같은 거 싫다고요. 그런 거 귀찮아서 하기 싫어요. 내가 이 나이 먹고 그런 거 해야 하나? 요새 뼈도 시리고 그런데.”
“…….”
정말 귀찮음이 가득한 아스콘의 말에 지셀은 말문이 막혔다.
뾰족한 귀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엘프라고 보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 산전수전 다 겪은 인간들과 다를 게 없었다.
‘이런 무시…… 뭔가 오랜만이야.’
아스콘은 멍한 표정을 짓는 지셀을 바라보며 경멸 어린 비웃음을 띠었다.
‘왜? 큰돈 주고 산 노예들이라 말 잘 들을 줄 알고 기대했어? 한심하기는.’
안 봐도 뻔하다. 엘프 노예를 이렇게 많이 산 걸 보면 수하들이나 주변 귀족들에게 비싼 노예라고 생색내며 선물할 게 뻔했다. 엘프 노예는 최고의 선물거리였으니까.
‘젊어서 그런가? 돈 자랑하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 났네.’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살아온 그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영주님이 아직 젊으셔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는 거 같으니 조언 하나 해 드릴게.”
“……무슨 조언?”
“우리는 영주님 마음대로 다루기 힘들어요. 고고한 품격과 자존심이 있는 종족이거든요. 그걸 모르시고 사 오셨나 보네.”
지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엘프들을 둘러보았다. 저게 지금 고고한 품격과 자존심이 있는 행동들이야?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콘은 제 할 말만 하기 바빴다.
“뭐, 그래도 돈은 많으신 거 같으니 우리 잘 지내봅시다. 적당히 성질만 안 건드리면 앞으로 재미있게 놀아 드릴게. 대표니, 뭐니 그딴 소리는 그만하시고요.”
아스콘의 건방진 태도에 지셀의 측근들도 조금씩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황당해서 가만히 있었지, 아무리 고급 노예라 해도 너무 무례한 모습이었다.
드워프가 처음 왔을 때 앞에 나섰다가 피를 토했던 기사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앞으로 나섰다. 그때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이놈! 감히 노예 주제에 영주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 큭, 쿨럭!”
지셀이 황당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기사가 연신 기침을 하며 변명을 내질렀다.
“쿨럭! 갑자기 말을 해서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쿨럭! 쿨럭!”
“……그냥 들어가라.”
“……죄송합니다.”
기사가 뒤로 물러나자 지셀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내 주변에는 이렇게 이상한 놈들만 꼬이는 걸까? 설마 내가 이상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난 정상인데.’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자아 성찰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엘프들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나는 너희들을 단순히 노예로 부릴 생각이 없다. 10년간 나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하면 자유민으로 풀어 주고 엘프들의 자치 구역을 만들어 주겠다. 원한다면 숲도 하나 조성해 주고.”
드워프들과 같은 조건이었다. 지셀은 이들을 노예라고 그냥 부려 먹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는 신분의 차이도 의미가 없어지는 환란의 시기가 올 테니까. 그때는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한다.
하지만 아스콘을 비롯한 엘프들은 지셀의 말을 듣고도 코웃음을 쳤다.
“진짜 어려서 그런가? 세상 물정 너무 모르시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누가 요새 촌스럽게 숲에서 살아요? 거기서 무슨 재미로 살라고? 우리 조상님들은 그랬다지만, 인생 완전 손해였지.”
“와, 우리 영주님 낭만 있으시다. 노예 해방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잖아?”
“협조해 달라니, 얼마나 잘 놀아 달라는 거야? 우리 나이 들어서 뼈 안 좋다니까요.”
처음 드워프들이 보였던 반응과 다를 게 없었다. 이들도 지셀이 지금 약속한 대로 해 줄 거라 믿지 않는 것이었다.
자꾸 선을 넘는 엘프들의 모습에 벨린다와 길리언이 나서려 했지만, 지셀이 고개를 저어 그들을 제지했다.
‘종족이 다르고 고생도 많이 했을 테니까 일단 이해해 주자. 나는 종족 차별주의자가 아니니까. 이렇게 배려심이 깊다, 내가.’
한번 참은 지셀이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그건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보수와 같은 거니까. 그때 가서 보면 될 일이지.”
“네네, 알겠습니다. 그런 건 나중에 알아서 하시고요. 알았으니까 대표도 새로 뽑으세요. 저는 이만.”
아스콘은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귀찮으니 더 얘기하기도 싫다는 몸짓이었다.
‘이 새끼가……?’
지셀은 다시 한번 참고 웃는 얼굴로 이를 꽉 깨물었다. 드워프들과 마찬가지로 엘프들에게도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표는 너다. 엘프 문화를 존중하는 의미도 있는 거지.”
“이거 참, 말이 안 통하시네. 안 할 거니까 그리 아세요. 존중하지 마세요.”
아스콘은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벨린다와 길리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주변의 모두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엘프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코웃음을 쳤다.
‘뭐? 때리게? 우리 몸값이 얼만데 함부로 할 수 있겠어?’
‘우리가 뭐 한두 번 맞아 본 줄 아냐.’
‘아, 새로운 곳에 올 때마다 기 싸움하는 거 지겨워 죽겠다니까. 서로 재미있게 놀면 그만인데 꼭 저래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셀은 누워 있는 아스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서 엘프들을 인솔해라. 일단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고 기다리도록.”
“싫은데요? 귀찮은데요? 아니면 그냥 감옥 갈게요. 그게 서로 편하겠다. 영주님 죽은 다음에 풀려나도 괜찮고.”
아스콘은 누운 채로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지셀도 억지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그냥 일어나 줄래? 나는 힘으로 억압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종족 차별주의자도 아니고, 비폭력 평화주의자거든.”
“하, 진짜 나이 많은 사람한테 너무하네. 여기는 연장자 공경도 없어? 뭐, 그래도 새 주인님한테 그런 신조가 있는 건 마음에 드네요. 일단 1차 합격?”
“그래, 내가 좀 착해.”
아스콘이 느릿하게 일어나 지셀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들어도 뭐 어쩔 거냐는 얄미운 표정이었다.
“나 대표 안 할 거라니까요? 귀찮으니까 다른 사람 시켜요.”
“우리 좋게 좋게 지내면 안 될까? 난 진짜 평화주의자인데, 참 알아주질 않네.”
지셀의 웃는 얼굴에서 조금씩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