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71)
271 – 그놈이 벌써 움직였다고? (1)
271화 그놈이 벌써 움직였다고? (1)
친왕파 귀족들의 회의 자리에서 지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왕국을 잇는 도로 사업이 시작되면서 요즘 지셀은 수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어 있었다.
이러니 회의 자리마다 이름이 빠질 수가 없었다.
왕국군 총사령관 모리스 맥쿼리 후작은 눈을 찌푸리며 브랜포드 후작에게 물었다.
“그놈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고 있다고?”
“그렇소. 아예 영지가 떠들썩할 정도로 모으고 있다고 하더군.”
“하, 그 오리 새끼가 카발디 백작을 치고선 겁을 먹긴 먹었나 보구먼. 하긴, 공작파 귀족을 건드렸으니 그럴 만도 하지.”
“문제는 너무 과할 정도로 모으고 있다는 거요.”
정확한 수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무장병이 최소 수천 명은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큰 사고를 몇 번이나 쳤던 지셀이기에 브랜포드 후작은 그 소문이 유독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음…… 하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까. 이번에도 어디 치려고 모으는 거 아냐? 지금 겨우 가뭄 사태를 수습하고 있는데 또 사고 치면 곤란해.”
“일단은 카발디 백작을 치고 공작파와 척졌으니 나름 대비를 하는 듯하오. 데스몬드 백작도 군대를 모으고 있고.”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모리스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한낱 북부의 일개 영주일 뿐이지. 공작가가 내전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데스몬드 따위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그 말에 다른 친왕파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군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모를까, 이미 데스몬드 영지 인근에서 계속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 브랜포드 후작의 선견지명 덕분에 데스몬드 백작은 손발이 꽁꽁 묶이게 된 셈이었다.
그 사실은 브랜포드 후작도 알고 동의하는 바다. 아무리 북부에서 손꼽히는 데스몬드라도 공작가의 도움과 명령 없이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당장 전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데스몬드가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쯧, 데스몬드가 군대를 소집하는 건 내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지 않은가.’
친왕파 귀족들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간 공작가의 압박에 계속 밀렸으면서도, 펜리스 백작 덕분에 조금 살 만해지니 또 오만한 성정들이 고개를 쳐든다.
자신들이 왕실을 떠받든다는 명분과 정통성을 쥐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공작가가 내전을 일으키면 그건 반란이었으니까.
한숨을 한번 내쉰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현재 2군단의 일부 병력이 인근 영주들의 도로 건설을 도와주고 있지 않소?”
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하는 거 빨리하는 게 나으니까. 내가 지시했는데 뭐 문제라도 있소? 북부 새끼들 다 가난해서 작업도 제대로 못 하고 있더라고.”
“전부 다 복귀시키도록 하시오.”
“왜?”
“2군단이 그쪽에 주둔하는 건 북부 감시 및 펜리스 백작의 보호를 위해서요.”
무심한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모리스는 험상궂은 얼굴을 더 찡그렸다.
“도대체 왜 그렇게 그 오리 새끼를 신경 쓰는 건데? 그놈이 언제부터 우리한테 그렇게 중요했다고!”
“내전이 일어나면 북부에서는 펜리스 백작이 가장 먼저 공격당할 것이오. 2군단의 전력이 유지되어야 데스몬드와 공작파 귀족들의 합공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오.”
“무슨 벌써 내전을 걱정해! 공작가도 가뭄 이후에 전력을 수습하느라 조용히 있잖아! 지금 내전을 일으키면 그냥 서로 죽자는 건데 그놈이 그럴 리가 있겠냐고! 그 새끼들 하는 짓은 다 말뿐인 협박이야!”
“다른 영주들과 왕국군도 내전에 대비해 전력을 정비할 생각이오. 언제 공작가가 칼을 빼 들지 모르니까. 도로 건설 때문에 공작파 영주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져 있고.”
“그래, 준비하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그놈만 보호하는데? 자꾸 그렇게 그놈만 싸고돌고 그놈이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니까 그 새끼가 더 건방져지는 거 아냐!”
모리스는 그간의 분노를 터뜨리듯이 외쳤다. 그 외침에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나 냉정한 브랜포드 후작이 너무 지셀만 챙기니 조금씩 불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의 권세가 높아 아직은 다들 뒤에서만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셀이 몇 번 더 사고를 치거나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한다면 후작의 입지도 같이 흔들릴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도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소. 내가 말한 대로 하시오.”
“이익…….”
모리스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몇 번이나 입술을 씰룩였다. 브랜포드 후작이 왜 저렇게 그 애송이만 끼고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지만, 브랜포드 후작의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친왕파의 수장이자 자신을 뛰어넘는 권세가였으니까.
“공작가만 쓰러뜨리면 그 새끼의 목은 내가 날려 버릴 거라는 말, 절대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때는 말리지 않는 게 좋아.”
“그때가 되면 내 모르는 척하겠소이다.”
“흥!”
이번에도 영양가 없는 협박을 건넨 모리스는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다른 귀족들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모리스를 따라갔다.
그들은 어디에 줄을 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도 나이가 드니 판단력이 흐려지는 모양이야.’
‘설사 내전이 일어나도 왕국군은 우리를 보호해야지. 왜 그놈을 보호해 준다는 말인가?’
‘혹시 그놈을 정말 정치적 후계자로 점찍은 건가?’
친왕파의 다른 귀족들도 모리스 후작과 비슷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애송이에게 너무 과한 혜택을 주고 편의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가가 정말 내전을 일으키면 그놈은 버리는 패로 쓰는 게 맞다. 괜히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진짜 내전이 벌어진다면 왕국군 전력은 그놈을 보호하기보다는 그냥 공작파를 압박하는 데 쓰는 게 낫지. 공작파의 만만한 다른 영주를 치거나.’
‘지금까지는 북부에서의 영향력을 올리려고 키워 준 거지만, 실제로 전쟁이 나면 그놈은 버리고 다른 영주들을 밀어주는 게 나아.’
‘왕국군은 우리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 놈을 도와주는 데 쓰기는 아깝지.’
친왕파 귀족들의 생각은 대부분 비슷했다. 아직은 브랜포드 후작의 힘으로 찍어 누르고는 있지만, 그들의 불만이 커지다 보면 결국 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브랜포드 후작은 혼자 남게 되자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피곤하군.’
공작가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데 내부는 제대로 단합이 되지 않고 있다.
지셀이 몇 번이나 능력을 보여 줬음에도 젊은 귀족들은 그의 명성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나이 든 귀족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형편없는 북부의 애송이 놈이라며 그를 무시했다.
시대가 바뀌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고방식이 고루한 친왕파 귀족들 때문에 지셀과 관련된 일은 뭐 하나 매끄럽게 풀리지 않았다.
그놈이 사고를 여러 번 쳐서 그런 부분도 있긴 하지만.
‘내전이 일어난다면 지리멸렬하게 당하기만 하겠어.’
브랜포드 후작은 내전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친왕파의 귀족들 대부분은 여전히 공작파를 견제하며 그들과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왕실에 속한 귀족들의 힘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아함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정치 방식이니까.
‘나라가 망하는 건 언제나 멍청한 놈들이 설칠 때였지.’
이 왕국을 승냥이 같은 놈들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지금은 자신의 권위로 계속 찍어 누르며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브랜포드 후작의 머릿속에 지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제멋대로에 사고나 치고 다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놈.
‘재미있는 놈이긴 하지.’
어쩌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그놈이 왕국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공작가조차 그놈이 하는 짓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밀어줄 거면 그런 놈을 밀어줘야지.’
공작가와 싸우기 위해 자신이 키운 강력한 무기, 북부에서 가장 빠르게 힘을 키우고 있는 젊은 영주.
그것이 바로 지셀 페르디움이었다.
어느 순간 브랜포드 후작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데스몬드의 영주, 해럴드는 제 앞에 선 부관에게 물었다.
“그놈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대놓고 전쟁을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추정하기로는 병력 규모가 5천 이상이 될 거 같습니다.”
현재 펜리스 영지의 정보는 다른 영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수상한 자들은 죄다 ‘노동 돌격대’로 끌고 가고, 영지 밖으로 퍼지는 정보는 가능한 한 조작해서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덩치가 커진 이상, 정보 유출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해럴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멍청한 놈은 아니었어. 맛이 가서 겁도 없이 날뛰고 있긴 하지만.”
해럴드의 표정은 전과 달랐다. 분노하지도 않았고, 지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속에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혼자서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린 해럴드는 다시 부관에게 물었다.
“우리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영지의 물자를 전부 끌어모았습니다. 이제 더는 모을 수 없을 거 같습니다.”
해럴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손해가 참 크군.”
지셀을 암살하려고 몰래 키우던 상단과 엄청난 양의 자원을 미끼로 던졌다. 영주를 끌어내기란 그리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암살에 실패한 탓에 상단은 해체되었고, 가져갔던 자원도 모두 증발해 버렸다.
영주 암살에 쓰인 이상, 상단이 해체되는 건 그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상단과 연관된 곳도 모두 끝장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지셀을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손해는 쉽게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해럴드는 최후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로 힘으로 지셀을 잡아 죽이는 것이다.
“우리를 감시하는 2군단의 상황은 어떻지?”
“현재 절반의 병력이 친왕파 영지에 지원을 나가 있습니다. 도로 건설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놈들도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구나.”
데스몬드 백작은 피식 웃었다. 왕국군이 감시하면 자신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반 정도만 남아 있다면 순식간에 밀어 버릴 수 있다.
“우리 쪽 병력 모집 상황은?”
“모든 봉신에게 병력을 소집하라고 알렸습니다. 현재 각지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놈이 대규모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했다면 우리도 더 모아야겠군. 압도적으로 쓸어버리고 그곳을 차지해야 하니까.”
“압도적이라 하신다면…….”
“징집병은 필요 없다. 3만의 무장 병력을 확보해라.”
“……3만 말씀이십니까?”
“그래, 봉신들에게 단 하나의 병사도 남기지 말고 전부 끌고 오라 전해라. 수가 부족하면 모두 목을 베겠다. 우리 또한 모든 거점과 요새의 병력을 하나로 모은다. 총동원령이란 말이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부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난한 탓에 북부 영지들의 평균 병력은 1천에서 2천 정도에 불과하다. 병력이 많은 영지라고 해 봤자 3천을 넘기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해럴드는 3만의 병력을 모으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영지의 치안을 맡은 병사들까지 죄다 끌고 와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그런 병사들까지 긁어모으면 3만 명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정도 저력이 있기에 데스몬드가 북부의 최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해럴드는 의자에 기대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멜리아가 반란에 성공해서 다행이군.”
만약 그 일까지 실패했다면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레이폴드가 신경 쓰여서 지셀과의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솔직히 아멜리아를 우습게 보고 있었는데, 혼자만의 힘으로 북부제일검인 위르겐도 처리하고 순식간에 영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놀라긴 했다.
“생각보다는 제법이야. 그런데 멍청하게 후계자 하나를 놓치다니. 쯧쯧쯧.”
하지만 데이븐 레이폴드의 존재에 생각이 닿자 해럴드는 혀를 찼다. 역시 방구석에서 책만 읽던 계집이라 한계가 있었다.
지셀만 아니었어도 레이폴드의 반란 또한 자신이 깔끔하게 마무리했을 텐데.
“지금 발루아 남작과 전쟁 중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내가 전쟁을 일으키면 바로 군대를 끌고 합류하라고 전해라. 발루아 남작은 내가 밀어 버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부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먼저 전쟁을 일으키시면……. 백작님이 내전을 촉발하시는 셈이 됩니다. 펜리스 백작을 죽이면 분명 친왕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건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이라 공작가에서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에게는 명분도 없으니까요.”
부관의 물음에 해럴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셀 하나 때문에 모든 일이 꼬여 버렸다. 아멜리아가 반란에 성공했지만, 발루아 남작을 상대하게 된 바람에 레이폴드의 힘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그 사이에 지셀은 제 이득을 다 챙기고, 이제는 친왕파의 모든 영지를 잇는 도로까지 건설하고 있었다.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미 공작가는 모든 일을 망친 해럴드에게 분노한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공작가의 두뇌인 라울 요제프 자작이 분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판도는 모두 그가 짜 둔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지셀이란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건방진 놈들.’
지셀과 라울, 둘 모두를 향한 해럴드의 속마음이었다.
한 놈은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한 놈은 자신의 머리 위에 서서 지시만 내린다.
특히, 라울은 지금 자신을 처리하고 다른 이를 내세우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북부의 대영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굴욕이었다. 계속 일을 실패한 것도,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이제는 다 상관없다.’
실타래는 엉킬 대로 엉켰다. 아깝더라도 단호하게 끊고 가야 한다. 그러려면 지셀을 죽이는 게 우선이었다.
이건 이제 공작가의 명령과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북부의 대영주로서 땅에 떨어진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세우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해럴드는 공작가가 어떻게 나올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전쟁을 결심했다.
지셀을 죽이고 북부를 제패한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다시 보여 주면 된다.
명분? 내전? 그딴 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처참한 굴욕감을 씻는 것이다.
미친놈을 상대하려면 자신도 미친놈이 되어야 했다. 그걸 방해한다면 왕국군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그 뒤에 공작가와 담판을 짓는다.’
그래도 공작가가 자신을 쳐내려 한다면 그땐 힘으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친왕파에 붙어서라도 말이다.
공작을 배신할 각오까지 할 정도로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여력을 남기지 않고 영지의 모든 힘을 한곳으로 모았다.
오직 지셀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해럴드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전쟁은 공작가의 계획과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이건 내 계획이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 미친 새끼를 죽이고 지금까지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
각오를 굳힌 해럴드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그의 눈은 서늘할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