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77)
277 –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4)
277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4)
해럴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 남작은 데스몬드 진영에서 개인 무력으로는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좋다, 다른 놈은 신경 쓰지 말고 저놈부터 우선 죽이도록.”
“알겠습니다.”
허튼 남작이 바로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그는 요새로 다가가는 와중에도 계속 길리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무자비한 힘으로 이쪽의 기사와 병사들을 쉬지 않고 도륙하고 있는 자.
만약 정상적인 상황에서 붙었다면 허튼 남작 자신도 감히 그를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계속된 전투로 힘이 많이 떨어진 게 눈에 보였다. 기세는 갈수록 흉포해졌지만, 그 힘과 속도는 처음보다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전쟁의 긴장감과 전투의 피로는 쉬이 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쯤이면 괜찮겠군.’
성벽 가까이 도착한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단 두 번의 도약만으로 사다리를 타고 가볍게 성벽 위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길리언을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차앙!
귀에 꽂히듯이 들려오는 소리에 길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을 뽑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상대가 만만하지 않은 적이라는 걸.
‘드디어 진짜가 나타났군.’
가볍게 걸어오고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강대한 힘의 파동이 느껴진다.
길리언은 자세를 고쳐잡고 정면으로 허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허튼 남작도 가까이서 길리언을 확인하고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어쩌면…… 오늘이 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구나.’
눈앞에 있는 자는 상처 입고 독이 바짝 오른 맹수였다. 한 번이라도 실수했다간 자칫 이쪽의 목이 물어뜯길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거친 기세에 감히 다가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둘 다 단번에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어떠한 말도 내뱉지 않고, 바로 서로를 향해 무기를 내질렀다.
카아아아앙!
도끼와 검이 만나는 순간,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강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의 무기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였다.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강렬한 충격파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콰앙! 콰아앙!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를 견디기 힘들어 물러난 것이다.
파앙!
길리언의 도끼가 허튼 남작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허튼 남작은 검을 들어 올려 도끼를 쳐냈다.
카앙!
강렬한 반탄력에 서로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잠깐의 틈이 생겼다.
허튼 남작이 심유한 눈으로 길리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 펜리스 백작의 수하들은 대부분이 용병들이라 들었는데……. 이름이 뭐지?”
“길리언.”
“비천한 용병 주제에 제법이군. 나는 허튼 남작이다. 오늘 널 죽일 사람이지.”
길리언은 피식 웃으며 허튼 남작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맹렬한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시건방진 말을 지껄이는구나.”
거친 대답에 허튼 남작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긴 했지만, 자신도 이미 중년에 접어든 터.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니었다.
길리언의 말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체성은 용병이다. 누구보다 거친 세월을 살아온 자로서, 허튼 남작의 말은 도발 축에도 들지 않았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새끼들이 많긴 했지. 지금은 다 땅속에 파묻혀 있지만 말이다. 칼은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
젊은 시절부터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으며 살아온 길리언이다. 허튼 남작처럼 오만한 실력자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하지만 용병들의 세계에서는 살아남는 자가 가장 강한 자다.
길리언은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삶을 증명하는 자부심이었다.
허튼 남작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예의가 없는 놈이군. 누가 땅속에 묻힐지는 두고 봐야겠지.”
콰앙!
두 사람은 다시 맞붙기 시작했다. 마치 두 사람이 싸우는 공간만 다른 세계가 된 것만 같았다.
펜리스의 기사와 병사들, 데스몬드의 기사와 병사들도 어느 순간 전투를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맞붙으며 이동하는 범위가 갈수록 커져 갔기 때문이다. 괜히 근처에 있다가 말려들면 몸이 갈가리 찢어질 수도 있었다.
콰앙! 콰아앙!
바닥이 깨지며 돌들이 튀어 나갔다. 그 파편에 맞은 병사가 그대로 쓰러질 정도로 여파는 강력했다.
허튼 남작의 검술은 누가 봐도 감탄을 내지를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다.
그야말로 기사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검술.
펜리스와 데스몬드, 양쪽의 기사들은 절제되고 품격 있는 그의 검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펜리스 기사들이 느끼는 놀라움은 컸다.
‘엄청나다…….’
‘그냥 검술 교본 그 자체야.’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이 정말 많구나.’
그들이 가장 많이 본 검술은 지셀의 것이다. 하지만 지셀의 검술은 그들 수준에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보는 사람을 감동시킬 정도로 우아하고 어떨 때는 모든 걸 찢어발길 정도로 광폭하다. 지셀의 움직임은 어떤 무기를 쓰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그러니 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간혹 그가 보이는 실력에 경악하는 것 외에는 다른 감상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허튼 남작은 다르다. 그의 검술은 기사가 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보여 주는, 정석 그 자체였다.
콰아앙!
그에 반해 길리언의 움직임은 마치 굶주린 맹수와도 같았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바로 목을 물어뜯기고 온몸이 분쇄될 듯한, 흉포하고도 거친 살기가 느껴진다.
데스몬드의 기사들은 오히려 길리언의 공격을 보며 감탄을 토해 냈다.
‘지극히 실전적이다.’
‘어디서 무기가 날아올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
‘저런 움직임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공격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과도 같았다.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피할 수도, 막아 낼 수도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두 사람 다 유형만 다를 뿐 똑같은 괴물이었다.
푸슉!
허튼 남작의 검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길리언의 팔과 다리 곳곳이 베이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허튼 남작의 몸은 깨끗하다. 아주 작은 상처조차도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치명타를 줄 수가 없다.’
상대는 과격할 정도로 공격 일변도였다. 어지간한 공격은 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분명 상처를 더 많이 입고 피투성이가 된 건 상대 쪽이다. 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밀리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상대의 도끼는 무자비한 힘을 품고, 날카로운 각도로 날아왔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진다면, 한 대라도 맞는다면 작은 상처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길리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튼 남작을 노려보았다.
‘미꾸라지 같은 놈.’
보통 이 정도로 밀어붙이면 상대는 점차 조급해하며 자세가 흐트러지게 된다. 하지만 허튼 남작이란 놈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침착함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저런 건 아무나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싸움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자만이 가능하다.
길리언의 입장에서 상대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유형이 바로 허튼 남작과 같은 사람이었다.
콰앙! 콰앙!
무기를 맞부딪치는 동안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는다.’
체력 싸움으로 들어가면 어느 한쪽이 지쳐야 끝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다. 두 사람의 움직임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잠시 소강상태가 됐고, 기사들의 대결이라 관습상 끼어들지 않는 것뿐이다.
양측 다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흉흉한 모습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승자가 있는 쪽은 높아진 사기로 상대측을 밀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언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더 거친 수를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기회를 주지.’
콰앙!
다시 무기가 맞부딪치며 튕겨 나간다. 길리언은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며 도끼를 꽉 잡았다.
‘와라.’
상대를 향한 도발이자 미끼다. 허튼 남작이 그걸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면서도 그걸 받아 주었다.
‘승부를 내지.’
허튼 남작이 눈을 빛내며 길리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동시에 길리언의 도끼가 허튼 남작을 향해 내리꽂혔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공격.
누가 더 강하고 빠르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쐐애애액!
마나를 한껏 머금은 허튼 남작의 검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푸욱!
길리언의 도끼가 반도 휘둘러지기 전, 온 힘을 다해 내지른 허튼 남작의 검이 먼저 깊숙하게 꽂혀 들어갔다.
살을 뚫는 감촉에 허튼 남작이 미소를 지었다.
‘끝이다.’
하지만 허튼 남작은 몰랐다. 이 길리언이란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
심장이 뚫렸음에도 길리언의 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악마같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도끼를 내리찍었다.
허튼 남작은 본능적으로 검에서 손을 놓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콰아아앙!
쩌억!
허튼 남작의 흉갑이 깨어지며 가슴이 쩍 하고 벌어졌다.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허튼 남작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길리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분명 심장을…….’
자신의 검이 꽂힌 위치를 확인하고 허튼 남작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검은 그가 처음 노렸던 위치에서 아주 살짝 벗어나 있었다.
‘설마…… 도끼를 휘두르면서 자세를 바꿨나?’
무기를 휘두를 때는 자세가 바뀜에 따라 몸의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걸 모르는 허튼 남작이 아니다. 당연히 상대의 몸이 움직이기 전에 찔렀다.
하지만 그 찰나의 타이밍조차 길리언이 건 도박이었다. 상대가 찌르는 순간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조금이나마 자세가 바뀌고 치명상을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평생 싸워 온 자만이 쓸 수 있는 대범한 수였다.
파아악!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며 비틀거리던 허튼 남작이 무릎을 꿇었다.
“쿨럭!”
“남작님!”
데스몬드의 기사들이 달려와 피를 토하는 허튼 남작을 부축했다. 깊은 상처였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다.
“어서 남작님을 모셔라!”
허튼 남작이 부하들에게 부축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길리언도 몇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난 뒤에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내었다. 도끼를 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죽이지 못했다.’
허튼 남작이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도끼가 얕게 들어갔다. 그 상황에서도 그런 판단을 내리다니, 역시 대단한 놈이었다.
“교관!”
펜리스의 기사들도 달려와서 길리언을 부축했다. 꼿꼿하게 서 있긴 하지만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구멍 뚫린 가슴에서는 계속 피가 새어 나왔고, 꽉 다문 입술에서도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정말 멀쩡했다면 멈추지 않고 바로 후속타를 날렸을 것이다.
양측이 다시 무기를 들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쩌다 보니 어정쩡하게 전투를 멈춘 상태였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주변에 금세 살기가 피어오르고 전의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펜리스 기사들은 몇 번이나 핏물을 삼키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젠장…… 몸이 뒤틀리는 거 같아.’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
‘후우……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간다.’
이들은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대부분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저 검은색 투구를 쓰고 있기에 적들이 못 알아차리는 것일 뿐.
길리언도 그걸 알기에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 줬다가는 적들이 오히려 더 기세등등하게 덤벼들 테니까.
둥! 둥! 둥!
북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지만 전과는 다르게 데스몬드군이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허튼 남작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주변을 꽁꽁 에워싸고 있었다. 여기서 잃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북소리와 함께 물러가는 데스몬드군을 보며 펜리스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운이 좋았어.’
‘교관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만약 허튼 남작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데스몬드군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펜리스군의 실제 상태를 알았다면 더 밀어붙였겠지만, 길리언이 버텨 준 덕분에 해럴드마저도 펜리스군의 허세에 속아 넘어갔다.
적들이 물러난 게 확실해지자 길리언은 피를 내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계를 세우고 모두 휴식을 취한다. 언제든지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마음을 놓지 마라.”
그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물었다.
“교관, 정말 괜찮아?”
“당장 누워서 치료부터 받아야 하지 않겠어?”
“어이! 의무병 어디 갔어! 붕대 좀 가져와!”
소란 떠는 기사들을 보며 길리언이 손을 저었다.
“됐다. 너희들도 어서 쉬고 마나부터 회복해라. 내 상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휘소에 가더라도 혼자 걸어가야 한다. 가서 혼자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모든 병사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길리언은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늘의 전투를 내내 지켜보던 해럴드는 새로운 작전을 떠올렸다.
“모든 병기와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요새를 부숴 버리는 게 낫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