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81)
281 – 우리가 도와줄 차례다. (1)
281화 우리가 도와줄 차례다. (1)
“당장 포우드 백작을 불러와라!”
데스몬드군이 스톤헤이븐 요새를 공격하기 얼마 전, 2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랜포드 후작은 엄청난 분노를 토해 냈다.
데스몬드 백작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움직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군대를 모으고 있다기에 다들 어느 정도는 내전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고 긴장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어떠한 통보도 없이 무식하게 혼자 군대를 일으켜 왕국군까지 전멸시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수도에 머물고 있던 ‘공작가의 입’ 포우드 백작은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해 브랜포드 후작의 앞에 섰다.
“후, 후작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
“백작! 명분도 없이 펜리스를 공격하다니! 이게 지금 공작의 뜻이냐!”
“그, 그게 데스몬드 백작은 저희랑 상관이 없는…….”
“지금 내 앞에서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브랜포드 후작이 살기 어린 눈빛을 내보이자 포우드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데스몬드 백작은 지금껏 중립을 표방해 왔으나, 이제는 그가 공작파 귀족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바보가 아니니 카발디 전쟁 때 이미 눈치를 챈 것이다.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다고 생각한 포우드 백작이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희도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릅니다. 이건 정말 요제프 자작의……. 아니, 공작가의 뜻이 아닙니다.”
공작가가 내전을 준비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라울은 최소한의 피해로 왕국을 손에 쥐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시간이 오래 들고 귀찮은데도 협박과 회유를 통해 각 지역의 영주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 회유되지 않을 자들만 남긴 뒤,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그들을 죽이고 쉽게 왕국을 차지하는 것.
그것이 공작가의 기본 전략이었다. 지셀이란 놈이 나타나 판을 흔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데스몬드 백작까지 멋대로 움직일 줄이야…….’
라울은 무척이나 분노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판이 흔들리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이제 라울에게 데스몬드 백작은 동료가 아니라, 막 다뤄도 괜찮은 패가 되었다.
“저희는…… 절대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펜리스 백작을 협공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발 물러나는 포우드 백작의 모습에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같은 파벌의 일임에도 모르는 척하겠다? 책임도 지지 않고?”
“일전에 저희는 펜리스 백작의 일에도 끼어들지 않았잖습니까? 각하께서도 손을 떼시는 게 어떠실는지…….”
그때처럼 개인 간의 일로 치부하자는 뜻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포우드 백작은 그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펜리스는 끝이야. 데스몬드 백작을 이길 순 없어. 친왕파가 끼어들든 말든 상관없다.’
무려 3만의 병력이다. 펜리스 백작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목이 잘릴 게 뻔했다. 그 뒤에 친왕파가 데스몬드를 제압하려 해도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데스몬드 백작은 능력이 뛰어난 자다. 그 수하들도 만만치 않다. 어쩌면 친왕파가 연신 깨지며 장기전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한테 이득이지. 기회를 보고 바로 내전을 일으키면 되니까. 우리가 힘이 없어서 시간을 끌고 있는 게 아니야.’
공작가의 힘은 강대하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왕국을 바로 뒤집어엎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내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공작가의 두뇌인 라울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국을 차지한 뒤에도 따로 힘을 쓸 곳이 있다는 듯이.
이유야 어쨌든, 친왕파는 라울의 그런 기조 덕분에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 포우드 백작의 생각이었다.
포우드 백작을 노려보던 브랜포드 후작은 이마를 짚고 웃었다.
“참 상황을 복잡하게 꼬는구나. 펜리스의 멸망은 기정사실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데스몬드로 우리를 건드려 보겠다, 이거로군. 우리가 덤비면 싸워서 힘을 빼고, 뒤로 빠지면 펜리스를 안전하게 먹고. 어느 쪽이든 좋다는 거겠지.”
포우드 백작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브랜포드 후작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닐 터였다.
공작가는 이번 일과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왕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펜리스가 멸망한 후 데스몬드와 싸우는 거 말고는 말이다.
여유로운 포우드 백작의 모습에 브랜포드 후작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들의 수작질은 더 이상 봐주기가 힘들구나.”
“오해입니다. 저희는 전쟁을 원하지 않기에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각하.”
“그래, 그렇겠지. 너희들의 말장난은 이제 지겹다. 톨레오.”
브랜포드 후작이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을 불렀다. 톨레오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각하.”
“당장 저놈을 옥에 가두고 수도에 있는 공작파 귀족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받들겠습니다.”
톨레오가 손을 들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바로 포우드 백작의 양팔을 붙잡았다. 포우드 백작을 따라온 호위 기사들도 바로 제압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포우드 백작이 당황하며 외쳤다.
“어? 어? 가, 각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옵니까? 저는 공작가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관습에 따라 제 안전을 보장…….”
“펜리스 백작이 패하면 네놈과 공작파 귀족들의 목을 모조리 잘라 공작에게 보내겠다.”
“네? 네?”
포우드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지금 북부의 애송이 하나 때문에 내전을 일으키겠다는 뜻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후작의 입에서 더 믿을 수 없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었다.
“집사.”
“하명하십시오.”
“북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한 3군단에게 바로 펜리스 백작의 지원을 나가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현재 공작파에 속한 영지 중 가장 세력이 약한 곳이 어디인가?”
“빠르게 칠 수 있는 곳은 북부의 하링턴 남작령과 동부의 콜린드 남작령입니다.”
“좋군. 펜리스 백작이 패배하는 즉시 그 두 영지를 점령하라고 맥쿼리 후작에게 전해라. 데스몬드는 따로 군대를 꾸려 치겠다.”
“……알겠습니다.”
과격한 명령에도 가신들은 아무도 후작을 말리지 못했다.
후작이 명령을 내리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 누구도 후작의 권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브랜포드 후작가는 그렇게 굴러가는 곳이었다.
포우드 백작은 정신이 나갈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각하! 명분도 없이 전쟁을 벌이시겠다니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녕 내전을 일으키시려는 겁니까! 저희는 데스몬드 백작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포우드 백작은 브랜포드 후작이 저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직접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을 총애한다고 해도, 그딴 이유로 왕실과 친왕파의 운명까지 걸다니!
펜리스 백작도, 데스몬드 백작도, 브랜포드 후작도, 그냥 죄다 미쳐 버린 것만 같았다.
브랜포드 후작은 포우드 백작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내가 언제까지 네놈들의 수작과 말장난에 끌려다닐 줄 아느냐. 긴말은 필요 없다. 살고 싶으면 펜리스 백작이 이기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끌고 가라!”
“각하! 각하!”
포우드 백작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끌려갔다.
대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신들은 브랜포드 후작의 분노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집사가 입을 열었다.
“후작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껏 내전을 피하려고 가장 노력한 사람은 브랜포드 후작이었다. 공작가의 진정한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왕파의 방어적인 전략과 공작가의 소극적인 태도가 맞물려 지금의 세력 구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지셀이란 놈이 나타나 판을 흔들고, 그 결과 데스몬드 백작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펜리스 백작…… 아니, 지셀 페르디움을 받아들일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 같군.”
뛰어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 빨리 성장했다. 그러니 언제가 되었든 결국은 데스몬드 백작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싹이 더 크기 전에 철저하게 짓밟지 않으면 본인이 위험해질 것을 데스몬드 백작도 잘 알 테니까.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에게 왕국군까지 붙여 가며 더 클 때까지 보호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무식하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집사는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3군단은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빠른 길은 공작파 영주들의 땅이기에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막 2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어쩌면 이미 공성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3군단은 기존의 2군단보다 더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도로도 아직 전부 완성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명령을 받자마자 바로 출발해도 펜리스 영지까지 족히 한 달 이상은 걸릴 것이다.
북부의 가난한 친왕파 영주들은 별로 도움도 안 된다. 숫자도 적고 훈련도 부실한 병력을 보내 봤자 손해만 커진다.
브랜포드 후작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지셀은 데스몬드 백작을 이길 수 없다. 결국 패배하겠지.”
“만약 물러난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겁니다. 페르디움 후작이 아직 건재하니까요.”
“그래, 그래도 카발디 지역은 뱉어야겠지. 어쩌면 펜리스까지도.”
그러면 지셀을 밀어준 의미가 없어진다. 가진 기반과 기술을 다 뺏기고 다시 가난해진 그가 재기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 앞을 데스몬드 백작이 가로막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페르디움의 멸망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데스몬드 백작이 후환을 남겨둘 리가 없다.
“어차피 지셀은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우리는 데스몬드 백작과 싸워야 한다. 공작가는 상황을 여유롭게 지켜보면서 우리 힘이 빠지길 기다리겠지.”
“후작님…….”
“내전은 언젠가 벌어질 일이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먼저 싸움을 거는 게 낫다. 안 그러면 결국 지금처럼 조금씩 잡아 먹히다가 힘도 못 써 보고 다들 죽을 테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자신의 결정으로 왕실과 친왕파의 귀족들은 모두 전쟁 준비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내전만은 피하고 싶었건만, 결국 자신의 손으로 시작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장 내전을 피하고 조금 더 힘을 비축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지셀이 승리하는 것.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저으며 미련을 털어 버렸다.
현실적으로 왕국군을 더 배치해 보호해 주는 건 의미가 없었다. 언제고 내전이 터지면 지금과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질 수 있었다.
만약 지셀이 지금보다 더 강했다면 내전은 다른 곳에서 먼저 시작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3군단의 군단장, 클리프턴 자작은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을 빠르게 전달받았다.
“목표는 펜리스 백작의 지원과 구출. 3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데스몬드 백작이 승리하고 펜리스 백작이 사망했다 판단되면 공작파의 하링턴 남작령을 공격. 흠, 쉽지 않군.”
몇 번 고개를 끄덕인 그는 바로 부관을 불렀다.
“최대한 빠르게 출정할 준비를 해라. 펜리스 백작을 도우러 간다.”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을 받은 왕국군 3군단이, 펜리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데스몬드 백작의 공격에 난리가 난 건 친왕파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후작이 된 지셀의 아버지, 즈발터 페르디움도 소식을 듣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데스몬드 백작이…… 펜리스를 침공했다고? 그것도 2군단까지 전멸시키고?”
“네! 이미 펜리스 영지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이, 이런…….”
충격적인 소식에 즈발터는 순간적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언젠가는 전쟁이 터질 줄 알았다. 페르디움 공방전의 배후도 데스몬드 백작이었으니까.
하지만 친왕파에 합류한 뒤에는 그 걱정을 다소 놓은 건 사실이었다.
결국 내전이 일어나도 공작파와 친왕파가 함께 맞붙는다. 지셀과 자신은 거기에 껴 한 축을 담당할 줄 알았다.
“이렇게 데스몬드 백작과 단신으로 맞붙을 줄은……. 그자가 왕국군까지 공격할 줄이야…….”
즈발터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혹시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쳐들어올 줄은 정말 몰랐다.
“형님! 정신 차리쇼!”
멍해 있던 즈발터는 란돌프의 호통에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페르디움에 소식이 도달했다는 건 이미 전투가 벌어졌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 그래. 지, 지금 당장 지셀을 도우러……. 잠깐, 요새는 어떻게 하지? 요새에 감시 병력을 남기고…….”
백전노장이었던 그에게도 갑작스러운 데스몬드의 침공은 꽤 큰 충격이었다.
데스몬드는 북부의 최강이라 불리는 영지다. 거기서 3만의 대군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이르자 즈발터는 다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럼 병력의 편제를 다시…… 페르디움도 준비를…….”
허둥지둥거리는 즈발터의 양팔을 잡고 란돌프가 소리쳤다.
“형님! 정신 차리라고요! 빨리 전군을 움직여서 대공자를 도우러 가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까 요새에 남길 병력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지금은 휴전 상태인데!”
“그놈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감시 병력을…….”
즈발터는 자신이 맡은 막중한 책임과 아들에 대한 걱정, 두 가지가 충돌하자 빠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저번 카발디 전쟁에서도 병력 일부를 요새에 남겨두고 움직였다.
그때는 지셀이 공격하는 상황이라 도와주든, 물러나라고 설득을 하든 선택할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지셀은 데스몬드의 대군을 막아야 한다. 훈련병 하나라도 아쉬운 상태일 터였다.
“형님! 어차피 대공자가 없으면 다 소용없습니다!”
“뭐?”
“이 요새! 식량! 마나 연공법! 야만인들! 우리 페르디움의 발전까지도! 모두 대공자가 아니었으면 해결 못 했을 겁니다!”
“…….”
대답도 못 하는 즈발터의 팔을 계속 흔들며 란돌프가 다시 외쳤다.
“그러니까 여기를 점령당해도! 북부가 불타올라도! 대공자만 있으면 다시 다 되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버립시다! 휴전했으니 일단 야만인 새끼들은 믿고 여기를 버리자고요!”
“버리자니…… 여기를?”
평생 요새를 지키며 살아온 즈발터에게 이곳을 버리라는 건 책임감도 함께 버리라는 말과도 같았다.
특히 야만인들의 수장인 워로카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음흉한 놈은 지셀의 무력에 밀려서 억지로 합의했을 뿐이다.
이미 식량도 일부 얻어 냈으니, 지금 자리를 비우면 그놈이 또 요새를 차지하겠다고 덤빌 수도 있었다.
혹시나 지셀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워로카가 더 기고만장해서 날뛸 게 뻔했다. 아들도 잃고 요새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새를 다시 뺏기도 힘들거니와, 야만인들의 약탈이 더 심해질 터다. 북부는 또 전란에 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란돌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공자가 죽게 생겼다고요! 형님 아들이 죽는다고! 도대체 언제까지 남들을 위해서만 살 겁니까!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이제는 좀! 가족들도 챙기고 살라고요! 죽은 형수님한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너…….”
“펜리스가 점령당하면 우리라고 무사할 거 같습니까? 데스몬드 백작이 우리를 살려 둘 거 같냐고요! 엘레나도 죽게 됩니다! 하, 씨발! 형님! 왜 갑자기 바보가 됐냐고! 정신 차리라고!”
란돌프의 말을 들은 즈발터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 말이 옳다. 요새를 지키고 있어 봤자 펜리스가 점령당하면 끝이다. 애초에 데스몬드 백작은 페르디움을 멸망시키려 했었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펜리스와 페르디움 모두 멸망하고 만다.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린 즈발터가 란돌프를 밀어 내며 말했다.
“……그래. 일단 지셀부터 구하고 보자.”
짜악!
즈발터는 스스로를 다그치듯 제 양 볼을 강하게 두드리곤 외쳤다.
“전 병력은 한 명도 빠짐없이 펜리스로 이동한다! 전령을 보내 호메른에게도 미리 준비하라고 일러라!”
요새의 모든 병력이 하나도 빠짐없이 소집되었다. 이들도 데스몬드가 펜리스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북부 최강의 영지, 3만의 대군. 기겁할 만한 소식을 듣고서도 이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 의지를 더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군수 물자를 전달하러 왔다가 또 일손을 거들라고 잡혀 있던 스코반이 검을 뽑아 들며 크게 외쳤다.
“대공자님이 위험하단다!”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도 동시에 무기를 들었다. 이들에게 지셀은 이제 페르디움의 영웅이자 은인이었다.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다 같이 크게 외쳤다.
“이번에는 우리가 대공자님을 도우러 간다!”
“와아아아아!”
큰 함성과 함께 페르디움군도 펜리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