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84)
284 – 혼자 온 게 아니거든. (2)
284화 혼자 온 게 아니거든. (2)
데스몬드의 추격대는 당황했다. 그간 자신들을 괴롭힌 놈들을 끝장내려는데 갑자기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쓰러져 있던 펜리스의 기사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왔다고?”
“설마 벌써 준비가 끝난 건가?”
“하, 하하하하! 영주다! 영주가 왔어!”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로 웃음이 나왔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서 나타난단 말인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영주의 움직임은 정말 예측할 수가 없었다.
펜리스의 기사들뿐만이 아니다. 쓰려져 있던 병사들까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살았다…….”
“영주님이 오셨어…….”
“영주님이라면 여기 있는 이놈들 정도는 다 죽일 수 있을 거야…….”
지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지셀은 다른 건 몰라도 전쟁에서만큼은 이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다.
“이놈들이…….”
데스몬드군은 누워 있는 펜리스군을 험상궂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지원군이 좀 왔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곧 죽을 놈들이 허세를 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전에 네놈들이 먼저 죽는다. 그리고 저놈들도 다 죽겠지.”
데스몬드군의 병사들이 누워 있는 펜리스군의 투구를 창으로 걷어 냈다.
힘들게 다른 곳을 찌를 필요도 없다. 얼굴을 그냥 찍어 버리면 된다.
투구를 벗기자 기사들 대부분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흐으…… 본대도 아닌 너희들 정도로 우리 영주를 죽인다고?”
데스몬드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시건방진 말을 하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죽이고 빠지려고 창을 높이 들었다.
퍼억!
“꺼억…….”
창을 찌르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와 병사의 목을 뚫었다.
퍼억! 퍼억! 퍼억!
다급하게 창을 찌르려던 다른 병사들도 화살에 맞아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데스몬드군의 병사 하나가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유독 빠르게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펜리스군이 영주라고 부르던 인물과 그 뒤를 따르는 300여 명의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
그들은 모두 활을 들고 있었다.
“젠장! 일단 빠져! 대열을 갖춰라!”
너무 빠르다. 눈 한번 깜빡할 때마다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펜리스군을 전부 죽이고 갈 시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갑자기 적이 나타났으니 다시 뭉쳐서 진형을 만들어야 했다.
훈련된 정예들답게 데스몬드군은 잽싸게 대열을 갖추었다. 하지만 허튼 남작은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놈부터 먼저 죽인다.’
길리언을 죽인다면 적들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다. 제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은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 하나를 주워 들었다.
“죽어라!”
쐐액!
카앙!
그가 길리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대비해 쳐 내긴 했지만, 강한 힘에 검을 쥔 손이 떨려왔다.
“큭, 화살에 이런 힘을…….”
화살에 담긴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번에도 검에 마나를 집중하지 않았다면 검날이 박살 날 뻔했다.
펜리스군에 길리언 말고 이런 강자가 있었던가?
‘혹시 저자가…… 펜리스 백작인가?’
화살을 날린 자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이제 길리언을 죽이기엔 늦었다.
‘소문의 실력, 확인해 보지.’
파앗!
검은 말을 탄 지셀이 길리언을 넘어 허튼 남작에게 쇄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지셀이 창을 내질렀다.
“흐읍!”
허튼 남작은 자세를 낮춰 창을 피하며 말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셀을 땅으로 끌어 내릴 속셈이었다.
말이 도약을 끝내고 바닥에 착지할 때 맞춰 내지른 공격이었다.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파앗!
하지만 바닥에 발굽이 닿자마자 흑왕은 허벅지 근육에 힘을 주어 다시 뛰어올랐다. 허튼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
말 주제에 자신의 검을 피했다고? 아무리 기마술이 뛰어난 자가 타고 있다 해도 자신의 공격 타이밍은 완벽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허튼 남작은 당황하면서도, 공격이 실패한 걸 깨닫자마자 바로 앞으로 굴렀다. 하지만 지셀은 그가 머뭇거리던 찰나를 놓치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촤악!
“크윽!”
지셀의 창에 등이 베인 허튼 남작이 신음을 삼켰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호오, 제법인데?”
지셀이 흑왕의 기수를 돌리며 허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내지른 창을 두 번이나 피했다. 적어도 상급에 오른 뛰어난 기사라는 뜻이었다.
푸르르륵.
흑왕이 잇몸을 내보이며 웃었다. 공격에 실패한 두 사람을 동시에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셀이 혀를 차며 배를 누르자, 그 고통에 흑왕은 바로 입을 닫았다.
그사이 지셀을 뒤따르던 기사들이 속속 도착해, 곧바로 쓰러진 아군의 앞을 막아섰다. 그 뒤를 이어 나머지 병력이 차례대로 도착했다.
지셀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길리언! 괜찮아? 괜찮지?”
“영주님…….”
길리언은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셀이 나타났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린 길리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주님! 일단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고 재회의 기쁨은 조금 있다가 나누자고!”
“아니, 그게 아니고…….”
“어이, 뭐 해! 빨리 길리언과 부상자들을 옮겨라!”
지셀이 자꾸 말을 끊어 버려서 길리언은 하고 싶은 말을 못 했다. 다시 말하려 하는데 옆에서 ‘근육의 고든’이 부축을 하며 또 그의 말을 끊었다.
“어휴, 우리 교관님 살 빠진 것 봐. 고생 많이 하셨나 봐. 이러면 근손실이 오는데…….”
“고든! 잠시만! 영주님에게…….”
“제가 닭 가슴살 많이 먹여 드릴게요. 자자, 빨리 오세요.”
“너! 크윽!”
고든의 우악스러운 손에 끌려가던 길리언은 상처가 벌어져서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허튼 남작은 펜리스의 지원군들이 부상자 이송으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틈을 타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빠르다!’
지원군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기마술이 다들 보통이 아니었다.
숨을 몇 번 고른 허튼 남작이 허리춤에서 포션을 꺼내 가슴과 등에 뿌렸다.
‘실력이 제법이군.’
지셀의 마나가 아직도 체내에 남아 날뛰는 탓에 상처가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포션 두 병을 연달아 뿌리고 자신의 마나로 지셀의 마나를 억누르고 나서야 겨우 겉의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내상은 완전히 낫지 않아, 적어도 며칠은 정양해야 할 듯했다.
이 정도로 마나의 여파가 크다는 건 실력도 뛰어나다는 뜻이다.
‘상급에 오른 건 확실하다. 길리언과 비슷한 경지인가? 쯧, 그래도 내가 다친 상태만 아니었으면 저런 애송이 정도는…….’
물론 허튼 남작은 지금도 자신이 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을 뿐, 집중해서 싸운다면 저런 애송이에게 질 리가 없었다.
그와 길리언이 지셀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었으니까.
허튼 남작은 지셀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대가 펜리스 백작이오?”
“그래, 내가 펜리스 백작이다.”
지셀이 오연하게 말하자 허튼 남작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나는 허튼 남작이오. 그나저나 멍청한 짓을 했군.”
“멍청한 짓?”
“성에 틀어박혀 있지, 뭐 하러 나오셨소.”
대화를 하며 안정을 되찾은 허튼 남작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저놈만 죽이면 이 전쟁은 끝이군.’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지셀만 죽이면 자신은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끝낸 일등 공신이 된다.
‘당장 공격을…… 아니, 아니지.’
병사들을 움직이려던 허튼 남작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검을 앞으로 뻗으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르다니 과연 대단하오. 하지만 백작의 자신감은 너무 과한 거 같소이다.”
“내 자신감이 과하다고?”
“그렇소,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알겠으나 영주가 겁도 없이 가장 앞에 서다니. 죽기 딱 좋은 행동이오. 담당 교사가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군. 쯧쯧.”
지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귀족이고 기사 아니랄까 봐 보자마자 훈수를 두고 있었다.
거기에 교사 얘기를 한다는 건 자신을 아직 제대로 된 영주가 아니라 어린애로 여긴다는 모욕이었다.
‘벨린다가 들었으면 남의 교육 방식에 웬 참견이냐고 화를 펄펄 냈겠군. 없어서 다행인가.’
지셀은 말에서 내리며 검을 뽑았다.
“누가 겁이 없는지는 봐야 할 거 같은데.”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구려. 그거야말로 젊음의 특권이지.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만큼 부족한 점도 있을 수밖에 없는 법.”
“내가? 뭐가 부족한데?”
“바로 연륜과 경험이지.”
“…….”
허튼 남작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지셀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싸움은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오. 비슷한 경지라면 결국 얼마나 실전 경험을 많이 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 나는 법이지.”
“…….”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백작에게 한 수 가르침을 주고 싶소만……. 자신 없으면 병력 대 병력으로 붙어도 좋소이다.”
허튼 남작의 오만한 말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전장에서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데는 보통 이유가 있다.
상대가 전장에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다를 떠는 클로드 같은 놈이거나.
일부러 시간을 끌려는 의도거나.
또는…….
‘피해를 줄이고 공을 세우고 싶나 보군.’
영지전은 결국 영주만 잡으면 끝이 나는 전쟁이다. 그런데 젊은 애송이 영주가 눈앞에 직접 나섰다.
일대일 대결로 죽일 수 있다면 병력의 피해도 아끼고, 북부에서 소문이 난 말썽꾸러기를 직접 처단했다는 명성도 얻게 된다.
허튼 남작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이 눈앞에 굴러들어 온 것처럼 보일 터였다. 그래서 저런 식으로 말을 많이 하며 지셀을 도발하는 것이다.
지셀에게 속이 읽힌 줄도 모르고, 허튼 남작은 대놓고 지셀에게 비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격이 제멋대로에 즉흥적이라 들었다. 귀족이라면 이런 도발을 참기 힘들겠지.’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부상당한 상태이긴 하지만, 자신에게는 상대에게 없는 연륜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펜리스 백작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혈기 넘치는 젊은이에 불과하다. 지금까지의 정보로도 그랬다.
자신의 침착함은 북부 제일이라 자부하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집중해서 싸운다면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침착하게 상대를 몰아붙이는 건 경지와 상관없이 오랜 시간을 들여야 쌓이는 능력이었으니까.
“어떻소? 기사 대전이야말로 전장의 낭만 아니겠소? 무서우면 들어가도 좋소이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튼 남작의 도발을 받아 주었다.
“그래, 받아들이지. 재미있는 놈이군.”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길래 보고 있었더니 나름 도발을 하려고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허튼 남작은 죽이려고 했다. 상대가 먼저 나서서 죽어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말 많이 안 해도 싸우고 싶다고 하면 언제나 싸워 주는 게 나다. 와라.”
지셀이 검을 들고 까닥거리자 허튼 남작의 기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거만하게 훈수를 두는 꼰대 귀족의 모습에서 마치 한 자루의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워진 것이다.
“오?”
지셀이 살짝 감탄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세를 보니 확실히 말뿐인 놈은 아니었다.
‘허튼 남작……. 유명한 인물이긴 하지. 이놈 때문에 길리언이 고생한 모양이군.’
그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생은 물론, 전생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전생에 허튼 남작은 해럴드의 세력을 약화하려는 아멜리아의 계략에 걸려 반역자로 몰리다 자결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름만은 북부에서 꽤 유명했기에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셀은 웃으면서 자세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양측의 군대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장수들끼리 대결할 때는 거리를 벌리는 게 관습이었다.
자칫 전투에 휘말릴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싸우다 어느 한쪽이 위험해질 때 아군이 도와주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허튼 남작은 자세를 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펜리스 백작…… 그거 아시오?”
“뭘?”
“나는 젊었을 적부터 지금까지 기사 대전에 다섯 번이나 승리했소. 그리고 아직도 이 자리에 서 있지.”
기사 대전의 승패는 곧 그 전쟁의 승패로 이어진다. 즉, 허튼 남작은 자신만의 힘으로 다섯 번이나 되는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는 뜻이었다.
기사 대전이 성립되었다면 전쟁이라고 해도 작은 분쟁 정도였지만, 어쨌든 홀로 영지의 운명을 등에 짊어지고 싸우는 건 큰 부담감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젊은 백작은 모를 거요. 이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 자리인지.”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있었다. 실력을 떠나서, 펜리스 백작 같은 애송이는 절대 이런 무거운 부담감을 느끼며 싸워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결국 펜리스 백작은 싸울수록 점점 부담감에 짓눌려 침착함을 잃게 될 것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가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지.’
그 생각에 이른 허튼 남작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지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난 백 번 넘게 해 봤는데.”
“뭐?”
말도 안 되는 대답에 허튼 남작이 황당해하는 사이, 지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시작하지.”
파앙!
지셀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나아가며 허튼 남작에게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