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86)
286 – 혼자 온 게 아니거든. (4)
286화 혼자 온 게 아니거든. (4)
해럴드는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간 길리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불타고 있었다.
“지셀……. 지셀……. 이 씹어 먹을 놈의 애송이가 드디어 내 눈앞에 나타났구나.”
해럴드의 마음도 지셀과 다를 바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나 서로를 만나고 싶어 했다.
서로의 목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다그닥. 다그닥.
하얀 깃발을 단 펜리스의 기사 하나가 데스몬드 진영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언가를 휙 던지고 잽싸게 도망갔다.
굴러떨어진 그 ‘무언가’를 본 데스몬드군은 기겁하며 바로 해럴드에게 가지고 갔다.
해럴드는 눈꼬리를 일그러트리며, 병사가 가지고 온 그것을 바라보았다.
“허튼 남작…….”
펜리스의 기사가 던지고 간 것은 바로 지셀에게 목이 베인 허튼 남작의 머리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지, 그의 표정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가득 차 있었다.
허튼 남작이 죽었다는 사실은 도망쳐 온 추격대의 기사와 병사들을 통해 이미 보고를 받았다.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금 분노가 끓어올랐다.
“으으…… 지셀! 지셀 네 이놈!”
언제나 자신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던 놈이, 이번에도 갑자기 나타나 아군의 최고 전력 중 하나를 죽였다.
해럴드의 휘하에 뛰어난 기사들이 즐비하긴 하지만 허튼 남작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자였다. 그가 죽은 이상 앞으로 친왕파의 싸움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실수했다. 부상을 입은 그를 추격대에 편성해서는 안 됐다. 아군의 안전한 호위를 받으며 싸우게 해야 했다.
머리를 쥐어 잡던 해럴드는 핏발이 서 붉게 물든 눈으로 말했다.
“저놈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제대로 진형을 갖춰라.”
침착해야 한다. 어쨌든 내내 죽이고 싶어 했던 놈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공성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다. 이번 전투에서만 이기면 된다.
척! 척! 척!
데스몬드의 대군이 펜리스군을 에워싸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자, 길리언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주님! 일단 피하십시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제 힘들 거 같은데? 도망가다가 꼬리를 잡히면 더 피해가 클걸?”
“제가! 제가 다시 막겠습니다! 어서 돌아가셔서 수성을 준비하십시오! 어이, 너희들! 100명만 나를 따라라!”
길리언이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전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영주님을 모시고…….”
“됐어, 길리언. 지금 나보고 남들이 희생하는 동안 도망가라는 거야? 우리가 질 거 같아서 그래? 이 내가 왔는데?”
“영주님!”
길리언은 답답함에 크게 소리쳤다. 분명 펜리스군은 강하다. 지셀을 필두로 한 300명의 기사와 갈바니움으로 무장한 기마병들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지속력이 약하다는 단점도 명확했다. 기사들이 갑옷의 힘을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마나가 빠르게 소모될 테니까.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저 대군에 맞서 싸워 봤으니까요. 하지만 절반 정도만 죽이고 나면 우리는 다 지쳐 나가떨어질 겁니다. 대군의 가장 큰 이점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더 오래 싸울 수 있어. 저놈들이 모두 다 죽을 때까지 말이지.”
“영주님 혼자 싸울 수 있으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 우리가 이겨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러니까 어서 몸을 피하시고 수성을 준비하십시오! 제가 다시 막겠습니다!”
길리언은 왜 항상 벨린다가 지셀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영주가 겁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나 무모했다.
하지만 지셀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네?”
“길리언과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 내가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야.”
“영주님은 살아야 합니다! 영주님은 혼자 몸이 아니란 말입니다!”
“거, 남들이 오해할 만한 얘기는 하지 말고. 나 아직 싱글이라고.”
“영주님!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영주님은 더 많은 이들을 책임지고 거느려야 할…….”
지셀은 길리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난 길리언을 잃고 싶지 않아. 길리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말에 길리언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를 꽉 깨물었다.
참으로 고마운 말이다. 충성을 바친 주군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 자신들이 왜 희생하려고 했는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닌가.
무릇 많은 사람을 이끄는 자는 냉정해져야 한다. 필요할 때는 취하고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한다. 그것이 사람들을 이끄는 군주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딴 건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항상 최선을 다하는 건, 내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야.”
“영주님…….”
“누군가를 잃으면서 얻어야 할 건 없고, 누군가를 잃으면서 얻고 싶은 것도 없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지셀의 가장 큰 트라우마다. 전생에서 이미 충분히 겪을 대로 겪어봤고 아플 만큼 아파 봤다.
그렇기에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공작가와 싸우려는 게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책임감은 그런 게 아니야.”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 가면서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지셀이 생각하는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난 전멸당할 생각도 없어. 언제나처럼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한다.”
말을 마친 지셀은 바로 흑왕에 올라타며 손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의 논쟁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전군, 전투 준비.”
철컥! 철컥! 철컥!
펜리스의 기사들과 모든 기마병이 투구를 내려 썼다. 그들은 데스몬드의 대군을 앞에 두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영주와 함께한다는 건, 이제 그들에게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길리언도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럼 저도 다시 싸우겠습니다. 내가 쓸 무기를 가져와라! 도끼든 창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고든이 길리언의 가슴을 쿡 찔렀다.
“큭!”
“에이, 이런 몸으로 뭘 싸우겠다고 그럽니까? 나랑 싸워도 지겠네. 아니, 수다쟁이 총관하고 싸워도 지겠는데?”
“으하하하하!”
다른 기사들도 배를 잡고 웃었다. 저 무서운 길리언이 약해진 모습을 보니 다들 재미있어 죽겠다는 분위기였다.
“이놈들! 쿨럭!”
길리언은 열을 내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하고 말았다. 그간 너무 무리하며 싸우다 보니 이제는 정말 몸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고든이 그 모습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우리 교관님 이러다가 죽겠네. 어이 잘 모시고 있어라!”
결국 길리언은 의무병들에게 붙잡혀 움직이지도 못하게 됐다. 뿌리치고 싶어도 뿌리칠 힘이 남지 않았다.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흑왕에 올라탄 지셀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셀은 그런 길리언을 보며 빙긋 웃더니 다시 명령을 내렸다.
“다들 진형을 갖추고 대기하도록.”
뒤쪽은 비어 있지만, 그쪽으로 도망친다면 데스몬드의 전군이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러면 이길 만한 전투도 이길 수 없다.
애초에 지셀은 도망갈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아예 끝장을 볼 계획이었으니까.
그는 침착하게 앞으로 다가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다가오던 데스몬드군이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하나다. 먼저 원거리 공격으로 피해를 주겠다는 뜻.
과연 데스몬드의 진영 앞에 강력한 마력이 몰리기 시작했다.
파직!
공간 자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일그러지더니, 곧 빛이 번뜩이며 작은 번개의 가닥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데스몬드군에 있는 6서클 마법사, 윌로우가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는 영주인 지셀이 선두에 선 걸 보고 기습적으로 그를 노려 마법을 쏘아 보기로 했다. 광역 마법은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이 약화할 수 있으니, 단일 표적을 노리는 빠르고 강력한 마법을 준비했다.
“크큭, 멍청한 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윌로우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법은 이제 적을 꿰뚫을 준비가 된 상태였다.
“라이트닝 로드.”
그가 시동어를 읊자 빛이 폭발했다. 수없이 많은 번개가 서로 교차하며 지셀을 향해 순식간에 뿜어져 나갔다.
그때, 펜리스군의 후방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리플렉트 실드.”
그와 동시에 지셀 바로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콰아앙!
번개는 그대로 반사되어 데스몬드군의 진영으로 향했다.
마법을 시전했던 윌로우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리플렉트 실드는 6서클 마법이긴 하지만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는 마법이다.
마법을 반사하기 위해서는 시전된 마법보다 훨씬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력이 넘치는 자가 아니면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펜리스군 진영에서 그 마법이 시전된 것이다.
윌로우는 남은 한 팔을 다급하게 휘저어 마법을 해제했다.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 나보다 윗줄의 마법사가 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마법을 이리 가볍게 튕겨 내었다는 건, 최소 6서클 마스터에 이른 자란 뜻이다.
‘펜리스에 그런 마법사가 있다고? 이 북부에서 6서클에 이른 마법사는 전부 신상이 파악되어 있는데?’
자신이 알기로는 펜리스에 6서클 마법사는 없었다. 적염의 마탑주의 후계자인 알포이가 펜리스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는 널리 퍼져 있지만, 그는 겨우 4서클에 불과하다.
‘우, 우리가 모르는 고위 마법사가 나타났다.’
윌로우는 바로 해럴드에게 보고를 올렸다. 대규모 마법 공격을 준비하던 해럴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만약 윌로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법 전력은 상대의 공격을 견제하며 빠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네사가 6서클에 오른 걸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마법사 한 명이 마력을 빨린 채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는 것도 말이다.
그녀는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려고 일부러 강력한 마법을 선보였다. 덕분에 데스몬드군의 마법사들은 행동에 제약이 생겨 버렸다.
상대의 마법 전력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견제를 하려면 마력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해럴드가 이를 갈며 말했다.
“마법 공격은 잠시 멈춘다. 천천히 다가가며 더 촘촘하게 포위해라. 저놈들이 압박감에 먼저 지치도록 해라.”
데스몬드군이 조금씩 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조심스럽게 맹수를 몰아가는 사냥꾼 무리와도 같았다.
이것은 대군이 취할 수 있는 이점 중의 하나였다. 수적으로 열세에 몰린 적은 당장 어느 쪽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 긴장감이 오래 지속되면 싸우지 않아도 몸에 엄청난 피로가 쌓이게 된다. 실제로 사냥꾼들이 맹수를 잡을 때도 이런 식으로 천천히 몰아가는 건 그런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해럴드는 뛰어난 지휘관이다. 그는 대군을 몰고 왔음에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지셀을 죽일 생각이었다.
“궁병들도 거리를 좁혀라. 마법사들도 다시 공격을 준비하도록.”
창병들의 뒤에 있던 궁병들도 펜리스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본진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도 천천히 병사들을 따라가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쉼 없이 펜리스군을 화살과 마법으로 두들겨 지치게 할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천천히 다가오는 데스몬드군이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펜리스군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감을 높였다.
데스몬드군은 그간 길리언의 활약을 몸으로 받아 내며 펜리스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수가 많아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펜리스군도 영주를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만한 대군을 상대한 적이 없었기에 압박감에 점점 짓눌려 갔다.
그때 갑자기 지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길리언에게 하나 말을 안 한 게 있네.”
두두두두두.
멀리서 군마들이 힘차게 땅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데스몬드군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두두두두!
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데스몬드군은 그제야 자신들의 우측에서 달려오는 군대를 발견했다.
부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크게 울리며 모두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것을 본 해럴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왕국군?”
선두에 휘날리는 왕실의 깃발. 바로 클리프턴 자작이 이끄는 3군단이었다.
그리고 3군단의 뒤로 휘황찬란한 귀족들의 깃발을 든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바로 이더리안 자작이 이끄는 투자 피해자들의…… 아니, 귀족 연합의 군대였다.
해럴드가 미처 무어라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어디선가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그는 소리가 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좌측에서도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저건…… 페르디움?”
그 군대 위에는 하얀 늑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페르디움군이 왕국군과 함께 시간을 맞춰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양쪽의 군대를 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내가 혼자 온 게 아니거든.”
후방에 있던 길리언은 눈을 크게 뜨고 새로이 나타난 군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잊고 있었다. 지셀이 예전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지셀이 아무것도 없고 무시당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길리언이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데스몬드군이 당황하는 사이, 양측의 군대가 데스몬드를 둘러싸듯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창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가자.”
다그닥, 다그닥.
흑왕이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저 눈앞에 데스몬드의 대군이 장엄하게 열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지셀이 씨익 웃었다.
“오늘 이후로…….”
아니, 어쩌면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가 북부 최강이라 불릴 것이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히이이이잉!
긴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흑왕이 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