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95)
295 – 아직 때가 아니니까. (1)
295화 아직 때가 아니니까. (1)
아멜리아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얄미운 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게 되었다.
재주는 지셀이 부리고 열매는 자신이 먹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 말이다.
“이제는 내가 뒤통수를 쳐 주지, 지셀.”
명분이야 내세우려면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애초에 자신과 데스몬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동맹을 맺은 사이다.
친왕파도 바로 자신과 싸우려 하지 않을 테니 협상만 잘하면 데스몬드 영지의 절반 정도는 그냥 받아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반절은커녕 단 한 치도 뱉어 낼 생각이 없지만 말이다.
‘공작가는 나를 도와줄 수밖에 없겠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끝난 일이었다.
해럴드를 잃은 공작가는 북부 진출의 교두보로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영토 분쟁이 일어나도 적극적으로 중재해 줄 것이다.
“혹시 모르니 전속력으로 진군해라. 어떻게든 주요 성과 요새를 우리가 먼저 차지해야 한다.”
자신의 뒤를 노리는 놈들은 모두 처리했다. 지셀과 해럴드는 이제 막 싸움을 끝냈을 것이다.
당장 진군을 방해할 요소는 전혀 없기에 아멜리아는 마음 놓고 속도를 높였다.
펜리스군도 그렇지만 레이폴드군도 전투의 피로가 쌓여 있다. 그들이 아무리 정예라 해도 누적된 피로는 어찌하지 못한다.
베르나프는 밤이 깊어지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 할 거 같습니다. 야간이라 이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병사들도 많이 지쳤고요.”
“쯧.”
아멜리아는 혀를 찬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천에 가까운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속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다. 데스몬드를 점령할 때까지 휴식은 없다. 동이 트는 대로 기마병들과 기사들을 앞서 보내도록. 보병들은 뒤를 따른다.”
“알겠습니다.”
곳곳에 횃불이 설치되고 숙영 준비가 금세 끝났다. 전쟁 중인 상황도 아니고 노리는 적들도 없으니 다들 평시와 비슷한 수준의 경계 상태를 유지했다.
이어질 행군을 각오하고 모두가 급히 잠든 사이에도 아멜리아는 쉬지 못했다.
그녀는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 안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앞으로의 일을 다시 점검하기에 바빴다.
“베르나프, 지금 병력으로는 빠르게 데스몬드의 전역을 점령할 수 없어. 그러니 우선 주요 길목만 막고…… 베르나프? 내 말 듣고 있어?”
고요한 침묵에 아멜리아가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
베르나프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호위이자 참모랍시고 옆에 붙여 놨더니 누구보다 빠르게 잠들었다.
아멜리아는 짜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굳이 깨우진 않았다. 베르나프도 반란에 내전에 근래 고생을 많이 하긴 했으니까.
바스테트도 그녀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고 잠이 든 지 오래였다.
“하아…….”
고개를 몇 번 저은 아멜리아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공작가에서 뭘 뜯어내고 북부를 차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지셀은 당장 건들기가 곤란해졌어. 대신 공작가가 조만간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렇게 그녀가 눈앞에 있는 지도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츠츠츠츳.
그녀의 뒤에서 아주 은밀하게 어둠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마치 사람처럼 보이는 형체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런 현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순간 바스테트의 귀가 쫑긋 섰다.
베르나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잠이 든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왼손 엄지는 저절로 움직여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가드를 살짝 밀쳐 냈다.
딸각.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와 동시에.
냐앙!
바스테트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베르나프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검을 뽑아 아멜리아의 등 뒤를 막았다.
카아아앙!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아멜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암살자를 발견했다.
베르나프는 왼손으로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쓰읍, 누구냐, 넌.”
암살자는 검은 로브와 검은 가면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단검을 내지르다가 막힌 암살자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흐음, 역시 무리였나.”
아멜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여자의 목소리다.
그 순간, 암살자의 로브가 펄럭이며 수십 개의 단검이 쏟아져 나왔다.
카카카카캉!
베르나프의 검이 번개같이 움직여 단검들을 모조리 튕겨 냈다. 그는 단검을 쳐내는 즉시 앞으로 나서며 검을 내리쳤다.
스걱!
베르나프의 검은 암살자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지만, 검에 실린 강렬한 기운이 암살자가 쓴 가면을 베었다.
가면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자 고혹적인 웃음을 띤 얼굴이 드러났다.
암살자는 베르나프를 보며 말했다.
“어머……. 생각보다 멀쩡한 사람이었네.”
베르나프가 발끈하려 했지만 아멜리아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암살자의 정체는 벨린다였다.
아멜리아가 벨린다를 알아본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에게도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예전에 그녀가 자신의 목에 건방지게 단검을 가져다 댔던 것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나니 더더욱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셀의 최측근이나 다름없는 여자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걸까.
“네가…… 여기에 왜 나타난 거지?”
“그야 물론 아가씨를 죽이러 왔지요. 여기서 계속 기다렸지 뭐예요.”
“나를 암살하러 왔다고? 지셀이 해럴드와 싸우고 있는데 그쪽은 내버려 두고?”
“도련님이 아가씨 발 좀 잡아 두라고 하셔서 말이에요. 저도 전쟁에 끼고 싶었는데 꼭 여기로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니 별수 있나요. 제가 아가씨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벨린다가 자못 섭섭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셀의 명령을 받아 아멜리아의 진군을 방해하러 온 것이다.
당연히 벨린다도 처음에는 반대했다. 데스몬드의 3만 대군에 맞서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지셀 옆에서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는 게 맞지 않겠냐고 버텼다.
하지만 지셀은 그녀를 이곳으로 보냈다. 어차피 암살 기술을 주로 쓰는 벨린다는 대규모 회전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대며.
그럴 바에는 그녀의 힘을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곳에 투입하는 게 이득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전부 맞는 말이라 벨린다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지셀의 명령에 따랐다.
그 뒤로 전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몰라 벨린다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멜리아가 나타나자 한시름 놓았다.
레이폴드군이 움직였다는 건 지셀이 승리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이를 갈며 벨린다를 노려봤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셀…… 그놈이…… 내가 움직일 줄을 예상했다고? 해럴드와의 전쟁을 코앞에 두고도 미리 너를 보냈다고?”
“그렇다니까요? 참 신기하다니까.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벨린다의 확신 어린 대답에 아멜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지셀이 해럴드와 맞붙기 전부터 자신은 발루아 남작과 싸우고 있었고 북부 연합군까지 맞서 싸웠다.
자신이 그들을 전부 이길 것도, 지셀의 승리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일 것도 예측했다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파악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머릿속을 읽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멜리아의 머릿속에 그동안 지셀이 벌였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룬스톤을 확보하고, 가뭄을 예측하고, 각종 신기술을 개발하고, 자신의 반란을 미리 알고 데이븐을 빼돌린 일까지.
이건 마치…….
‘그놈이 미래를 예지하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지셀의 행적을 돌아보면 대륙에 드물게 나타나는 예언자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 해도 추상적으로 미래를 예견할 뿐이지, 이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멜리아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예지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재의 범주를 벗어난 건 확실했다.
그놈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 저 높은 곳에서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느낌.
‘죽여야 해!’
아멜리아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지셀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놈이 짠 판에서 계속 놀아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죽여야 할 사람이 눈앞에 있다.
“예전에 네년 목을 꼭 가져오라고 했었는데 말이야. 멍청한 놈들이 실패했지. 그때 지셀을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는데.”
“아, 그때요. 아가씨는 좀 아쉬우셨겠어요.”
“그래, 상당히 아쉬웠어.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그때의 복수를 하려고 온 건가? 날 암살하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어?”
벨린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게요. 도련님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이렇게 멋진 호위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거였네요. 소문만 들었을 때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베르나프가 다시 발끈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아멜리아의 말이 더 빨랐다.
“암살에 실패했으니 내 발목을 잡는 건 불가능하겠네. 너 같은 하녀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어머, 너무 자신만만하시네요. 아가씨는 제가 올 줄도 몰랐잖아요?”
“그래서 암살에 성공했나?”
“아직 끝난 거 아니거든요?”
두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살기가 듬뿍듬뿍 흘러나왔다.
그 강렬한 기 싸움에 베르나프는 벨린다를 공격하는 것도 잊고 살짝 눈치를 봤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무척이나 약했다.
“죽여, 베르나프.”
냐앙!
하지만 아멜리아와 바스테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바로 벨린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벨린다도 단검을 들어 베르나프의 검을 막아 냈다.
베르나프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빛이 번뜩이며 사방을 갈랐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그녀에게 적중하지 않았다. 그저 로브 자락만 몇 번 베었을 뿐이다.
검을 휘두를수록 베르나프의 인상은 조금씩 찌푸려졌다.
‘무슨 움직임이…….’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듯하다. 벨린다가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계속 일그러져 기척을 감지하기가 어려웠다.
까다로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파팟!
일그러진 공간에서 로브가 펄럭일 때마다 수십 개의 단검이 튀어나온다.
‘이런!’
카앙! 카앙! 카앙!
베르나프는 잽싸게 다시 물러나며 단검들을 쳐 냈다. 벨린다와 연결된 단검들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계속 아멜리아를 노렸다.
뛰어난 암살자 앞에서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나프는 천막 입구를 힐긋 바라보았다.
이 정도 소란이 났으면 밖에 있는 병사들이 들어왔어야 하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미 죽은 건가.’
원래는 호위 기사들을 대동해 아멜리아 주위를 철통같이 지킨다. 하지만 지금은 호위 병력을 병사들로 대체한 상태였다.
이 정도 실력이면 병사 몇 명 정도는 기척도 없이 죽일 수 있었다. 하필이면 기사들을 쉬게 했을 때 암살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간의 일정이 무리했던 탓에 휴식을 줄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아멜리아가 위험에 처한 것은 호위 단장인 자신의 명백한 실수였다.
‘잠깐이면 된다.’
베르나프는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기사들의 천막은 그리 멀지 않다. 충분히 이변을 느끼고 달려올 만한 거리였다.
카앙!
벨린다도 아멜리아를 죽이기 쉽지 않다고 느꼈다.
‘이 바보가 이 정도 실력일 줄이야. 야외에서 방심한 상태라면 성공할 줄 알았는데.’
베르나프는 아멜리아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바보로 소문이 난 자다. 그가 이런 실력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멜리아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면서도 기회가 나면 바로 다가와서 검을 휘두른다. 벨린다도 위험할 뻔한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대단한 건 아멜리아의 반응이었다.
단검이 코앞까지 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오히려 벨린다를 죽일 듯이 노려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벨린다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보통이 아니네.’
마나도 다룰 줄 모르고 검 하나 쓸 줄 모르면서 저런 강단이라니.
지셀과는 다른 의미로 참 무서운 사람이었다.
카앙! 카앙! 카앙!
벨린다와 베르나프, 두 사람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수십 개의 단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그걸 쳐 내는 검날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수없이 많은 공방이 오고 갔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촤아아악!
갑자기 천막 곳곳이 갈라지며 십수 명의 기사들이 난입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암살자를 죽여라!”
기사들이 바로 검을 들고 벨린다에게 덤벼들었다.
“칫.”
죽일 수 없는 적에게 집착하는 건 암살자의 덕목이 아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뒤로 빼며 웃었다.
“역시 실패네요. 그런데…… 제가 혼자 온 게 아니거든요.”
화아악!
벨린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숙영지 곳곳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병사들의 고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적이다!”
“암살자들이 들어왔다!”
“어서 일어나!”
지셀이 남몰래 벨린다와 함께 키운 힘.
페르디움의 암살대가 레이폴드군의 숙영지를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