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299)
299 – 이제 다음을 준비하자고. (2)
299화 이제 다음을 준비하자고. (2)
펜리스 관리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영토가 훨씬 더 넓어진 만큼 할 일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클로드를 위시해 많은 행정관이 데스몬드 지역으로 넘어왔다.
오기 전에 잠깐 ‘일에 치여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클로드였지만, 막상 데스몬드 지역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게 진짜 전부 우리 땅이 되어 버리다니.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카발디 지역을 점령했을 때보다 훨씬 얌전한 반응이었다. 그때도 기뻐서 날뛰었으니, 카발디보다 훨씬 큰 데스몬드를 점령했다면 더 기뻐야 정상일 텐데.
성과가 너무 커서 믿기지 않아 감정도 좀처럼 안 올라왔다.
“이게 진짜인가?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웬디야, 내 볼 좀…… 아, 지금 없구나.”
클로드는 아련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펜리스에 왔을 때가 새록새록 생각났다. 지셀이 돈이 많아서 대영주의 후계자인 줄 알았다가 크게 실망하지 않았던가.
거지 같은 영지로 끌려와서 노예로 전락한 뒤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지금도 더러운 처지인 건 마찬가지지만……. 우리 영주님이 진짜 대영주가 되어 버리다니.”
너무 큰 일을 당하면 사람이 멍해진다. 지금 클로드의 심정이 딱 그러했다.
지셀이 졌으면 자신도 그냥 죽었을 텐데 안 죽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하지만 얌전하던 것도 잠시, 본격적으로 성에 도착하자 슬슬 클로드는 콧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에헴, 내가 바로 대영지 펜리스의 총관이로다. 이제부터 품위에 신경을 좀 써야겠어.’
왠지 자꾸 얼굴에 슬금슬금 미소가 올라왔다. 광대가 솟아오르는 걸 참기 힘들었다.
클로드는 마차 안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오랜 세월 동안 불의와 악에 고통받아 온 그대들에게 내가 정의를 되찾아 주겠노라!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갈 것이며…… 크, 나 왜 이렇게 멋지냐? 다들 감동하겠지?”
클로드는 히죽 웃으며 스스로의 멋짐에 감탄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그는 영지민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지금 오는 사람이 영지의 총관이래.”
“북부의 뇌물왕이라나? 아주 부패하고 엄청 독한 인간인데, 입만 열면 거짓말을 내뱉으니 믿지 말라더라.”
“도박 중독자라는 소문도 있어. 정신병자라는 소문도 있고. 아무튼 눈에 띄면 안 된대.”
“아휴, 그 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놈이 얼마나 우리를 괴롭히고 뜯어갈까? 벌써 걱정되네.”
영지민들은 클로드가 탄 마차만 보고도 걱정 어린 한탄을 내뱉었다.
오는 내내 욕을 먹은 것도 모르는 클로드는 위풍당당하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총관님이 오셨다!”
노예지만 그래도 펜리스에서는 서열 2위다. 성 밖에서부터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클로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클로드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받았다.
‘캬, 도망 안 가길 잘했네. 내가 대영지의 총관 클로드다! 내가 이 기분에 총관한다, 진짜.’
“어머, 총관님 왔어요?”
벨린다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그 옆에 있던 웬디가 벨린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클로드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본 클로드는 순간 눈물을 글썽거리며 외쳤다.
“웬디이이이이! 너 없으니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흐어어어엉!”
클로드가 콧물까지 훌쩍거리며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왔다. 웬디는 잽싸게 클로드의 머리를 밀어 내며 주변을 살폈다.
지나가던 병사들과 사용인들이 모두 비웃음을 참는 듯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웬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이 새끼는 진짜 창피한 걸 모른다.
“비키……세요.”
“흐어어어엉! 날 떠나지 마!”
“제발…… 좀…….”
창피함에 웬디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암살자인 자신이 이렇게 반응하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클로드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그러면 영주님을 만나러 갈까?”
웬디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앞서 걷는 그를 노려보다 고개를 몇 번 젓고는 다시 뒤를 따랐다.
지셀은 클로드를 보자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여, 클로드 어서 오고.”
“으하하하! 대영주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클로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축하하자 지셀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일 더 하느니 죽으려고 한 거 아니었어?”
“아휴,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으셨대. 억울해서 안 죽을 거거든요? 나중에 영지가 안정화되면 아주 그냥 실컷 놀고먹다가 때깔 좋게 죽을 거거든요?”
클로드의 야망에 지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뭐……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뭐 인사는 이쯤이면 됐고…… 가신들 다 죽이셨죠?”
“응.”
“네, 알겠습니다. 남은 우리만 죽어나겠네.”
지셀의 깔끔한 대답에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기겁할 일이라도, 사람이 같은 일을 여러 번 당하면 이렇게 익숙해지는 법이다.
지셀은 전쟁 군주다. 전쟁으로 계속 영토를 넓히고 있다. 새로운 영지를 얻은 뒤 해야 할 일은 뻔했다.
“그럼 바로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언제나…….”
“네네, 빠르고 확실하게.”
클로드는 다 알아들었다는 듯 손을 휘휘 젓고는 몸을 돌렸다. 여유가 넘치는 게 진짜 대영지의 총관 같았다.
“야, 아직 말 안 끝났는…….”
지셀이 황당해하며 불렀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로드는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지셀은 헛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래, 일단은 현황 파악하고 안정화부터 해야 하니까. 다음에 얘기하지, 뭐.”
클로드는 바로 관리들을 이끌고 영지의 현황 파악에 들어갔다.
‘저번에는 허겁지겁 빼돌리려다가 걸렸지. 이번에는 몰래 잘 빼먹어 보자!’
장엄한 마음으로 가장 먼저 데스몬드 백작의 개인 재산을 확인한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왜…… 거지야?”
사실 거지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평범한 영주들의 재산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영지의 주인이라길래 기대했건만 카발디 백작에 비하면 재산이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데스몬드 백작이 이렇게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는 사치스럽지는 않았지만, 귀족답게 품위 유지에는 돈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클로드는 허겁지겁 다른 가신들의 사재와 영지의 창고들까지 다 뒤져 봤다.
“뭐야! 왜 다 거지냐고!”
어느 창고든 다들 별거 없었다.
클로드의 머릿속에서 데스몬드는 악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악덕 영주인 카발디 백작보다 더 많은 재산을 착복하고 쌓아놨어야 했다.
“누가 벌써 훔쳐 간 거냐!”
길길이 날뛰던 클로드는 쌓여 있는 서류를 확인하고 나서야 어찌 된 일인지 이해했다.
“와, 이 새끼들 진짜 진심이었구나.”
지셀을 죽이려고 영지의 모든 재산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영지의 재산은 대부분 식량과 병장기로 바꿔 먹은 상태였다.
“에이 씨, 이것들은 우리한테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데.”
지셀이 데스몬드의 본대를 처리한 뒤에 뒤따라오던 보급대는 자연스럽게 항복했다. 덕분에 수많은 병기와 물자를 획득하긴 했지만, 펜리스에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식량이야 본래도 썩어날 정도로 넘쳤고, 철제 무장과 도구는 죄다 갈바니움으로 교체하는 중이다.
병기를 잔뜩 얻었어도 오히려 다시 녹이는 인건비와 시간만 더 들 게 뻔했다. 굳이 쓸 만한 걸 추리자면 공성 병기 정도였다.
“흐음, 무장들이라 어디 팔아 버릴 수도 없고. 아니지, 친왕파에 생색이나 내면서 싸게 팔아 버릴까?”
차라리 다른 자원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써먹었겠지만, 지금은 데스몬드 영지 전체가 개털이 된 상태이니 머리만 아팠다.
거기에 영지민들의 재산까지 죄다 징발한 모양이다. 그래도 나중에 보답을 주려고 한 건지, 가구별로 얼마나 징발했는지 정리는 잘 되어 있었다.
“데스몬드 백작이 아주 치사한 놈은 아니었구먼.”
물자를 긁어모으는 중에도 그냥 막무가내로 뺏어 가진 않았다. 귀족적 사고방식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해럴드다웠다.
대략적인 현황 파악을 끝낸 클로드는 일의 우선순위를 매겼다.
“으음, 제일 먼저 영지민들에게 식량부터 나눠 줘야겠군.”
데스몬드는 식량 생산량이 많은 곳이다. 밀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작물들이 풍족하게 나는 편이다. 하지만 예전에 지셀에게 대량의 식량을 팔고 난 뒤 찾아온 가뭄의 여파로 상황이 안 좋아졌었다.
그 와중에 거대 상단까지 날리고, 그나마 남아 있던 식량도 전쟁 물자로 죄다 징발해 갔다. 그러니 영지민들의 사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새 영토를 점령할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 지금은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클로드가 대량의 식량 수레들을 끌고 나타나자 영지민들은 착잡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게 원래 다 우리 거였는데…….”
“어쩌면 더 뺏어 갈지도 몰라. 우리보다 가난한 영지였다며?”
“젠장, 어쩌다 우리가 저런 촌놈들한테 진 거지?”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불만이 한가득했다.
전쟁에 이기기만 했다면 많은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데스몬드 백작은 무섭지만 적어도 약속을 어기는 치졸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됐다. 가뜩이나 가뭄의 여파로 형편이 안 좋아졌었는데 이제는 정말 먹고살기도 팍팍해졌다.
사실 그들이 빈털터리가 된 것은 데스몬드 백작이 전쟁에서 빠르게 승리할 거라 자신하며 먹을 것만 조금 남기고 거의 다 털어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원망의 대상을 잘못짚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자신들이 받았을 보상이 지셀 때문에 날아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중심지에 사는 영지민들일수록 영지에 대한 자부심이 컸기에 더 불만이 많았다.
그런 영지민들을 둘러본 클로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하단 말이야. 왜 우리만 오면 다들 싫어하지?”
어차피 나중에는 좋아할 거면서.
히죽 웃은 클로드는 곧 큰소리로 외쳤다.
“데스몬드 백작이 약속한 보상은 우리가 대신 지급해 주겠다. 그것도 두 배로!”
“……?”
영지민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두 배로 준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치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이 나와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그렇게 주실 생각입니까?”
“그래!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영지민들이 모두 불신 어린 표정을 지었다. 데스몬드 영지에는 이미 클로드에 관한 괴상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왜 오자마자 이런 눈빛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클로드는 발끈했다.
“지금 당장 나눠주겠다! 곳곳에 임시 분배소를 만들어 뒀으니 데스몬드 백작에게 받았던 증서를 가져오도록! 단, 각자 납부한 품목이 다르니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식량으로 통일해서 지급하겠다!”
그 말에 영지민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식량으로 받는 게 당연히 더 이득이다. 일단 당장 먹고사는 데도 필요하고, 먹고 남은 건 오가는 상단들에 쉽게 팔 수 있었으니까.
소문이 퍼지자 영지민들은 믿음 반, 불신 반으로 각 분배소를 찾았다.
“와! 진짜 주잖아!”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이 받았어!”
“펜리스 백작님 최고다!”
이들에게 영지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한테 잘해 주는 영주가 최고인 것이다.
북부의 다른 영지와 다르게, 데스몬드에서는 죽을 정도로 굶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식량을 나눠 주기만 했을 뿐인데 민생이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영지 변방의 가난한 마을 주민들은 식량을 나눠주자 중심지의 영지민들보다 훨씬 더 열광했다.
그나마 데스몬드 백작에게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중심지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데스몬드 백작이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저 세금 내라면 내고 뭐 좀 달라고 하면 주면서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고 오히려 식량을 주니 펜리스 백작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나날이 높아졌다.
“봐! 진짜 주잖아! 날 믿으라고!”
클로드는 길길이 날뛰며 데스몬드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가 빠르게 돌며 영지민들을 달래니 펜리스에 대한 적개심은 많이 줄어들었다.
“끄응, 그런데 이거 다른 문제가 좀 있네.”
적개심을 줄였다 해도 영지 분위기가 단번에 안정되지는 않았다. 데스몬드 백작이 모든 병력을 끌고 나간 탓에 생긴 후폭풍 때문이다.
클로드는 피곤한 눈을 끔벅이며 지셀에게 새로운 보고를 올렸다.
“범죄 조직이 너무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데스몬드가 패배했다는 소문이 돈 뒤로는 아주 별놈들이 다 뛰쳐나왔어요. 점령기의 혼란을 틈타서 자리를 잡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 모양입니다.”
“범죄 조직이 많아졌다고?”
“데스몬드 백작이 아예 경비병까지 죄다 끌고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죠. 이거 수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습니다.”
“흠, 영지민들이 많이 동요하고 있겠지?”
“당연하죠. 우리가 나눠준 식량을 노리는 놈들이 많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모양입니다. 이미 뺏긴 사람들도 있고요. 우리가 아직 행정과 치안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터라.”
오자마자 단번에 처리하기는 힘든 분야였다. 행정 체계도 펜리스처럼 바꿔야 하고 관리도 많이 필요했다.
거기에 이 넓은 영지의 치안을 유지하려면 군사도 적절하게 배치해야 한다. 현재 계속 훈련병들이 넘어오고는 있지만 여전히 인력이 부족했다. 치안 확보는 결국 시간이 걸리는 문제였다.
“흐음…… 빨리 안정을 시켜야 하는데.”
데스몬드 백작은 그저 고비 중 하나일 뿐이다. 영지를 빠르게 안정을 시켜야 더 무서운 적과 싸울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도 요새를 짓고, 마을들을 통합하고, 각종 시설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영지민들이 불안에 떠느라 제대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 큰 손해다.
“얼마나 걸릴 거 같아?”
“지금 기사와 헌터들까지 모두 투입해 치안을 확보하려고 하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지리도 잘 모르고, 영지민들과의 협조도 잘 안 되고 있고요. 정리하는 데 최소 반년은 걸릴 거 같습니다.”
“야, 안 돼. 너무 오래 걸리잖아? 지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범죄자들 잡는다고 몇 달이나 써!”
“하,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무작정 잡는다고 끝나는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찾아가서 ‘너 범죄자지? 죽어.’ 이럴 수는 없다. 그렇기에 범죄 조직은 은밀하고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래서 영주들도 범죄 조직이 세금만 잘 바치면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더러운 일을 시킬 때 그들을 이용하면 편하니까.
백번 양보해서 무작정 잡아 오더라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정말 죄가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어느 정도 벌을 줄 것인지 재판도 거쳐야 한다.
“당장 범죄를 저지른 놈은 잡아서 때려죽이면 되는데 은근하게 숨어서 나쁜 짓 하는 놈들이 문제라니까요. 그런 놈들을 어떻게 다 솎아냅니까? 당장은 죄를 안 지었는데.”
별게 아닌 거 같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오히려 영지민들이 영주를 불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잡힌 놈들이 범죄자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설령 범죄자인 걸 알더라도 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언제 자신에게도 눈먼 화살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불안과 반감을 품게 된다.
그렇기에 귀족들도 겉으로나마 명분과 법을 지키는 척하는 것이다.
물론 악덕 영주라면 영지민들의 불안감 같은 건 그냥 무시하겠지만, 지셀은 그런 영주로 보이면 안 된다.
“흐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그렇죠. 치안을 강화하고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계속 억제하고 감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래도 안정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고요.”
“그거 너무 비효율적이야. 시간이 많이 들어서 마음에 안 들어. 어쩔 수 없군. 이번에도 내가 나서는 수밖에.”
“뭐…… 또 어떻게 하시려고요?”
“영주가 마음대로 법을 집행한다는 인식만 안 주면 되는 거 아냐? 영주가 죄 없는 사람 잡아간다는 소문만 안 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건…… 그렇죠.”
“그럼 어렵지 않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범죄에는 범죄.”
“네?”
클로드가 불안한 눈빛으로 반문하자 지셀이 씨익 웃었다.
“내 복면을 가져와라. 그놈들한테 천벌을 내려야겠다.”
자신이 했다는 것만 안 걸리면 된다.
약탈왕과 40인의 도적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