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304)
304 – 나는 약탈왕이다. (5)
304화 나는 약탈왕이다. (5)
브랜포드 후작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머릿속에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델파인 공작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나 여유 있는 미소와 그에 대비되는 무심한 눈빛.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공작은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권위적이지 않고 누구에게나 상냥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 이후로 그는 잔학무도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 갑자기 광증이 도졌다는 소문이 돌고, 공작은 오랫동안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브랜포드 후작도 그가 이제는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공작가의 모든 대소사는 요제프 자작이 실권을 잡고 행하고 있었으니까.
‘요제프 자작이…… 오히려 내전을 억누르고 있었다고? 공작이 아니라?’
브랜포드 후작도 공작가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금 같은 구도를 이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공작의 뜻이라 생각했다. 요제프 자작이 실권자이고 공작이 허수아비란 소문도 있긴 했지만, 상징성을 거머쥔 그의 뜻을 완전히 거스를 순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실은 전쟁을 바라는 공작을 요제프 자작이 설득하고 있었다니.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 친구가 왕국을 차지하려 하는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젊었을 적, 브랜포드 후작과 델파인 공작은 같은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동문이었다.
공작은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몽상가에 가까웠다. 언제나 멍하니 혼자 생각에 잠기는 걸 좋아했다.
브랜포드 후작이 야심 차게 왕국의 정치와 권력에 대해 말하면 공작은 항상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인세의 정치와 권력이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을.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기에 살아가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게 아닌가? 특히 우리 같은 사람은 더 중요하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 나는…… 더 먼 곳을 보고 싶다.
열정적인 브랜포드 후작과 달리 델파인 공작은 그렇게 자신의 위치와 신분에 맞지 않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가끔 그 눈에는 정체 모를 열망이 가득 차곤 했다.
그렇기에 브랜포드 후작은 델파인 공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작파와 대립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그도 나이가 들고 변했을 거라 억지로 이해한 게 전부였다.
‘됐다. 내가 그를 잘못 봤던 거겠지. 시간이 오래 지나기도 했고.’
수십 년의 시간은 사람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고 공작은 이미 왕국의 적이 된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자를 이해하려 할 필요도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실권자고 무슨 뜻을 품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작가가 왕국을 차지하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지 않소. 그저 양쪽 다 아닌 척 언급을 안 할 뿐이었지. 어차피 최악의 경우 내전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거요.”
브랜포드 후작의 날카로운 말에 포우드 백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얼마나 죽느냐는 다른 문제지요.”
“죽음이 두려워 명예를 버릴 생각은 없소이다.”
“전쟁으로 왕국의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말입니까?”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왕국의 모든 이가 죽어도 공작이 왕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사람들의 목숨보다 왕실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그게 내 소임이오.”
포우드 백작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각하, 이 왕국에서 각하의 명령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각하께서는 이미 이 왕국의 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폐하께서는 병으로 드러누웠고 왕실은 허수아비로 전락한 지 오래지 않습니까? 그 자리의 주인만 바뀌면 피를 적게 볼 수 있습니다.”
“닥치시오!”
콰앙!
의자의 팔걸이를 후려친 브랜포드 후작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포우드 백작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왕국에 승냥이 같은 놈들만 가득하기에 내가 왕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지킬 수 없을 테니까.”
“…….”
“공작에게 똑바로 전하시오. 그 야심을 접고 물러난다면 나 또한 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왕실을 적대한다면 내 끝까지 싸우겠다고. 알겠소이까?”
“……알겠습니다.”
포우드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브랜포드 후작은 철혈의 권세가라 불리는 자다. 사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것이 마지막 설득이자 협상이었다.
“후우…….”
포우드 백작이 물러나자 브랜포드 후작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알고 있다. 세간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말이다.
왕국 최고의 권세가, 왕은 아니지만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
차기 국왕마저도 그의 승인을 거쳐야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을 휘두르는 자.
그의 뜻은 아니었지만, 왕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역사는 자신을 불충한 자로 기록할지 모른다.
“나도 늙었군.”
예전과 다르게 쉽게 피로가 몰려온다. 정치를 너무 오래 한 후유증이리라.
슬슬 후계자를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동부의 군사령관으로 있는 자신의 아들은 성에 차지 않는다.
‘지셀 페르디움…….’
이상하게 후계를 생각하면 그놈부터 떠오른다. 애초에 그 정도까지 염두에 두고 밀어준 건 아니었는데.
여전히 불안하고 미덥지 않긴 하지만 그놈만 한 인물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놈이 왕실에 충성만 하면…….’
그 생각에 이르자 브랜포드 후작은 피식 웃었다.
“그놈이 그럴 리가 없지.”
그래, 아무리 봐도 그럴 놈 같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지셀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왕실을 엎어 버릴 놈이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문제가 없는 놈은 없었다.
‘공작가만 무너뜨린다면…….’
그때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그게 브랜포드 후작의 작은 소망이었다.
* * *
델파인 공작가.
그의 시조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루타니아 건국왕의 형제라는 설도 있었고, 외척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었으며, 공신이라는 설도 있었다. 루타니아를 수호했던 용의 후손이라는 황당한 설도 전해진다.
설만 있는 이유는 관련된 모든 사료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공작가는 공작가였다. 델파인 공작가의 주인은 언제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왔다. 그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공작령은 남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지역이다. 수많은 자원이 있어 축복받은 땅이라고도 불린다.
공작가는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대대로 강력한 힘을 길러 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왕실을 위협하거나 왕위를 뺏으려는 야심을 품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공작가의 주인들은 항상 공석에 나서는 걸 꺼렸고, 숨어 사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별의별 소문들이 돌다 시들기를 반복했지만 공작가는 언제나 침묵할 뿐이었다.
이번 대의 공작이 야심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작령의 중심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백색 성이 있다. 이곳이 바로 공작이 기거하는 성, ‘이클립스’였다.
성내의 중심부에는 영광의 홀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곳의 천장은 다른 성의 연회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다.
그렇기에 영광의 홀에 드는 사람은 압도적인 높이에 절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홀 중심에 있는 높은 단상에는 화려한 의자 하나만 놓여 있다.
이 권좌에 앉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델파인 공작가의 주인뿐이었다.
“그래, 해럴드가 패배했다고?”
그 의자 위에서, 한 남자가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새하얀 피부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누가 봐도 미청년으로 보이는 이자가 바로 공작가의 주인, 에른하르트 델파인 공작이다.
놀랍게도 그의 외모는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다. 뭇 레이디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왕국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던 그 시절과 다를 게 없이 말이다.
만약 브랜포드 후작이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놀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 만났을 때 공작은 분명 중년에 접어드는 모습이었으니까.
어떠한 검술과 마법도 익히지 않았다고 알려진 공작이 젊음을 되찾은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가신들은 모두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들 공작이 천천히 젊어지는 모습을 봐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에른하르트의 물음에 공작가의 두뇌라 불리는 라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예, 펜리스 백작에게 패배했다고 합니다.”
“펜리스라…… 근래 자주 듣는 이름이로구나. 제법 능력이 있다지?”
“죄송합니다. 그만한 인물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라울의 사죄에 에른하르트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위압감 속에서 다시 에른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이엔, 지셀이란 아이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들었다. 어떠했느냐?”
공작의 옆에는 눈이 사자처럼 부리부리하고, 체구가 철탑처럼 거대한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이 사내가 바로 왕국제일검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 카이엔 발자크 백작이었다.
그는 브랜포드 후작가의 연회에서 가면을 쓰고 지셀을 만난 적이 있었다.
“예, 전하. 그 나이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룬 일들을 보면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간이 더 지난다면 누구도 쉬이 넘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에른하르트의 반응은 그뿐이었다. 잠깐의 호기심, 그 이상은 없어 보였다.
홀에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잠시 후, 에른하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울.”
“예, 전하.”
“나는 선물을 기다리는 동안의 즐거움을 아는 자다. 그렇기에 너에게 모든 걸 맡기고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하나…… 이제는 조금 갈증이 나는구나.”
“송구하옵니다, 전하.”
라울이 식은땀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가 지금까지 모든 일을 지휘했으니 책임도 그에게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뿐이다.
‘지셀 페르디움……. 그놈을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오랫동안 진행한 계책이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었는데, 지셀이란 놈 하나 때문에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다. 속이 끓어올랐다.
해럴드가 패하는 바람에 북부의 가장 큰 세력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럴드가 지원하던 아멜리아가 레이폴드를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펜리스의 기세는 이제 레이폴드를 뛰어넘었다. 북부를 다시 차지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힘을 들여야 할 수밖에 없었다.
에른하르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미묘하게 세로로 좁아진 동공은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파충류와 같은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라울, 아직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느냐?”
“왕국을 취하는 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인재와 병력을 소모해 좋을 게 없습니다.”
라울의 필사적인 설득에 에른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이미 해럴드와 북부를 잃지 않았느냐.”
“아직 남아 있는 자가 있습니다. 해럴드가 레이폴드의 반란을 성공시켰기에…….”
“쯧쯧, 작은 일에 집착하는 건 여전하구나.”
에른하르트는 귀찮다는 듯 라울의 말을 끊었다. 그는 왕국을 차지하는 일을 고작 ‘작은 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울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공작은 정말로 대부분의 세상사를 하찮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에게는 모든 것이 권태롭고 무의미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느냐.”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모든 일을 끝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네가 그리 원한다면야.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에른하르트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전혀 없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모든 걸 라울에게 일임할 뿐이었다.
“더 이상 고할 게 없으면 물러가거라.”
“……‘그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무엇이냐.”
“도움이 될 만한 자를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꽤 실력이 좋은 기사들이라 하옵니다. 정체를 숨기고 우리 쪽 인물로 활약할 예정입니다.”
에른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어디에도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알아서 하거라.”
“예, 전하.”
“이만 물러들 가도록.”
공작의 명에 모두가 물러가고 카이엔 발자크 백작만이 남았다. 오직 그만이 공작의 곁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에른하르트는 카이엔에게도 손짓을 하며 말했다.
“오늘은 그대도 물러가라.”
“전하.”
“혼자 있고 싶구나.”
그의 명에 카이엔도 결국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났다.
촤아악.
아무도 남지 않자 커튼이 쳐지고 모든 불이 꺼진다. 어느새 영광의 홀에는 어떠한 빛도 인기척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한 공간 속에서, 에른하르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작게 중얼거렸다.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짙은 어둠 속에서 에른하르트의 두 눈만이 불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