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44)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44화(44/269)
44화 역시 생각한 대로야. (2)
부웅!
무릎을 꿇은 기사의 목에 길리언의 도끼가 내리꽂혔다.
기사의 목이 도끼에 잘리기 직전.
“잠깐.”
지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도끼가 멈추었다.
뚝, 뚝…….
도끼는 목 앞에서 정확히 멈췄지만, 살짝 베인 목덜미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헉, 허억!”
기사는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심호흡을 해 댔다.
‘미, 미친놈들!’
지셀이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면 제 목은 정말로 잘리고 말았을 것이다.
목을 타고 내려와 바닥을 적시는 자신의 피를 보며 기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도대체…….’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공자는 비록 짜증 나는 사고뭉치였지만, 전혀 무섭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섭다.’
주변을 가득 메울 정도로 느껴지는 강렬한 지배력.
이곳에 있는 용병들이 그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공자는 성품도 실력도 부족해 한낱 병사조차도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말단 병사들에게도 은근히 무시당하고 경멸받던 대공자가 아니었는가.
저 거친 용병들이 목숨을 불사할 정도로 그를 따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벅저벅.
그사이 지셀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어붙어 있던 병사들은 지셀이 다가오자 모두 무기를 집어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평소에 대공자를 우습게 봤던 자들도 지금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거, 내가 멈추지 않았으면 큰일이 날 뻔했네. 많이 놀랐어?”
지셀은 웃으며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나는 평화주의자인데 우리 애들이 고생을 많이 해서 좀 거칠어. 그러니까 앞으로 사이좋게 지냈으면 해.”
“네……. 넵.”
요컨대 함부로 시비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제대로 알아들었겠지.’
앞으로도 다른 이들과 수많이 충돌할 테지만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쨌든 아버지가 부르니 자식 된 도리로 가 봐야겠지. 묶을 건가? 나는 묶이는 걸 좋아하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지.”
지셀이 팔을 내밀며 묻자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온몸을 꽁꽁 묶어서 굴욕적으로 끌고 가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용병들이 언제 덤벼들지 몰라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좋아, 취향이 맞아서 그나마 다행이네. 도착하는 대로 용병들이 휴식할 곳을 마련해 줘. 그리고 벨린다가 내상을 심하게 입었으니 치료할 준비를 하도록.”
기사는 잠들어 있는 벨린다와 꼬질꼬질한 용병들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기사가 손짓하자 병사 몇 명이 달려와 벨린다가 타고 있는 수레를 우선 끌고 갔다.
곧 기사가 앞서고 병사들이 지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용병들은 건들거리며 뒤를 따랐지만, 처음 보였던 날카로운 기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지셀과 용병들이 숲을 나오자 인부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그들도 병사들을 통해 영주가 대공자를 잡아오라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사를 따라가는 지셀을 보며 수군거렸다.
“뭐야? 대공자님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영주님이 마수의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대. 그런데 대공자님이 멋대로 들어갔다나?”
“사람도 엄청 줄었어. 절반도 안 남았는데?”
“죄다 죽었나 보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숲을 개척하겠다는 건지.”
“저기 실은 건 돌인가? 몬스터 시체도 있는 거 같긴 한데……. 고작 저런 거 얻으려고 들어간 거야?”
갈수록 구경하려는 인파가 늘어나고, 다들 지셀과 용병들을 보며 한마디씩 하기 바빴다.
그럴 만도 했다. 용병들은 숲에 들어가기 전보다 수가 많이 줄어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죄다 피투성이에 부상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영주의 명으로 잡혀가니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지셀이 벌을 단단히 받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셀은 옆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흐음, 경비대 중에 스코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지? 휴가라도 간 거야?”
“……영주님에게 거짓 보고를 한 죄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만간 기사 자격도 박탈당할 것입니다.”
“아하, 그거참 안타까운 일이군. 휴가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 때문에 벌을 받은 모양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지셀을 보고 기사는 입술만 씰룩거렸다.
스코반은 지셀과 용병들의 행방을 거짓으로 보고했다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애초에 끝까지 숨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덕분에 지셀 일행이 시간을 벌긴 했지만,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터였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와 함께 바로 성으로 향했다.
꾀죄죄하고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그는 보무당당히 대전으로 향했다.
길리언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지셀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쿠웅!
대전에 들어가자 가신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딱 봐도 겨우 목숨만 붙어 도망쳐 온 패잔병 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아버님.”
지셀의 인사에도 즈발터는 대답하지 않고 사나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한참 동안 지셀을 노려보던 즈발터는 낮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마수의 숲 개척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대답에 몇몇 가신들이 나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영주님의 명을 무시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어찌 그리 생각이 짧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몬스터라도 튀어나왔으면 어쩌려고 그런 겁니까?”
“게다가 기사를 회유하여 거짓으로 보고하게 하다니!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가신들이 지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즈발터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내 명을 어긴 건 그 죄를 묻고 합당한 벌을 내리면 될 일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렇게 잡아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즈발터는 분노를 꾹꾹 누른 채 지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너는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냐.”
지셀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겼다.
마수의 숲 일에 대해 묻는 어감이 아니었다.
그건 벌을 내리면 된다고 했으니 다른 일을 묻는 것이 분명했다.
지셀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고가 있었나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태평스러운 대답에 이번에는 호메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며칠 전 레이폴드 영지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페르디움 영지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겠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바로 대공자님 때문에!”
지셀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한 뒤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뭐랍니까?”
“대공자님이 아멜리아 공녀님을 찾아가서 영지 지원 명목으로 2만 골드를 뜯어갔다고 하더군요. 레이폴드 백작이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해 파혼과 동시에 지원을 끊기로 했습니다. 대공자님이 미리 받아 갔다면서요!”
호메른이 열을 냈다. 지셀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가 몰래 상단을 키우고 있다는 건 아직 밝혀지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도 지셀의 입을 막으려 2만 골드를 순순히 내어 준 것이 아니었는가.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이 일을 공론화시켰다는 건, 이제 소문이 나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아멜리아, 역시 만만치 않은 여자군.’
지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짧은 시간에 아멜리아는 분명 소문 따위는 무시할 수 있는 조치를 전부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지셀을 엿 먹이기 위해 그 일을 이용한 것이다.
레이폴드 영지에서도 지원을 끊을 명분이 생겼으니 아멜리아가 던져 준 떡밥을 모른 척할 리가 없었다.
지셀이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기자 호메른이 더욱더 열을 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말을 좀 해 보세요! 대공자님은 지금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재무관인 알버트가 차가운 말투로 내뱉었다.
“지원을 줄였다 해도 레이폴드 영지는 가장 많이 지원해 주는 곳입니다. 그쪽 지원이 끊기면 당장 영지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지셀이 말이 없자 란돌프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이 망할 놈의 새끼! 형님! 오늘은 말리지 마십쇼! 내 저놈의 허리를 반대로 접어 버려야겠습니다! 감옥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오늘 여기서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습니다!”
뛰쳐나가려는 란돌프를 다른 가신들과 병사들이 겨우 붙잡아 막았다.
하지만 험악한 분위기에 가신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이건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다른 자였다면 극형에 처할 겁니다!”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면서 영지를 살리겠다는 핑계를 대더니, 오히려 영지를 망하게 한 거 아닙니까!”
가신들은 흥분해서 말을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제 이들에게는 지셀이 멋대로 마수의 숲에 들어가서 영지가 위험할 뻔했던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몬스터도 튀어나오지 않았고, 지셀도 살아 돌아왔으니 벌을 주고 감옥에 가둬 버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폴드의 지원이 끊긴 건 지셀에게 벌을 내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궁핍하고 힘든 영지를 관리하느라 노심초사하던 그들이니, 지금은 환장할 지경일 것이다.
‘하여튼 아멜리아 걔는 돈으로 사람 말리는 짓은 무지 잘한다니까. 어휴, 독한 것. 어휴, 무서운 것.’
지셀은 속으로 혀를 차며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분노와 불안감이 혼재되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영지를 꾸려가야 할지 걱정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호메른은 무덤덤한 지셀의 표정을 보며 머리가 띵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도 이해 못 하는 표정이구나! 이 멍청한 새끼!’
마수의 숲에 멋대로 들어간 것도 그저 평소처럼 사고를 친 거라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지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사고를 친 건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신들이 화를 내는 상황에도 재무관인 알버트는 냉정해지려 노력하며 계산을 이어 갔다.
2만 골드 중 남은 돈이라도 어떻게든 회수해야 했다.
앞으로 어찌할지 방법을 찾을 동안 버티려면 그 돈이라도 필요했다.
“대공자님, 2만 골드에서 얼마나 남았습니까?”
살얼음 같은 알버트의 물음에 지셀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용병과 인부들 고용비, 주둔지 자잿값과 식량값으로 거의 다 사용했습니다.”
“그 큰돈을…… 벌써 다 썼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손이 좀 커서요. 하하하.”
“으으윽! 저 새끼…… 당장 가둬 버려!”
평소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던 알버트마저 울화가 터져 비틀거렸다.
이제 이 영지는 끝이다.
병력을 유지할 비용이 없으니 야만인들의 공세를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목숨이 아까우면 영지를 떠나 도망이라도 가야 할 판이었다.
호메른은 급하게 즈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주님! 당장 저 새끼를…… 아니, 대공자를 레이폴드 영지로 압송해 사과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 저 새끼, 저거 사람 새끼 아닙니다! 개자식입니다! 아, 영주님 죄송합니다. 영주님이 개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가신들은 도무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약혼녀에게서 돈을 뜯어 왔는데, 그게 영지 지원금을 미리 받아 온 거란다.
그 돈을 제 하고 싶은 일에 쓰겠다고 죄다 사용해 버렸다.
가신들이 보기에는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었다.
지셀의 기행이 이제는 선을 넘어 버렸다.
즈발터는 말없이 가신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지셀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게 다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돈을 받아온 건……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변명이 통할 것 같지는 않군요.”
아들의 대답에 즈발터는 눈을 질끈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목을 베어 버릴 정도의 중죄였다.
‘조금 더 엄하게 키우고 일찍 바로잡아 줬어야 했는데. 내가 진짜 개다. 개.’
언제나 성을 비우고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자식들에게는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 결과는 수습하기 힘들 정도의 큰 사고로 돌아왔다.
즈발터가 그렇게 아들에 대한 실망과 후회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호메른이 나서서 외쳤다.
“너는 이제 대공자가 아니라 죄인이다! 당장 무릎을 꿇어라!”
지셀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무릎이 안 좋아서 그건 힘들겠습니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큰 잘못까진 아니지 않아요?”
“으아아아! 이 천하의 쌍놈아! 정말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단 말이냐!”
“제가 한 일인데 모를 리가요.”
“알면서도 지금 그렇게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어억, 목이야!”
호메른이 혈압으로 쓰러지기 직전, 지셀은 손가락을 튕기며 문밖을 향해 외쳤다.
“가져와라!”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길리언이 큰 궤짝을 하나 들고 왔다.
쿵!
사람 몸보다 큰 궤짝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놓였다.
지셀은 궤짝 위에 손을 얹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보세요. 투자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상자 뚜껑을 홱 열어젖혔다.
찬란한 푸른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