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450)
450 – 총관이 알아서 잘 적었겠지. (3)
450화 총관이 알아서 잘 적었겠지. (3)
에레네스는 입술을 앙다물고 다크를 관찰했다. 가만히 다크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설마…….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짚이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자신이 알기로 ‘그’와 함께 봉인되었을 터. 다시 나타났어도 ‘그’와 함께여야 한다.
‘아니, 아니야. 그저 비슷한 기운일 뿐이다.’
그 존재는 저렇게 천박하지도 유치하지도 않았다. 저런 정신 나간 정령 같은 게 아니었다.
찢어질 듯한 감정의 폭풍 속에서 생겨난 그 존재는, 슬픔과 음울함만을 품고 있었다.
“그 정령…… 비슷한 걸 어디에서 얻은 거지?”
“주웠는…….”
지셀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다크가 끼어들었다.
“알려고 하지 마라! 엘프! 내 저주를 받고 싶지 않다면!”
“…….”
다크는 그저 초라한 자신의 과거를 말해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에레네스는 다시 다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존재와 헷갈릴 만큼 기운이 비슷했지만, 역시 조금 달랐다.
그저 불길함만이 느껴질 뿐, 별다른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너무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갇혀 있던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생겼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마나 연공법도 그렇다. 인간은 누구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존재다. 그러니 자신이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었다.
신성력과 구원교의 기운은 상극이다. 특히 균열의 괴수들은 더욱더 그렇다.
만약 지셀이 구원교와 관련이 있다면 신의 가호를 받는 사제와 함께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펜리스 백작은 수많은 균열의 확장을 저지하지 않았는가.
‘내가 실수했군.’
펜리스 백작의 힘이 자신이 알던 것과 비슷한 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쳤을 뿐인 듯했다. 수상스럽긴 하지만 지켜보면 될 일이다.
결국 에레네스는 갑옷을 해제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오해를 해서 큰 실례를 했군요. 용서해 주시길.”
“…….”
사람들은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번 오해했다가는 왕국 하나쯤 말아먹겠네.’
‘아스콘처럼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전생에 에레네스를 겪어 본 그는 그녀의 성격이 무척이나 뻣뻣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럴 수 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의는 집어치우도록 하지. 불편하니까.”
“그렇게…… 알았다.”
에레네스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지셀은 지휘 천막이 있던 쪽을 돌아보았다. 천막은 이미 충격파에 휘말려 먼지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에레네스가 지셀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그걸 보고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래. 배상은 받아 낼 거야.”
두 사람은 다른 천막으로 들어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변에는 측근 몇 명만 대동한 상태였다.
지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원교와 원한이 조금 있는 모양이지?”
“조금이 아니라 박멸할 생각이다.”
“이유는 말할 생각 있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놈들이니까.”
원론적인 대답이었다. 지셀은 그 너머에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걸 지금 굳이 따져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 실력이 대단하던데, 우리와 함께하려고 찾아온 건가?”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결정하려고 했다.”
“균열과 싸울 거면 우리와 함께하는 게 나을 거야.”
“어째서지?”
“이제 막 루타니아 왕국을 주축으로 연합군이 결성되었거든. 구원교와 싸우려면 여기서 싸우는 게 제일이긴 하지.”
지셀은 그녀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일단은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하며 그녀의 힘을 얻으려 했다.
에레네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루타니아 왕국에서는 균열 대부분의 확장을 저지했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목표가 어떻게 되지?”
“일단 델파인 공작가를 칠 거다. 그들이 곧 움직일 거야. 놈들이 구원교와 손을 잡았으니 구원교도 같이 오겠지. 연합군에도 이곳으로 먼저 오라고 했어.”
“이곳으로?”
“그래, 연합군의 제일 목표는 루타니아 왕국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거든.”
“그럴 이유가 있나?”
“이곳이 빨리 정리되어야 내가 다른 곳을 도와주러 갈 수 있으니까. 그게 가장 효과적이지 않겠어?”
“그렇군.”
에레네스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자신이 듣기로도 현재 균열을 가장 확실히 상대하는 곳은 북부군이다. 이들이 내부의 일을 빨리 처리할수록 다른 곳도 빨리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 힘을 분산시켰다가 끌려다니는 것보다는 하나씩 빠르게 처리하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친 에레네스가 말했다.
“델파인 공작가와 이곳의 구원교를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하지.”
“잘 생각했어.”
지셀이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급에 이르는 구원교의 사제들이 몇이나 델파인 공작가에 붙어 있는지는 그도 모른다. 에레네스가 합류했으니 구원교의 사제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계속 여기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루타니아의 내부 정리가 끝나면 나는 떠나도록 하겠다.”
“어차피 균열 처리가 목적이면 계속 함께 움직여도 되지 않나?”
“그럴 수는 없다. 따로 찾고 있는 게 있다.”
“그게 뭔데?”
“……아직은 대답할 수 없다.”
“그래, 그렇군.”
지셀은 이번에도 더 따지지 않았다. 전생에도 에레네스는 그러했으니까.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한참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클로드가 말했다.
“그러면 엘프들도 저희 펜리스와 함께한다는 거군요. 이제 동맹이 된 건가요? 아, 저는 펜리스의 총관인 클로드입니다. 행정 업무를 맡고 있지요.”
에레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그렇다.”
“그렇다면 이쪽에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행하려고 한 일이니 미리 얘기해도 되겠군. 이곳 루타니아 왕국에서 엘프에 대한 노예제를 폐지해 줬으면 한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니 그 일을 진행해 줄 수 있나?”
에레네스는 전생에도 인류 연합에 같은 것을 요구했다. 세계수를 지키는 그녀야말로 엘프들의 대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군요. 어차피 우리 영지는 그렇게 하고 있으니 별문제가 없지요. 동맹군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거고요. 바로 진행하도록 하죠.”
지셀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에레네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된다고? 왕국의 법을 바꿔야 하는 일 아닌가?”
“이 왕국에서 우리 영주님이 원해서 되지 않는 일은 없는데요. 그리고 안 해 주면 대족장님이 난리 피울 거잖아요. 그 멋진 갑옷 입고 말이죠. 아, 진짜 멋지던데 혹시 그 갑옷 더 남는 거 없나요?”
“…….”
에레네스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엘프를 해방하라고 실력을 행사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어렵더라도 협상을 통해 얻어내려 했다. 그녀는 구원교와 싸우려는 것이지 대륙의 인간들까지 전부 적으로 돌리려 한 건 아니었으니까.
새삼 지셀이 가진 권력을 알게 된 에레네스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군. 가능하면 그 일을 우선 부탁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마치 엘프들이 노예가 된 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대족장이라는 위치에서 그간 엘프들을 버려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부탁에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뻣뻣한 엘프가 고개를 숙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긴 전생에도 자신의 힘을 먼저 보여 주고 엘프들의 처우 개선을 부탁했지.’
그렇기에 엘프들은 노예 위치에서 풀려나, 인류 연합에 속해 함께 싸울 수 있었다.
어차피 지셀이 왕국법을 뜯어고쳐서라도 바꾸려고 했던 일이다. 엘프뿐만이 아니라 드워프들과도 약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지셀이 물었다.
“드워프들은?”
“그건 드워프들의 왕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면 그냥 노예로 내버려둬?”
“그건 드워프들의 왕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
에레네스는 끝까지 모르는 척 같은 말만 반복했다. 엘프와 드워프의 사이가 안 좋은 건 유명하지만, 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까.
확실히 에레네스의 정의감은 어딘가 살짝 비틀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저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은 확실하니 그거면 충분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클로드가 이것저것 쓰던 종이들을 한데 모은 뒤 한 장을 꺼내 에레네스에게 건넸다.
“자, 그러면 우리의 동맹을 확실하게 한다는 하는 의미에서 여기에 서명해 주시죠.”
“서명?”
“네, 계약서입니다. 증거를 남겨야 하니까요.”
에레네스가 조금 불쾌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엘프들의 대족장이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걸 작성하라는 것이냐.”
“원래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겁니다. 세상에 계약서도 안 쓰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대족장의 말은 가볍지 않다. 내가 너희들과 한 언약은 하늘과 땅, 나무들과 꽃, 그리고 바람이 듣고 세상에 퍼뜨려 줄 것이다. 너희들만 약속을 올바르게 지키면 된다.”
클로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것들은 보증을 못 하니까 계약서를 쓰는 거라니까요. 나무랑 꽃이 뭘 할 수 있는데요?”
“내 말은, 대자연이 보증…….”
“대자연이고 나발이고…… 아니,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말이 기세요? 그냥 이거 서명하면 그렇게 구구절절 말씀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사기꾼일수록 말이 길어진다는 얘기 들어 보신 적 없으세요?”
“…….”
“엘프 대족장님, 그냥 서명하시죠?”
휙.
에레네스가 신경질적으로 클로드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엘프 대족장인 자신에게 계약서를 작성하라는 인간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이 펜리스에 사는 놈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특히 이 클로드란 놈이 그래.’
오랜 세월을 살아와 어지간한 일에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자신이다. 그런데 계약서 쓰라고 재촉하는 이놈은 묘하게 자신의 평정심을 깨뜨리고 있었다.
풍겨 오는 기분도 무척 불쾌했다. 끈적한 흙탕물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늪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찝찝한 놈이었다.
펜까지 받아 서명을 하려던 에레네스가 서명란 옆에 있는 이상한 글귀를 보고 멈칫했다.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앗차차, 제가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낙서한 게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다른 부분만 먼저 확인하시죠. 금방 다시 작성해서 드리겠습니다.”
클로드가 바로 다른 종이에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했다.
“자, 다시 똑같이 적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이건 대족장님이 저희를 도와주겠다는 내용이고, 여기에는 저희가 엘프들을 노예에서 해방해 주겠다는 내용이 있고…… 그리고 여기는…….”
클로드가 계약서의 곳곳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설명해 주었다.
에레네스는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놈은 말이 너무 많다. 그냥 약속을 하나 하는 것뿐인데 뭐 이렇게 복잡하다는 말인가.
“알겠다, 알겠어. 서명하면 되지 않느냐. 인간들의 일 처리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구나. 우리 엘프들은 신의로 일을 진행하거늘.”
정신이 사나워진 그녀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두 장의 새로운 계약서에 바로 서명해 ‘버리고’ 말았다. 그냥 서명란 옆에 또 이상한 글이 있는지만 확인했다.
클로드는 뭔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냉큼 계약서를 지셀에게 가져가 눈짓했다.
“영주님도 어서 서명하시죠.”
지셀은 클로드를 잘 안다. 슬쩍 옆을 보니 웬디가 천장만 보고 있다. 저건 클로드가 또 뭔가를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약서에 쓰여 있는 ‘수작질’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미친놈, 이 짧은 시간에 대화를 듣고 이딴 짓을 벌이다니.
“크흠흠, 뭐 총관이 알아서 잘 적었겠지. 난 그냥 서명만 하면 되는 거지, 뭐. 총관 데리고 오길 잘했네.”
지셀은 헛기침을 하며 ‘안 읽은 척’을 하고 잽싸게 서명을 했다.
클로드는 두 장의 계약서를 돌돌 말아 후다닥 끈으로 묶었다.
“자, 이제 완료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족장님.”
“그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게 엘프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럼요,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거죠. 그러면 두 개 다 저희가 보관할까요? 보관할 곳은 있으신지요?”
“이리 주어라. 보관할 곳이 있다.”
에레네스가 손짓하자 땅에서 나무 덩굴이 튀어나왔다.
돌돌 말린 계약서는 덩굴에 감싸여 다시 땅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신기한 기술이었지만 계약서를 우연히 다시 볼 일은 없을 거 같았다.
그걸 본 클로드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휴, 우리 대족장님은 보관도 확실하시네. 무척 안전해 보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 같기도 하고. 하긴 이런 엘프를 건드릴 간 큰 놈은 없었겠지. 대자연이 보증하는 계약서라…… 그거참 좋네.’
클로드가 방긋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일부러 이상한 짓들을 하며 에레네스의 정신을 쏙 빼놨다. 애초에 계약서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만나자마자 사기를 치는 놈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루타니아의 영웅이라 불리는 자와 그 총관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는 보지 못했다.
계약 기간에 아주 작게 ‘30년’이라고 쓰여 있던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