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457)
457 – 이제 빛날 수 있어. (1)
457화 이제 빛날 수 있어. (1)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피한 멜키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두두두두!
잠시 후 불타는 숲에서 일단의 무리가 튀어나왔다. 멜키르는 다가오는 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펜리스 백작.”
온몸이 찌릿찌릿해질 정도로 강한 기세를 풍기는 지셀을 보며 멜키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드디어 왔구나.”
히이이잉!
흑왕의 고삐를 당겨 멈추게 한 지셀이 말했다.
“길리언, 기사들을 데리고 성으로 향해라. 잔당을 모두 찾아 죽이도록.”
“알겠습니다.”
길리언이 기사들과 함께 다시 말을 달렸다.
멜키르는 자신을 지나쳐 가는 그들을 보면서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잘 가라고 살짝 길을 비켜 주며,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듯 손까지 뻗었다.
길리언은 불쾌해하며 미간을 좁혔지만 힐끗 눈길을 쏘아 보내고는 그대로 말을 달렸다.
길리언과 기사들이 사라지자 멜키르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웃었다.
“수하들을 전부 보내다니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 하나 남긴 했군. 둘이서 날 상대하려고?”
지셀 옆에 남아 있던 벨린다는 계속 멜키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붕대로 감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을 구별하는 특징은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매, 입술, 분위기, 목소리. 기억을 더듬으며 눈앞에 선 자와 기억 속 인물의 특징을 비교하던 벨린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정말 네가 살아 있었구나. 배신자 멜키르.”
멜키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벨린다를 바라보았다.
“뭐? 배신자? 날 아나?”
벨린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네트 님을 배신하고 습격한 네놈을 잊을 리가 없지.”
그 이름을 들은 멜키르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 맺힌 살의가 훤히 보였다.
“그년을 알고 있군. 넌 뭐냐? 그 계집은 지금 어디에 있지?”
“돌아가셨다. 네놈과 싸운 날 입으신 부상 때문에.”
잠시 멈칫한 멜키르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 하하하! 죽었어? 결국 죽었어? 크하하하! 그럼 내가 이긴 것 아닌가! 크하하하!”
멜키르는 너무나 기뻤다. 자신을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든 자가, 결국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20여 년 동안 얹혀 있던 체증과 분노가 싹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광소를 터뜨리는 멜키르를 향해 벨린다가 비웃음을 지었다.
“이겨? 암살자 수백 명을 끌고 와서 기습했는데도 전멸한 주제에 그걸 정말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아주 추하게 발버둥 쳤었잖아. 지금도 사실 두려운 존재가 사라져서 기쁜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멜키르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년이…… 넌 뭐냐?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그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아는 사람은 공작가와 구원교의 인물 몇몇뿐이었다. 절대 외부인이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벨린다를 노려보던 멜키르가 곧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너…… 벨린다?”
“그래, 기억났다니 다행이네.”
“흐하하하! 네년이! 네년이 살아 있었구나!”
차앙!
멜키르의 양손에 갑자기 두 개의 단검이 생겨났다.
“그래, 그래. 어린 년이 운 좋게도 살아남았구나. 아네트가 널 데리고 도망쳤나 보지?”
벨린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차가운 눈빛으로 마나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그녀의 로브가 펄럭이자 몸에 연결된 단검 수십 개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떠올랐다.
그것을 본 멜키르가 다시 웃었다.
“역시 그년이 쓰던 기술하고 비슷하구나. 숨어 사는 동안 좀 배운 모양이야. 오늘 널 죽여서 내 수치스러운 과거를 전부 지워야겠다. 둘 다 덤벼라.”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피워올렸다.
뻘쭘하게 대화를 듣고 있던 지셀이 물었다.
“벨린다, 정말 아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아네트란 사람은 누구고?”
벨린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네트 님은 제 스승님이자 제가 소속되었던 단체의 단장님이셨어요. 그리고…….”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지셀이 재촉하듯 물었다.
“그리고?”
“도련님의 어머니셨죠.”
“…….”
멜키르의 고개가 휙 꺾이듯이 지셀 쪽으로 돌아갔다. 지셀 또한 자기도 모르던 비밀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잘못 들은 건가 싶어진 지셀이 떠듬거리며 다시 물었다.
“우리 엄마가…… 암살자?”
“일반적인 암살자랑은 조금 달라요. 정의로운 암살자 비슷한 거예요.”
정의로운 암살자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지셀은 복잡한 머리를 애써 가라앉혔다.
솔직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지셀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건, 어머니의 몸이 조금 병약했다는 것. 그래서 오래 살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몇 년이나 슬퍼했던 기억은 남아 있었으니까.
“어, 그러니까…… 우리 엄마 몸이 약했던 게…… 혹시 저놈 때문이라는 건가?”
“네. 이 비열한 놈하고 싸우느라 마나 코어가 깨지는 큰 부상을 입으셨었어요.”
“그런 부상을 입었는데도…… 아버지와 결혼하고 나와 엘레나까지 낳고 몇 년을 더 사셨다고? 그게 말이 돼?”
마나 코어가 깨지면 정상적으로 살기가 힘들다. 몸의 균형이 망가지고 끊임없이 생명력이 새어나가기 때문에 일반인보다도 더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세상을 떠나는 게 일반적인 결말이다.
타고나길 강건하게 태어났거나, 깨진 코어 대신 다른 방법을 써서 마나와 생명력을 저장하면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벨린다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단장님께서는 신력을 타고나신 분이셨거든요. 정말 강한 분이셨죠.”
“와우…….”
신력을 타고난 자는 체력과 힘이 일반인에 비해 몇 배나 강인하다. 실제로 전생의 대륙 7강 중에서 신력을 가진 자가 있었기에 지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신력을 타고났다면 마나 코어가 깨지고서도 몇 년이나 살았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렇군. 나랑 엘레나는 워낙 건강한데 우리 엄마는 왜 병약했을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거든. 큰 부상 때문이었네.”
어머니의 출신도, 어머니와 함께 페르디움에 왔다던 벨린다의 과거도 뭔가 수상쩍긴 했었다. 이제야 밝혀진 출생의 비밀(?)에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그렇게 약하신 분이 아니었어요. 신력을 타고나신 분이 그런 큰 후유증을 겪을 정도로 크게 다치셨는데, 저놈이 살아 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르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군.”
벨린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놈이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무슨 수작을 부렸다는 뜻이다.
숨을 쉴 때마다 검은 기운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딱 봐도 구원교에서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저놈이 아네트의 자식이라고?”
멜키르가 정말 당황했는지 지셀과 벨린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 북부를 제패하고 마스터에 오른 대단하신 분이지.”
“하, 하하…… 과연 왕국 최강이라 불렸던 그년의 자식답구나. 그래, 그래. 이제 보니 머리카락 색도, 생긴 것도 페르디움 후작이 아니라 그년과 비슷하군.”
“아네트 님을 많이 닮았거든.”
“설마 저놈이 그렇게 빨리 강해진 게 그년하고 똑같이 신력을 타고나서 그런 건가?”
멜키르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신력을 가진 자가 마나를 익히면 본신의 힘이 몇 배나 더 증폭되기 때문이다.
벨린다가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련님은 신력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아네트 님의 마나 연공법과 기술도 배우지 않았어.”
“뭐? 그러면 어떻게 저 나이에 마스터에 올랐다는 거냐.”
“우리는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았어. 아네트 님이 그러기를 원하셨으니까. 도련님은 페르디움의 마나 연공법과 검술만 익혔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년의 비기와 힘이 저놈한테 갔으니 저렇게 빨리 강해진 것이 아니냐!”
“아니, 도련님은 스스로 노력해서 그 자리에 오른 거야. 그리고…… 그만 좀 그년, 그년 거려. 네 상관이었던 사람한테 예의는 지켜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콰아앙!
벨린다의 눈이 빛나며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멜키르의 뒤에서 나타난 그녀가 단검을 날카롭게 쏘아 냈지만, 이미 목표는 사라진 뒤였다.
몸을 돌리는 그녀의 앞에 멜키르의 붕대 감은 얼굴이 나타났다.
“견습 단원 주제에 감히 날 공격하다니…… 많이 컸구나.”
카앙!
멜키르의 단검이 벨린다의 복부를 노리고 들어왔다. 가까스로 쳐 낸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파아아아악!
수십 개의 단검이 꿈틀거리며 멜키르를 향해 날아갔다. 단번에 공간을 장악하는 공격이었지만 멜키르는 모두 피해 냈다.
스륵.
벨린다의 몸이 흐릿해지다 곧 사라졌다. 그녀를 따라가는 멜키르의 몸도 흐릿해졌다.
카앙! 카앙!
두 사람은 사방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전투를 이어 갔다. 누구도 좇기 힘들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지셀은 그걸 전부 눈으로 좇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벨린다가 이기긴 무리겠어.’
확실히 멜키르는 강했다. 대놓고 싸워서 약해 보일 뿐, 제대로 암습을 가한다면 어지간한 초인은 크게 한 방 먹을 것이다.
그리고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힘을 전부 개방하지 않고 있군.’
전력을 내지 않고도 벨린다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 건지, 상대가 두 명이니 힘을 아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직은 여력이 있어 보였다.
‘흐음, 어찌해야 할까…….’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벨린다와 합공해서 빠르게 잡아 죽였을 것이다. 갑자기 들어서 아직 얼떨떨하긴 하지만, 어머니에게 큰 부상을 입힌 범인이었다 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 싸움에 끼어들기는 조금 애매했다.
‘벨린다가 저렇게 원한과 감정을 내보이는 일도 흔치 않으니…….’
그녀는 지금 자신의 힘으로 멜키르를 쓰러뜨리고 싶어 한다. 스스로 과거의 악연을 끊으려 하는 것이다.
콰앙! 카아앙!
벨린다의 몸 곳곳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독이 묻어 있었는지 상처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앗!
맞붙어 싸우던 벨린다가 힘에 겨운지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잠깐 숨을 고른 멜키르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이거, 이거……. ‘그림자 기사단’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 불렸던 벨린다가 20년이나 지났는데 고작 이 정도야? 아네트 그년이 사람 보는 눈은 부족했네.”
“닥쳐.”
벨린다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저놈의 숨통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 버리고 싶었는데 역시 초인의 벽을 넘기는 아직 힘들었다.
이죽거리던 멜키르가 지셀을 흘낏 바라보았다.
“요새 잘 나가니 내가 우습게 보이나? 네놈이 태어나기도 전에 난 마스터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냐는 뜻이다. 이년이 죽고 나서야 움직일 건가? 아주 여유가 넘치시는데?”
“벨린다가 혼자 힘으로 널 죽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 맞아?”
지셀의 물음에 벨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놈은 반드시 제가 죽여야겠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멜키르가 우습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흐흐흐, 그래서 구경만 하겠다? 이년이 죽어야 후회할 모양이네. 뭐, 그러면 계속 구경하도록 해.”
휘리릭.
멜키르가 단검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며 이죽거렸다.
그는 지셀이 끼어들지 않을 거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분명 벨린다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면 움직일 것이다. 그때 비기를 써서 역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마저 해볼까?”
씨익 웃은 그의 몸이 사라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벨린다의 뒤에서 튀어나왔다.
“칫!”
카앙!
벨린다가 몸을 틀며 가까스로 공격을 막았다. 두 사람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카카카캉!
파악! 파악! 파악!
사방에서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어둠이 피어올랐다.
암살자들의 싸움은 확실히 기사들의 싸움과는 달랐다.
두 사람은 과하게 힘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기운을 한 점에 집중해 상대의 급소만 노렸다. 그러니 강렬한 충격파가 퍼지지도 않았다.
카가가각!
멜키르의 오러 블레이드를 견디지 못한 벨린다의 단검이 하나둘씩 이가 나가고 줄이 끊겨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녀가 드래곤 하트를 흡수해 강대한 마나를 쌓았어도 멜키르와는 힘을 집중하는 수준이 확연히 달랐다.
그러니 마나를 과하게 몰아넣어도 단검의 이가 나가 버리거나 줄이 끊긴 것이었다.
멜키르는 쉬지 않고 이죽거렸다.
“아직도 벽을 못 넘어섰잖아? 그년의 비기도 제대로 못 쓰고 말이야. 도대체 그 긴 시간 동안 뭘 한 거야? 놀았어?”
“…….”
벨린다는 그저 입술만 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겨를이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이기기가 힘들다. 이 배신자를 자신의 손으로 단죄하고 싶지만 그럴 가능성이 너무나도 낮은 게 분했다.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고 이미 마나의 양은 초인의 수준에 다다랐지만, 단 하나의 벽을 넘지 못해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벨린다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그런 그녀를, 지셀은 조금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