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462)
462 – 너 요새 운동하니? (3)
462화 너 요새 운동하니? (3)
루타니아의 국왕은 오래전부터 병석에 누워있었다. 그렇기에 재상과 브랜포드 후작이 국정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이라면 브랜포드 후작이 제대로 된 권력을 잡기 전, 아직 국왕이 쇠약해지기 전이었다.
‘왕실에는 이 사태와 연관된 기록이 있을지도 몰라. 국왕이라면 알고 있겠지.’
그런 의심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바로 공작가가 취하는 전략 그 자체다.
‘공작가는 전생에도 바로 수도부터 노렸다. 그때는 친왕파가 약해진 상태라 별로 의심하지 않았지만…….’
전쟁에서 왕을 잡는 건 곧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일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공작가의 의도에 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귀족 대부분이 공작가에 넘어갔기 때문에 수도만 점령하면 끝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단 말이지.’
자신 때문에 공작가는 왕국을 자연스럽게 삼키는 데 실패했다. 게다가 왕국과 교단의 공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니 국왕을 잡는다 해도 그들이 왕국을 차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공작가의 군대는 왕국 전역이 아니라 수도만을 노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군대를 움직이는 방식을 보면 그렇다.
‘구원교는 20여 년 전에 왕실을 수호하는 그림자 기사단을 쳤다. 암중에서 이미 한 번 싸웠단 뜻이지. 지금도 왕실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어. 단순히 전쟁에 승리하기를 원하는 게 아니야.’
아마 그들은 그때부터 왕실을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의 어머니 때문에 저쪽도 괴멸되는 피해를 보았다.
그래서 왕국을 전복하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감에 의존한 예측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상대의 전략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내내 전쟁터에서 살아온 지셀의 직감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의문점을 해결하려면 국왕을 직접 만나 구원교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그림자 기사단에 대해서도. 왜 한 가문이 대대로 왕실을 수호했는지도 말이야.’
벨린다에게 넘겨받은 책에도 그런 부분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다.
몇 가지 의문점을 마음속에 갈무리한 지셀이 벨린다에게 웃어 보였다.
“멋있네. 우리 엄마가 왕국 최강에, 루타니아를 어둠 속에서 수호하던 사람이었다니.”
“깜짝 놀라셨죠?”
“뭐, 조금.”
“도련님 재능이 다 아네트 님에게서 이어진 거라니까요. 엘레나 아가씨의 신력도 말이죠.”
벨린다는 무척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후련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네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말하고 싶어 지금까지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던 걸까.
지셀이 머리를 조금 긁적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우리 엄마의 진짜 이름이…… ‘엘리자베스 로렌 르 이본느 데 발리에르’가 아니라는 거네?”
“네.”
“그러면…… 그렇게 지은 이유가 있나?”
“그냥 이제 예쁘고 우아하고 거창한 이름을 쓰고 싶으시다고 그렇게 바꾸셨어요. 예전부터 생각해 두신 거였거든요. 그러니까 다 가짜죠.”
“……그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거고?”
“네, 예쁘고 밝고 재미있고…… 그런 분으로만 알고 계세요.”
“원래 성격은?”
“평소에는 정말로 그렇긴 한데, 화나면 좀…… 도련님이랑 비슷한 면이 있으셨던 거 같네요.”
지셀은 쉽게 수긍했다. 자신의 성격이 왜 이 모양인지 이제 알게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한테까지 그렇게 다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알면 큰 충격을 받긴 했을 것이다. 어머니를 그저 몰락 귀족의 후예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남편으로서는 조금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벨린다의 생각은 달랐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쓸데없거나 안 좋은 과거는 숨기고 싶어 하는 법이라고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말이죠. 굳이 그런 걸 후작님이 알아서 좋을 건 없잖아요? 괜히 자존심만 상할 수도 있고요. 배려에요, 배려.”
“으음…… 그런가.”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죠. 분명 아네트 님의 마나 연공법과 기술은 페르디움에 도움이 됐겠지만, 그걸 익혔다가는 페르디움이 더 빠르게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어요.”
“흐음…….”
맞는 말이었다. 멜키르란 놈의 말에 따르면 공작가는 어머니의 행방을 몇 번이나 확인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페르디움에 알리는 걸 포기했을 것이다.
벨린다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밝히니 속이 시원하네요.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책에 비전이 적혀 있으니 언제든 익히시면 돼요. 원래 도련님 거니까요.”
“뭐, 그건 생각해 보고. 그나저나 아버지하고는 어떻게 만난 거야?”
“원래는 북부에서 잠시 휴양을 취하고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페르디움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젊었던 후작님을 만난 거죠.”
“그렇게 서로 눈이 맞았다?”
“눈이 맞긴요. 후작님이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아네트 님을 어찌나 집요하게 따라다니던지……. 매번 거절해도 계속 쫓아다녔다니까요? 후작님 은근히 근성 있는 남자였어요.”
“……그래.”
문득 예전에 어머니에 관해 물을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내가 그대를 위해서라면 심장도 뽑아 줄 수 있다고 고백했지. 그 뒤에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심장 언제 뽑을 거냐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허허허허.
가만 보니 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랑 하나만으로 그런 사람과 결혼에 성공하다니, 어찌 보면 아버지도 대단했다.
“그래서 벨린다가 여기 남아서 나랑 엘레나를 돌본 거였구나.”
“네, 아네트 님도 제가 여기서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셨거든요. 그래서 후작님도 저에게 도련님과 아가씨를 맡기신 거고요.”
그 말을 하는 벨린다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아직도 많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지셀은 문득 다른 의문점을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잠깐, 그런데 왕실은 엄마를 안 찾았어? 공작가와 멜키르도 계속 찾았던 거 같은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 사라졌다면 왕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사람을 찾아다녔다는 기록도 없고,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벨린다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그림자 기사단은 설사 왕이라 해도 정체를 알 수 없어요.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단체였거든요. 단원들도 고아만 뽑아서 양성하니 가족도 없어요.”
“그게…… 말이 되나? 왕도 안 만나고?”
“오직 단장님만이 가면을 쓰고 왕을 만났죠. 그러니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어요. 어쩌면 없어져서 속 시원해했을 수도 있겠죠.”
왕의 재가 없이 알아서 정보를 수집하고 움직이는 단체라니. 대단하긴 하지만 어찌 보면 양날의 검과도 같다.
그들의 수장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왕의 목도 날려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니까.
왕실로서는 한 가문에 귀속된 그림자 기사단을 굉장히 찝찝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군. 그래서 구원교와 멜키르가 그림자 기사단을 차지하려 한 거구나. 쉽게 왕을 잡으려고.”
“그런 거 같아요. 하지만 실패했죠. 그래도 아네트 님은 떠나기 전에 편지는 남겼다고 하셨어요.”
“무슨 편지?”
“그림자 기사단이 와해됐으니 새로운 수호 단체나 가문을 만들라고요. 당시에 왕실을 노리던 적은 아네트 님이 전부 처리했다고 하셨으니 할 일은 다 하신 거죠. 어차피 기사단이 사라진 이상 아네트 님이 남아 계시는 게 오히려 위험할 테니까요.”
“그래, 그랬군.”
웬만한 궁금증은 다 풀렸다. 어떻게 그런 단체가 만들어지고 유지됐는지는 여전히 의아했지만 말이다.
‘그건 국왕을 만나 보면 알 수 있겠지.’
새삼 신기하고 놀라웠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엄청난 단체의 수장이었단다. 거기에 당시 왕국 최강이라 불릴 정도였다니.
지셀은 상념에 빠지려던 스스로를 다잡고 벨린다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 또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볼게. 벨린다도 어서 쉬도록 해.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까.”
“도련님은요?”
지셀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엘레나를 마저 설득해야지.”
* * *
“후…….”
지셀은 거울을 노려보며 숨을 내쉬었다.
빨간 손바닥 자국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러 지셀이 마나의 흐름을 차단해 회복을 막았기 때문이다.
페르디움의 후계자이자 펜리스의 영주, 북부군 사령관인 자신의 뺨에 엘레나가 손바닥 자국을 남겼다고 강하게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남매간의 싸움은 이렇게 유치할 수밖에 없다.
“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자신이 페르디움으로 향한 사이 공작가의 군대도 움직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예상대로 델파인군의 진군로는 세 방향이었다. 그중 하나는 북부군이 있는 쪽이었다. 무척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니 곧 부딪칠 것이다.
강행군을 한 기사들을 위해 하루 정도만 쉬고 가려 했는데 엘레나의 일이 변수였다.
“어떻게든 오늘 내로 설득해야 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오늘 내로 설득해야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었다.
지셀은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설득하기로 하고 바로 엘레나를 찾아갔다. 시간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똑똑.
노크를 하자 방 안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지 마.”
덜컥.
지셀은 엘레나의 거부에도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생의 거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 들어오지 말라고!”
“엘레나,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 들어 봐.”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네 재능을 이런 북부에서 썩힐 순 없어. 넌 정말 최고가 될 재능이라고.”
“난 우아한 귀부인이 될 거야! 멋진 공자님하고 결혼할 거라고! 무슨 전쟁터야!”
예전 같았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놀렸을 것이다. 가난한 영지의 영애가 어찌 멋진 공자님을 만나 결혼을 한다는 말이냐고.
하지만 요새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수많은 명문가에서 청혼을 보내오고 있다. 지셀 덕분에 페르디움 가문은 명실공히 왕국 최고의 가문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쪽에서 혼처를 고르는 중이었다. 딸바보 즈발터가 청혼서를 오는 족족 전부 찢어 버리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지셀이 조금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너는 결혼보다 전장에서 날뛰는 게 어울려. 한 마리의 성난 황소처럼 말이지. 공포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거야. 정말 멋있지 않아?”
“으아아악! 짜증 나! 꺼져!”
흔한 남매간의 대화였지만 진척이 영 되지 않았다. 지셀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너는 최고의 전투 병기가 될 수 있다고! 아니, 그냥 전투 병기로도 널 표현하기는 부족해. 넌 공성 병기급이야! 와, 공성 병기 엘레나!”
“그러니까 그런 거 하기 싫다고!”
“왜? 멋있잖아? 인간이 공성 병기라니!”
“하나도 안 멋있다고!”
“다 너를 위해서야!”
“싫다고!”
“아! 하라고 좀!”
천하의 지셀도 가족이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약점이라도 잡아서 괴롭혀야 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자 지셀은 바로 몸을 돌렸다. 치사하지만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아버지한테 얘기해서 널 북부군으로 쫓아낼 거다.”
“뭐? 뭐? 미쳤어? 야! 멈춰! 이 미친놈아!”
엘레나가 다급한 얼굴로 지셀의 뒤를 쫓았다.
지셀은 페르디움의 목줄을 쥐고 있다. 자신을 보내라고 지셀이 강요하면 아버지와 가신들은 거부하기가 힘들 것이다.
암살자가 날뛴 뒤라 가신들은 대전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피해를 확인하고 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한 지셀은 들어가자마자 즈발터에게 말했다.
“엘레나를 북부군으로 데리고 가서 수련시켜야겠습니다.”
“으음……. 꼭 그리해야겠느냐.”
즈발터도 이미 보고를 받았다. 자식이 신력을 타고났다는 건 기꺼운 소식이긴 했지만, 딸에게 수련이니 전투니 그런 험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북부군은 전쟁터만 찾아다니는 군대다. 딸을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었다.
“아빠, 아빠! 나 안 갈래! 절대 허락하지 말아요!”
엘레나가 헐레벌떡 들어와 즈발터의 옆에 매달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부탁에 즈발터가 근엄하게 말했다.
“굳이 싸우기 싫다는 사람을 데리고 갈 필요가 있느냐. 게다가 엘레나는 아직 약하지 않느냐. 북부군으로 가면 위험할 것이다.”
“후방 주둔지에 배치할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직접 가르쳐서 얼른 강하게 키우겠습니다.”
“어허, 그래도 위험하다니까. 안 된다.”
즈발터의 강경한 반대에 지셀이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초인이 암습을 해 와도 바로 죽을 실력은 아닙니다. 버티기만 해도 주변에서 협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내가 이제 그 정도 실력은 된다.”
“하지만 엘레나와 레이첼은 아닙니다. 단 한 번의 실수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을 겪고 전 두 사람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으음……. 그래도 이곳에서 수련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제가 가르치는 게 가장 빠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으으음…….”
즈발터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이제 암살이 벌어질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즈발터가 고민하는 사이, 지셀이 총관인 호메른과 재무관인 알버트를 노려보았다. 계속 도움을 받고 싶으면 알아서 처신하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눈치챈 두 사람이 바로 앞에 나섰다.
“대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엘레나 아가씨도 최소한의 무력은 쌓으셔야지요.”
“그럼요, 저희가 그동안 그 부분에 소홀했습니다. 대공자라면 속성 교육이 가능할 겁니다.”
두 사람에게는 어차피 선택권이 없다. 대공자는 수틀리면 정말 다 뺏어 갈 놈이다. 이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가신들도 모두 나서서 찬성의 뜻을 던졌다. 딸바보 즈발터도 당황할 정도였다.
지셀의 수작을 본 엘레나가 분노하며 외쳤다.
“뭐에요! 다들 나를 내쫓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 같잖아! 정말 너무하잖아! 오빠가 그렇게 무서워?”
와지지직!
즈발터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가 분노한 엘레나의 손에 박살이 나 버렸다. 이제 그녀는 힘을 내뿜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반대하던 즈발터마저 살짝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가, 가도 될 거 같은데…….”
“이이익! 진짜 아빠까지 그럴 거야? 나 안 가! 안 갈 테니까 아무도 찾아오지 마! 오면 다 죽을 줄 알아!”
엘레나가 주먹을 내보이며 씩씩거리자 다들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그렇게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즈발터는 이마를 짚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둘이 알아서 하거라. 어차피 네놈이 다른 사람 말 들을 놈도 아니지 않느냐.”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셀은 방에 숨은 엘레나를 일단 내버려두고 휴식을 취했다.
하루를 푹 쉰 지셀과 기사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마쳤다.
짐을 싸 들고나온 레이첼이 살짝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에, 엘레나는요? 저, 저 혼자 가나요?”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엘레나와 레이첼은 둘 도 없는 친구였다. 길리언도 언젠가는 귀족 작위를 받을 게 확실하기에 페르디움에서는 둘이 허물없이 지내는 걸 막지 않았다.
레이첼은 엘레나도 함께 간다는 지셀의 설득에 용기를 내어 따르기로 했다.
길리언도 조금 걱정스러워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못 본 딸을 가까이 둘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반대하진 않았다.
어차피 북부군이 망하면 페르디움이고 뭐고 다 망할 게 뻔하다. 그럴 바에는 같이 있으면서 수련을 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레이첼의 물음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엘레나도 함께 갈 거니까.”
지셀이 품에서 검은색 천을 한 장 꺼내 눈 아래를 가리도록 묶었다. 몇몇 기사들이 똑같이 따라 했다.
그러자 성 앞에 흉악한 도적 떼가 생겨났다.
목뒤를 몇 번 주무른 지셀이 중얼거렸다.
“왜 꼭 다들 힘을 쓰게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곱게 가자고 할 때 가면 얼마나 좋아. 안 그래?”
살다 보면 때로는 약탈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설사 그게 동생이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