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473)
473 – 이쯤이면 알았을 텐데? (1)
473화 이쯤이면 알았을 텐데? (1)
펜리스 기동군의 나머지 1만이 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싸우느라 지친 동료들을 대신해 전장을 정리하고 포로들을 챙겼다.
후속 부대와 함께 끌려온 사제 몇 명도 지친 몸을 이끌고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지셀은 이번 전투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싸운 기사들을 따로 불러 치하했다. 펜리스 기사단 중 200여 명이 기동군에 참여한 상태였다.
“좋아, 다들 수고했다.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다시 이동한다.”
고든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다른 쪽으로 싸우러 가나요?”
“바로 다른 전장으로 이동하기에는 늦었다. 왕국군 총사령관부터 만나서 군을 새로 편제한 뒤에 북부군과 합류할 계획이다.”
“알겠습니다!”
“오늘 경계는 후속 부대에 맡기고 전투에 참여한 자들은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도록.”
“와아아아아!”
다들 함성을 내질렀다. 며칠간 빠르게 이동하느라 가루만 먹었다. 다들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델파인군은 수가 3만이나 되었던 만큼 보유한 식량도 꽤 되었다. 대부분 왕국군에 넘길 것이지만, 하루 정도 배불리 먹을 만한 여유는 있었다.
오랜만에 술을 먹고 취한 기사 몇몇이 싸움박질을 했다.
평소 군율이 엄격한 펜리스군에서는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셀은 혀를 몇 번 차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풀어 줄 때는 확실하게 풀어 주는 게 맞으니까.
1만의 후속 부대가 철저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고, 주변의 위협 또한 완전하게 처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푹 쉰 펜리스 기동군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크, 영주들의 군대가 다시 규합해 방어선을 만들었을 거야. 그들도 우리가 지금 도착한 줄 모를 테니까. 병사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 봐.”
― 알겠어.
다크가 먼저 출발해 정찰에 나섰다. 펜리스 기동군은 포로들 때문에 조금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탈출에 성공한 모리스는 인근 영주들과 연합군을 규합해 다시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다.
모인 병력은 겨우 8천여 명 정도였지만 요새를 끼고 방비를 단단히 해서 버텨 볼 생각이었다.
모리스는 모두를 모아 놓고 주먹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비록 우리의 병력은 이곳으로 진군하는 델파인군보다 적지만! 여신의 은총으로 모리아나 교단의 ‘성녀’ 파르니엘 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은 힘껏 환호했다.
그들도 지금 남부 전선이 괴멸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델파인군이 이곳으로 진격 중이다.
공포에 떨던 그들에게 초인이자 성녀인 파르니엘의 존재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다.
모리스가 자신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올리려는 것을 파르니엘도 뻔히 알았지만 순순히 받아 주었다. 성녀의 업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쿠웅!
그녀가 거대한 메이스를 땅에 찍으며 말했다.
“모리아나의 이름으로 구원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다시 환호했다. 파르니엘의 거대한 체구와 강력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근육은 무한한 신뢰감을 주었다.
평소였다면 저게 무슨 성녀냐고 할 테지만 전쟁터에서만큼은 정말 믿음직함 그 자체였다.
모리스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히야, 초인이 합류하니 든든하구먼. 우리 할멈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점쟁이 할멈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구해 오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할멈,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해. 내가 남부 전선을 다시 탈환해서 구해 줄게.”
모리스가 파르니엘에게 안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그렇게 사기를 끌어올리고 있을 때, 정찰병이 달려와 외쳤다.
“인근에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드디어 델파인군이 도착했구나!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아닙니다!”
“그럼 뭔데! 연합군이 또 왔어?”
“부, 북부군의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모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북부군은 여기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지금 다른 군단과 싸우고 있을 텐데 어떻게 이곳에 왔다는 말인가?
적들의 기만 전략일 수도 있다. 모리스는 전군에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리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과연 저 멀리서 수만의 대군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진짜로 북부군과 펜리스군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지, 진짜인가? 왜 여기에 북부군이?”
아무리 생각해도 올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설사 왔다 해도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던 델파인군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긴장하면서 보고 있는데 상대 진영에서 누군가 앞서 달려왔다.
검은 말을 탄 자의 모습을 확인한 모리스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조카가 왔잖아?”
성녀가 합류했다 해도 델파인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병력뿐만이 아니라 마법사의 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강력한 북부군이 왔으니 모리스로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아니, 내가 나가겠다!”
모리스는 측근들과 함께 바로 지셀을 마중 나갔다.
“으하하하! 우리 조카가 왔구나!”
“……살아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모리스의 인사에 지셀은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모리스가 죽었다면 북부군을 제외한 모든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을 것이다.
총사령관이란 지위는 그런 것이니까.
모리스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델파인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 텐데 못 만난 거야?”
“그쪽은 이미 전멸했습니다.”
“뭐? 지, 진짜?”
“살아남은 이들은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지셀의 말에 모리스는 다가온 군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 상당한 숫자가 무장이 해제된 채 서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패퇴시켰던 델파인군을 이렇게 쉽게 처리하고 포로까지 끌고 오다니.
펜리스 백작이야말로 이 난세를 끝낼 영웅이라는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었다.
“너, 저, 정말 대단하구나…….”
모리스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대단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놈만 있으면 정말 전쟁에서 승리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할멈한테 더 자세히 물어볼걸.’
본인 점만 보느라 지셀에 관한 걸 거의 안 물어봤다. 그게 참 안타까웠다.
한참을 넋이 나가 있던 모리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 그런데 포로가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지금 우리는 이 많은 포로를 감당할 수가 없다.”
얼핏 봐도 1만은 그냥 넘어 보였다. 아무리 무장이 해제됐다고는 하지만 순순히 따라온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마 다른 군대였다면 진작에 다시 덤벼들었을 터. 상대가 지셀이라 얌전히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리스의 걱정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냥 다 왕국군으로 데려다 쓰세요. 새로 편제하면 될 거 아닙니까?”
“어…… 그러고 싶은데 우리보다 수가 더 많아서 통제가 될지…….”
“왕국군 총사령관께서 그 정도도 못 해요?”
그러자 모리스가 발끈했다.
“내가 못 한다는 게 아니고! 내 밑에 있는 애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러는 거지!”
“며칠 같이 먹고 자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면 오늘 바로 다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조, 좋지. 그, 그런데 나는 괜찮은데 다른 귀족들하고 교단에서 뭐라고 할지…….”
공작가가 이미 이단으로 찍혔기에 그 수하들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합의가 된 상태다. 살려 뒀다가 무수한 교단의 항의를 받을 게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지셀이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왕국군 총사령관께서 그 정도도 못 해요?”
“하, 하지. 내가 다 설득하지. 내가 하자고 하면 다 되지…….”
솔직히 못 한다. 브랜포드 후작이야 그냥 넘어가더라도 교단의 주교들은 무척이나 피곤하게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재수 없으면 자신도 이단으로 찍힐 수가 있었다.
모리스가 머리를 굴려 다른 핑계를 댔다.
“시, 식량이 충분할까 모르겠네.”
“델파인군이 가지고 있던 것도 전부 챙겨 왔습니다. 부족하면 제가 펜리스와 페르디움에 전해 바로 채워 드리겠습니다.”
남부를 제외하고는 왕국 전역에 도로가 깔린 지 오래였다. 며칠만 있으면 식량이 잔뜩 쌓일 것이다.
‘하 씨, 어떻게 하지? 창피해지기 싫은데.’
미신 맹신자 주제에 체면은 또 엄청나게 따지는 모순적인 남자가 모리스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두뇌를 굴리다 말했다.
“마, 맞다! 나는 다 좋은데! 여기에 지금 성녀가 와 계시거든.”
“성녀요?”
“그래. 초인이야, 초인! 성녀를 만나서 내가 겨우 살아난 거야. 추격군이 왔을 때 딱 나타났거든! 캬, 진짜 하늘의 도우심이었지. 점쟁이 할멈이 참 용하다니까…….”
모리스가 주절주절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했다. 하지만 지셀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성녀인데 초인이라고요?”
“그래, 그렇다니까! 그런데 그분이 반대하시지 않을지 모르겠네…… 아무리 나라도 성녀님 의견에 반대하기는 조금 곤란하잖아?”
성녀한테 한 수 접어 주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리스의 말을 들은 지셀은 의심스러워하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아는 진짜 성녀는 하나뿐이다. 피오테……가 아니라 바로 전생에 대륙 7강의 일원이자 전쟁의 성녀로 불렸던 자.
그 성녀가 지금 루타니아 왕국에 왔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성녀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진짜…… 성녀가 맞습니까?”
“그래! 진짜 교단이 인정한 성녀!”
모리스는 호들갑을 떨며 지셀을 데리고 갔다. 성녀 일행도 북부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 앞에 나와 있었기에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성녀님, 이 친구가 요새 소문이 자자한 펜리스 백작입니다. 제 조카나 마찬가지인 친구죠.”
“반갑습니다. 모리아나 교단의 성녀, 파르니엘입니다.”
파르니엘은 담담하게 인사했지만 지셀은 그러지 못했다.
‘진짜…… 성녀가 이곳으로 오다니…….’
어찌 저 체격과 위압감을 잊으랴. 지셀 또한 몇 번이나 그녀와 힘을 합쳐 싸워 봤기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째서 이곳으로 온 거지?’
성녀는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른 자를 막으러 가야 했다.
바로 이 혼란을 틈타 미친 짓을 벌이는, 또 다른 대륙 7강의 일원인 ‘망자들의 주인’을 말이다.
‘성녀가 이곳에 왔으니…… 그 미친놈이 더 날뛰겠군.’
사실 성녀가 있기에 지셀은 그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생에 그들이 싸웠던 곳은 루타니아 왕국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가 이곳으로 온 이상 ‘망자들의 주인’은 방해받지 않고 다른 왕국의 세력을 갉아먹을 것이다.
그 결과 구원교가 다시 득세할 수 있는 틈이 생겨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것도 내가 만든 결과니까.’
전생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성녀가 루타니아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구원교는 정체를 숨기고 있었고 공작가는 이미 왕국을 모두 장악했을 테니까.
‘내가 활약할수록 미래는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곳 루타니아 왕국의 일부터 빨리 끝내려고 연합군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다.
그 덕분에 구원교의 고위 사제들이 이곳으로 더 많이 몰려들었다.
전략적으로는 틀리지 않는 판단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구원교와 공작가 세력을 최대한 많이 줄이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성녀 또한 그걸 알고 나름 한 손을 거들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지셀은 마음을 편히 먹었다. 어차피 미래를 바꾸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미래가 바뀌는 건 당연한 일이다.
‘차라리 성녀와 힘을 합쳐 루타니아 내부부터 빨리 정리하는 게 낫겠군.’
전략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수정하는 게 맞다. 초인이 부족한 친왕파 진영에는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셀이 그런 생각 때문에 잠시 뜸을 들이자 파르니엘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파르니엘이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자신의 외모만 보고 성녀라는 말을 못 믿는 자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힘으로 신앙을 보여 주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지셀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교단의 성녀를 뵈어 영광입니다. 펜리스 백작입니다.”
이미 성녀를 알고 있었기에 지셀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제야 파르니엘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는 동안 백작님의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왕국을 구할 영웅이자 북부의 최강자라고요.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과찬입니다. 이번에 총사령관님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원교의 고위 사제까지 처리하고 말이지요.”
모리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크게 웃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내 마음이 아주 든든합니다! 자, 조촐하지만 작은 연회라도 열 테니…….”
모리스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파르니엘이 근육을 꿈틀거리며 지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기 때문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녀를 지셀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파르니엘이 메이스를 꽉 쥐며 웃었다.
“혹시 백작님께서는 성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계십니까?”
스르릉.
지셀도 천천히 검을 뽑으며 웃었다.
“뭇사람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신다고…….”
제멋대로 움직이고 나서 그저 여신의 뜻이라는 말로 끝내는 게 성녀다. 그냥 말이 안 통한다고 보면 된다.
여기에 논리를 요구하는 순간, 얻어맞는다.
파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마음이 백작님을 도와도 되는지 묻고 있습니다. 백작님을 보니 무언가 껄끄러워서 말입니다. 백작님의 진짜 ‘힘’을 봐야겠습니다.”
파르니엘은 에레네스보다 더 구원교의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성력은 구원교의 기운과 완전히 상극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도 지셀을 만나자마자 무척이나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찝찝하다면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 눈앞에 있는 자가 ‘악’인지 말이다.
쿠웅!
파르니엘이 한 걸음 더 지셀에게 다가서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또한 여신의 뜻이겠죠.”
그 모습을 본 모리스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아주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둘이 만나자마자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셀이 굽힐 놈도 아니었다. 말려도 들을 놈도 아니다. 그런 놈이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 충분히 봐 왔다.
저 새끼 이미 붙기도 전에 칼 뽑았다.
‘할멈이 있어야 했는데.’
점쟁이 노파가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정말 울고 싶었다.
* * *
#번외편: 루카스의 연애 상담 ― 실연한 어떤 기사를 위한 위로의 이야기
기사들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싸움은 루카스의 헛소리에서 시작되었다.
지셀이 기사들을 치하하며 술과 고기를 베풀자 다들 무척이나 신나 했다. 한쪽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는 기사 하나만 빼고.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뭐야, 쟤는 표정이 왜 저래? 실연당한 것처럼.”
바람처럼 몸이 잽싸 ‘윈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기사는 그 말에 더욱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스가 윈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진짜 실연당했대요. 푸하하하!”
전쟁 중이지만 북부군의 화살 배송은 여전히 성황리에 운영 중이었다. 북부군이 빠진 자리는 영지에 남은 병사들과 새로 고용된 일꾼, 용병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 화살 배송이 이번에는 안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윈드가 얼마 전에 화살 배송으로 이별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으음…….”
지셀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사실 그도 연애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조언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담백하지만 진심을 담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
“힘내라.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믿는다.”
다른 건 몰라도 연애 상담은 쥐약이기에 지셀은 후다닥 자리를 떠 버렸다.
술과 고기가 차려진 뒤, 조금 취한 루카스가 윈드의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내가 실연당했던 얘기를 해 줄게. 연애 상담 같은 거야.”
“아, 됐어. 하지 마. 듣기 싫어.”
“나도 여기 오기 전에 정말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지.”
루카스가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아련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 당시에 난 가진 게 없었어. 그러자 그 여자가 말했지. 괜찮다고, 자기네 집에서 같이 살면 된다고.”
다들 루카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사이였는데 왜 헤어졌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루카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그게 정말 고마웠어.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지. 그래서 자신 있게 말했어. 진심으로 우리 엄마처럼 모시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거든.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됐어.”
고든이 옆에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왜 문제가 돼? 자기 엄마처럼 모시겠다고 하면 더 좋은 거 아니야? 여자도 좋아했을 거 같은데. 그런 남자 흔치 않잖아.”
루카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그 여자도 처음에는 좋아했지.”
“그런데 왜?”
“내가 진짜 우리 엄마처럼 대했거든.”
“……???”
“배고프면 밥 차려 달라고 하고 집에서 속옷만 입고 다니고 용돈도 달라고 하고 음식 투정도 하고 잘 때 깨우면 짜증도 내고……. 아무튼 난 우리 엄마한테 그런다고.”
“…….”
“그래서 결국 쫓겨났어. 아, 나는 그분을 우리 엄마처럼 대했는데 그분은 우리 엄마처럼 날 대해주지 않더라고.”
‘미친 새끼인가?’
다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몇 여기사들은 생각했다.
‘엄마처럼 모시겠다는 놈 있으면 조심해야겠다. 함정이 있었네. 그냥 예의를 지키라고 해야지.’
루카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뒤에 이런 일 저런 일 하다가 펜리스까지 온 거지.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지더라고. 어때? 내 실연 이야기가 조금 도움이 됐나?”
눈곱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옆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일어나 루카스를 밟기 시작했다.
“억! 싯팔! 뭐야! 왜 그래!”
펜리스 기사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 루카스도 여러 명의 협공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루카스가 맞는 동안 윈드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먹먹한 가슴은 좀처럼 시원하게 뚫리는 거 같지 않았다.
‘…….’
누구나 한 번쯤 실연을 겪는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픔은 자신만이 아는 법이다.
섣부른 위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루카스의 엉터리 조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사랑한 만큼 아파하다 보면 분명 괜찮아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 믿는다.
그러니 지금은, 실컷 아픔에 취해도 괜찮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땀을 빼 보는 것도, 아니면 그저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별명과 같이, 지금의 아픔도 바람처럼 흘러갈 것이기에.
그리고 영주의 말처럼, 앞으로 더 좋은 일이 가득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 모든 건 내일 다시 생각해 봐도 될 것이다.
지금은 개소리를 지껄인 루카스를 패는 게 우선이다.
“후우…….”
크게 숨을 내뱉은 윈드는 바로 달려가 다른 이들과 함께 루카스를 밟았다. 일단 루카스라도 이렇게 밟으면 속이 좀 풀릴 거 같았다.
퍽! 퍼억! 퍽!
찰진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끄아아악! 이 새끼들아! 그만하라고!”
밤하늘에 루카스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