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508)
508 – 끝장을 볼 테니까요. (1)
508화 끝장을 볼 테니까요. (1)
베르헴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왕실의 비밀을 어찌 변방의 촌놈이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 그림자 기사단을 네놈이 어떻게 알고 있느냐?”
“질문을 하는 건 나다.”
“…….”
베르헴은 이 굴욕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자신의 목숨은 저놈에게 달려 있는데.
구원교의 망할 사제는 펜리스 백작이 수도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도망가 버렸다. 왕실 기사단장까지 패한 이상 베르헴을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셀 또한 플라쿠스가 없는 걸 확인하고 따로 묻지도 않았다. 안 봐도 뻔했다. 더 이상 왕이 쓸모가 없다고 판단해 도망갔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르헴이 천천히 말했다.
“브랜포드 후작에게 들었느냐? 짐 또한 많은 걸 알지는 못하느니라. 그저 이 나라의 또 다른 ‘왕’이라는 사실밖에는…….”
“뭐? 왕?”
“그, 그렇다. 왕국을 다스리는 건 아니고, 그저 왕과 같은 권한을 쓸 수 있었다고 알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
“왕실의 비밀이거늘…….”
“그럼 그냥 죽어.”
지셀이 검을 들자 베르헴이 기겁하며 외쳤다.
“건국을 함께한 세 가문 중의 하나다!”
“흠…….”
“건국왕과 그림자 기사단장의 가문, 그리고 델파인 공작가는 함께 이 왕국을 세웠다! 세 가문은 같은 권한을 가지기로 하였다!”
베르헴이 지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공작의 위는 오직 이 왕국에서 델파인 공작가에만 허락된 것이었느니라. 그리고 공작가는 언제든 필요하다면 왕실을 뒤엎을 권한이 있었다!”
“허…….”
지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공신에게 주어지는 면책권도 반역까지 용서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작가에는 왕실을 뒤엎을 권한까지 있었다니, 이 정도면 정말 왕과 다름없는 권한이 아닌가.
“그러면 그림자 기사단은? 왜 작위가 없는 거지?”
“그들은 정체를 숨기기로 하였다. 이 왕국의 밤을 지배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어째서 건국왕은 그런 권한을 내어준 거지?”
“모른다, 그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 당시에는 정국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고 알고 있다. 강력한 세 가문이 힘을 합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기록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은가? 왕실은 그런 걸 중요시한다고 알고 있는데?”
“없다, 아무것도 없다. 당시 사람들이 모든 기록을 일부러 지웠다고 했다.”
고대 제국이 멸망한 뒤, 수많은 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해 난립했다고 전해진다. 그 또한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그 시절 사료가 거의 남지 않은 것은 전쟁통에 소실되어 그렇다는 게 정론이었다. 역사가 제대로 기록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베르헴의 말에 따르면, 사료가 전쟁으로 소실된 것이 아니라 당시 고위층이 사료를 ‘일부러’ 지운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궁금했지만 베르헴도 그 이유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세 가문이 같은 권한을 나눴는데…… 어쩌다 지금 같은 상태가 된 거지?”
“왕가는 어떻게든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어쨌든 세 가문의 대표는 왕가였으니까. 수백 년에 걸쳐 그들의 힘을 약화했다.”
“어느 정도는 성공한 모양이군.”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림자 기사단은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왕실을 지키는 데만 집중했다.”
“흠.”
“공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그저 남부를 다스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한 마디로 왕실만 그들을 거슬려 하며 어떻게든 없애려 했던 것이다. 그마저도 힘을 약화하는 데만 그쳤을 뿐, 결국 없애는 데는 실패했다.
베르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게 전부다. 이 얘기도 왕가에 은밀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기록이 제대로 없기에 왕에게만 구전되어 왔을 뿐이다.”
“흐음…… 그러면 이 성물은 뭐지?”
“그, 그건…… 건국왕 때부터 내려오던 것이다. 왕가를 지켜 줄 보물이라 하였지만,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나도 거기에 그런 신성력이 담겨 있는 줄 몰랐다.”
“그게 다야? 표정을 보니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은데.”
지셀이 서늘한 눈빛으로 베르헴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아무래도 뭔가 더 알고 있는 눈치였다.
베르헴은 머뭇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살고 싶으니 순순히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의 목걸이다.”
“성녀? 무슨 성녀?”
건국왕 때부터 내려온 물건이라 했다. 그때도 파르니엘처럼 성녀의 칭호를 받은 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베르헴은 천천히 성물에 관해 설명을 이었다.
“그 목걸이는…… ‘최초의 성녀’라 불리는 자의 목걸이다. 모든 여신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성녀.”
“성녀? 건국왕은 남자가 아니었던가? 성녀의 목걸이가 왜 왕가에 있는 거지?”
베르헴은 지셀의 재촉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건국왕은…… 성녀의 하인이었다고 한다.”
“……하인?”
“그, 그렇다. 성녀의 수발을 들던…… 이, 이것은 왕가의 비밀이니라!”
베르헴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시종들도 놀랐다. 이 왕국의 고귀한 핏줄이 하인의 후손이었다는 말이 아닌가!
지셀도 피식 웃었다.
“이거 놀라운데. 어떻게 일개 하인이 나라를 세울 수가 있지? 보통 하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아니, 정확하게 판명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전해져 오는 신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보통은 그렇지만, 왕가에만 은밀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면 조금 다르지. 어쨌든, 왕실에선 왜 이걸 계속 간직한 거지? 어떤 힘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모른다, 정말 모른다. 그저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고 은밀히 가지고 있으라는 얘기뿐이었다.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고. 그래서 왕가는 수많은 비보를 만들어 그것을 숨겨 왔었다.”
“그런데 넌 이걸 공작가에 넘기려고 했잖아?”
“다, 당연하지 않으냐? 그저 평범한 목걸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냥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줄 알았다.”
“흠…….”
“어차피 그림자 기사단이 없어졌고 공작가만 없애면 모든 게 끝나니까, 과거의 물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오래된 물건이라 생각했다면 그럴 수 있었다. 공작가의 요구대로 넘기려고 한 걸 보면 왕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그래도 왕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 성물에 확실히 비밀이 있는 거 같아. 그러니 공작가도 이걸 노리는 거고. 그림자 기사단은 이 목걸이를 지킨 것 아니었을까?’
왕가는 오래전부터 성물에 관해 비밀을 지켜 왔다. 남은 두 가문은 성물의 행방을 몰랐을 것이다.
공작가는 성물을 갖고 싶어 했고 그림자 기사단은 그걸 지키려 했다. 세 가문은 그렇게 오랫동안 힘의 균형을 유지했던 거 같았다.
건국왕의 예상대로, 성물을 숨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왕가가 지켜져 왔던 것이다.
이 멍청한 왕만 빼고 공작가와 그림자 기사단장은 이 성물이 어디 쓰이는지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재미있는 얘기네. 그림자 기사단에 대해서는 더 아는 게 없나? 왜 없어진 거지?”
사실 벨린다에게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부단장이었던 멜키르가 구원교와 손을 잡고 기습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왕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한번 듣고 싶었다. 아무래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베르헴은 이번에도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내가…… 내가 없애는 걸 허락했다.”
“뭐?”
“어찌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가 있는가! 선조들은 실패했지만 짐은 성공했느니라!”
“뭘 어떻게 했길래?”
“부단장인 멜키르가 은밀히 짐에게 제안을 했느니라. 기사단장을 죽이겠다고. 공작가의 인물들이 도와주기로 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
“짐이 허락하고 단장의 숨겨진 거처를 알려 주었다. 오직 왕만이 아는 장소였지.”
“허.”
“공작가에서 보낸 자들이 그곳까지 은밀히 갈 수 있게 부단장이 정보를 교란했느니라. 이후에 공작가까지 쓸어버리려 했지만 짐의 몸이 약해져서…….”
베르헴은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지셀은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와, 널 지켜 주는 사람인데 없애라고 해? 그것도 외부의 세력까지 끌어와서?”
“이익!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진 자를 어찌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멜키르는 짐에게 충성을 맹세했단 말이다!”
지셀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졌다.
벨린다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수십 개의 단검을 허공에 띄운 상태였다.
“그러니까…… 네놈이 단장님을 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단 말이지?”
아네트의 숨겨진 거처는 벨린다도 몰랐다. 부단장인 멜키르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가문 대 가문으로 동맹을 맺은 왕에게만 전달되는 비밀이었다.
왕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림자 기사단장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 와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비밀을 흘린 게 베르헴이었다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벨린다는 아네트가 다른 곳에서 기습당한 줄 알았다. 아무리 초인들이 잔뜩 몰려왔어도 그녀만 한 실력자가 당한 것이 이상하긴 했다.
숨겨진 거처에서는 아네트도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지냈으리라. 그런 와중에 홀로 수많은 초인에게 기습당했으니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베르헴을 죽이지 않고 떠났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복수심마저 억누른 것이다.
분명 베르헴이 정보를 흘린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 배신에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까. 벨린다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아!”
파아아악!
벨린다의 단검이 뻗어져 나가며 베르헴의 몸 곳곳에 꽂혔다. 베르헴은 그대로 벽까지 날아가 박혀 버렸다.
“끄아아악!”
팔과 다리가 단검에 뚫려 벽에 꽂힌 베르헴이 비명을 내질렀다.
“왜, 왜 이러는 것이냐! 지, 짐이 지금 원하는 대로 다 말해 주지 않았느냐!”
지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분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림자 기사단원이시거든.”
“뭐, 뭐? 부, 분명 그림자 기사단원들은 전부 죽었을 텐데!”
아네트가 떨어져 있던 사이, 그림자 기사단원들의 거처도 동시에 습격당했다. 그들도 강했기에 꽤 오래 버텼지만, 전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견습 단원이었던 벨린다만이 죽기 직전 아네트가 도착해 살아날 수 있었다.
“사, 살려 다오. 짐이 직접 죽인 건 아니지 않으냐! 멜키르와 공작가가 저지른 일이다!”
“네놈이 단장님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면 그놈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겠지.”
“으으으으……. 어찌 왕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그림자 기사단원은 짐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지 않느냐! 그게 약속이지 않았느냐!”
베르헴은 너무나 억울했다.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자신은 이 나라의 왕이자 어버이다. 이런 무도하고 하찮은 놈들에게 핍박당하는 게 너무나도 한스러웠다.
그래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 구원교와 손까지 잡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손과 발에서 피를 잔뜩 흘리며 베르헴이 애원했다.
“어서, 어서 짐을 풀어 다오. 반역을 일으킨 건 용서해 주겠다. 짐은 이대로 몸만 치료하고 조용히 살겠노라.”
지셀이 고개를 저으며 검을 들었다.
“그럴 순 없다. 네가 죽어야 일이 깔끔해지거든.”
사실 아무런 힘이 없는 왕 정도야 살려 둬도 후환은 없을 것이었다. 어디 탑에 감금해 두면 된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으면 많은 사람이 불편해진다.
지셀의 피 묻은 검을 보고 베르헴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다, 다 말하지 않았느냐! 짐이 알고 있는 건 모두 말해 주지 않았느냐!”
“말하면 살려 준다고는 안 했는데?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이, 이, 이, 이놈! 끄아아악!”
베르헴이 손을 뻗으려 했지만 팔에 단검이 단단히 박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고통만 더 느낄 뿐이었다.
헐떡거리던 그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끄으윽…… 짐이, 짐이 실수했구나. 그림자 기사단장만 살아 있었어도…… 네놈들 따위가 감히, 감히 이곳에 당도하지도 못했을 것이거늘.”
“……음.”
지셀이 턱을 긁적였다. 여기서 맞장구를 칠 수도 없고. 이럴 때 참 머쓱하다.
“브랜포드 후작이 자리에 있었다면 네놈들이 감히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겠느냐!”
맞는 말이었다. 공작가와 싸워야 하는데 왕국마저 적으로 돌리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후회하면 무엇하겠는가. 그 모든 방벽을 내친 건 왕 본인이었다.
“유언은 끝났지?”
지셀이 별말 없이 목을 베려고 할 때, 벨린다가 외쳤다.
“도련님의 어머니가 아네트 님이야!”
베르헴은 죽을 위기도 잊고 멍한 표정으로 벨린다를 바라보았다.
“뭐?”
“페르디움 후작 부인이 아네트 님이라고!”
“무, 무, 무슨…….”
“아네트 님은 네놈들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결국 돌아가셨어. 하지만 페르디움 후작님을 만나 도련님과 아가씨를 남기셨지. 그러니까 지금 이건 아네트 님이 하시는 복수야. 죽어서도 절대 잊지 마.”
벨린다는 베르헴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고 가게 하고 싶었다.
과연 베르헴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네놈이…… 그림자 기사단장의 아들이라고? 그, 그년이 살아 있었단 말이냐?”
“그래. 어찌 보면 네놈 덕분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해도 되겠군.”
“으, 으으으…… 으아아아아!”
베르헴이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자신과 공작가가 오래전에 저지른 일의 결과로 앞길이 막혔다는 말이 아닌가!
그녀의 자식은 장성하여 공작가를 막아서고 왕실을 쓸어버렸다. 그녀의 남편은 새로운 왕이 되기 위해 수도로 오고 있었다.
어찌 이런 얄궂은 운명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네 어미를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셈이었다.
“으아아아! 그년은 마지막까지 내 앞을 이렇게 막는구나!”
차라리 가만히 내버려둘 걸 그랬다. 그랬다면 자신은 천수를 누리고 왕실은 여전히 보호받고 있었을 텐데.
……아니, 그때 정말 확실히 죽였어야 했다. 온 왕국을 뒤져서라도 말이다.
당시 베르헴은 아네트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공포에 휩싸여 왕실 기사단을 늘리고, 왕실 기사단장인 팔란츠 백작에게 드래곤 하트를 먹였다.
10년이 지나서야 아네트가 죽은 줄 알고 마음을 놓았다. 물론 그 이후에는 브랜포드 후작이 권력을 잡아 또다시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기사단을 늘리는 데서 끝낼 게 아니라, 늘어난 기사들을 파견해 어떻게든 아네트를 잡아 죽였어야 했다.
베르헴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후회와 절망, 분노에 뒤섞인 비명만 질러 댔다. 시술의 부작용이 도졌는지 이제는 눈과 코, 입, 귀에서도 피를 내뿜고 있었다.
지셀은 그런 베르헴에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옛 시대의 왕조는 오늘로 끝이다. 이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것이다.”
“닥쳐라! 네 이노……!”
스각!
베르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의 검이 움직였다. 베르헴의 머리는 깔끔하게 몸에서 떨어졌다.
그 얼굴에는 억울함과 분노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셀은 검에 묻은 피를 털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
공작가도 그렇고 왕도 그렇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왜 건드려서 이 사달을 낸단 말인가.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후련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성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머지는 구원교를 쓸어버리면서 알아내면 될 거 같았다.
겸사겸사 어머니의 복수도 한 번 더(?) 하게 된 셈이니, 그 부분도 꽤 마음에 들었다.
곧 왕의 목이 성 앞에 누구나 볼 수 있게 걸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환호했다.
“와아아아아!”
“미친 왕이 죽었다!”
“우리는 해방됐다!”
수도는 며칠간 축제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지셀은 귀족들이 횡령했던 식량을 압수해 아낌없이 풀었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마음 편히 먹고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페르디움군이 수도에 도착했을 때.
즈발터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서 몰려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 엎드려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