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51)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51화(51/269)
51화 저 돈 없는데요? (2)
즈발터는 절대 아들과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헛기침을 한 즈발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날씨가 좋구나.”
“네.”
“날씨가 참 좋아.”
“네, 참 좋네요.”
지셀은 이제 심각한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창밖을 보던 즈발터는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했다.
“북방 요새 한쪽이 무너진 지 꽤 됐는데, 보수하려면 5천 골드 정도 필요하다더구나. ……아니다, 됐다. 내가 괜한 소리를…….”
“…….”
지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즈발터는 눈까지 감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이런 형편에 5천 골드를 어디서 구할꼬. 곧 야만인들을 막으러 출정해야 하는데. 쯧쯧, 다 내 부덕이로다. 내 부덕이야. 영지에 돈이 이렇게나 없을 줄이야.”
지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알버트와 란돌프처럼 대놓고 달라는 건 아니지만, 누가 봐도 돈 달라고 시위하는 것 아닌가.
문득, 어릴 적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네 아빠는 걱정이 많아서 매일 혼자서 끙끙 앓기만 한단다. 특히 돈 얘기는 솔직하게 말을 못 해. 사나이의 자존심이라나 뭐라나? 말을 계속 빙빙 돌려서 엄마가 일부러 모른 척하면 아빠는 또 삐져 가지고 혼자 씩씩거리고 그랬어. 웃기지?
‘와, 설마 그러겠나 싶었는데. 진짜였네?’
지셀이 황당함에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즈발터도 입술을 꾹 깨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니,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알아서 살짝 좀 찔러 주면 안 되냐? 저런 건 아주 지 엄마랑 똑같아 가지고. 어쩜 저런 것만 닮았대?’
그래도 백작 부인은 신기하게 돈을 구해 와 남모르게 넣어 주곤 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즈발터는 끝없이 혼잣말을 뱉어냈다.
“허어…… 누군가 영지를 위해 기부를 좀 해주면 좋으련만……. 그 뭐냐, 발전 기금 같은 거 말이지.”
“…….”
아무래도 발전 기금을 좋아하는 건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지셀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돈을 받기 전까지는 계속 탄식만 하며 붙잡아 둘 거 같았다.
‘뭐, 북방 요새 정도면 조금 써도 괜찮겠지. 어차피 나도 그건 증축하려고 했으니까.’
차후 북방도 평정할 생각이지만 그전까지는 아버지가 계속 맡아 줘야 한다.
어느 정도 지원해 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보수 비용 정도는 넘겨줘도 괜찮을 거 같았다.
“이번에 룬스톤을 판매하면 5천 골드를 우선 보내 드리겠습니다.”
시원스럽게 내뱉자 즈발터는 잠깐 움찔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도 계획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괜히 ‘영지를 위한 중요한 일’ 때문에 네 계획을 미룰 필요는 없다.”
“아닙니다. 제가 우선 지원해 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다. 북방 요새야 뭐 지금까지 잘 버텨 왔으니…….”
“안 괜찮은 거 같은데요.”
“크흠흠, 괜찮다니까.”
“아, 그냥 드릴게요. 좀.”
“……그럴까?”
즈발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좋다고 바로 호들갑 떨면 체면이 깎이니 아닌 척 침묵하는 것이다.
“그래, 굳이 네가 그렇게까지 주고 싶다면 내 말리지는 않으마. 덕분에 오랜만에 북방 요새를 정비할 수 있겠구나. 고맙다. 허허허.”
“그럼, 전 일이 바빠서 나가보겠습니다.”
“오, 그래. 바쁜 사람을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지. 어서 가서 일 보거라. 멀리 안 나간다.”
즈발터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내심 아들을 참 잘 키웠다는 뿌듯함도 들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당당하게 달라고 해야겠다. 의외로 잘 주잖아? 아휴, 은근히 지 엄마 닮았다니까.’
흐뭇해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온 지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이게 더 피곤하군.”
마수의 숲에서 싸우는 것보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더 피곤하다.
가만히 있어도 마나가 다 빨리는 기분이다.
“당장 다음 일을 시작해야겠어.”
영지에 있다가는 끝도 없이 시달릴 테니, 차라리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 * *
영지의 총관 호메른은 다른 가신들과는 조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후후, 내가 대공자를 하루 이틀 본 줄 알아? 무작정 조른다고 돈을 줄 놈이 절대 아니라고.’
지셀이 영지를 위해 쓰겠다고 말은 했지만, 어떻게 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쪼들리는 영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호메른은 그런 입바른 소리만 믿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받아 내 자신이 직접 굴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공자가 돈을 쓸 곳은 많지 않아.’
병력을 키운다 해도, 룬스톤이 어디 한두 푼 하는 물건인가. 어지간한 영지 정도로 병사를 모으고 훈련시켜도 돈은 많이 남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은 병력을 모집하지도 않았으니 개척에 참여한 용병들과 인부들의 고용비만 나가고 있을 터.
혹시나 유흥에 빠져 흥청망청 돈을 날리면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다.
사실 못 믿을 사람은 지셀만이 아니었다.
“알버트랑 란돌프가 선수 치기 전에 내가 먼저 최대한 받아 내야겠어.”
두 사람은 분명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먼저 쓰려고 할 것이다.
그들의 의견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중요하긴 중요하지.
하지만 각자 담당 업무만 생각하는 그들과 달리, 영지를 총괄하는 호메른에게는 중요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식량을 비축하는 것을 비롯해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를 충원하고, 밀린 급여를 지급하고, 영지민들에 대한 구호 대책을 마련하고, 상단에 진 빚을 갚고, 군마와 장비를 확보하고, 요새를 정비하고, 영지 내에 있는 공공 시설물을 정비하고 추가로 설립하고…….
이놈의 영지에는 돈이 들어갈 곳이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그걸 한꺼번에 모조리 치울 수는 없으니, 가장 급한 부분부터 차례대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려면 영지 전체를 볼 수 있는 자신이 돈을 굴리는 게 제일 나았다.
“후후, 대상을 무너뜨리기 힘들면 대상의 주변부터 무너뜨린다. 병법의 기본이지.”
호메른은 지셀에게 직접 부탁하는 대신 바로 벨린다를 찾아갔다.
그녀는 지셀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살피며 가정 교사 역할을 해 왔다.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대공자라도 그녀가 부탁하면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으리라.
호메른은 이거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라며 내심 자화자찬했다.
“오, 벨린다. 몸은 좀 어떠한가?”
“어머, 남작님이 여기는 웬일이세요?”
벨린다는 예상외의 손님을 맞고 깜짝 놀랐다.
호메른은 지셀이 사고뭉치가 된 이후부터 아예 그녀마저 싸잡아 없는 사람 취급해 왔다.
그런 사람이 먼저 그녀를 찾아올 줄이야.
“험험, 몸이 안 좋다길래 어떤가 찾아와 봤지.”
“아, 이제는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야. 그대는 대공자님을 잘 모셔야 하니 항상 몸을 아끼게.”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긴 했지만, 벨린다는 딱히 호메른을 원망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한창 사고 칠 때 지셀은 너무나 막장이라 영지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가정 교사를 겸했으니만큼, 다들 지셀이 사고 치는 것도 잘못 가르친 그녀 탓이라고 여겼다.
안부 인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호메른은 슬그머니 무언가를 꺼내 벨린다의 손에 쥐여 줬다.
“흠흠, 이거…… 별거 아니지만 받게.”
“갑자기 무슨…… 어머!”
호메른이 내민 건 금과 보석으로 만든 장미 모양 브로치였다.
브로치를 잠시 살펴보던 그녀는 작게 새겨진 로고를 보고 놀라서 외쳤다.
“이거 혹시 ‘샤르넬’이에요?”
“오, 벨린다가 제법 안목이 있군. 샤르넬이 맞네. 허허허.”
벨린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브로치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샤르넬’은 대륙을 통틀어 한 손에 꼽히는 유명한 장인이다.
가난한 페르디움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비싼 물건인 것이다.
“이거 진짜예요?”
“그럼 그럼, 진짜고말고. 체면이 있지, 아무렴 내가 가짜를 들고 다닐까.”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벨린다가 당황스러운 듯 말하면서도 눈빛을 반짝였다.
호메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부탁이 좀 있는데…….”
부탁이라는 말에 벨린다는 멈칫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님이 이번에 돈을 좀 많이 벌지 않았나? 영지를 위해서 쓴다고는 하시는데…… 직접 쓰시기보다는 내 쪽으로 돈을 주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말이지.”
호메른이 짐짓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대공자님을 못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돈을 쓰더라도 효율이 좋은 쪽으로 써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영지 살림을 대부분 내가 맡고 있으니 말일세. 어떤가?”
길게 늘여 말하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자신한테 돈을 달라는 청탁이었다.
벨린다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브로치를 호메른에게 내밀었다.
“죄송해요. 이건 다시 가져가세요. 도련님께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어요. 도련님 돈은 도련님이 알아서 쓰셔야 해요.”
“크흠, 어떻게 안 되겠는가? 어차피 영지를 위해서인데. 자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 일이야.”
“죄송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호메른이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벨린다는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쩔 수 없이 엘레나에게 부탁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호메른은 브로치를 다시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벨린다의 손에서 브로치가 전혀 빠지지 않았다.
호메른은 당황해서 브로치를 다시 힘주어 당겨 보았다.
‘응? 이거 왜 안 빠져?’
벨린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부탁을 들어 드릴 수 없으니, 역시 도로 가져가시는 게 맞겠죠…….”
가져가라고 내밀고는 있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빼낼 수가 없었다.
‘이이익! 이거 미친 거 아냐?’
호메른이 가만 보니 희미하게 푸른 빛이 브로치를 감싸고 있었다.
벨린다가 마나까지 뿜어내며 붙잡고 있던 것이다.
‘와, 환장하겠네. 엘레나 아가씨한테 이거 드리면서 부탁해야 하는데. 저 저, 이 악물면서 땀까지 흘리는 거 봐라.’
호통이라도 칠까 생각했지만 호메른은 곧 마음을 접었다.
벨린다 옆에 다른 부상자들도 누워 있고 하녀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괜히 아픈 사람한테 브로치를 뺏겠다고 실랑이를 벌여 봤자 체면만 떨어질 것이다.
‘대공자가 왜 그따위로 컸는지 이제 알겠다!’
가정 교사가 이 모양이니 그 학생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호메른은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뺏기로 하고 일단은 자리를 피한 것이다.
벨린다가 그의 등에 대고 의아한 듯 물었다.
“총관님, 이거 안 가져가세요?”
못 가져가게 한 게 누군데! 호메른은 고개만 돌려 벨린다를 노려보았다.
“대공자하고 둘이 아주 똑같구나!”
울화통이 터진 호메른은 결국 한마디 내뱉고 발을 구르듯 걸음을 옮겼다.
호메른이 나가자 벨린다는 흐뭇하게 웃으며 브로치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밖으로 나간 호메른은 씩씩대며 머리를 굴렸다.
“당장 아가씨를 찾아갈 수도 없고.”
가진 재산 중 그나마 유일하게 가치 있던 게 브로치인데, 벨린다가 강제로 가져가 버렸다.
빈손으로 찾아가 부탁하기엔 그도 염치가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호메른은 곧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렇지! 호위 기사 퍼거스가 있었지!”
퍼거스는 벨린다와 마찬가지로 지셀이 어렸을 때부터 따른 사람이다.
거기다 벨린다보다 나이도 많으니, 그가 부탁하면 지셀이 더 마음 약해질 것이다.
호메른은 차라리 그쪽을 공략할 마음을 먹고, 가신들을 닦달해 만드라고라 뿌리를 하나 얻어 왔다.
비록 말라비틀어지고 볼품없는 상태이지만, 이 정도여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약재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퍼거스의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퍼거스 경! 여기 있나?”
숙소로 들어가자 퍼거스가 침대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총관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퍼거스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별건 아니고, 내가 자네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걸 주려고…….”
혹시나 잔뿌리라도 떨어질까 애지중지 품고 온 만드라고라 뿌리를 꺼내려던 찰나, 호메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퍼거스의 옆에 잔뜩 쌓인 만드라고라 뿌리들과 수많은 영양 식품들이었다.
한참 동안 눈만 끔뻑끔뻑하던 호메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가리켰다.
“저건 뭔가? 저 귀한 것들이 뭐가 저렇게 많아?”
그러자 퍼거스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도련님께서 마수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잔뜩 주고 가셨습니다. 총관님도 몇 개 좀 드릴까요?”
지셀은 돈이 생기자마자 퍼거스가 먹을 건강 약재들부터 잔뜩 사서 안겼던 것이다.
호메른은 제 손에 들린 초라한 만드라고라 뿌리와 퍼거스의 옆에 쌓인 우람한 만드라고라 뿌리를 번갈아 보다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잘 있으면 됐네.”
만드라고라 뿌리를 주섬주섬 다시 품에 넣고 떠나는 그의 모습은, 오늘따라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