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521)
521 – 계약서를 보시면 되잖아요? (1)
521화 계약서를 보시면 되잖아요? (1)
“내전이 끝나면 루타니아 왕국은 다른 왕국들을 도와주러 가야 해. 아직 균열의 영역조차 처리하지 못한 곳들도 많거든.”
“그래서? 그때도 내 힘을 이용하겠다는 건가?”
“아예 구원교에 먹혀 왕실이 멸망한 나라도 있지. 작은 왕국이긴 하지만, 주인이 없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아멜리아는 그 순간 깨달았다. 지셀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이다.
“루타니아를 떠나서 그런 곳을 차지해. 네 능력이라면 가능할 거야. 안정될 때까지는 약속대로 우리가 지원해 주지. 그 정도면 네 야망을 이루는 데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
그 말도 맞다. 꼭 루타니아를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이곳에서 태어났기에 목표로 삼았을 뿐.
하지만 구원교 덕분에 이제 다른 왕국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우리 둘이 싸워 봤자 괜히 전쟁만 길어질 뿐이야. 사람들은 어서 빨리 구원교를 없애고 싶어 하는데, 굳이 우리끼리 민심을 깎아 먹을 필요는 없지.”
“…….”
“안 싸운다 해도 네가 여기서 지내면 서로 불편할걸. 우리는 이미 헤어진 사이라고.”
“……꺼져.”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이려고 한 사이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몇 번이나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연합했던 건, 그만큼 공작가와 구원교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파혼한 사이라 서로 불편해하는 정도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껏 힘을 합쳐 싸워 온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한다면 왕국의 사람들은 다시 불안에 빠질 것이다.
아멜리아도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을 터였다. 자신의 영지민들은 잘 챙기는 그녀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아멜리아와 지셀이 공유할 수 있는 목표가 하나는 있었다.
“설사 네가 날 이기고 이 왕국을 차지한다 해도 결국은 구원교와 싸워야 해.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그 바퀴벌레 같은 놈들과 말이지.”
“흐음…….”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한 것은 괴물들의 세상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세상이어야 했다. 그곳에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교가 대륙에 남아 있으면 뜻을 펼치기는커녕 평생을 전장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홀로 싸우는 건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지셀도 그 점을 짚고 있었다.
“어때? 어차피 너나 나나 구원교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잖아. 연합군이 다른 나라를 맡을 테니 너도 부담이 덜할 거다.”
지셀은 이제 아멜리아를 압도할 정도로 힘을 키웠다. 그럼에도 그녀를 쳐 내지 않고 협력하자고 제안을 건네는 건, 대륙에 퍼져 있는 구원교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교는 지셀을 죽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이제 그가 원한다고 싸움을 끝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니 능력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챙기는 게 맞았다. 이건 더 이상 권력 쟁탈이 아니라 인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됐으니까.
진심을 담은 지셀의 말에 아멜리아는 입매를 비틀었다.
“날 여기서 쫓아내고 내 힘도 이용하겠다는 말을 잘도 포장하네.”
“누가 공짜로 해 달래? 어차피 이제 연합군의 수장은 나야. 다른 왕국으로 진출할 명분은 확실하게 줄 수 있지. 식량도 충분히 줄 거고.”
“그래, 나쁘진 않군. 네가 내전에서 승리만 한다면 말이지.”
“그건 걱정하지 말고. 네가 수락만 하면 승리할 방법은 있어.”
아멜리아도 지셀이 제안한 방법이 최선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즈발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는 왕이었다. 굳이 위험과 오명을 뒤집어쓰고 왕국을 차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럴 바에는 새로운 땅에서 당당하게 왕위에 오르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지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아멜리아는 무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이 지긋지긋한 왕국을 떠나게 되는구나.”
명분상으로는 연합군 소속으로 움직이겠지만, 이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지셀과 함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를 견제할 필요도 없으니 각자 맡은 영역에서 싸워 이겨 나가면 그만이었다.
지셀도, 아멜리아도 그러는 쪽이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인지는 상관없지.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일.’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을 만들려면 강력한 기반이 필요하다. 일단은 새로운 곳에 정착해 기반을 쌓고, 그 뒤에 조금씩 세력을 확장하면 될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대를 이어서라도 그렇게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 뜻이 모든 곳에 닿을 수 있겠지.’
꼭 지금 이룰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구원교를 없애고, 목표에 이른다는 확신을 얻는 것이다.
‘차라리 잘됐어. 고이고 썩은 물들을 쳐 내기 위해 시간과 힘을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녀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왕국의 체제를 바꿔야 했다.
영주들이 제 영지에서 왕처럼 지내는 봉건제는 안 된다. 그런 체제하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제정한 법과 원칙이 흔들리게 된다.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어 있는 땅이라면 새로운 체제를 이루기가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그녀는 바스테트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바스테트, 나의 사명은 다른 땅에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란다. 내 뜻의 옳고 그름은 결국 후대가 판단할 것이니.”
냐앙.
아멜리아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마음 편한 미소를 지었다.
* * *
아멜리아가 루타니아를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지셀과 그녀의 미묘한 관계도 일단락되었다.
가장 큰 잠재 위험을 해결한 지셀과 왕실은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였다.
베르헴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군사를 정비해 다른 왕국을 도우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위해 연합군들이 다른 나라까지 와서 희생한 것이 아닌가.
“각지로 보낼 구호 물품은 준비되었습니다!”
“왕국군도 새로운 편제를 마쳤습니다!”
“식량 보급과 장비 점검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언제든 출정할 수 있습니다!”
다들 민생 안정과 새로운 전쟁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공주가 된 엘레나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굳이 꼽자면, 파르니엘의 무지막지한 괴력에 감명받은 지셀이 새로운 거대 망치, ‘파괴의 선언자’를 만들어 준 것뿐이었다.
“……나 공주 맞아?”
엘레나가 망치를 휘두르며 수련하다가 문득 레이첼에게 물었다.
“공주님 맞지요. 이 왕국의 유일한 공주님.”
레이첼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엘레나가 공주가 되어 무척이나 기뻤다.
“이게 무슨 공주야! 내가 생각하는 공주는 이런 게 아니라고! 이렇게 땀내 나는 공주님이 어디 있어!”
엘레나의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병영에서 지내며 레이첼과 함께 종일 수련만 해야 했다.
지셀이 워낙 바쁘다 보니 일단 기사들과 함께 구르도록 던져 놓은 것이었다.
“젠장! 왜 하루 종일 수련만 해야 하냐고! 공주 생활을 즐기게 해 주든가! 아니면 누구 패라고 좀 보내 주든가! 스트레스받아 죽겠네!”
콰아앙!
엘레나가 바닥에 망치를 휘두르자 땅이 그대로 갈라졌다. 그녀 주변에서 훈련하던 기사들이 후다닥 옆으로 피했다.
엘레나와 레이첼은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계속 후방에서 수련만 했을 뿐이다.
지셀이 그들은 아직 사람을 죽이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이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아, 곧 우리도 균열인들을 잡으러 간다잖아?”
“흥, 만나면 다 쓸어버려야지. 이 망치로 죄다 납작하게 만들어 줄 거야.”
병영에서 계속 구르다 보니 성질까지 더러워졌다. 평범한 공주로 살기는 그른 거 같으니 정말 뭐라도 두드려 패고 싶었다.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귀족의 신분을 얻고 호위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스코반은 그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어휴, 아가씨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제 오빠랑 똑같네.’
아무래도 저 집안은 핏줄이 문제인 거 같았다. 폐하께서는 안 그러시는데 도대체 누굴 닮은 걸까?
돌아가신 왕비님도 예전에 봤을 때는 참으로 부드러운(?) 분이셨는데 말이다.
엘레나가 그렇게 투덜거리며 수련하고 있을 때, 아렐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 곧 수업 시간입니다.”
“어, 어머. 하이듄 남작님 오셨어요?”
엘레나가 갑자기 몸을 옆으로 틀며 옆머리를 마구 넘겼다. 망치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아이씨, 오는 시간 깜빡했네. 지금 땀 냄새 엄청 나는데.’
흉한 모습을 보여 줬을까 봐 괜히 걱정되었다.
아렐도 공을 인정받아 전생과 같은 하이듄이라는 성과 남작 작위를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기사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펜리스의 가신들은 여전히 지셀과 함께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아렐은 요새 수도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기사였다. 대공의 제자라는 배경도 대단한데, 어린 나이에도 공을 세워 귀족의 작위까지 받았다.
거기에 외모도 잘생겼다. 성품은 또 흠잡을 데 없이 바르기로 유명하다.
그러니 수도의 모든 귀족 아가씨가 아렐을 노리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엘레나도 그런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나보다 어리지만 뭐 어때? 요새는 연하가 대세라는데. 누나가 지켜 줄게.’
괜히 새침한 척하며 혼자 별생각을 다 하는 엘레나에게, 아렐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서 준비하시지요.”
“알겠어요.”
엘레나는 공주가 되면서 각종 예법을 포함해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예전에는 공부하기 싫다고 난리를 피웠던 그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렐과 함께 배우기 때문이었다.
아렐의 교육에 상당한 신경을 쓰는 지셀은 왕실 최고의 학자들을 그에게 붙여 주었다.
공주가 그보다 못한 선생을 둘 수도 없으니, 결국 엘레나와 레이첼도 아렐과 함께 배우게 되었다.
엘레나는 아렐을 뒤따라가며 눈을 빛냈다.
‘어쩜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 그놈은 저 나이 때 완전 망나니였는데.’
아렐은 정말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기사 같았다. 흠잡을 데가 없다. 어딘가 하나쯤은 맛이 간 펜리스 기사들과 비교하니 더 그랬다.
‘나중에 말 안 들으면 힘으로 제압해야지.’
아무리 아렐이라도 힘으로는 엘레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힘으로 해결하는 걸 가장 선호하는 면은 역시 그 오빠에 그 동생이었다.
‘아, 나 갑자기 왜 성격이 이렇게 안 좋아진 거지? 이게 다 훈련 때문이야.’
우아한 레이디가 되겠다는 엘레나의 꿈은 하루하루 멀어져 갔다.
즈발터는 딸에게도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힘든 백성들을 구제하는 게 우선이다. 무엇도 아끼지 말아라. 특히 주거지와 식량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 주어야 한다. 어서 움직이도록 하라.”
먹는 것과 자는 곳은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두 가지만 해결되면 사람들은 다른 일에 힘을 쓸 수가 있었다.
그래서 펜리스와 페르디움의 정책은 언제나 그 두 가지부터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즈발터의 명령에 따라 왕국 곳곳으로 식량과 자재들이 지원되었다. 그간 페르디움과 펜리스에서 쌓아 둔 자원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자, 빨리 움직이자!”
“마법사들이 도와줄 거다!”
“평소처럼 하면 돼!”
미리 도로를 깔아 놓았고, 병사들을 화살 배송에 투입해 경험을 쌓게 했던 덕분에 물자 보급은 정말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
부족했던 행정력도 금세 확보되었다. 기존에 왕국을 운영하던 귀족들이 그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던 인재들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왕실 재무관 역할을 함께 맡고 있는 로잘린과 메리엘이 그런 인재들의 대표 격이었다. 그들 덕분에 왕국은 빠르게 안정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뒤 에레네스는 지셀을 찾아가 말했다.
“공작가를 처단했으니 난 이제 그만 가 보겠다.”
“응? 어디로?”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공작가를 처치하면 개인적인 일을 보러 떠나겠다고.”
“어…… 그랬지. 맞아, 그랬지.”
지셀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쓴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척하는 상황에서는 에레네스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구원교와 싸우는 걸 그만두겠다는 뜻은 아니다. 볼일이 끝나면 다시 함께 싸울 수 있을 거다. 어쨌든 약속을 지켜 주어서 고맙다. 절대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에레네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의를 중요시하는 엘프 대족장으로서, 하나의 약속이 서로 만족스럽게 끝난 상황이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다. 훗날 구원교와 싸울 때 다시 만나자. 루타니아 왕국에 세계수의 축복이 깃들기를 기원하겠다.”
지셀이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띤 채 클로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야근에 지쳐 요새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클로드가 눈을 빛내며 번쩍 손을 들었다.
“대족장님! 잠시만요!”
“왜 그러느냐?”
“지금 가시면 안 되는데요?”
그 말에 에레네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이 해 줄 일이 더 남았다는 말인가?
“왜 가면 안 되느냐? 급한 일이 있다면 내 더 도와주고 가도록 하겠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뭔가 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무슨 오해?”
클로드가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족장님은 저희랑 30년 계약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 어디를 가신다는 겁니까? 약속 안 지키실 거예요?”
그 말에 에레네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