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54)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54화(54/269)
54화 싫으면 말고요. (1)
브리반트 영지의 남쪽 끝, 화려한 도시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탑을 본 용병들이 입을 떡 벌렸다.
“우, 우와…… 여기가 적염의 마탑이구나…….”
“나도 여기는 처음 와 봐.”
“레이폴드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데?”
“진홍의 마탑이 최고라더니, 겉보기에는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
아무리 진홍의 마탑에 밀려났다 하더라도 마탑은 역시 마탑이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탑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이 모여 있었다.
마법사들을 노리고 연 가게가 하나둘씩 늘다 보니 아예 도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적염의 마탑에서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경비 시스템이 마탑 주변과 브리반트 영지까지 지켜주고 있었다.
브리반트 영지가 이렇게 발전한 데는 그만큼 마탑 덕이 컸다.
브리반트 백작도 마탑주의 눈치를 보며 살 정도니 그 위세가 어마어마했다.
지셀은 여유 넘치는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속으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군.’
도시의 외관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험악한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데도 이들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특별히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의 치안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높고.
지셀도 용병왕 시절 타국에서 마탑이 있는 도시에 가 본 적이 있지만, 브리반트만큼 발전한 도시는 없었다.
‘치안도, 도시 구조도 훌륭하지만…… 사람들이나 거리가 유난히 깨끗하네. 마탑에서 뭔가 수를 쓴 건가?’
보통 마법사들은 제 연구에만 몰두할 뿐 다른 이들에게 혜택이 될 일은 잘 하지 않는다.
마탑 주변은 다른 구역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편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법사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적염의 마탑 주변은 다른 마탑 주변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발전되어 있었다.
‘소문처럼 마탑주가 결벽증이라 그런지도 모르겠군.’
적염의 마탑주가 주변이 더러운 걸 못 참는 성격이라 손을 썼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면 영주 놀이에 심취해서 주변을 이렇게 발전시켜 놓은 걸 수도 있고.
어찌 됐건 앞으로 영지를 발전시키려는 지셀로서는 보고 배울 점이 많은 도시였다.
“와, 여기 엄청 잘사나 봐.”
“집들이 전부 귀족들이 사는 저택 같은데?”
“길도 봐 봐. 완전히 작정하고 도시를 만들었어.”
브리반트 사람들은 죄다 귀족이라도 되는 듯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좋은 향기를 풍겼다.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걷는 용병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지나쳐 갔다.
평소였다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용병들도 왠지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쭈뼛거렸다.
“젠장, 우리 완전 촌놈 같잖아?”
용병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여기저기 돌아보느라 바빴다.
세련되고 깨끗한 도시는 북부에서 부유한 영지로 손꼽히는 레이폴드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참을 구경하던 용병들의 귀에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북쪽에서 온 용병들인가? 옷 입은 것 봐. 촌스러워 죽겠네.”
“왠지 냄새나는 거 같지 않아?”
“우리가 깨끗한 거지, 다른 곳은 다 저러고 살아. 불쌍해라. 쯧쯧.”
“용병들이 뭐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용병들은 창피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평소 같았으면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깽판이라도 쳤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의 화려한 풍경과 사람들의 세련된 외양에 주눅이 들 대로 들어 차마 대거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성격이 불같은 용병은 있기 마련이다.
“에이 썅! 더럽게 시끄럽네! 죽고 싶어?”
켈베로스 용병단원 몇 명이 무기를 꺼내 들고 주위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멀찍이 물러났다. 하지만 피하면서도 그다지 겁먹은 눈치는 아니었다.
“어머머, 별꼴이야. 왜 성질이래.”
“못 배워서 그래, 못 배워서. 쯧쯧쯧.”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깽판을 치려고 해?”
“구경 두 번 했다가는 살인 나겠네.”
켈베로스 용병단원 중 하나가 사람들의 반응에 이를 갈며 정말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지셀은 단호하게 그를 제지했다.
“그만. 저런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조용히 움직여라.”
“아니! 대장님! 저놈들이 우리를!”
“우리 촌놈들 맞잖아. 그냥 구경이나 해.”
지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카오르가 그 뒤에서 처신 잘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용병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면 겁에 질려 머뭇거리거나, 멀리 피해 다니곤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우습게 보기만 하니 속이 끓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때려눕히기라도 하고 싶은데, 지셀과 카오르가 제지하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행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탑까지 걸어갔다.
졸지에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탑에 가까워질수록 용병들은 다시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한눈에 담을 수도 없는 탑의 크기에 압도된 게 뻔히 보였다.
‘아무튼 단순하기는.’
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용병들의 뒤를 따라갔다.
한편, 마탑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는 멀리서 다가오는 지셀 일행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단체 관광인가? 쯧쯧, 형편도 안 좋아 보이는데 잘도 놀러 왔군.’
관광부터 떠올린 이유는 단순했다. 종종 귀족들이 마법사들을 만나거나 탑을 구경하러 이 도시로 놀러 오곤 했기 때문이다.
사람 수가 많아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관광 나온 귀족 일행, 다른 하나는 물건을 팔러 온 상단.
하지만 일행이 가까워질수록 문지기의 표정은 구겨져 갔다.
지셀 일행은 관광객이라기엔 옷차림이 너무나 허름했고 인상들도 좋지 않았다.
상대가 귀족이거나 큰 상단이었다면 당연히 방긋방긋 웃으며 맞아 줘야겠지만, 저런 놈들에게까지 표정 관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은 비록 문지기에 불과하지만, 문지기야말로 마탑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괜히 상냥하게 대했다가 거지 떼에게 우습게 보이면 마탑의 권위에도 흠이 날 것이다.
사실은 평민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뒤에 있는 마탑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그의 어깨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래도 내가 마탑에서 일하는데, 보통 사람은 아니지. 에헴.’
개로 태어나도 귀족의 개가 낫다고 하던가. 문지기가 딱 그 꼴이었다.
지셀과 용병들의 얼굴이 분간될 정도로 가까이 오자, 그 뒤에 잔뜩 끌고 온 수레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문지기는 지셀 일행이 찾아온 목적을 알게 되었다.
‘꼴에 뭘 잔뜩 싣고 오는 걸 보니 관광이 아니라 뭘 좀 팔러 온 모양이네.’
가끔 이렇게 용병이나 모험가들이 희귀한 물건을 구했다고 마탑에 팔러 오는 경우가 있었다.
지셀 일행처럼 단체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긴 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용병이나 모험가라면 저렇게 후줄근한 차림새인 것도 이해가 갔다.
‘흐음, 수레가 많은 걸 보니 희귀하고 값나가는 건 아니다. 천으로 덮은 윤곽을 보면 목재는 아닌 거 같고…… 역시 몬스터나 짐승들의 부산물이겠군.’
거기까지 추측한 문지기는 혀를 찼다.
적염의 마탑은 비록 지금은 2위로 밀려났지만, 그 전까지 1위로 꼽히던 마탑이다.
그만큼 돈도 많이 벌어들였고, 마법사들이 물건을 보는 눈도 까다로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치스러웠다.
그런 면 때문에 결국 다른 마탑에 추월당한 거긴 하지만……. 아직은 옛 버릇이 남아 몬스터나 짐승의 가죽 등은 최상급 제품만 사들였다.
당연히 그런 물건을 납품하는 전속 상단도 따로 있었다.
용병들이 구해 온 것이라면 흠도 많고 품질도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희귀한 물건이라면 몰라도, 흔한 재료는 굳이 용병들에게 살 이유가 없었다.
‘돌려보내는 게 낫겠지.’
문지기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지셀 일행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지셀은 마탑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려는 그를 보고 벨린다가 기겁하며 잡아챘다.
“어디 가세요? 길리언 아저씨 시켜요!”
지셀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꼭 그래야 해? 레이폴드에서도 결국은 내가 나섰잖아.”
“그때는 그때고요! 처음부터 나서시면 안 된다니까요.”
벨린다가 지셀을 꼭 붙잡은 채 길리언에게 눈치를 주었다. 길리언은 묵묵히 문지기에게 걸어갔다.
“이분은 페르디움의 대공자…….”
문지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길리언의 말을 잘랐다.
“안 사요.”
“……뭐?”
“가져온 거 안 산다고요.”
문지기는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 일행에게 보일 법한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셀 일행을 용병 무리로 본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셀이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몰려다니니, 보는 사람마다 무시하기 일쑤였다.
용병왕 시절에는 지금처럼 대충 입고 다니고, 수하들마저도 기괴한 차림을 하고 다녔어도 아무도 무시하지 못했다.
용병왕을 상징하는 깃발 하나만 걸어 두면 알아서 모두 머리를 조아리거나 피했다.
하지만 용병왕은커녕 페르디움이라는 이름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지금은 차림새 그대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돈이 생기면 좀 꾸미긴 해야겠군.’
문지기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외견으로 판단하는 건 당연하니까. 용병왕 시절에야 깃발이 있으니 알아본 거고.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문 앞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질질 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결국 지셀은 앞으로 나섰다.
“문지기랑 실랑이하고 싶지는 않군. 마탑의 거래 담당자를 불러와라. 아니, 마탑주를 만나야겠다.”
문지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안 산다고요. 적염의 마탑은 아무 물건이나 사지 않아요. 거기다 탑주님을 만나겠다고요? 영주님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게 탑주님입니다.”
길리언이 문지기의 무례한 언사를 참다못해 으르렁거렸다.
“문지기 주제에 건방지구나.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당장 불러오란 말이다.”
그 기세에 찔끔 겁을 먹고 문지기가 뒤로 물러났다.
마탑의 문지기를 맡은 뒤로 자신에게 이렇게 험악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겁먹지 마라! 내가 마탑의 얼굴이다!’
마탑의 마법사 두어 명만 와도 이 거지 떼들을 쓸어 버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야! 썩 물러나지 못할까!”
문지기가 발악하는 꼴을 보고 지셀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오늘 안에 못 들어가겠는데.’
그가 말없이 카오르에게 손짓했다.
카오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레에서 룬스톤 조각 하나를 슬쩍 빼내어 지셀에게 다가왔다.
룬스톤이 몇 수레나 있다는 게 알려지면 주변이 시끄러워질 테니 조심한 것이다.
‘그래도 단장이라는 건가. 눈치는 좀 있네.’
지셀은 내심 흐뭇해하며 룬스톤을 받아 문지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마탑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게 뭔지는 알겠지? 이걸 팔러 왔다.”
문지기는 지셀이 들이민 돌조각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수정 조각이 그를 홀리듯 은은히 빛을 내뿜었다.
문지기는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 곧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룬스톤을 알아본 것이다.
문지기가 그대로 얼어 있자 지셀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진짜로 안 살 거야? 진짜? 나 그냥 가도 돼?”
그제야 문지기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뜩이나 요새 진홍의 마탑에 밀려서 마법사님들이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다.
그런데 저만한 양의 룬스톤을 가져온 손님을 내쫓았다는 게 알려지면 문지기 자리가 아니라 모가지가 날아갈 게 분명했다.
문지기는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일단 그냥 들어오세요! 제발요!”
수레에 실린 나머지 짐도 모두 룬스톤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 문지기에게는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열렬하게 환대하는 문지기의 옆을 지나며 지셀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문지기가 일 잘하더라고 마탑주한테 꼭 전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