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68)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68화(68/269)
68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4)
즈발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어떻게 진형을 짜 승부를 걸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상대의 보급 부대가 전멸했다면 선택지가 더 많아진다.
하지만 그 전에 무슨 일인지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다른 가신들도 아무런 말을 못 한 채 피에 절은 지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셀은 대전을 한번 둘러보고 담담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래서 기습으로 적군을 전멸시키고 보급품은 모두 불태웠습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들고 오긴 힘들었습니다. 아, 이건 보급 부대 지휘관인 파브로 남작의 목입니다. 아시는 분?”
호메른이 상자를 열어 안에 담긴 목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떠듬거리며 말했다.
“마, 맞습니다. 디갈드의 파브로 남작입니다.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가신들은 모두 탄성을 내뱉었다. 오직 란돌프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지셀을 만나면 당장 후려치려고 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한평생을 보낸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평소 까불거리던 대공자가 아니다. 저건 인간 백정이나 풍기는 분위기야. 어째서 저놈이 저렇게…….’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영지에서만 지내 전쟁이라고는 겪어 본 적 없는 대공자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즈발터는 란돌프와 다른 의미로 놀랐다.
“기습이라니…… 어찌 그리 조심성 없이 움직였다는 말이냐.”
타박하고는 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화보다 놀라운 마음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기습은 일단 성공하면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전략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전멸할 가능성도 큰, 양날의 검이었다.
그래서 날씨, 장소, 지형, 시기, 적장의 성향 등 수많은 조건을 신중하게 검토한 이후에나 쓰는 전술이었다.
그런데 영주의 허락도 없이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기습을 시도했다니.
미친놈이나 할 법한 일이지만, 지셀은 망설임도 없이 병력을 끌고 나가 기습을 했고 심지어 성공했다.
“어차피 우리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지셀이 덤덤하게 답했다. 즈발터가 답답한 심정을 담아 외쳤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와 상의해야 할 게 아니냐! 제대로 전력을 꾸리고 준비한 뒤에 나갔어야지! 만약 실패했으면 너와 용병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 줌의 전력도 아쉬운 상황이란 걸 모른다는 말이냐!”
“그랬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뭐?”
“이미 배신자가 나와 디갈드에 전쟁 명분까지 만들어 준 상황입니다. 배신자가 또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네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즈발터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페르디움에 남은 가신들과 기사는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위험한 발언이었다.
충성심을 의심해서야 어찌 그들이 목숨을 걸고 따르겠는가.
하지만 지셀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아버지 옆에 정말 그런 사람이 없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뭐, 뭣?”
“저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건 오직 저뿐입니다.”
피범벅이 된 채 단호하게 말하는 아들을 보고 즈발터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가신들도 반박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가신 중에서 배신자가 나온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공자의 모습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모두가 입도 뻥긋 못하고 있었다.
서늘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본 지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여기서 성을 지킵니다. 이제 누구도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나가시려면 제 검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과격하고 독단적인 선언에 란돌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일어섰다.
무어라 외치려는 그를 즈발터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좋다, 어쨌든 성공했으니 기습 건은 넘어가겠다. 그러면 농성하자는 이유는 무엇이냐.”
“적은 대군입니다. 이 작은 영지전에도 보급 부대를 따로 이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보급 부대가 전멸한 이상 그들은 오래 부대를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
“…….”
“그사이 로게스 백작에게 다시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지원이 온 뒤 성문을 열고 나가 협공하면 됩니다.”
“지원이 늦거나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설사 지원이 오지 않더라도 적은 우리보다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적이 철군하고 다시 쳐들어올 준비를 하는 사이에 우리도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적의 본대도 물자를 어느 정도 챙겨 오긴 했겠지만, 그 정도 대군을 먹여야 하니 고작해야 며칠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페르디움이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대군에 공성 병기까지 이끌고 왔으니 요새가 아닌 페르디움 성에서는 오래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일주일은 버텨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전보다는 그게 더 승리할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으음…….”
지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회전으로 승부를 보다가 패하면 그대로 끝이지만, 성벽을 끼고 버틸 수만 있다면 이길 가능성이 커진다.
수성 측이 장기전에 불리한 건 포위당해 보급로가 차단당하기 때문인데, 공성 측도 보급 문제에 직면했으니까.
고민하던 즈발터는 란돌프를 돌아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크흠, 전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의견이었지만, 독단적으로 구는 지셀에게 감정이 상한 란돌프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지 못했다.
반면 처음부터 수성을 고집했던 호메른은 지셀의 의견에 냉큼 찬성표를 던졌다.
“이번만큼은 대공자의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로게스에 다시 지원을 요청하고 버티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다른 가신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로 보급이 끊긴 건 마찬가지입니다.”
“6천 명을 먹일 물자를 바로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 버티는 건 우리가 유리합니다.”
“대공자가 큰일을 해냈군요. 이건 기회입니다!”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다면 지셀의 의견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나 눈엣가시 같던 대공자지만 이번만큼은 지셀이 제멋대로 군 덕에 일이 잘 풀렸다.
호메른도, 알버트도, 다른 가신들도 지셀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란돌프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공을 세운 건 분명하나……. 너무 위험하구나. 자칫 잘못하면 살인귀가 되겠어.’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란돌프는 대공자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가신들의 의견을 들은 즈발터가 고심에 빠지자 지셀이 다시 말했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영지민들을 버리고 북방 요새로 후퇴하는 겁니다.”
“이놈! 그게 귀족이 할 말이란 말이냐!”
즈발터가 지셀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가신들도 인상을 찌푸리며 경멸하는 눈빛을 보였다.
“성이 점령당하면 영지민들은 노예처럼 살다가 죄다 죽을 것이다! 그걸 모른단 말이냐!”
북부 요새로 넘어가 수성에 성공하더라도, 영지민들이 짓밟힌다면 페르디움을 다시 안정화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셀은 냉정한 눈으로 백작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확률은 그쪽이 더 높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실 겁니다.”
“…….”
즈발터는 말없이 지셀을 노려보았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호메른이었다.
“그만! 그만 멈추십시오! 우리끼리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영주님, 대공자의 말투가 과격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즈발터는 지셀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호메른의 말대로 빨리 결정해야 했다.
‘확률은 낮지만…… 거기에라도 거는 게 낫겠지.’
본래도 영지민을 버리고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길 가능성이 작아 고민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지셀이 활로를 찾아왔으니 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즈발터는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다, 성에서 맞서 싸우겠다. 새로 병력을 편제하고 배치할 준비를 해라. 그리고 로게스 백작에게 소식을 전할 경로도 다시 검토하라.”
영주의 명에 모든 가신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이나마 희망이 생겼으니 이제는 최선을 다해 막아 내야 한다.
그때 란돌프가 나서며 말했다.
“잠깐! 대공자가 모아 둔 용병들은 그대로 두실 겁니까? 영지의 병력에 편입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다시 지셀에게 향했다.
즈발터는 차갑게 말했다.
“네놈은 그럴 생각이 없겠지.”
“저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한 번이라도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느냐?”
“죄송합니다.”
지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란돌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강제로 뺏고 싶었지만, 대공자가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고 온 탓에 병력을 빼앗을 명분도 없어져 버렸다.
즈발터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작전 지휘는 따라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만…….”
“무엇이냐.”
“성문 쪽은 제가 막게 해 주십시오.”
“성문을?”
“그렇습니다.”
즈발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제 병력은 아끼겠다는 건가? 무슨 생각인 거지?’
공성이 시작된 직후에는 성벽 쪽이 가장 위험하다.
언제 투석기에 맞을지 모르고, 성벽에 붙은 공성탑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력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일단 성문이 뚫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성문 쪽이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된다.
“이유가 무엇이냐? 설마 성벽 쪽에 서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냐?”
“성문 쪽에서 대기하다가 위험한 쪽으로 지원을 나갈 생각입니다.”
“지원이라…….”
“아무래도 용병들이다 보니 훈련이 부족합니다. 그런 식으로 부족한 곳을 채우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즈발터는 찝찝해하면서도 수락했다.
어차피 허락하지 않는다고 얌전히 따를 녀석도 아니고.
“그렇게 하도록 해라. 단, 전쟁이 끝나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하십시오.”
지셀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훌쩍 몸을 돌렸다.
알버트가 그를 급하게 붙잡았다.
“잠깐만요! 새로 가져온 룬스톤은 어디로 옮기셨습니까?”
“이미 다 썼습니다.”
“네? 그 많은 걸 벌써요? 도대체 어디에?”
“필요한 데 썼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지셀은 더 설명하지 않고 대전을 나섰다.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하나둘 그의 생각대로 판이 짜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솔직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로게스 백작은 지원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영지에서는 거절이더라도 답변이 왔는데, 로게스 영지와는 아예 연락이 끊겼다.
이미 그쪽으로 가는 길목이 모두 차단됐다는 뜻이다.
‘역시 그놈답군.’
디갈드의 이름을 내걸고 온 병사들을 보고 확신했다.
저 정도로 많은 병력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대영주는 이 북부에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레이폴드 백작.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북부군 총사령관, 해럴드 데스몬드 공작.’
루타니아 왕국은 후에 대륙을 휩쓴 전란에 맞서 군 조직을 개편한다.
북부의 영주들은 모두 해럴드의 봉신이 되고 해럴드 데스몬드는 공작 작위를 새로 받았었다.
‘역시 네놈이 북부를 담당하고 있었구나.’
지셀은 전생에서 해럴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지식하긴 하지만 제법 전략에 밝고 무력도 쓸 만한 놈이었다.
아멜리아는 지셀에게 당한 뒤 남은 세력을 모아 유격전을 펼쳤지만, 해럴드는 힘과 힘으로 대놓고 맞붙은 사이다.
‘그놈이 끼어들었으니 아마 버티기 힘들 테지.’
페르디움 백작과 그 가신들은 지셀이 건넨 희망만 믿고 싸우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정작 그 의견을 낸 지셀은 수성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데스몬드는 공성까지 염두에 두고 저런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보냈을 테니까.
‘이게 최선이다.’
지셀은 적군과 직접 맞붙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법사 여섯 명이 기습적으로 공격한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줄 수 있을 터였다.
적들은 이곳에 마법사가 있는 줄 모르고 있으니까.
거기에 자신이 돌격대를 이끌고 측면으로 치고 들어간다면 적의 진형을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작전을 짜고 아군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면 회전을 벌여도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승산이 있다는 정도로는 부족해.’
맞붙으면 아군의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다.
지면 그대로 끝이고,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두 번째 공격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지셀은 상처뿐인 승리는 원하지 않았다.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해.’
적들에게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 페르디움을 함부로 건드리면 죽는다는 걸.
지금까지 지셀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준비해 왔다.
단 한 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