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Mercenary’s Machinations RAW novel - Chapter (94)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94화(94/269)
94화 그게 오늘이었어? (4)
클로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장난하지 마라! 사람을 이따위로 희롱해? 그렇게 시간이 남아도냐!”
하지만 지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준다는데 왜 그래? 난 그냥 생각보다 금액이 적어서 놀랐을 뿐이야.”
전생에 클로드에게 몇 번이나 들었으니 확실했다. 그때는 분명 5천 골드였다.
‘하긴, 시간이 꽤 흐른 뒤였으니까. 가격이 다를 수도 있겠네.’
“금액이 적다고? 이게 끝까지…….”
클로드는 이를 악물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심보로 이따위 장난을 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 자신만만하군그래. 그러면 지금 당장 내놔.”
클로드가 비아냥거렸지만, 지셀은 기분 상한 티 하나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지. 그거면 되나?”
‘끝을 모르네. 집요한 놈.’
클로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지셀의 장난질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2천 골드가 적어? 그럼 5백 골드만 더 줘. 이 몸이 일해 주는 값으로 그 정도면 싸지.”
벨린다는 갈수록 뻔뻔해지는 요구에 인상을 쓰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예의도 없고, 양심도 없고. 손목이 아니라 목을 잘라도 시원치 않은 인간이었네.”
정말로 클로드의 목에다 단검을 꽂을 기세였다. 지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해, 벨린다. 앞으로 우리 영지에 필요한 사람이니까.”
“아니, 도련님! 저런 자를 그냥 봐주시려고요?”
벨린다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성질을 냈다.
“그만.”
묵직한 지셀의 목소리에 벨린다는 입을 앙다물고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벨린다가 저리 화를 내니 심부름을 보내기도 어려웠다.
지셀은 쓴웃음을 지으며 길리언을 불렀다.
“길리언, 오스턴에서 가장 큰 상단에 가서 사람을 데리고 와. 신용장을 발행하겠다고 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길리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런 인물에게 그런 큰돈을 줘도 되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지금껏 어지간하면 토 달지 않고 지셀이 하라는 대로 따라왔지만, 이번에는 그가 봐도 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길리언,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어땠지? 길리언이 지금 이 친구와 다를 게 있었나?”
그 말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길리언은 더 심각했다.
도박장이라도 나다니는 클로드에 비해, 길리언은 밖에 나가지도 않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셀의 가장 큰 힘이고, 없어서는 안 될 수하가 되었다.
그 말뜻을 이해한 길리언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자신의 주군은 단 하나도 허투루 행동하는 법이 없었다.
분명 저 도박쟁이에게서도 자신들이 못 보는 무언가를 봤으리라.
벨린다 역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났다.
‘저 아저씨는 그래도 체격이라도 좋았잖아. 도련님은 대체 뭘 보고 저놈을 이렇게 믿는 거지?’
클로드는 팔짱을 낀 채 어수선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화가 나는 걸 넘어서 기가 막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망신을 줘야 속이 좀 풀릴 거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리언이 한 사람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클로드는 술집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알아보고 흠칫 놀랐다.
‘어? 저 사람은?’
남자는 오스턴에서 가장 큰 상단의 부단주였다.
액수가 크니 부단주씩이나 되는 인물이 움직인 것이다.
‘이 새끼들이 무슨 장난을 이렇게…….’
장난치고는 스케일이 상당히 크다. 저만한 인물을 데리고 오다니.
‘이 뒤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지셀이 세이론 왕국의 귀족이었다면 아무 조건 없이 신용장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체면 때문에라도 상단의 돈을 떼먹을 염려는 적으니까.
하지만 타국의 귀족은 사정이 다르다.
담보도 없이 신용장을 발부해 줄 정도로 상단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뭘 맡기려고? 어지간한 보석도 2천5백 골드는 안 되는데.’
그가 보기에 지셀은 그리 부유해 보이진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은 깔끔했지만 그리 고급스러운 재질도 아니고, 비싼 장신구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놈도 그런데, 그 수하라는 자들이야 볼 것도 없었다.
아마 상단 부단주는 담보가 없으면 곤란하다며 그대로 돌아가 버리겠지.
클로드는 망신당할 지셀을 상상하며 속으로 낄낄댔다.
그때였다.
‘어?’
용병 하나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테이블 위에 웬 돌덩이 하나를 턱 올려놓았다.
돌은 은은하게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 푸른 빛을 눈에 담았다.
상단의 부단주는 룬스톤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오오, 이거 정말 상급의 룬스톤이군요. 혹시 더 없으십니까? 가격은 시세보다 잘 쳐 드리겠습니다. 오스턴만이 아니라 이 주변에서는 저희 상단이 최고입니다.”
‘어?’
클로드는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부단주의 눈빛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물건을 다루어 봤을 그가 저 정도로 탐을 낸다는 건, 그만큼 지셀이 내놓은 룬스톤의 품질이 좋다는 뜻이었다.
‘지, 진짜인가?’
그때 지셀이 귀찮은 듯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더 팔 생각은 없으니까 빨리 일이나 마무리해라.”
“그러지 마시고……. 제가 정말 가격 잘 쳐 드리겠습니다. 다른 상단 가셔도 저희만큼 비싸게 사 주진 않을 겁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애타는 얼굴로 지셀을 집요하게 잡고 늘어지던 부단주는 용병들이 무기를 꺼내자 그제야 혀를 차며 가방을 열었다.
신용장을 써 내려가는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 표정을 보고 클로드가 외쳤다.
“자, 잠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클로드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 거면 2천 골드랑 5백 골드, 두 장으로 해 줘. 가능해?”
벨린다는 입술을 비죽거렸고 부단주는 지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지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줘.”
“이게 마법 처리가 된 종이라 본래는 그렇게 안 해 드리는데……. 큰 금액을 거래해 주시니 추가금 없이 해 드리겠습니다.”
부단주는 혹시나 지셀과 거래를 틀 수 있을지 기대하며 선선히 클로드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최대한 생색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에 꼭 저희 상단을 찾아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는 끝까지 지셀에게 허리를 숙이며 아부를 떨었다.
결국 용병들이 참다못해 노려보고 나서야 부단주는 자리를 떴다.
무려 2천5백 골드나 되는 신용장을 남겨 두고.
“가져가라.”
지셀이 탁자 위에 놓인 신용장 쪽으로 가볍게 턱짓했다.
클로드는 눈을 크게 뜨고 지셀과 신용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돈을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돈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셀은 그런 큰돈이 왜 필요한지 묻지도, 어떻게 갚을 건지 따지지도 않았다.
클로드는 손을 벌벌 떨었다.
‘내, 내가 몇 년 동안 그렇게 바라던 일이 이렇게 쉽게…… 이뤄졌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부단주까지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2천 골드면 평범한 사람이 평생 놀고먹으며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다.
아무리 부유한 귀족이라도 쉽게 내밀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애송이는 한낱 도박쟁이에게 그 큰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 것이다.
클로드는 이 돈을 어떻게든 마련하기 위해 몇 년을 도박장에서 살았다.
그렇게 노력해도 이루지 못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경악으로 가득 찼던 마음속에 서서히 허무감이 차올랐다.
멍하니 서 있던 클로드가 퍼뜩 놀라 고개를 저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려 했던 돈을 드디어 구했는데 자존심이 대수랴.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클로드는 신용장을 덥석 집어 품에 쑤셔 넣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문 앞까지 다가간 그는 지셀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술집을 박차고 나갔다.
마치 도망가는 것처럼.
반신반의하며 그를 지켜보던 용병들이 벌떡 일어났다.
“저놈 잡아라! 도둑이야!”
벨린다가 기겁하며 따라가려 했지만, 지셀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왜 잡아요! 저놈이 돈만 들고 튀잖아!”
“괜찮아. 어디로 갈지 알고 있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벨린다와 용병들이 당황해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갔는지 아신다고요? 아, 도박장이에요?”
“아니, 이번에는 다른 곳이다.”
지셀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저놈이 혼자 처리할 수는 없을 테니 따라가자.”
클로드는 지금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힘없는 자가 그런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지셀은 용병들을 이끌고 술집을 나섰다.
이미 거리에서 클로드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지셀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뒤, 일행은 오스턴 영주의 성 앞에 멈춰 섰다.
“도련님, 여기는?”
“그래, 오스턴 남작의 성이다.”
지셀이 예상한 대로, 클로드는 성 앞을 지키는 경비병과 실랑이 중이었다.
“약속대로 돈을 가지고 왔다고! 영주를 만나게 해 줘!”
“아니, 영주님이 네 친구냐? 다짜고짜 들어가겠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것 같아?”
“영주가 내건 약속이야! 당장 전하라고!”
“알겠으니까, 얌전히 기다려.”
영주는 만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미리 이야기된 바가 있었는지, 클로드는 당당하게 악을 쓰고 있었다.
경비병 하나가 소식을 전하러 들어간 뒤에도 클로드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지셀을 발견하자 몸을 잔뜩 움츠리며 외쳤다.
“왜 왔어!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뭐 하는지 궁금해서.”
“내 일이야! 일만 처리하면 찾아갈 텐데 뭐 하러 따라왔냐고!”
지셀 대신 벨린다가 짜증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당신 같은 도박쟁이를 뭘 믿고 기다려! 당장 설명 안 하면 뺏어 버린다?”
“누가 도망간대? 그냥 기다리라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던 경비병이 지셀에게 물었다.
“댁은 뉘슈?”
지셀은 클로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아, 나는 이 녀석의 친구다. 같이 영주님을 만나러 왔지.”
“친구는 무슨…….”
클로드가 반박하기도 전에 지셀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정신 안 차려? 지금 그 큰돈을 들고 혼자 들어가겠다고? 오스턴 남작은 욕심 많기로 유명한 놈이잖아.”
그제야 클로드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생의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했다.
술과 도박에 빠져 사는 동안 머리가 완전히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여기까지 이 큰돈을 들고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었으니까.
클로드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세차게 젓고 입술을 깨물었다.
‘폐인 생활을 너무 오래 했군. 그래도 귀족과 같이 들어가면 그나마 좀 낫겠지.’
애써 표정을 덤덤하게 고친 클로드가 말했다.
“그래, 친구 맞아. 같이 들어갈 생각이야.”
경비병은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사람을 불러 클로드에게 일행이 있다는 소식을 추가로 알렸다.
얼마 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물론 무기를 맡긴 용병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클로드와 지셀만이 영주를 알현하도록 허락받았다.
오스턴 남작의 생김새는 탐욕스러운 성격을 그대로 빚어낸 듯했다.
눈빛이 탁하고 볼에는 살이 투덕투덕 붙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놈이 정말 돈을 마련했다고?”
지셀 앞에서는 쇠꼬챙이처럼 뻣뻣하게 굴던 클로드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비굴하게 외쳤다.
“정말로 돈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제발 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