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159)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158화(159/266)
158. 마지막 시즌 (3)
시끌벅적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가슴이 간질거리고 설렌다.
비단 세태에 찌든 어른들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다.
올드 타운인 맨스필드도, 거리의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크리스마스.
캐롤 소리와 함께 이쁜 조명이 맨스필드 시내 곳곳을 밝혔다.
클럽하우스 역시 불빛이 꺼질 리가 없었다.
다만 축제가 벌어지는 바깥과 달리, 클럽하우스 담장 안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흐릿한 캐롤 소리가 무색하게끔, 사무실을 채우는 건 현실에 찌든 목소리뿐이었으니까. 나는 거의 죽은 물고기 눈을 하는 코치진을 바라보며, 잔인한 현실을 들쑤셨다.
“박싱데입니다.”
“으윽!”
“기어코, 그날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세상의 종말이 아마 지금…….”
“성탄절인데 그 무슨 실례에요……자일슨 팀장니임.”
박싱데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에 무조건 경기를 치르는 날을 의미한다.
이게 기존 일정의 조율 따위는 없기에, 축구에서의 박싱데이는 그날 딱 하루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러다가 사람 하나 잡지, 이 빌어먹을 협회 놈들은 수십 년째 박싱데이 따윌 없애 버릴 생각은 안 한단 말입니다!”
지옥의 일정, 그 자체를 의미했다.
박싱데이를 전후로 해서 근 한 달간 진행되는 경기 일정은 보기만 해도 눈앞이 깜깜해진다.
베테랑 코치인 알롭마저 능글거리는 표정을 전부 지어내고 답답함만을 토로했다.
“고작 3개월하고도 보름 해서, 리그 열아홉 경기, FA컵 두 경기를 치렀는데, 정말 이러다 사람 잡지…….”
어디 박싱데이뿐일까.
리그 초반부터의 일정도 상당히 빡빡했다. 리그 경기 수만 46라운드니까, 초반부터 촘촘한 경기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던 상황.
선수들의 체력적인 문제가 서서히 부각되고 있는 지금.
연말연시, 박싱데이 특유의 몰아치는 일정은 큰 위험이었다.
당장 우리 팀만 따져도 숨이 턱 막혔다.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23일 일요일에 리그 20라운드 엑서터 시티.
26일에 21라운드 포트 베일 FC
1월 2일에 22라운드 레이튼 오리엔트.
1월 5일에 FA컵 3라운드 노츠 카운티.
4일 후에 리그 23라운드, 다시 3일 후에 24라운드…….
“독일은 보름 정도 휴식기 가지지 않습니까? 다른 리그도 마찬가지고요. 이러니 영국 팀이 챔피언스리그서 활약을 못 하는 거지, 참…….”
박싱데이 전후로 몰려 있는 경기 일정은, 축구 종사자들이라면 필연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싫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이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아무튼,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아, 네, 감독님. 메리 크리스마스…….”
“선수들 체력도 체력이고, 다 가족들이 있으니까, 훈련 시간을 적절히 조정하죠. 크리스마스엔 모두 가족과 보낼 수 있도록 하시고…….”
물론 이는 선수만 의미한다.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의 컨디션만큼 지금 중요한 건 없으니까.
“저는 클럽하우스에 남아서 경기들 검토하고 준비할 테니, 코치분들께선 크리스마스 때 휴일 잘 보내세요.”
알렌스키, 알롭, 막스. 그리고 자일슨 팀장까지.
모두 나를 쳐다보며 침묵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저도 할 일이 많아서…… 남아서 일 좀 하겠습니다.”
“허허, 선수들 훈련 무리하지 않게끔 조정하려면 나도 남아야지요.”
“감독이 일하는데 수석코치인 내가 옆에서 보좌해야…….”
“으으음. 선수들 몸 상태 관리해야 하니 저도 뭐 출근을…….”
“이런, 다들 크리스마스 때 쉬지 않고요?”
“…….”
어쩐지 눈빛이 매섭다고 느껴졌지만 착각이겠지. 아니, 난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일슨 팀장께선 다음 경기뿐만 아니라 1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경기마다 전력 보고서 만들어 주시고, 코치진은 그 보고서를 토대로……”
점점 굳어지는 그들의 얼굴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본인들이 출근하고 싶다는데.
나는 성실한 직원들의 근무 의욕을 차갑게 식힐 정도로 못난 상사는 아니다.
* * *
[리그 8위 엑서터 시티, 맨스필드에게 1대 0 패배!] [핵심 선수들의 골 침묵에, 젠킨슨 다음으로 가장 오래 맨스필드에 헌신한 토마스 캐롤의 깜짝 골!] [영입 선수뿐만 아니라, 오래된 선수들까지. 모두가 한 몸으로 승리를 위해 전진하는 맨스필드!] [20경기 무패 기록을 세운, 맨스필드 타운. 구단 역사상 최다 무패 기록!] [백 년이 넘는 역사 속, 새로운 역사를 쓰는 유진 호. 여기저기서 조심스레 타오르는 화두.] [리그 원 구성원들의 머릿속에 서서히 떠오르는 한 단어] [무패 우승, 맨스필드는 가능할 것인가?]* * *
“…….”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추위가 한겨울임을 역설하는 듯했다.
쿠르르릉.
클럽하우스의 철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경비원도 없는 조용한 클럽하우스.
휴식기에도 클럽하우스를 지키는 경비원 잭도 오늘만큼은 자리에 없었다.
젠킨슨은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후, 후, 숨을 내뱉었다. 새하얀 입김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의 주위로 흐릿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집에서 뛰어오면서 적당한 워밍업은 끝난 상태.
젠킨슨은 그대로 훈련장을 향해 뛰어갔다.
투웅! 툭!
뛰어가던 젠킨슨의 표정이 묘해졌다.
가까워질수록 귓전에 들리는 격한 호흡 소리, 잔디를 박차는 소리, 그리고 공을 다루는 그 특유의 소음까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훈련장에서 연신 공을 두고 뛰는 선수의 이름이 젠킨슨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캐롤?”
“어…… 캡틴! 하하,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긴 한데, 훈련장에서?”
겨울이 무색하게끔, 얼굴에 땀이 송송 맺힌 토마스 캐롤이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젠킨슨은 반가움을 느끼며 패딩을 벗었다.
훈련복이 드러나자, 토마스 캐롤 역시 가볍게 헛웃음을 켰다.
“지독하네, 캡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휴일인데 나와 있는 꼴을 보는 건 처음인데.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말이야. 1년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하, 하하. 철없던 시절이었지.”
토마스 캐롤.
존재감은 희미하지만, 젠킨슨에겐 사실 오스카나 대니 스콧보다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였다.
오스카도, 대니 스콧도 대단하고 좋은 사람이기야 하지만, 한 팀에서 거의 10년간 한솥밥을 먹은 선수하고 같을 수가 있을까.
젠킨슨이 캐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역시. 결혼을 해야 해. 결혼하고 애도 생기니까, 그 게으름뱅이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만드네?”
“결혼 전에 필드 위 싸움꾼으로 유명했던 캡틴이 그런 말 하면 좀 섭섭한데.”
“철없던 시절 얘기지.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이렇게 개인 훈련 해도 되겠어?”
“어차피 애기도 이제 한 살이야. 어딜 갈 수도 없지. 저녁에 어머니에게 애기 맡기고, 와이프 데리고 근사한 저녁 잡아 놨어, 낮엔 훈련해야지.”
“허어.”
존 젠킨슨은 혀를 내둘렀다.
캐롤이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하, 흐흠, 나도 알아. 이렇게까지 성실해질 줄은 몰랐는데…….”
젠킨슨은 저도 모르게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딱히 대단히 성실하지 않았던 동료, 아니 친구의 변화는 그조차 흡족한 일이었다.
“집에 있어도, 애기랑 놀고 있다가도, 막, 뭐라고 해야할까. 몸이 근질거려. 훈련하고, 땀을 흘리면서 뛰고 싶다고. 그런 생각이 종종 들어. 왜 이런지는…….”
“뛰는 게 재밌으니까?”
“……그런 걸지도.”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대화가 없다고 한들,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둘은 과거를 가늠하는 듯, 떠올렸다.
10년 전, 5년 전, 3년 전.
지금의 맨스필드는 그 어느 때하고도 다르다.
“나도 나이가 제법 먹었잖아?”
“지금 나 늙었다고 놀리는 거야, 뭐야?”
“그거야 캡틴이 몸 관리 철저해서 그런거고. 나도, 이쯤 됐으면 고령이지.”
서른셋의 토마스 캐롤이 그리 말하는 게 서른여덟의 젠킨슨으로선 퍽 웃겼지만, 캐롤의 진지한 눈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캐롤은 공을 툭툭, 차올리며 말했다.
“하루, 하루 그냥 뭐, 선수로서의 발전이니, 성장이니 그런 건 잘 몰랐어.”
“성장이란 건, 참 쉽게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
“적당히, 적당히 팀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주급만 받아 가면서 살자.”
“……너뿐이겠냐.”
“하하, 알고 있었어?”
“죽은 생선 눈을 하고 다니던 애들이 어디 한둘이야? 다들 떠났지만…….”
“나름대로 실력 있는 놈들은 좋은 팀 갔고, 실력 안 되는 놈들은 감독님 새로 오시면서 다들 쫓겨났고…… 난 딱 그 중간이야.”
젠킨슨은 자조 어린 듯한 목소리에도 무어라 위로도 못 했다. 어떻게 포장해서 말할지 머릿속이 복잡할 때, 토마스 캐롤은 묵묵히 말을 이었다.
“뭐든지 어중간한 놈.”
“…….”
“그거 알아? 내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 입고 있는 팬들이 경기장에 몇이나 될지?”
“야, 그건…….”
“못하는 건 아닌데, 또 잘하는 건 아니고…… 애매하지. 스쿼드 채우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은데, 선발로는 좀 아쉽고. 다 그랬거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고. 그래서 캡틴처럼, 팀을 위해서라든지 그런 거, 잘 몰랐어.”
젠킨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토마스 캐롤은 골문을 향해 슈팅을 날렸다.
빈 골대.
그의 슈팅은 아무도 없는 골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벗어났다.
“쳇. 변명 같겠지만, 재미가 없었으니까. 축구라는 게.”
“……매일 지는데 무슨 재미를 느껴.”
“그래서 캡틴이 대단한 거지. 그 재미 없는 상황에서도 훈련하고, 팀을 위해 뛰고. 사실 그땐 왜 저럴까, 왜 주장만 저렇게 유난일까, 그랬거든.”
젠킨슨은 대답 대신 공을 들고 와 캐롤의 앞에 뒀다.
캐롤은 그 공을 한번 말없이 주시하더니, 발을 내디디며 후려 찼다.
터엉-!
“근데, 이젠 좀 알겠어.”
이번엔 그 슛이 골포스트 상단을 맞혔다.
캐롤은 고개를 돌려서 클럽하우스 건물을 바라봤다.
크리스마스에도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의 창문.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던 토마스 캐롤은, 다시금 공을 가지고 와서, 골대를 향해, 뻐엉.
철럭―!
“…….”
골망을 뒤흔드는 슈팅. 그제야 캐롤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왜 재밌는지, 왜 이 구단에 정이 생기는지, 십 년간 뛰면서도 그냥 돈을 받아 가던 직장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클럽에 소속감을 느끼는지…… 다 유진 감독님 부임 이후야.”
“……그렇긴 하지.”
그때부터 팀은 바뀌었으니까.
젠킨슨은 그 말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도, 캐롤도, 아니 맨스필드에서 1년, 2년 이상을 뛰었던 선수라면 모두 절실히 피부로 느끼는 진실.
‘모든 걸, 그 남자는 바꾸고 있다.’
감독은 팀을 바꿔 놓았고, 끝내는 선수마저 바꿨다.
젠킨슨 본인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 당장 이 존재감 없는 토마스 캐롤조차.
이게 쉬운 일일까. 어린 선수도 아닌, 자신만의 신념이 뚜렷해진 나이 든 선수마저 바꾼다는 것이. 젠킨슨은 캐롤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미소가 꿈틀거리더니, 씁쓸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런데 말야, 캡틴.”
“응?”
“나 계약 기간 올해까지거든.”
“……!”
“그거 알아? 작년부터 새로 온 이적생들 말고, 기존 맨스필드 선수단 중에서, 재계약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거?”
젠킨슨의 눈꼬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캐롤은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이 6개월 남은 지금, 나는 보스만룰 덕분에 다른 구단과 계약해서 이적료 없이 옮길 수 있는 상황이야. 하지만.”
캐롤은 긴 숨을 내쉬며 다시 불이 켜진 사무실의 창을 바라봤다.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코팅된 그 창 너머에, 캐롤은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직도 감독님은 나한테 재계약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
“이번 시즌 우승하고, 다음 시즌 챔피언십을 간다면, 이젠 아예 달라지니까. 기존 선수들은…….”
자리가 없겠군.
그 같은 말을 젠킨슨은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캐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포기 안 해. 캡틴.”
“…….”
“여기 나가면, 갈 팀도 없어. 여기서 은퇴할 거야.”
순간 젠킨슨은 뜨겁다고 느꼈다. 추운 칼바람이 몰아치고, 흘린 땀이 식으면서 빼앗는 체온이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드는데도,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그간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했던 캐롤의 존재감이, 노을 색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전부, 이번 시즌, 전부 쏟아 낼 거라고.”
“……!”
그 선명한 의지를 보면서, 젠킨슨은 어깨를 꽉 잡았다.
“그래, 전부.”
캐롤에게 말하듯이, 그리고 본인에게 다짐하듯이.
“…….”
그 광경을, 창가의 유진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