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22)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22화(22/266)
22. 협상은 필드에서 (4)
사람은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치면 대개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크게 흥분해서 방방 날뛰거나.
충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넋을 놓거나.
스탠리와 그의 에이전트는 둘 다 후자였다.
“놀라지 마세요. 제가 생각하는 스탠리 선수에 맞는 합리적인 주급이니까요.”
“합……리적이라고요?”
그제야 스탠리의 얼굴에 떠났던 넋이 돌아왔다.
먼저 반응한 사람은 에이전트였다.
“지금 사람 불러놓고 장난합니까?”
“장난을 왜 하나요. 저는 그런 실없는 사람 아닙니다. 시간도 없고요.”
“주급의 절반도 안 주면서 오라는 게, 대체 어떤 구단에서 이적 계약 협상 때 내미는 카드입니까?”
“그러면 주급을 더 높이기라도 해야 하나요? 지금 폼에?”
“!”
에이전트의 입이 벌어졌다.
그래도 그는 꽤 훌륭한 에이전트였다.
뻔뻔하단 뜻이다.
“당연하죠! 스탠리 선수는 한때 잉글랜드 최고 유망주 50인에 뽑혔던 대단한 재능이에요! 데이비드 베컴이 나타났다고 소문이 자자했었다고요!”
“그것이 벌써 13년 전이고, 지금은 리그 투의 백업 선수네요. 리그 투의 베컴이라.”
에이전트는 입을 다물었다.
핵심을 찔러 넣어 말문이 막힌 것도 이유였지만, 그로서는 이런 상황이 처음일 것이다.
묻지 않아도 그의 눈이 말해주고 있으니까.
‘계약하러 왔다면서, 선수를 면박 주고 깎아내려?’
분명 그런 속내가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선수와 구단 간의 협상에서 대개 선수가 갑이다.
애당초 대부분의 협상이 구단에서 그 선수를 영입하기를 원한 덕분에 진행되니까. 선수를 구워삶기 위해 입바른 말을 마구 내뱉는 장면이 보통의 협상장이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구단이 아니라, 선수가 더 급할 때.
지금 내 행동은, 저들이 그런 상황이라는 일종의 명시적인 선언이었다.
에이전트는 그 의중을 깨달아서 말문이 막힌 것이리라.
얼마간의 침묵이 지났을까.
에이전트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귀 구단에서 먼저 스탠리 선수를 원했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런 협상 조건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일어날게요.”
“예, 들어보지 못했겠죠. 이 정도 조건을 제시한 구단도 없을 테니까요.”
“그 무슨!”
“아닌가요? 혹시 협상 중인 구단이 따로 있습니까?”
“그거까지 그 쪽에게 말해줄 이유는 없습니다만.”
“네,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면 백업으로 남겠습니까, 스탠리 선수.”
내 질문의 방향은 에이전트가 아니라 스탠리에게 향했다.
스탠리의 눈은 다소 혼탁했다.
눈빛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읽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에이전트는 스탠리가 대답하지 않자,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말했다.
“가자고. 다 망해가는 구단에서 원한다고 해서 자리에 앉아줬더니, 이 무슨 모욕이야?”
“다 망해가는 구단밖에 찾지 않는다는 얘기겠죠.”
“이 사람이 정말!”
에이전트가 참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로 넥타이를 푸는 순간.
스탠리가 불쑥 말했다.
“제 가치가 이 정도라고요?”
그는 계약서에 적힌 숫자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4부 리그팀의 일반적인 백업 선수의 주급입니다.”
“제가 받는 주급보다 현저히 낮다는 거, 아시죠?”
“압니다. 스탠리 선수가 본인 실력 대비 과도한 주급을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제 돈까지 깎으면서 다른 팀으로 가려고 할까요? 저를 영입하려고 하는 게 맞나요, 감독님?”
스탠리의 목소리는 다소 평이했다.
에이전트가 과하게 흥분했기에 그런 것일까.
상당히 대비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예. 그리고 저희 팀에선 주전급의 주급입니다.”
“……!”
“즉, 우리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을 내밀었단 얘기죠.”
스탠리의 눈썹이 씰룩였다.
“나는 말입니다. 선수께서 부상을 입어 위축되거나, 또 다른 부상의 가능성이나, 현저하게 떨어진 폼이나, 과거 유망주였던 찬란한 과거가 퇴색된 지금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
멈춰있는 듯한 동공을 응시했다.
“내 선수로 쓸 겁니다. 백업 따위가 아니라, 주전으로요.”
감독으로서의 믿음, 낯선 팀에서의 걱정을 덜어주고.
“물론, 그 자리를 쟁취해내는 것은 스탠리 선수입니다만, 적어도 저는 제 눈을 믿고, 가치 없는 것에 돈을 지불하는 충동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
“제2의 데이비드 베컴, 아름다운 킥으로 붙여졌던 그 별명. 경기 뛰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잖아요?”
‘누구에게’라는 주어는 없다. 팬일지도, 가족일지도. 하나 때론 말이 생략되어도, 확실히 의도가 전달될 때가 있다.
스탠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가라앉은 침묵에서 에이전트는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스탠리가 눈을 감은 채 침묵하고 있자 답답한 기색을 보였다.
에이전트가 주도하는 협상이라 한들.
결국 선택과 결정은 선수의 몫이다.
만일 이 자리에 에이전트만 홀로 왔다면, 나는 자리를 파했을 것이다.
내가 공략해야 할 건 에이전트가 아니라 선수, 브랜들리 스탠리였기에.
“하…….”
스탠리가 실소를 터뜨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는 탄식인지, 감탄인지 알기 어려운 소리를 내뱉으며.
“재밌네요. 이거.”
웃었다.
내가 공략해야 할 선수는 브랜들리 스탠리.
돈보다 필드 위에 있는 걸 사랑하는 남자였다.
* * *
스탠리를 수월하게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으니까.”
수요가 없는 공급은 거래가 체결될 수 없다.
많은 구단이 그가 받는 고액 주급을 생각하면, 접촉할 생각조차 안 했으리라.
일반적으로 지금 받는 주급을 크게 삭감하면서까지 타 팀으로 이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흔하지 않다는 말은, 사례가 적지만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인이 사랑하는 팀으로의 이적이거나.
말년에 고향팀으로 돌아가거나.
스탠리가 주급 삭감에도 동의하는 근거는 단 하나였다.
“찬란한 과거를 가졌던 선수야. 후회하겠지. 그리고 아직도 늦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이 품은 재능, 늦게나마 피울 수 있다고. 그래서 필드에 나가고 싶어해. 부상을 두려워하지만, 그래도,”
부상을 두려워하면서도, 경기장에서 위축되더라도.
그래도 필드를 떠나지 못하는 남자.
그것이 축구에 대한 열정일지, 아니면 아직 내가 모르는 무언가일지.
하나는 확실하다.
“경기장에서 뛰는 순간에야 살아 숨 쉬는 걸 느끼는 선수.”
그래, 뛰고 싶어 하는 선수.
우리 팀에 가장 필요한 가치였다.
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수라는 거, 또 다른 뜻이기도 해. 그만큼 형편없다는 얘기잖아.”
막스는 스탠리 선수의 영입을 탐탁잖아 했다.
현재 우리 뎁스에서 선수 영입은 좋지만, 굳이 데리고 올 만한 선수인가는, 의문이라는 뜻이다.
“장점이 죽어버린 선수야. 단점만 그득그득하다고.”
누구도 부정치 못하는 단점이 확연히 불거진 선수다. 잦은 부상, 부상 이후 돌아오지 않는 스피드, 부상악령에 위축된 플레이.
하지만.
“그건 윙어로 뛰었을 때의 단점이고.”
“……뭐?”
막스가 놀란 눈을 떴다가, 이내 떠오른 게 있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잠깐, 포지션 변경 생각하는 거야?”
“스탠리,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윙어였어. 가끔 중앙에서 뛴 적 한두 번은 있겠지, 그렇지만 포지션을 이리저리 옮길 정도의 다재다능이 아니야.”
“그건 지금까지 아무도 새로운 포지션을 권유하지 않아서야.”
막스가 열변을 토했다.
“10년 가까이 뛰었던 포지션에서 변경한다고? 애당초 여러 포지션을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는 대니 스콧 같은 지능을 가진 선수가 아닌데? 피지컬로 승부 보던 선수였다고.”
선수의 포지션 변경은 감독이나 선수나 둘 다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리스크는 모르기에 위험한 것이다.
미리 안다면.
정확히는, 리스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리스크가 없다니?”
과거의 미래에선 포레스트 그린은 상당히 유명한 구단이었다.
4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3부 리그로 복귀.
3부 리그에서도 리그 6위로 플레이오프를 통과해 승격 당해 다이렉트 승격 성공.
2년 연속 승격이라는 쾌거를 이뤄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놀랍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유형은 상당히 많으니까.
프리미어리그 진출은 몇 년이고 실패하지만, 그 과정에서 축구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FA컵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이 스포츠 뉴스를 뜨겁게 달궜다.
그것도 프리미어리그 팀 세 개 구단을 격파하며.
아무리 로테이션을 돌리는 상대 팀이라고 하지만, 그중에 아스날과 리버풀이라는 거함이 있었다면 이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수많은 티비 패널과 언론 칼럼들이 언더독 포레스트의 쾌거를 분석했다.
그중엔 감독의 훌륭한 지휘며, 좋은 선수단 구성을 만들어낸 단장의 능력이며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더 다가오는 핵심 이유는 바로 선수들이었다.
‘무명 선수들의 선전을 넘어선 대활약.’
그중 하나가.
‘챔피언십 리그 베스트 일레븐의 중 하나였던 브랜들리 스탠리.’
친선경기에서, 그가 윙어로 나왔을 땐 나도 다소 놀랐다.
원래 포지션이 윙어였을 줄은 몰랐다.
‘전 포지션이 윙어였을 줄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지. 원래부터 그 포지션이었던 것처럼 말이야.’
FA컵 4강전에서 그들의 반란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내 팀이었으니까.
포레스트의 단장과 감독, 그리고 선수진까지.
제법 내 머릿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런 포레스트의 핵심을 데리고 오다니.
조금 미안하긴 한데.
‘아직 더 미안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핵심 중의 핵심.
‘그 친구도 데려와야 하니까.’
챔피언십 득점왕이 되는 스트라이커.
해리 오스카까지도.
* * *
“저는 구단의 명성은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그를 만난 장소는 작은 펍(Pub)이었다.
“팀 명성 생각했으면, 강등당하자마자 들어오는 오퍼 받고 바로 떠났을 거예요. 왜겠어요? 당장 리그 원 팀의 오퍼가 몇 갠데.”
소박하고 담백한 느낌의 인테리어와 슴슴한 맥주의 주향이 입안을 감돈다.
슬쩍 메뉴판을 바라봤다. 가격을 보니 이해가 간다. 싸구려군.
“그러니 감독님이 나를 트레이드로 원하느니 할 때, 만남을 거절하지 않은 겁니다. 팀 명성만 보면, 다른 리그 원 오퍼들 거절하고 이 자리에 앉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는 말을 할 때 고개를 까딱이는 습관이 있었다.
여러 가닥으로 땋아 늘어진 드레드 헤어가 흔들리며, 그의 거친 면모가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졌다.
사각형의 턱이 으적으적 움직이며, 맛없는 안주와 맥주를 계속해서 들이 삼켰다.
새하얀 이빨이 검은 피부 대비 유난히 번뜩였다.
“그쪽 친구들하고 미팅을 안 해본 건 아닙니다. 그런데 썩, 만족스럽지 않더라, 이 말입니다. 계속 리그 투에서 뛸 실력이 아니라니, 재능이 아깝다니……구단의 비전과 미래 이런 소리나 늘어놓는데, 어디 안 답답합니까?”
그는 답답하다는 듯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마셨다.
출렁이는 목울대가 크게 꿀렁이고, 그가 미간을 좁히며 입가를 대충 훔쳤다.
“크, 어때요, 맥주 맛 좋지 않아요? 나 여기 단골이에요.”
홀로 족히 이삼 인분을 먹어 치운 그는 나의 1.5배는 됨직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혹시 감독님도 구단 미래니, 우승컵을 차지하니, 승격하니, 이런 걸 얘기하러 오신 거면 저는 더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날 겁니다. 유치하게, 무슨 팀의 미래니, 열정이니 그런 소릴 하겠어요? 내 나이가 몇 갠데.”
새하얀 웃음을 드러내며 사람 좋게 웃던 그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서늘한 눈이 짐승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짐승.
그랬다.
그는 짐승 같은 사내였다. 196cm의 신장과 92Kg에 달하는 그라운드의 짐승.
해리 오스카.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그가 굵고 기다란 손가락 하나를 폈다.
“지금 받는 것보다 세 배의 돈.”
그리고 가장 어려운 협상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