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28)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28화(28/266)
28. 돈이 없다면 잇몸으로 (1)
“지금 우리가 이기고 있는 거 맞죠? 두 골 넣었으니까!”
목마를 탄 손녀가 두 발을 마구 흔들며 크게 쫑알댔다.
잭은 조금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고 미소를 보였다.
“그래, 이기고 있단다. 우리가 두 골 넣고, 이기고 있단다.”
손녀에게 해주는 말이었지만, 잭 본인에게 되뇌듯이 하는 말이기도 했다.
비단 그뿐일까.
앉아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전부 일어선 채, 갈라지는 목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함성과 응원을 쏟아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한데?”
“반즐리 우승 후보라면서? 우리가 두 골이나 넣고 압도하고 있다고!”
“대니 스콧 봐! 혼자 경기를 지배하잖아?”
들뜬 목소리가 관중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두 손을 꽉 쥐고, 기쁨과 희열로 범벅된 눈빛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누가 대니 스콧 불안하댔어?”
“혼자 퀄리티가 다른데!”
“저런 선수를 어떻게 데리고 온 거지?”
“감독이 직접 데리고 왔다고 했잖아. 부임하자마자 바로 영입했다고.”
“감독 처음이라더니, 썩 불안했는데…….”
“뭐 풋내기? 하! 풋내기한테 밀리고 있는 게 누군데!”
잭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누가 누구한테 풋내기라고 욕한 거야?’
사실 대다수의 팬은, 반즐리 감독의 기자회견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대놓고 반발하진 못했다. 실상이 어떻든 드러나는 부분은 확실히 유진은 경력 없는 풋내기였고, 반면 반즐리 감독은 제법 잔뼈가 굵은 감독이었으니까.
잭은 그 기자회견을 보고 차마 화도 제대로 못 냈던 자신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흥, 사람 존중도 없이 비아냥대는 그딴 재수 없는 콧수염보다, 잘생긴 풋내기가 훨씬 낫지!”
어린 아들하고 온 듯한 중년 여성이 소리치자 주위에서 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워낙 작은 구단이고 팬들도 늘 보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소리치는 장면이 퍽 정겨웠다. 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즐리 같은 감독 따위 한 트럭을 데리고 와도 필요 없다.
이건 비단 그의 생각뿐만이 아니다.
경기 전 팬들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번 팬을 피하고 도망 다니기만 하던 전임 감독들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여 줬기에, 팬들의 신임도는 상당히 올라간 상황.
심지어 개막전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고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 감독이 짱이야?”
“응, 그래. 최고란다.”
잭은 그리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아비의 기분이 좋은 것이 전염되었을까, 손녀는 그저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그 끝.
전광판에 90분을 넘어 추가시간이 지나기 시작하자, 모두 긴장된 얼굴로 필드로 주시했다.
그리고.
삐이이익―!
휘슬이 울렸다.
개막전 승리라는, 그 선언의 의미가 담긴.
“와아아아아!”
네 면으로 이뤄진 경기장에서 동시에 함성이 쏟아졌다.
그저 감정 없는 기계적인 외침이 아니라, 순수하게 즐거운 감정이 묻어나는 열띤 환호.
그리고 관중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울림이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퍼졌다.
―우리는, 함께 이깁니다.
그 목소리.
일어선 관중 모두.
필드 위에서 웃으며 주저앉는 선수들과 똑같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하고 있었다.
* * *
“풋내기 감독이라 매도했던 유진 피셔 감독에게 시즌 첫 패배를 당했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심리전은 통하면 상대를 완벽히 농락할 수 있지만, 실패한다면 거꾸로 쥐어진 칼이 되어 가슴을 찌르는 법.
샘 홀튼은 자신이 진창에 빠진 꼴을 순순히 인정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져오는 기자회견장에서, 샘 홀튼은 깔끔하게 일축했다.
“제 선수들은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감독인 제가 상대 팀을 잘못 파악한 것이 패배의 요인이었습니다. 승리를 가져간 유진 피셔 감독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샘 홀튼은 패인을 오로지 자신에게 돌리며, 선수들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았다.
개막전부터 선수를 탓하며 비판하는 짓거리가 얼마나 멍청한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러 조롱을 생각하니, 그도 가슴이 쓰렸다.
기자회견을 짧게 일축하고 나온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경기를 복기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아직 자신의 패인이 무엇인지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상대 감독을 찾아가 경기 내용을 복기하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감독으로서 첫 경기를 치르는데, 거기에 대놓고 조롱했으니…….”
구단 버스에 오른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 코치가 슬그머니 태블릿을 건넸다.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으로 나오는 맨스필드 감독의 경기 후 기자회견이었다.
샘 홀튼은 뭘 이런 걸 보여 주냐고 눈빛으로 타박했지만, 정작 태블릿에선 눈을 떼지 않았다.
―반즐리 감독 샘 홀튼은, 경기 전에 유진 감독님을 향해 풋내기라 일갈했는데요. 오늘 멋지게 실력으로 갚아줬습니다! 기분이 통쾌하신가요?
“일갈은 무슨, 저 기자. 나한테 기분 어떠냐고 물어보던 기자 맞지? 참나, 무슨 싸움을 또 붙이려고 해? 다 끝난 경기인데.”
샘 홀튼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슬쩍 곁눈질로 화면에 나오는 유진의 입술을 바라봤다.
―감독으로서 처음이니,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응?”
샘 홀튼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번 승리에 운이 많이 따르고, 선수들이 많이 뛰어준 덕입니다. 무엇보다도 홈구장을 찾아오신 팬들의 열렬한 응원이 사실상 승리의 핵심입니다. 관중의 응원에 감명받은 축구의 신이 오늘 맨스필드를 택했을 뿐이고, 시종일관 우리 팀을 괴롭히고 시험한, 반즐리 감독님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단호하면서도 힘 있게, 그러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정중한 어조.
눈을 빛내며 싸움을 붙이던 기자들도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며 추가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 공백 사이로 유진이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그 모습을 보며, 샘 홀튼은 기이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헛웃음을 켰다.
“이거 참, 정작 풋내기는……나인 것 같은데.”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 * *
경기장 상층부에 있는 사무실에서 소소한 파티를 했다.
“고작 한 경기 승리야, 릴리.”
“개막전 승리잖아?”
릴리는 얼굴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건배를 제안했다.
애석하게도 술은 아니었다.
나도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릴리도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적당히 단맛이 감도는 음료를 마시는 아주 조촐한 축하 자리였다.
“오랜만에 재밌었어. 관중들이 끊임없이 노래하는데, 너무 기분이 좋더라.”
“다행히도 팬들이 잘 따라줬어.”
“그게 다 유진, 네 덕택 아니야? 경기 전에 그렇게 심장을 두들겨놓고?”
맞다. 의도한 거다.
애당초 의도가 없었다면, 득이 될 것 없는 자리에 나가 뜬금없이 연설했겠는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무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으니까.”
“응?”
“남들보다 많은 주급을 줘서 스타 플레이어를 데려오는 것도, 팀의 훈련 시설이 좋고 코치진이 너무도 뛰어나서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리고 잠재력을 터뜨리는 것도, 다른 구단에 비하면 약세야.”
“그렇긴, 하지.”
릴리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구단 얘기만 나오면, 릴리는 참 알기 쉽게 변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무기를 만들 거야. 우리도 만들 수 있는 무기. 하지만 어떤 팀에게도 통할 수 있는 강력한 창끝.”
“그게……그 연설하고 관련이 있어?”
“우리 팀의 무기는 팬이야.”
“팬? 잠깐만, 우리 팬 그렇게 많지 않아.”
“알아. 하지만 이 작은 경기장, 다 채울 수는 있어.”
맨스필드의 주 경기장인 필드 밀의 수용인원은 일만 명.
사실 7만의 인구에서 1만의 관중석을 채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타지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특히 노티엉셔 주 곳곳에 퍼져 있고. 그들 대부분은 노팅엄의 팬이지만, 고향팀을 잊지 않겠지.”
“확실히, 그 사람들이 우릴 찾는다면 일만 석 다 채우는 건 어렵지만 가능은 해.”
“채우는 방법은 간단해. 성적.”
“!”
“정확히는 홈 경기 성적이지.”
원정 성적은 다소 약세여도 괜찮다. 어떤 스포츠든 이기면 재밌다. 아무리 지루한 게임이어도, 내가 이기면 재밌다. 그것이 스포츠의 핵심이다.
경기를 찾아오는 홈관중을 유지하고 늘리는 방법은 오로지 홈 성적이다.
“뭣보다 우리 구단은 시골에 있잖아.”
“맞아. 그래서 관중동원력에 한계가 있어. 일단 구단이 자생하려면 티켓값에서부터 확실히 수입원이 잡혀야 하는데, 연령대가 높다 보니 요금을 인상하기도 그렇고, 강등당했는지 또 늘릴 수도 없고…….”
“매번 만원 관중을 만들어야지.”
“그게 쉽진 않잖아?”
“도리어 쉬워.”
“으응?”
“관중들을 보면, 서로 다 아는 얼굴이거든. 어디서 무슨 장사를 하는 사람,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람, 어디서 농장을 꾸리는 사람……제각기 소규모 커뮤니티가 여러 곳에 형성되어 있어.”
릴리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 다리 하나 건너면 아는 사람이 나오는 좁은 커뮤니티야. 이 커뮤니티가 다 연결되었거든. 여기서 오늘 경기를 보고 간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할까?”
“그야, 당연히 축구 얘기.”
영국인들에게 축구는 삶이다.
삶을 얘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릴리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서서히 밝아졌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그러니까, 커뮤니티의 주제가 축구가 되면.”
“경기를 보지 않은 사람은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고.”
“그러면 같이 경기장을 찾으려고 할거고.”
“관중은 늘어나는 것이지. 결국 이러나저러나, 홈 성적이야.”
“아아!”
사실 릴리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다.
다만 그 조건이 너무도 쉽지 않았으니, 아무도 이뤄내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홈 성적 좋은 거, 그거 몇 년 동안 우리 팀하고는 먼 얘기였어.”
릴리가 작은 주먹을 눈가에 갖다 대며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다를 거야.”
“……유진.”
“이기는 재미, 응원하는 재미, 그걸 알게 됐으니까.”
“그러면, 이게 우리의 무기가 된다는 거야?”
“90분 내내 잠깐도 쉬지 않고 나오는 함성과 연호, 응원. 그리고 상대 팀을 향해선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저속한 욕설과 무분별한 비난과 조롱, 끊임없는 야유.”
“…….”
“원래 원정이 어렵지만, 난 만들 거야. 우리 홈에선, 아무도 승점을 가져갈 수 없다는 그 트라우마를 전부한테.”
릴리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압도적인 홈에서의 극강. 가득 찬 만원 관중의 경기장. 그것이 무기가 될 거야. 경기장이 작아서 차라리 낫거든. 꽉 찬 경기장에서 쏟아지는 90분 내내 들려오는 욕설을 생각해봐.”
상대로서는 아무리 집중력이 뛰어난 선수라도 엄청난 압박감으로 돌아올 것이다.
모든 경기에서 이길 순 없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경기에서 이겨야 우승한다. 이 절대적인 명제에서 내가 찾은 방법은, 홈 전승이었다.
“오늘이 그 시작이 될 거야.”
팬들을 각성시키는 것도, 그런 의도였다.
릴리의 입이 헤, 벌어졌다. 상기된 얼굴의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너는 생각이 다 있구나. 그저 맹목적으로 공만 차던 답답한 유진이 언제 이렇게 철두철미해졌을까.”
“세월이 무상한 법이야, 릴리. 우리도 이젠 아이가 아냐.”
“헉,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대체 어떤 말에서 늙었다는 결론이 도출됐는지 모르겠는데.”
릴리가 실없이 웃었다. 오늘 승리의 기쁨이, 술을 마시지도 않았건만 그녀를 취하게 한듯했다.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러면 경기 후 기자회견은?”
“응?”
“내 생각엔 그렇게 담담하게 안 하고, 찍어 누를 줄 알았거든.”
“굳이 진흙탕 싸움에, 기자들이나 좋아하는 먹잇감을 던져줄 필요는 없어. 더비 팀이면 모를까. 어느 정도 다른 팀하고 관계를 좋게 유지해야지.”
“비즈니스적으로?”
“그렇지. 선수를 팔고 사 오거나 할 때, 생각보다 이 인간적 관계란 것이, 때론 비즈니스적 합리성보다 더 강력하거든.”
그때, 거짓말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 듯했다.
나는 릴리에게 손을 들어 양해를 바라고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유진입니다.”
전화 너머에서, 헛기침과 함께, 머뭇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 그, 크흠. 반갑습니다. 나 반즐리 감독 되는 사람인, 샘 홀튼이라고 합니다.
“예, 반가워요. 감독님.”
―큼, 예, 일단 그, 경기 전에 제가 했던 발언 경솔했음을 사과드리려고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내가 좀, 지저분하게 경기에서 이기려고 무리했어요, 그, 미안합니다. 유진 감독.
“예, 사실 기분 나쁜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과하시니 받겠습니다. 그래야 감독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실 테니까요.”
―흠, 흠 사람, 참 시원하니 좋습니다. 고마워요. 오늘 경기 감독님이 정말 멋지게 이겼습니다. 개막전 승리, 축하드려요.
“네, 좋은 경기였어요.”
조용히 침묵한 채 전화를 듣는 릴리의 눈이 동그래진다.
이런 내 모습이 많이 의아하게 보였을까.
―하하, 고마워요. 감독님이 경기 끝나고 그렇게 말씀해주신 덕에, 내가 체면을 차렸어요. 이거야 원,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갚을 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으, 응?
“오늘 벤치에 앉아 있던 레프트 윙어, 클라라니 선수. 임대해주시죠.”
―엑?
때로는 비즈니스적 합리성 보단.
체면과 인간관계.
그것이 더 강렬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내 이익을 위해선.
“은혜, 갚으시겠다니 받겠습니다.”
뻔뻔해질 수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