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29)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29화(29/266)
29. 돈이 없다면 잇몸으로 (2)
전화 저편에서 침묵이 흐른다.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감정이 여실히 느껴진다.
농담인가, 그냥 찔러보는 말인가, 고심하는 표정이 눈앞에서 보이는 듯했다.
한참 후에야 머뭇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그, 지금 정식으로 임대 요청을 하는 것입니까? 클라라니한테?
“예, 맞습니다. 구단 프런트를 통하면 다소 오래 걸리니까요. 결정권은 아무래도 감독님이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허, 일개 감독에게 권한이 많을 리가요.
“겸손한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반즐리 구단에는 저희 팀처럼 따로 단장이나 디렉터가 없더군요.”
―아, 뭐 그렇긴 합니다만.
“구단 수뇌부라곤 대표이사이신 분이 한 분 계시던데, 구단주님 사람이고요. 사실상 감독님과 구단주님이 직통이던데…….”
―허, 하하하, 감독님께서 우리 구단에 관심이 많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거야 원, 나중에 식사라도 한번 하시면 좋겠네요.
“네, 자리를 가지기 전에 일단 구두로 어느 정도 말을 맞춰놓는 것이 빠르겠죠.”
내가 화제를 돌리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하자, 전화 건너의 목소리도 낮게 가라앉았다.
―클라라니 선수가 서브진이긴 합니다만, 우리 팀에 중요한 선수입니다. 11명의 선발 선수 외에도 든든하게 버텨줄 서브진의 중요성, 감독님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브입니까, 아니면 감당 못 할 화근덩어립니까?”
―……!
전화 저편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대화를 듣고 있는 동그래진 릴리의 눈을 바라봤다.
재빨리 메모장에 글자를 적었다.
<허용 가능한 월 임대 비용은?>
릴리의 눈이 찡긋거렸다. 그녀가 짧게 고민하는 사이 샘 홀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허허,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화근이라뇨, 내 선수인데.
“팀에 걸핏하면 불화를 일으키고, 구단 규칙을 번번이 어기며 훈련에도 잦은 지각을 하는 선수라면 화근이 맞겠죠.”
―아니, 그걸 어떻게?
찔러본 거다.
“경기 전에, 해당 팀에 대한 선수들은 백업까지 다 알아보는 게 감독의 소양이죠.”
물론 티를 내진 않았다. 적어도 선수단을 분석한 건 사실이었기에. 다만 방금 찔러본 내용은 어느 정도 예상할만한 전형적인 주제였다.
“주전 밀렸더군요.”
―…….
“전 시즌까지 붙박이 선발이었던 선수가 주전에서 제외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흔히 말하는 노쇠화도 아닙니다. 스물일곱이니까요. 그렇다고 부상도 아닙니다. 건강한 선수니까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다. 주전에서 제외된 이유.
긴 시즌에서 필승해야만 하는 개막전.
그 개막전에서 핵심 주전이었던 선수를 쓰지 않고 벤치에 앉힌 이유.
밖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훈련장, 라커룸에서나 보여 주는 실망스러운 모습이 있단 의미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이유는 대게 훈련 지각, 불참, 음주와 유흥 따위가 일반적이다.
“감독님 플랜에서 제외된 선수를, 굳이 주급을 주면서 앉혀둘 이유는 없죠. 그런 선수가 라커룸에서 불길한 존재감을 내뿜으면 더욱 그렇고요.”
―맨스필드에 코칭 스태프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스카우터진도 없는 걸로 아는데, 그냥 벤치에 앉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유추해냈다는 겁니까?
샘 홀튼의 목소리에 떠오르는 건 선명한 경계였다.
동시에 탄식에 가까운 놀람이 어려있었다.
그때 릴리가 펜을 사각거리더니, 종이를 내밀었다.
<00만 파운드 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와 눈을 마주치곤, 다시 말했다.
“벤치에 앉아 있던 클라라니는 다른 선수들이 교체 출전할 때마다 계속 실망과 분노를 대놓고 드러냈습니다.”
―……!
“단순히 주전에 밀렸다는, 점 하나 때문에 보이는 표정치곤 살벌했습니다. 무언가 불화가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감독님과요.”
숨소리만 들려왔다.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했다는 심정은 그 숨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경기 막판에는 감독님 등을 미친 듯이 노려보더군요.”
어디 그뿐일까.
“경기는 지고 있는데, 감독님을 보며 도리어 쌤통이다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팀은 지는데 도리어 웃는 선수라.
“잘은 모르지만, 감독님과 클라라니 선수와의 신뢰 관계가 무너진 건, 알겠습니다.”
―…감독님, 정말 내 클럽에 빨대 꽂은 건 아니시죠?
“꽂을 빨대가 있으면 맨스필드가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겠죠.”
―허, 하아, 이건 절대 인종차별적 발언 아닙니다. 궁금해서 그래요. 혹시 아시아에서 무슨 점성술 같은 거 익히신 겁니까?
“실없는 농담은 취향이 아닌지라.”
―잠깐만요, 그러면 경기 내내 저와 벤치를 살폈다는 겁니까?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벤치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상대 교체 출전 선수를 예측할 수 있고, 그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조급한지, 여유로운지 정도만 파악해도 경기의 템포를 맞추는 데 큰 힘이 된다.
혹자는 그런 것까지 세세히 신경 쓰는 것이 말이 되냐고 묻는다.
그럼 답한다.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누구도 부정치 않는 최고의 감독이었다.
―어떻게, 그 치열한 경기 흐름을 주시하면서도 우리 벤치까지 다 살피고. 그런 비하인드까지 유추했다고요? 그래, 할 수 있다고 쳐요! 그런데 내가 지금 소름이 돋는다고!
기가 막혀 하는 목소리를 잠시 들어주다, 나는 핵심을 찔렀다.
“불만만 많고 팀 분위기 망치는 선수. 억지로 데리고 있어 봤자 불화만 초래합니다. 팀이 승승장구할 땐 모르죠. 하지만 한번 삐끗하면? 운이 좋지 않아 연패라도 하면? 예, 그런 친구가 선수단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겁니다.”
이미 감독과 신뢰가 끊어진 선수를 벤치에 앉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라커룸에 악영향을 끼친다. 즉.
“감독님에겐 화근 아닙니까?”
―허, 허허. 좋아요. 그러면 그 선수를 주전으로 쓰실 생각으로 임대 요청하는 겁니까?
“정확히는 로테이션 자원입니다.”
―예?
“반즐리는 우리 팀에게 졌는데, 패배한 팀의 서브 선수를 강팀의 주전으로 쓰는 건 말이 되지 않죠.”
그것을 농담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샘 홀튼은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정식 요청이기에 심사숙고하겠습니다. 다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인성에 문제가 있거나 라커룸의 분위기를 헤치는 선수는 독이에요. 아무래도 경력이 부족하시니 이 점을 잘 모르시는 거 같으신데.
그의 목소리에 담긴 건 내려다보는 듯한 어조가 아니었다.
순전히 묻어나는 걱정과 우려였다.
그것만 봐도 샘 홀튼이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보여 준 모습과는 본래 심성이 멀었다.
“저는 상관없었습니다. 성격 개차반인 선수가 온다 한들.”
―관리할 자신이 있단 얘깁니까?
“관리할 수 있단 자신감이라기보단……중요한 건 성적이니까요.”
나는 넥타이를 가볍게 풀었다.
―허허, 좋아요. 자세한 얘기는 정식으로 문서로 합시다. 그래도 구두로 어느 정도 말을 맞춰놓는 게 편하니, 좋아요. 월 임대비는 어느 정도 내실 생각입니까?
릴 리가 눈을 빛내며 종이를 들어 올렸다. 최선을 다하고 쥐어짜낸 금액.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대비, 안 냅니다.”
“!!”
―예?
눈이 크게 떠지는 릴리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눈빛으로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외치는 것이 훤히 보였다.
나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감독님의 화근을 제가 치워드리는 건데, 임대비까지 받으시면 은혜를 갚는 게 아니고 거래이지 않습니까?”
―아니, 허허허.
“은혜, 갚으실 기회입니다. 시원하게 털어버리시죠.”
* * *
정확한 확답은 받지 못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전화로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건, 아무리 하부 리그라도 엄연히 프로리그인 리그 투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확실했다.
다만 문제는 있었다.
“임대비와 주급.”
“아무래도 지금 반즐리에서 받는 주급을 우리가 100% 다 낼 순 없겠지?”
릴리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 점 고려해서 임대비를 안 내겠다고 한 거야.”
“으음.”
“자세한 건 협상을 해봐야지.”
“그 선수, 문제 많아 보이는데 좋은 선수야?”
“내 기억 속 그 클라라니가 맞다면.”
“기억 속? 본 적 있는 선수야?”
지금은 말고, 미래에서 말이다.
사실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겠다.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한 선수였기에.
지저분한 사생활로 제법 악명을 떨쳤지만, 실력은 나름 괜찮아서 챔피언십의 하위팀에서 서브로 뛰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래, 실력으로 그런 선수가 있다더라, 라고 안 것이 아니라.
‘경기 중 심판 폭행으로 떠들썩했던 이름이었나.’
내가 아는 건 흑인 선수. 당시 나이가 서른 초반쯤.
포지션은 윙어.
그리고 샘 홀튼과의 불화를 보건데, 아무래도 내 기억 속 클라라니와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니어도, 나쁘지 않아.’
스쿼드 뎁스.
우리 팀은 현재 1군 선수단이 20명에 불과한 그야말로 빈약함의 절정이다.
최소한의 스쿼드를 유지하는 뎁스용 선수라도 필요하다.
내가 아는 클라라니가 아니라면, 그 정도 선수로도 충분했다.
일단 반즐리의 저번 시즌 주전 선수란 점 하나만으로도 적어도 우리 팀의 날개보다는 뛰어날 것이기에.
‘심판을 폭행해버리는 그런 성격?’
상관없다.
괜히 임대로 데리고 오는 게 아니다. 여차하면 임대 복귀시키면 그만이다. 라커룸에서 분위기를 헤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아직 그 이빨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맨스필드에는 더 난폭한 짐승 하나가 있으니까.
내가 그렇게 짧은 상념에 잠긴 사이, 릴리가 별안간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임대 계약, 나한테 맡겨.”
“계약, 회장님이 직접 하시겠다는 거야?”
“유진. 너는 이제 긴 시즌의 시작에 섰어. 정말 긴 여정이잖아. 감독인 네가 전력 분석에, 훈련에, 선수 이적 건까지 정말 바쁘게 일하고 있잖아. 나도 도와주고 싶어. 그리고 할 수 있어.”
나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반짝이는 눈이었다.
과거에나, 지금에나.
그랬기에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언제나, 네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지.”
릴리의 입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 * *
릴리와의 조촐한 파티 겸 임대 계약에 대해 머리를 맞대며 상의를 마치고 나서야 뒤늦게 집에 돌아왔다.
오늘 분명 심장이 터질 듯한 격렬한 경기를 치르고 났지만, 집은 전혀 다른 세상인 듯 적막했다.
적막을 깬 건 휴대폰의 진동이었다.
―감독님, 알롭입니다. 오늘 경기 수고 많으셨습니다. 금일 경기에 따른 팬들의 반응을 요약해 메일로 보냈으니, 한번 확인해 보시죠.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뜻밖의 문자였다.
보통 이런 건 감독의 비서나 담당 마케팅 직원이 취합해서 보내는 건데.
물론 우리 팀에는 없기야 하지만.
나는 늘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알롭의 얼굴을 떠올리며 메일을 확인했다.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경기 내용에 대한 팬들의 감상과 반응. 경기 영상에 달린 댓글이나 SNS에서 올라온 많은 추천 수를 받은 게시글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내 경기 후 인터뷰의 반응도 의외로 많았다.
―인터뷰 멋졌다! 실력으로도 이겼고, 매너로도 이겼다고!
―상대 감독에 대한 존중을 보라고. 얼마나 보기 좋아?
―저게 진짜 남자지, 마음 넓게 상대를 용서하고 오히려 치켜세워주잖아. 저게 진짜 승리라고!
조금은 낯 뜨거운 반응들을 쭉쭉 넘겼다.
다 읽고 나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알롭은 왜 이런 내용들을 직접 추려서 보냈을까.
그의 너구리같은 능글거림을 떠올리며 고민하는 찰나, 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딱히 반갑지 않은 전화였다.
“예, 유진입니다. 전화 받았습니다.”
―오, 감독님, 나 데일 스틸 단장이요. 오늘 개막전 승리, 정말 멋졌습니다. 축하합니다!
“긴 시즌 중에 고작 한 경기 승리인데, 축하 인사가 많네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다음 축하는 우승 후에 받을게요. 매 승리 축하를 받으면 저도 자만해질 것 같아서.”
―하하하, 역시 감독님이라니까. 뭐, 축하 인사도 드릴 겸 우리 가볍게 안부 좀 물으려고 전화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주어는 없었지만,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 알았다.
해리 오스카. 지지부진하게 답보 상태인 협상을 콕 찌르고 있었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러자 데일 스틸이 조심스레 말했다.
―으음, 역시 어럽죠? 하지만 지금 헤럴드도 제가 이미 설득을 끝낸지라. 이대로 거래가 무산이 되면, 아무래도 서로 낯이 조금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감독님 앞에서 괜히 말을 빙빙 돌리네요. 정 안 되면 스탠리에 이적료를 더해서 거래를 진행하는 게 어떻겠어요?
데일 스틸은 과연 날카로운 감각의 소유자였다.
해리 오스카의 협상이 무산될 기미가 보이자, 도리어 틈을 파고드는 수완.
사실 전화를 받자마자 경기를 잘 봤다고,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부터가 일종의 선언이었다.
알았을 것이다.
오늘 승리에 가려진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을.
공격진의 빈약함.
이것이 우리 팀의 뚜렷하게 드러나는 강력한 문제임을 그는 알았다.
즉슨.
―스탠리 선수, 스트라이커도 소화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유망주 시절엔 윙포워드와 센터 포워드를 오갔죠. 이 정도면, 감독님 플랜에서도 훌륭한 카드가 될 것 같은데.
급한 건 우리, 여유로운 건 저쪽. 이 거래의 주도권이 데일 스틸에게 넘어갔단 뜻이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아직 이적 시장은 남았습니다.”
―흠, 그렇긴 하죠. 다만 오늘의 제안은 진지하다는 사실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 거래가 꼭 성사되기를 바라거든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나중에 계약서에 도장 찍는 순간에 봤으면 하네요.
데일 스틸은 시종일관 여유를 부리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적막이 집 안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전화를 걸었다.
딸칵, 하고 통화가 연결되는 소음이 들리는 순간.
나는 저쪽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오스카 씨. 원하시는 계약서 준비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