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32)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32화(32/266)
32. 미래 대신 현재 (2)
넘어야 할 산은 이사회뿐만이 아니었다.
“감독님. 정식 면담 요청드립니다.”
선수의 면담 신청은 어느 구단에서나 있다.
훈련에서의 피드백, 선수 개인의 불만, 포지션과 전술에 따른 적응도 문제, 또는 선수단 사이의 갈등까지.
그러나 면담을 요청한 이가 주장인 젠킨슨이란 점에서, 그 의도와 목적은 분명했다.
“유소년 아카데미 해체 반대합니다. 이건 선수단 전체를 대표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네. 반대 의견 알겠습니다.”
“받아주시는 겁니까?”
“의견 창구는 열어 둡니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제 소관입니다.”
“그게, 묵살한다는 얘기하고 뭐가 다르죠?”
젠킨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답답한 기색이 뚜렷했고 흉흉하게 번쩍이는 두 눈은 용암처럼 타올랐다.
강인한 얼굴과 단단한 체격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아찔했다.
“유소년 아카데미의 완전한 해체가 아닙니다.”
“말씀이 다르시군요.”
“구단 정상화를 위한 재정 확보, 그에 따른 축소 운영일 뿐입니다.”
“간판만 걸어놓고 다 치워버리는 걸 축소 운영이라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정말?”
맞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짓이다.
하나 그게 무엇이 문제인가.
“뭐가 잘못됐죠? 유소년 아카데미가 현재 팀에 도움이 안 되고, 위기에 빠진 팀의 정상화를 위해선 축소 운영이 불가피합니다.”
“유스팀은 구단의 근간이고 역사에요. 그리고 미래라구요. 저 어린 선수들 쫓아내면요. 다음 미래는 어쩌라는 건데요?”
“여유가 넘치시네요. 젠킨슨 선수.”
“……!”
“미래를 생각하시는 것도 여유가 있어서 생각하는 거겠죠. 궁금합니다. 그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지.”
“감독님, 말꼬리 잡고 비아냥대지 마시죠.”
“비아냥 아닙니다. 순수하게 궁금해요. 선수, 지금 은퇴했습니까?”
“뭐라고요?”
젠킨슨의 말문이 턱 막혔다. 치켜 올라간 눈썹에선 분노가, 확장된 동공에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지금 플레잉 코치라도 하고 있습니까?”
“대체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감독님.”
“코치직이라도 수행 중이신가요. 구단 사무국에 자리 하나 마련해 놨나요?”
젠킨슨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머릿속에서 어구가 정리되지 않는 느낌이 풍겼다.
“선수가 대체 구단 조직 운영에 왜 관여합니까?”
“……나는!”
젠킨슨이 눈을 부릅떴다. 검지를 피곤 자기 가슴을 쿡쿡 찔렀다.
“이 팀의 주장이에요. 유스에서부터 시작했다고요. 이 팀에 평생 헌신해 왔습니다. 내가 지금 못 할 말을 하는 건가요? 감독님.”
“뻔뻔함이 도가 지나칩니다. 선수.”
“!”
젠킨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치 못한 소리였을까. 명백한 비난에 그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신의 헌신이 이뤄낸 결과가 대체 무엇입니까.”
무심하게, 그를 응시했다.
감정을 지운다. 오로지 그에게 객관적인 사실만 전한다. 그것이 감독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팀은 무너졌습니다. 연패했고, 강등당했습니다. 팬은 떠났고, 관중석은 비었습니다. 핵심 선수도 팀을 외면하며 떠났고, 아무도 오지 않으려고 하며, 기껏 있는 선수단은 파벌이 나뉘었습니다.”
“…….”
젠킨슨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푸들거리는 입술이 무거운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지켜보기만 했으면서, 그 전부를 그저 바라만 봐 놓고.”
쾅.
탁자를 내리쳤다. 젠킨슨의 거대한 체구가 일순 작게 느껴졌다.
“이건 못 지켜보겠습니까?”
“감독님…….”
“팀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왜요. 못 참겠어요? 그래 놓고 헌신을 운운해?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으면서, 팀의 미래와 역사를 입에 담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젠킨슨은 누군가 뒤통수를 후린 듯, 축소된 동공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배려했다.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가서 훈련하세요. 선수.”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젠킨슨은 두 발이 바닥에 고정된 듯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봤다.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서서히 열기가 돌아왔다. 마치 영상을 되돌리듯, 천천히 일그러지는 그 과정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꿈틀거리는 입술, 꽉 쥐어지는 주먹, 이마에 두드러지는 핏줄.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 용암 같은 불길이 화르륵 그의 얼굴 위로 타올랐다.
쯧.
여기서 한 대 맞겠군.
선수를 폭행죄로 고소할 순 없는데…….
그때였다.
“젠킨슨!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쾅!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알롭 코치가 성난 얼굴로 들이닥쳤다.
젠킨슨이 움찔했다.
평소 늘 허허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알롭이 아니었다. 격노한 감정 그대로 드러나는,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주장이란 놈이! 감독님 앞에서 지금 무슨 추잡한 짓이냐!”
“코치님!”
“당장 나가! 선수단 대표란 놈이 흥분을 못 다스리고 이게 무슨 추태야? 주장이면 주장답게 굴어!”
알롭의 불호령에 젠킨슨은 그제야 타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망설이다가 나를 한차례 흘긴 다음에 사무실을 나갔다.
알롭은 그 뒷모습을 보곤 나에게 말했다.
“젠킨슨이 아무래도 유스 출신이다보니, 지금 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알롭 코치.”
그리 말하면서 알롭을 살폈다. 알롭은 언제 격노했냐는 듯, 늘상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실로 놀라울 정도의 빠른 감정 변화였다.
알롭은 나를 한차례 쳐다보더니 의뭉스럽게 말했다.
“저는 감독님을 지지합니다.”
“…….”
“이사회가 소집되고 출석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사회에 한 번 끌려다니게 된 순간부터, 많은 간섭이 있을 겁니다.”
“그 얘기하시는 연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알롭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 오해 마세요. 감독님. 어느 이사회든, 많은 사람이 간섭하게 되면 축구 구단이 이상하게 흔들리는 일, 이 바닥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이사회의 구단 간섭이 심해질 것을 우려하십니까?”
“당연합니다. 하물며 우리 구단의 이사회 대다수는 서포터즈 조합입니다. 축구인이 아니죠. 서포터즈예요.”
“…….”
“축구 팬은 늘 최고를 바랍니다. 최상, 최적의 영입, 최고의 성적. 나무랄 건 아닙니다. 어느 팬이 자신의 팀이 최고이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하지만 경영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겠죠.”
“제가 이사회에게 물러서지 않기를 바라는군요.”
“맞습니다. 감독님. 저는 감독님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제 편이 더 있다니, 고맙네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는군요. 코치.”
“하하하, 뭘 바라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코치인 저는 당연히 감독님을 지지해야죠. 그러면 저는 훈련을 주관하러 가보겠습니다.”
알롭은 의뭉스럽게 웃으며 나갔다. 알롭까지 나가자, 사무실은 언제 불길이 솟구쳤냐는 듯이 적막했다. 적막 속,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랬었지.”
회귀 전.
맨스필드의 운명.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처참한 팀.
이 팀의 사령탑이 됐던 사람은 결국.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다 감독으로 승격하는 건, 알롭 코치였었지.”
그 속내가 보인다.
하나 상관없다.
다른 생각을 품더라도, 이롭게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코치 말대로, 이사회에 허릴 굽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
“회의장 좌측에 앉는 사람들이 철저한 반대론자들이야. 그들을 설득해야 해.”
“우측은?”
“내가 설득에 성공한 사람들. 하지만 이 사람들도 전적인 지지는 아니야.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고 해야 할까.”
릴리의 말을 들으며 회의장으로 향했다.
“특히 교외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한스 할아버지를 조심해야 해. 목소리가 엄청나게 크시거든. 실제로도, 여론적으로도. 조합에 가장 큰 기부금을 후원한 사람이기도 하고.”
릴리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 떠올랐다.
그녀는 이사회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나한테 주지시켰다.
설득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설득, 옥스퍼드 사전에 나와 있는 그 일반적인 설득의 의미는 아니겠지?”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벌써 두렵다는 눈빛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막지 않았다. 또는 방향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되겠지. 코치진도, 선수단도 그렇게 휘어잡았으니까.”
그저 무의미한 믿음이 아니었다.
내가 보여 준 것이 있기에, 그에 상응하는 신뢰가 반짝였다.
문을 열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
들어가는 순간, 문밖에서 들렸던 웅성거리던 소음이 일시에 멎었다.
왜 그런 적 있지 않은가.
내가 나타난 순간, 갑자기 모두 말을 멈추는 순간.
바로 내 얘기 중이었다는 의미였다.
나를 향하는 무수한 시선.
복잡한 눈빛 사이로 드러나는 건 명백한 적개심. 그러면서도 동시에 믿고 싶다는 정반대되는 눈빛이었다.
그 시선들을 느끼며, 중앙에 섰다.
“반갑습니다. 이사회 여러분. 감독 유진입니다.”
“……반갑소, 감독.”
백발이 성성하지만, 얼굴에 붉은빛이 가득한 건장한 노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가 한스 영감이었다. 릴리가 말한 맨스필드 최대 규모의 목장 주인.
현 이사회의 사실상 수장.
그들의 눈빛이 어느 순간 이해됐다. 유스 아카데미를 해체, 축소 운영하겠다는 발표에 대한 강렬한 반발과 적개심. 그리고 동시에 개막전에서 보여 준 승리라는 달콤한 결실.
저들은 날 감독으로서는 분명 호의적인 눈빛이었지만, 이번 안건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감정을 숨김없이 눈빛과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냈다.
즉.
“길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이사회는 감독님이 최근 진행 중인 조직개편에서,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소년 아카데미를 축소 운영, 사실상 해체하겠다는 안건을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그것만 받아준다면, 감독으로서 내 자리는 인정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이사회를 둘러봤다.
한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릴리의 눈꼬리가 떨렸다.
우측에 앉았던, 릴리의 말에 설득당했다는 이사 일부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 한스 영감의 뜻에 넘어갔단 소식이었다.
“그렇군요. 많은 분이 반대하고 계시는군요. 궁금하네요. 반대의 이유가 뭐죠?”
“이유? 허, 참나! 거, 당연한 거 아니오? 프로구단에서 유스팀은 곧 축구의 미래요. 구단의 미래요. 유스 선수를 키워 콜업하고 팀을 이끌어가는 것, 젠킨슨을 보면 알잖소?”
“예. 압니다. 젠킨슨. 유스 출신의 훌륭한 선수죠. 그러면, 이것 좀 보시죠.”
빔프로젝터를 켰다. 화면에 앳된 선수의 사진이 나타났다. 유소년 유니폼을 입고 공을 차며 훈련하는 모습의 어린 선수다.
“아!”
순간 릴리가 탄식하며 입을 황급히 가렸다.
급히 입을 막았지만,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다.
“……지금 뭘 보라는 거요?”
“화면을 계속 보시죠.”
“…….”
슬라이드는 계속 넘어갔다. 여러 유소년 선수의 사진이 계속해서 나왔다.
슬라이드가 넘어갈수록 그 유소년 선수의 키가 점점 커지고 얼굴에서 앳된 기색이 사라졌다. 나이를 먹고 성장했다. 거뭇거뭇 수염이 났고, 각진 얼굴 형태가 잡혔으며, 체격 역시 듬직해졌다.
“어?”
“으음!”
일순 곳곳에서 술렁이는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슬라이드의 선수는 어느 순간 유니폼을 벗고, 1군 유니폼을 입고 훈련했다.
그리고 정식 경기에 데뷔하는 사진이 나왔다.
거기서 화면은 끝났다.
약간의 술렁거림, 무언가 알아차린 듯 침음하는 일부, 입을 가리고 나를 쳐다보는 릴리의 눈빛까지.
“우리 팀 유소년 아카데미가 발굴한 어린 선수입니다. 열심히 훈련했고, 성장했으며, 끝내 1군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습니다.”
“……저거야말로 유소년 운영의 핵심이오. 감독도 잘 아는구만!”
마지막 슬라이드로 넘겼다.
패배해서일까, 마지막 슬라이드엔 선수의 축 처진 뒷모습이 있었다.
“!”
“……!”
일순, 회의장에 희미한 놀람이 퍼져갔다. 침묵 너머로 눈을 크게 떴다.
유니폼에 마킹된 이름이 그들의 망막에 맺혔다.
유진 피셔.
“예. 접니다.”
“……!”
“아무도 기억 못 합니다. 여기, 여러분들도요.”
침묵이 가라앉는다. 적막이 감돈다. 그 고요 사이로 오로지 내 무심한 목소리만이 나직이 울렸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력이 부족해서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떠났으니까요.”
“…….”
“예.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십 년 가까이 키운 선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은퇴합니다. 팬들의 기억에도 남지 않습니다. 그것이.”
모두가 이상과 미래만 입에 담으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선수만 배출하는 시스템.”
그토록 외면해 왔던 잔혹한 사실.
“우리 유소년 아카데미의 수준이며, 곧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