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66)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65화(66/266)
65. One-man show (1)
침묵.
알롭은 유진의 시선을 차마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눈빛이 두꺼운 서류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두툼한 서류를 하나씩 넘겨 보던 알롭은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짧은 침음이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침음일지, 아니면 신음일지 모호한.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응시했다. 입을 다물고, 두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노려보는 시선도 아니다. 그저 한없이 담담한. 그래서 더 마주보기 힘든 그런 눈.
무언(無言).
알롭은 새삼 자신의 아들뻘인 유진이 무섭게 느껴졌다.
무언이 가지는 무서운 압박감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하는 모습은, 타고난 처세를 가진 알롭조차도 감탄하게끔 만드는 요소였다. 하나 언제까지고 그저 감탄할 순 없었다. 알롭은 떨리는 눈초리를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변명을 듣고자 하신다면, 제가 의도적으로 선수단 구성에 관여하려던 것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답이 아닙니다.”
유진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변명이 아니라, 책임지겠다. 이 말이 나와야 하는 시점입니다.”
“책임…….”
알롭은 그 단어를 혓바닥에 굴리다가 겨우 삼켰다.
흔들림 없는 유진의 눈빛이 여전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아, 그렇군요.”
알롭은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탄식하며 대답했다.
“사임, 하겠습니다. 허허, 제가 그만두는 거니, 위약금 준비 안 하셔도 됩니다.”
올라간 입꼬리가 처연하게 흔들렸다.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답, 아니신가.
알롭은 알았다. 두툼한 서류의 내용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리고 서류 봉투에 적힌 법률 사무소의 이름만 봐도. 유진이 작정하고, 냉혹하게 움직인다면, 자신은 어쩌면 축구계에 발을 붙이고 살긴 어려울 거라고.
막다른 골목이다.
그리고 유진은 지금, ‘책임’이라는 단어를 꺼내며 살 구멍을 겨우 열어 줬다.
그 구멍마저 열지 않으면 차라리 쥐가 이빨을 드러내고 싸울 거라는 사실을 잘 아니까.
‘참으로, 무서운 친구야.’
예전 같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겁지 않았으리라.
억울하고 답답하고 화가 날지언정.
깔끔하게 거래하고 나갔을 거다. 위약금은 안 받을 테니, 이 사실은 묻어 달라. 그렇게 얘기를 나누었겠지. 그게 알롭의 처세였다.
하나 지금 알롭은 그런 말도 못 했다. 아쉬움이 턱 끝까지 치달았다.
유진의 뒤.
벽에 그려져 있는 맨스필드의 엠블럼이 시야에 들어왔다.
‘맨스필드…….’
생소한 감정이다.
8년간 뛰었던 팀에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그 애정을.
‘……너무 늦었구나.’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불렸던 자신의 이름.
팬들이 외치는 그 연호가 어렴풋이 고막에서 울린다.
알롭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하니, 위약금도 받지 않고 나갈 테니, 이 일은…….”
“아니요.”
“……!”
순간 알롭의 눈이 커졌다. 유진은 그 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FA컵도 계획과 달리 진출했습니다. 로테이션도 실패했습니다. 역전극을 거뒀는데 책망은 하지 않습니다. 경기장 위의 지휘관은 코치였으니까요. 문제는 적어도 2부리그 이상의 상위 팀들, 빅클럽들과 만날 때까지 싸워 봐야 하는 무대가 만들어졌습니다.”
“…….”
“그런데 책임이라…….”
유진이 피식 웃었다.
“제가 말하는 책임은, 이렇게 된 상황에 대한 책임입니다.”
알롭의 회백색 동공에 혼란이 깃들었다.
여전히 유진이 말하고자 하는 저의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에이전트 건으로, 자신을 쫓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가.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가.
유진이 천천히 말했다.
“선수들은 지칠 겁니다. 아니요, 이미 지쳤죠. 선수들이 부족하니까요. 그런데 동시에 두 개 대회를 병행해야 합니다. 그것도 우승 가능성은 전무한 FA컵을요. 계륵입니다. 포기할 수도 없어요. 그렇다고 매달리기엔…… 좀 그렇죠?”
유진이 알롭에게 내밀었던 서류를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와 한 장씩 성의 없이 대충 넘겼다.
“저는 단순한 승격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승컵과 함께 승격할 겁니다. 그런데 우승은요, 대충할 순 없어요. 구단의 총력을 다해야죠. 여기에 FA컵도 신경 써야 하니…… 우리 선수들이 힘들겠죠. 고난이 될 겁니다. 제 모든 계획이 일그러졌으니까요.”
FA컵은 1라운드에서 포기한다.
대신 리그에 집중해서 우승과 함께 승격한다.
이 팀에는 우승이 필요하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우승컵을 들고, 그라운드에서 우승 세레모니를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지금 해야 한다. 앞으로 갈수록 우승은 어려울 거다. 3부리그로 승격해도 승격 팀은 도전자의 입장. 하물며 챔피언십, 프리미어리그, 그리고 꿈의 무대, 챔피언스리그는 어쩌겠는가.
가장 우승하기 쉬운 조건이 바로, 4부리그인 지금이다.
만만하진 않다.
당장 경쟁자인 포레스트 그린도 회귀 전 미래에서 경쟁력을 보여 줬던 클럽.
물론 유진은 FA컵을 포기할 땐 과감히 결단을 내릴 것이다.
하나 1라운드의 역전극이 문제다.
승리를 거둔 이상, 부딪쳐 쓰러질 때까지 싸워야 하는 무대다. 팬들은 그걸 기대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상위 클럽, 누구나 인정하는 빅클럽을 만나 후회 없이 싸우고 탈락하는 것이 이제 차선의 계획이다.
“예. 알롭 코치가 열심히 싸워 역전 승리를 거둬 낸 결과입니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어요. 제가 아는 코치라면, 왜 코치를 대행으로 내세웠는지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됐으리라 생각했거든요.”
알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제가 책임지고 사임을…….”
“아니, 도망 말고요.”
“……!”
“도망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코치.”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들고 세단기 앞으로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종이를 한 장씩 세단기에 집어넣었다.
드르륵―갈려 나가는 서류 뭉텅이를 보는 알롭의 동공이 부릅떠졌다.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말씀드리죠.”
“……대체 무슨.”
“여기 적힌 에이전시 말입니다. 이 에이전시를 들들 볶든, 파헤치든, 매달리든, 독촉하든, 아니면 협박하든, 두 손을 비비면서 알랑방귀를 뀌든, 찾아요.”
“……!”
“선수를 찾아요. 코치. 저렴하고, 유망하며…… 예, 좋은 선수요.”
마지막 종이까지 세단기에 집어넣은 유진이 돌아보며 씩 웃었다.
“선수 보는 눈 좋잖아요? 토마스 캐롤 데리고 온 사람도 코치고요. 안 그래요?”
“…….”
“일전에 선수단 방출 건 말입니다. 코치는 선수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게 우선순위인지 명확하게 파악했어요. 그거, 선수 보는 눈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허, 허허, 제가 똑바로 이해한 게 맞다면, 지금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건.”
“예. 사직서는 여기 세단기에 같이 넣어 버리시고요.”
“…….”
“하던 일, 계속하세요. 에이전시 선수 꽂아 넣어서 선수단에 영향력 키우던 거 말입니다.”
알롭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는 간신히 말했다.
“그걸, 용납, 하시겠다는 겁니까?”
“예. 하세요. 오히려 장려합니다.”
“……!”
“단, 최종 결재는 제가 합니다. 이번 겨울 이적 시장, 코치, 무척 바쁘실 겁니다. 당장 움직이셔야 하니까요.”
알롭은 마치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유진이 씩 웃었다.
“예, 같이 일합시다. 코치.”
그 순간, 알롭은 저도 모르게 유진의 뒤, 벽에 그려져 있는 맨스필드의 엠블럼을 눈에 담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흘러나왔다.
“……예, 여기, 허허, 맨스필드에서 말이죠.”
* * *
어머니는 대화하는 걸 좋아하신다.
특히 평소 ‘말이 없는’ 사람하고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에 엄청난 성취감을 느끼시는 게 틀림없었다.
간단, 명료, 할 말만 하고 입을 다무는 아버지와 결혼하신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가 경기를 내버려 두고 휴가를 낸 이유를 궁금해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숨기고 싶은 내용도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게 만드는 것이 어머니가 지닌 화술의 비기.
나는 알롭 코치에 대해서 전부 얘기했다.
“그러니까, 그 코치를 쳐낼지, 아니면 함께 갈지 고민이라는 거지?”
“네. 실력은 좋은데, 비례해서 여러모로 욕심도 많은 사람이라서요.”
“그러면 이건 테스트?”
“테스트…… 굳이 따지면 그렇죠. 단순한 욕심만 그득그득한 건지, 아니면 그 욕심이 축구, 그리고 맨스필드와 관련된 건지.”
“애정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거구나?”
어머니는 날카로운 구석이 많으셨다. 아들인 내 속마음이 훤히 보이는 걸까. 어머니의 눈이라는 것은.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별안간 동양의 고사를 말씀하셨다.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무슨 말씀이세요?”
“너도 한국에서 지냈으면서, 이 정도 고사는 척척 알아들어야지.”
“한국에서 고작 삼 년 있어 봤는데요, 뭘.”
“믿지 못하면 쓰지를 말고, 일단 그 사람을 쓰게 되면, 아예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야.”
“…….”
나는 티비를 바라봤다. FA컵 경기, 대역전극을 이뤄내고 두 팔을 치켜드는 알롭이 보였다.
“이 나이에, 아직도 배울 게 많네요.”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내 등을 때렸다.
“요즘 세상에 서른셋이 그런 말 할 때니? 결혼도 안 해 놓곤.”
슬쩍, 식탁을 정리하는 릴리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나는 쓰게 웃었다.
* * *
이전의 알롭이었으면 약간의 의문을 품고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던 관중의 목소리를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수천 명 관중이 운집한 경기장.
그중 수백 명이 한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그 순간을 코치로서 처음 경험해 보는 알롭은 분명 깨달았으리라. 추론도 아니다. 나는 확신했다.
알롭은 이 맨스필드에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진작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지.
팀을 떠나기 싫다는 이유가 단순히 이 팀에서 터줏대감으로 편하고, 오래 해 먹겠다는 욕심만은 아니었으리라.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차곡차곡 쌓아지던 애정. 바로 그 애정이다.
본인도 미처 몰랐던. 언제고 이 팀을 버릴 있다며 냉소를 짓던 그 마음이 이제 알롭에게선 없어졌다. 알롭은 맨스필드를 위해 힘껏 뛰었다.
“허허, 일단 스무 명 정도 선수의 프로필을 확보했습니다. 몇몇 선수는 비디오뿐만 아니라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따로 휴가는 못 드립니다.”
“아뇨, 오늘 훈련 끝내고 저녁에 갔다가 바로 내일 아침 훈련 주관하러 오겠습니다.”
“……안 피곤하겠어요?”
“매 경기 90분 뛰는 선수만 하겠습니까, 허허.”
확연히 바뀐 알롭의 태도에 막스도 혀를 내둘렀다.
“작정하고 움직이니까, 진척이 상당한데.”
“능력 있는 코치시니까. 그 대역전극, 봤잖아?”
“FA컵…… 그거, 너랑 나랑 짠 전술이잖아.”
막스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떨떠름한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그 전술과 지침을 짧은 시간 선수들에게 숙지하고 이끌어 내게 한 건, 정말 순전히 알롭의 능력 덕이었다. 결국 막스도 알롭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겨울 이적 시장은 알롭이 올리는 선수 명단으로 결정할 거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시즌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맨스필드 타운, 11월 5경기 3승 2무!
―FA컵 1라운드도 역전한 맨스필드, 리그 투에는 상대가 없다!
―맨스필드 유진 감독, 10월의 감독상에 이어 11월의 감독상 수상!
―리그 1위를 질주하는 맨스필드, 시즌 절반이 가까운 시점, 갈수록 강해져.
그리고 승리 역시,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