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73)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72화(73/266)
72. 트라우마 (4)
스탠리는 조금 떨어져 유진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등을 바라보며 내딛는 한 걸음이 이토록 무거울지는, 꿈에도 몰랐다. 단순히 전반전 경기를 뛰어서 무거운 발이 아니었다. 마치 늪이 빨아들이는 것처럼, 무언가 발을 꽉 붙잡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 느낌.
스탠리는 낯설지 않았다. 까마득한 과거일지, 아니면 몇 년 전일지. 이 감각, 이 부담감, 압박감 모두가 익숙했다.
‘언제였더라?’
머리에 피가 쏠렸다. 눈앞이 아득했다. 어지러웠다. 전반전 플레이와 심리적인 압박감이 그의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땅만 내려보던 스탠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넓은 등. 한없이 든든하면서도 동시에 두렵기 짝이 없는 단단한 등. 순간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하나 돌린 얼굴은 유진이 아니었다. 듬성듬성 지저분한 턱수염,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눈. 퉁명스럽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한 목소리.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마라. 분명히 말했다. 스탠리. 친구끼리 노는 건 좋다. 하지만 무슨 유스팀이니, 스카우터니, 이딴 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한다면…….”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의미는 완벽히 전달됐다.
이미 지난 시간이었으니까. 어렸을 때라 사실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단순히 말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는 사실도. 그저 혼쭐내주기 위해 높였던 언성이 아니었다는 것도.
“뭐? 스카우터? 축구에 재능이 있다고? 웃기는 소리 마쇼! 영국에 그딴 소리 듣는 애들이 어디 한둘인 줄 알아? 내 애한테 이상한 바람 넣지 말란 말이오!”
공터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던 아홉 살 자신에게. 런던의 스카우터들이 나타났을 때.
티비로만 바라보던, 그 대단한 프리미어리그 팀의 선수가 될 수 있단 사실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뛸 때.
이 기쁜 사실을 참지 못하고 쪼르르 달려가, 축구를 하고 있노라면 늘 마음에 안 드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아버지에게 자랑하듯이 늘어놨을 때.
스탠리는 깨달았다.
“유소년 축구? 거기만 들어가면 다 성공할 거 같지? 웃기지 마라! 수도 없이 많다. 수도 없이 많아. 재능 있다고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에서까지 다 모여드는데, 거기서 시간이나 낭비하겠다고? 꽃은 다 필 수가 없는 거야, 화려하게 핀 꽃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말하지만, 그 전에 무수히 피기도 전에 짓밟힌 꽃이 어디 한둘인지, 너도 나이를 먹게 되면 알 거다.”
아버지는 축구를 혐오하고 있다고.
어렸지만 스탠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혐오감은 단순하지 않다고.
어쩌면 증오에 가깝다고.
그저 자신이 공부는 내팽개친 채 공을 차는 사실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원한 대로 모범적으로 굴지 않고 매일 같이 공이나 차며 뛰어다니는 게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런 것들이었다면, 스탠리는 설득했으리라.
나, 축구를 하고 싶다고. 저 스카우터들 따라서 런던으로 가고 싶다고.
못했다. 아버지의 축구에 대한 혐오는, 무언가 더 근원적인 것에서 기인했다.
그날부터, 스카우터가 찾아온 날부터 스탠리는 철저하게 통제당했다.
친구들은 다 아버지와 손잡고 축구장에도 찾아가는데. 스카우터에게 명함을 받았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하던데. 왜 아버지만?
이런 불만을 울고불고하면서 쏟아 낸 적이 있다. 이렇게 울면 조금이라도 누그러질까 봐. 하나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냉랭한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영국인이라고 다 축구에 미쳐 날뛰지 않아. 축구에 미쳐서 가족이고 뭐고 버려두지 않는다고…….”
시간은 흘렀다. 스탠리는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튀어 오르는 용수철이 됐다.
의사인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공부만 하지 않았다.
혼이 나도, 온갖 화를 받아들이더라도 공을 찼다. 어쩌겠는가. 어떤 엄숙한 학교라고 해도 축구는 존재했다. 영국에서 축구는 삶이다. 축구 없는 학교는 없고, 축구를 싫어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공을 찰수록 갈증이 심해졌다. 목말랐다. 아버지에게 문전박대당했던 스카우터는 종종 연락해 왔다. 재능 있다며, 키우고 싶다며, 함께하고 싶다면서.
그럴수록 아버지의 통제는 더욱 심해졌다. 아무리 머리가 굵어진다 한들 그의 아버지는 폭군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안을 건사하시는 아버지의 권위는 가장, 그 이상이었다.
아무리 의지가 드높다고 한들, 단단한 마음을 품었든, 현실은 냉혹하다.
몰래 사서 침대 밑에 숨겨놨던 축구화가 처참하게 찢겨 쓰레기통에 처박힌 걸 봤을 때.
스탠리는 세상 전부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더는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잔혹함은 성공적이었다. 스탠리는 정말 그 순간부터, 축구에 대한 의욕이 사라졌으니까.
그래,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우리 밤비.”
울고 있는 자신을 찾아온 할머니. 나이를 먹어가도 자신을 늘 아기 때 애칭인 밤비라고 부르는 할머니.
할머니가 ‘쉿’ 코에 손을 갖다 대곤, 등에 숨겼던 상자를 조심히 꺼냈다.
상자에는 축구화가 있었다. 다소 낡았지만, 꾸준히 관리한 티가 나는 축구화가.
작은 축구화였다. 딱 어린 스탠리가 신을 만한 사이즈.
“할미가 나중에 꼭 좋은 축구화 사 줄게. 이건 낡았지만…….”
그 정도로 족했다. 축구라면 학을 떼는 아버지와 달리, 축구화를 선물로 주는 할머니의 호의는 무너지던 스탠리의 의지를 되살렸다.
처음이었다. 축구를 하는 걸 누군가 지지해 주는 응원은. 그 순수한 응원과 사랑은, 어린 스탠리를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아버지의 냉혹함과 비교되어 더욱이.
“와아아, 이게 최고예요! 정말 좋아요, 사랑해요, 할머니!”
“밤비, 어쩜 이렇게 이쁘기도 하지. 네 할아버지가 샀던 거란다. 네 아버지에게 줄 선물로…….”
할머니는 스탠리의 전적인 지지자였다.
비록 집의 가장은 아버지였지만, 할머니는 최대한 스탠리를 도와줬다. 그 순간이 스탠리에겐 가장 즐거웠다. 몰래 축구 경기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때마다 할머니가 숨겨 주곤 했다. 마치 둘만의 비밀을 나눈 것처럼 재밌었다.
할머니의 끝없는 사랑과 지지 덕에 스탠리는 축구를 할 수 있었다.
“아스날 경기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이요?!”
스탠리는 할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자신을 지지해 줄 뿐만 아니라, 티비로만 봤던 프리미어리그 경기까지 관람을 데리고 가준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형형한 눈을 피해서 경기장, 그것도 런던까지 가는 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스탠리에게는 편이 한 명 더 있었다.
“아휴, 티켓 세 장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북런던 더비잖아요! 제가 할머니랑 우리 동생을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다구요.”
무려 열세 살이나 차이 나는 탓에 누나는 스탠리의 돌아가신 엄마처럼 그를 아껴줬다.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는 누나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할머니와 스탠리는 성공적으로 아스날의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6만 관중이 들어선 경기장. 터져 나오는 함성. 그 분위기와 열기. 미친 듯이 내달리는 선수들. 화려한 플레이에 스탠리는 황홀감까지 느꼈다.
“와아아아아.”
그저 입을 벌리고 감탄을 내뱉는 스탠리를 보면서, 할머니는 어쩐지 슬픈 웃음을 지었다.
“옛날 기억이 나는구나. 여기에 할아버지랑 딱 우리 밤비만 했던 때 네 아비와 함께 왔었거든. 이 경기장에.”
“네에?”
아버지가, 그 아버지가, 축구장을 왔다고? 그뿐만 아니라 누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영감이 축구선수였거든.”
“정말요? 할아버지가요?”
스탠리는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6부리그, 세미프로 선수였단다. 그래도 선수였지. 낮에는 훈련하고, 저녁에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우리 밤비에게 준 축구화, 영감이 네 아비에게 선물로 준 거란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축구를 증오하죠?
그 질문은 차마 더 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고, 스탠리는 사랑하는 할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 질문의 답은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됐다. 할아버지는 경기를 뛰다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정확히는 응급처치 후 눈을 떴지만, 그 후유증으로 몇 년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축구를 혐오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심장 수술의 권위자가 되신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사정을 알게 되자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옅어지고, 도리어 안쓰러움도 생겼지만,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는 상황에 반발심이 더 커졌다.
스탠리가 끝내 열다섯 살이 됐을 때.
그토록 러브 콜을 보냈던 아스날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물론 아버지는 거의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나섰다. 늘 조용하시고 포근하던 할머니가 그토록 무서울 정도로 소리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네 아들이기 전에, 내 손주야! 나는 내 손주가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제아무리 냉혹한 집안의 가장도, 할머니의 절절한 외침은 이겨낼 수 없었다.
물론 아버지와는 사실상 의절했다. 하나 스탠리는 꿋꿋했다. 절대적인 할머니의 사랑과 지지가 그를 받쳐 줬다. 할머니는 직접 런던까지 와서 어린 스탠리를 챙겨줬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무한한 지지 덕에 스탠리는 축구선수로서의 길을 걸었다.
프로 데뷔전 경기조차 찾아오지 않은 아버지는 머릿속에서 잊었다.
―제2의 데이비드 베컴, 환상적인 킥을 가진 브랜들리 스탠리. 잉글랜드 유망주 50인 선정!
그리고 그의 재능은 화려하게 꽃피우는 듯했다.
할머니의 사랑, 누나의 지지 속에서.
―브랜들리 스탠리, 치명적인 무릎 골절로 시즌 아웃 선수 생활 은퇴설 솔솔.
그리고 알았다. 이 세상에는. 이 축구에는. 아버지의 말처럼, 피다 만 꽃이 많다고. 피기도 전에 져 버린 꽃잎이 바닥에 짓밟힌 채 썩어간다는 걸.
인생의 모든 불행은 한순간에 다가온다던가.
“그때 말렸어야 했다. 네가 축구를 한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어. 빌어먹을, 어쩌면 두 발로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서야 그 축구에 종지부를 찍겠구나.”
의절한 후 처음으로 만난 아버지는 위로와 믿음 대신 그리 말했다.
“할머니가, 으응, 너무 충격받지 말고, 혹시 기억을 잘 못하시더라도, 알겠지?”
누나는 스탠리의 부상을 돌봐주지 못했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닥친 탓에.
그에게 무한한 사랑과 지지를 보여주던 할머니는 세월 속에서 기억을 잊어갔다.
그래, 더는 없었다.
그를 믿어 주는 사람도, 그를 지지해 주는 사람도.
저 화려했던 유망주는, 저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고 찬사받던 유망주는.
잊혀졌다.
가족에게도, 그의 조건 없는 지지자인 할머니에게서도.
트라우마.
단순히 부상이 무서운 트라우마가 아니다. 또 고통을 받으며 쓰러질까, 그 두려움이 아니다. 잊힐까 봐. 축구선수 스탠리, 그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까 봐.
뛰고 싶은데 뛸 수 없는 이유였다.
정말 열심히 뛰어서 자신을 세상에 각인시키고 싶다. 그러나 혹여 또다시 다칠까, 그래서 다시는 복귀할 수 없을까라는 그 두려움이 공존했다.
“……하악.”
스탠리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끔찍한 기억과 트라우마에서 겨우 깨어났다.
어느새 걸어가던 유진의 등은 멈춰 있었다. 돌아선 유진의 무심한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냉랭했던 아버지의 환상은 그의 트라우마에 불과했다는 듯이 사라지고 유진만이 있었다.
“하아.”
스탠리는 헛웃음을 켰다.
솔직히 말해서, 그를 따로 불러냈을 때 직감했다.
‘지독한 말을 내뱉겠지. 그리고 교체야.’
끔찍한 기억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전반전의 플레이는 형편없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가 멀쩡히 두 발로 걷는 데 문제없다는 것이 증거였다.
그는 아예 경합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 자식.’
스윈던의 선수는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머리 옆에 진한 스크래치를 가진 선수는 기억 속과 그대로였다. 어찌 잊을까. 그때의 충격과 고통, 그리고 그 눈빛까지.
그놈이 그라운드에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스탠리는 뛰지 못했다. 공이 있고, 패스가 오는 방향이 명백한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놈은 불쾌하게도, 뛰어난 선수였다. 한발 먼저 움직여 패스 경로를 파악하고 쫓았다. 공을 잡으려면 놈과 경합해야 했다. 할 수 없었다. 스탠리는 그를 피해 다녔다.
따로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알 만했다.
단순한 교체가 아니라, 지독히도 실망했다는 얘기를 쏟아 내기 위해서겠지.
스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필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필드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 양가적인 감정 속에서.
“……예?”
“중요한 역할입니다. 변경되는 포메이션과 움직임에서 스탠리 선수가 맡는 책무가 무겁습니다.”
“…….”
“그래서 이렇게 따로 불러 세세히 말한 겁니다.”
“……교체가, 아니라고요?”
“교체를 왜 합니까?”
스탠리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은 그와 달리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대체 선수 없습니다.”
“……!”
“역할 수행하세요. 감독의 지시입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도, 물어보질 않고서요?”
“스탠리.”
유진이 피식 웃었다.
늘 무심한 얼굴에 떠오르는 한줄기 미소에 스탠리의 입이 닫혔다. 유진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
그 순간, 스탠리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밤비, 우리 밤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단다.
그를 향해 그저 사랑뿐 아니라 무한한 지지를 보여 줬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전 불가능한 지침을 내리지 않습니다. 선수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이 경험할 무수한 리더 중의 최고입니다.”
유진의 웃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본인을 믿지 마세요. 저를 믿으세요. 그거면 됩니다.”
단단하고, 한없이 담담한 그 목소리로.
스탠리의 마음속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