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86)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85화(86/266)
85. 승리의 그늘 (2)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으로 향하는 터널. 젠킨슨은 소리쳤다.
“하. 미친놈.”
젠킨슨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너, 이 새끼야, 미치도록 사랑스럽다고!”
젠킨슨은 생각보다 근엄한 주장이다. 흥분할 땐 종종 참지 못하고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지만, 오스카라는 팀의 새로운 리더가 온 이후론 모든 선수를 잘 제어하기 위해서 담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바로 감독, 유진의 모습을 본떠서.
하지만 근래 젠킨슨은 곧장 젊을 적 흥분이 툭 튀어나왔다.
“이렇게 잘하면서! 어? 어? 왜 내가 수비 가담 좀 하라고 윽박지를 땐 무시했냐고, 일부러 그랬지? 오스카 편든다고 일부러 내 말 무시한 거지?”
“그, 그만, 비켜!”
스탠리는 저보다 1.5배는 큼직한 젠킨슨이 마구 껴안자 비명을 내질렀다. 하나 어쩌겠는가. 젠킨슨은 나이가 무색하게도 순발력은 크게 떨어졌을지언정 힘만큼은 여전했다. 스탠리는 젠킨슨의 격렬한 포옹에 눈앞이 아찔했다.
“나 질식해서 교체당하는 거 보기 싫으면, 좀 비켜.”
그 말에 젠킨슨이 훅 떨어졌다.
“하, 계속 그렇게만 하라고. 스탠리. 그러면 이 완장, 내 다음으로 네가 가져갈지 모르겠어.”
“……!”
스탠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주장 완장에 욕심이 없었다. 그런 책임감을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놀란 이유는 하나다. 늘 아니꼽게 자신을 바라봤었던 젠킨슨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완장을 얘기하는 사실은, 곧 자신을 인정했다는 뜻이니까.
아니 그럴까.
“덕택에 수비가 잘 풀리고 있어. 정말로.”
수비 라인을 이끄는 젠킨슨으로선 절실히 체감했다.
전반기와 후반기.
선수들이 리그에 적응하고 손발이 맞아가고 팀워크와 호흡이 절정에 달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수비 라인의 안정화는 단연코 스탠리 덕분이었다.
‘가장 약한 고리가 가장 강한 벽이 됐으니까.’
매번 수비진에서 부담을 느끼던 젠킨슨에겐 스탠리의 변화는 마음에 찰 수밖에 없었다. 비록 스탠리가 오스카의 절친한 친구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주장이 동료 선수를 아껴 주는 일쯤이야 당연하다.
“오스카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갑자기 형처럼 구는 건 뭐야?”
“나이로 따져도 내가 훨씬 형이지. 그리고 주장이잖아. 팀에 맘에 안 드는 놈 있으면 말해. 내가 처리해 주지.”
“주장이면 형평성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스탠리의 삐딱한 말에 젠킨슨이 코웃음을 쳤다.
“그딴 게 어딨어? 필드에.”
씩 웃는 험악한 얼굴에 스탠리는 새삼 왜 유진이 오스카와 젠킨슨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갔다. 저 표정과 눈빛은 오스카와 비슷했다. 즉. 오스카와 친한 스탠리로선 젠킨슨의 언행이 부담스럽기는커녕, 퍽 친근했다.
스포츠란 이래서 신기하다.
금방이라도 싸울 듯 사이가 안 좋더라도, 함께 땀 흘리며 부딪치고 뛰다 보면 또 어느새 친해져 있으니까.
“캡틴, 오래 뛰었지? 여기서.”
“그렇지.”
“그러면, 감독님이 데뷔했을 때도 기억나?”
“…….”
터널을 걸어가던 젠킨슨은 흠칫 멈췄다.
“19년 뛰었잖아? 감독님은 유스에서 1군 데뷔 잠깐 했다고…….”
“사실, 기억은 잘 안 나.”
젠킨슨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매년 콜업되던 유스가 대여섯은 됐어. 그래, 그중에 동양인 혼혈 친구가 한 명 있었던 건 기억하지.”
젠킨슨이 무어라 달싹이다가 머뭇거렸다.
“그게 다야.”
“으응?”
“어느 날부터 사라졌으니까.”
“…….”
“나중에 듣기론 부상으로 계약해지하고 팀을 나갔다, 정도만 알았어. 사실 흔하거든. 유스에서 콜업돼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선수들.”
흔적도 없이.
그 말을 젠킨슨이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특히 할머니와 누나의 기억 속에 화려하게 남고 싶은 스탠리로선 상상도 하기 싫은 말이었다.
“뭐, 안타까운 일은 아냐. 원래 선수 콜업이 그래. 나이가 차기도 했고, 실력은 부족하지만 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 반짝이는 재능 없이 콜업된 선수는 결국 사라져. 4부 리그라고 해도, 여긴 프로거든.”
“…….”
“그래서 처음 왔을 때도 기억 못 했지.”
젠킨슨은 유진을 본 순간,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눈빛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감독이 유스 출신이고 1군에도 데뷔했던,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선수 중 하나였다고.
젠킨슨이 뺨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그래서, 뭐. 잘 몰라.”
“…….”
팀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은 단연코 젠킨슨이다. 19년 동안 한 팀에서 뛴 선수는 그뿐이다. 심지어 프런트도 여러 번 물갈이가 됐다. 젠킨슨이 모르면, 모르는 거였다.
“그분은 아실지도 모르겠군.”
“누구?”
이 팀에 젠킨슨 말고 오래된 사람이 또 있을까. 클럽하우스의 경비인 잭은 스탠리도 안다. 늘 웃으면서 선수를 반겨 주는 인상 좋은 할아버지.
하지만 스탠리가 궁금한 건 ‘사람’ 유진이 아니라, ‘선수’ 유진이었다.
그 눈빛. 자신의 무릎을 보며 한없이 쓸쓸해하던 그 눈빛을 스탠리는 잊기 어려웠다.
“아니, 잭 아저씨 말고. 유스팀의 테디베어.”
“으응?”
“푸근한 곰 아저씨 한 분 계셔. 유스 감독님. 나 유스일 적에도 유소년 지도자셨던 분이시니, 감독을 선수로 키워낸 것도 그분이야.”
“으음, 그렇군. 여하튼 감독님은 그러면 선수로서 두각을 못 드러냈다는 거네.”
“선수로서의 재능과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다르니까.”
“재능이라…….”
스탠리는 요즘 그 단어를 자주 듣는다고 중얼거리면서 라커룸으로 먼저 들어갔다.
젠킨슨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답답하고, 조급함이 뒤섞인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문 어린 선수.
제임스가 크게 심호흡하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들어간 스탠리와 제임스를 번갈아 보던 젠킨슨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재능이란, 참.”
* * *
“뭔가 단단히 잘못됐소, 단장.”
“……그러게요, 감독님.”
포레스트 그린의 불독 감독의 나직한 말에, 데일 스틸 단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이 TV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맨스필드가 파죽의 6연승을 내달립니다! 전반기에 패배를 안겨 준 상대, 피터버러를 상대로 5대 0이라는 일격을 제대로 먹이네요!
“……맨스필드가 승리를 거두는 건 이제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데일 스틸 단장은 다 식어버린 커피 잔을 매만졌다. 달싹이는 입술. 차마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턱밑에서 막힌 말. 그 말을 대신한 사람은 불독 감독이었다.
“경기 내용도 흠잡을 데 없이 압도적이구만.”
평소 호탕하게 웃으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던 불독은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눈빛이 TV 속, 중계에 잡힌 유진 감독을 향했다.
―이로써 맨스필드는 1위 자리를 더 공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리그 33라운드, 이제 슬슬 리그의 향방이 갈리는 듯한데요!
“후. 감독님이 시즌 시작 전에, 맨스필드가 다크호스가 되리라 말씀은 하셨지만…….”
데일 스틸 단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불독의 지휘력을 신뢰했다. 단장과 감독. 서로 확고한 믿음을 가진 파트너이지만, 데일 스틸도 딱 하나만큼은 믿지 못하고 웃어넘겼다.
‘이번 시즌 예상치 못할 다크호스라니.’
데일 스틸은 쓴웃음을 삼켰다. 시즌 시작 전. 맨스필드의 감독과 거래를 트면서 만만치 않은 사람이란 건 느꼈다. 하나 그는 단장이었다. 축구팀은 선수와 감독, 코치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무수한 스태프, 프런트의 직원들, 팀에 구축된 시스템.
그 전부가 강팀을 만들어 내는 법.
여러 이유를 생각하면, 맨스필드는 ‘보통이 아닌’ 감독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이 낙제점이었다. 그것이 감독과 단장의 시야였다. 불독은 유진만 보고 다크호스를 운운했지만, 데일 스틸은 감독 한 명이 바뀐다고 팀 전체가 바뀐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감독은 감독일 뿐. 경기력의 증가는 불러올 수 있지만, 팀의 체질 변화는 단장과 프런트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랬는데, 역시 축구는 감독님의 안목을 따라갈 수가 없네요.”
“내 안목도 형편없소, 단장.”
불독이 입꼬리를 비틀리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람 좋은 호인이기만 했던 그의 두 눈이 차가운 안광을 뿌렸다.
“다크호스라니. 저게 어딜 봐서?”
“…….”
“리그를 씹어 먹고 있잖소.”
“분명, 전반기만 해도 이렇게 위협적이진 않았는데.”
“스탠리, 저 스탠리를 저렇게 쓸진 몰랐군.”
“스윈던전이 우리에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군요.”
데일 스틸은 쓰게 웃었다.
“후반기 접어들면서 이제 한계를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윈던전.
경쟁 팀에게 분석 보고서와 자료들을 아낌없이 베풀었던 것.
데일 스틸이 스탠리의 과거와 부상 이력, 포레스트의 훈련 보고서를 넘겨줬던 것.
유진은 좋은 사람이다. 훌륭한 감독이기도 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호의에는 조금은 음흉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그저 유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전반기 빈약한 선수단으로 기적적으로 저만큼 팀을 이끌어왔지만, 스윈던전에서 서로 힘껏 싸워서 지치기를 바랐는데.”
실제로 그리됐다. 스윈던전 이후 맨스필드는 3경기 무승을 기록했으니까.
“참, 신기합니다. 선수단 운영을 어떻게 하길래.”
이후 거짓말 같은 7연승에 데일 스틸은 기함을 터뜨리고 싶었다.
시즌 전반기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팀들도 선수들이 갈려 나가 체력 문제를 호소하는 이 시점.
그런 팀들이 우습게도 연승행진이라니. 꾸역꾸역 간신히 거둔 승리라도 감탄이 나올 텐데, 심지어 매 경기 압도적이었다.
“7경기 19득점 1실점이라니. 말도 안 되네요. 참.”
“새로 영입한 쓰리 톰, 그 선수들도 장난 아니야. 적어도 한 명당 5만에서 10만 유로 이적료는 줘야 해. 셋 다 자유계약이라면서?”
“이거야 원, 단장으로 면목 없습니다. 선수 보는 눈, 그리고 협상 능력, 단장인 저보다 유진 감독이 나은 것 같네요.”
―현재 맨스필드는 승점 70점으로, 2위 포레스트 그린과의 승점을 9점 차이로 벌렸습니다. 3위 반즐리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맨스필드와 14점 차이가 나는 상태. 우승팀은 아무래도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맨스필드와 포레스트에서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9점 차이라.”
불독이 탄식했다.
“우리와 맨스필드의 경기가…….”
“41라운드에요.”
“리그 46라운드 다 치르기 전에 결정 나겠군.”
우승팀이.
지금도 9점 차인데, 맞대결에서 패배한다면, 사실상 승점 6점이 걸린 경기에서 진다면.
“더 점수가 벌어져서는 안 되겠어.”
아니, 승점을 좁혀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저 기세가 좀처럼 꺾일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하나 불독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막 짜릿하지 않소? 단장. 안 그래요?”
“두 번 짜릿하다간, 제 머리칼이 다 백발이 될 겁니다.”
“으하하하. 끝까지 해봅시다. 나름 감독 선밴데, 어, 저 친구한테 한 방 먹이지도 못하고 무너질 수야 없지!”
그제야 데일 스틸 단장은 후,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눈빛을 뿌리던 불독은 사라지고, 다시금 예의 호탕한 그로 돌아왔으니까.
하나 그 웃음 속에, 불독의 두 눈은 여전히 시퍼렇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