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gressed Tyrant of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96)
회귀한 필드의 독재자 98화(96/266)
98. 짝사랑의 말로 (4)
―스탠리! 후방으로 내려와 깔끔한 태클! 공을 뺏자마자 곧장 패스합니다! 제임스가 달리고 있습니다!
불독의 예상과 달리, 포레스트의 어떤 선수들도 제임스가 그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정해진 플레이만 펼치는 손쉬운 먹잇감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함부로 접근하지 마!”
“간격 유지해!”
“속아 넘어가지 마!”
환상적인 어시스트로 연결된 노 룩 패스의 충격은 선수들의 뇌리까지 전해졌다.
어떻게 안 보고, 그토록 정확한 타이밍에 패스를 할 수 있지?
그게 운이 따른다고 되는가? 우직한 돌파와 노 룩 패스 한방에 수비진이 붕괴했다. 그들의 눈엔 경기장을 헤집었던 대니 스콧과 스탠리보단, 제임스의 임팩트가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제임스의 질주! 포레스트의 선수들이 긴장합니다! 이 선수, 빠르거든요! 지치지도 않는지 또 전력으로 질주를 해요!
하물며, 비록 헛발질로 끝났지만, 처음부터 간담을 서늘케 했던 찬스를 만들지 않았던가. 거기다 마치 오늘만 사는 것처럼 질주를 멈추지 않는 제임스.
윙어, 윙백, 그 포지션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였다. 그에게 경기 중 걷는다는 개념은 없는 듯했다.
멀리서 객관적으로 필드를 냉정히 주시하는 불독과 달리, 필드에서 부딪치는 선수들은 지독한 경계심을 느꼈다.
그리고 제임스는, 아니 정확히 유진은 그 경계심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계속해, 계속!”
유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에 파고들었다.
“계속, 움직여, 계속!”
스탠리는 선명히 알아들었다.
저 외침은 자신에게 향하는 소리임을.
―제임스의 돌파, 막힙니다! 뒤로 백 패스! 대니 스콧이 잡습니다!
이번 전술의 핵심이 무엇인지, 스탠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끝없이 해야 합니다. 그저 한두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여야 해요. 마치 오늘이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전부를 쏟아 내면서요.
스위칭.
자신과 제임스의 위치를 상황에 맞게 계속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타이밍과 결정은 오롯이.
―흐름은 스탠리가 보고, 결정하세요.
서로 의견을 교환할 필요도, 소리치면서 규칙적으로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믿음.
자신의 수비적 재능을 발견하고, 거침없이 밀어붙이던 바로 그 믿음.
스탠리는 감독의 믿음을 결코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필드를 주시하는 그의 시야가 확대되고, 거친 땀방울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선수들이 찰나 느리게 느껴지는 감각.
‘지금.’
또 한 번 번뜩이는 안광 너머로, 스탠리는 제임스를 바라봤다.
“제임스!”
외치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자, 제임스는 흘긋 보곤 아무 말도 없이 후방으로 복귀하며 수비수로 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그 흐름을, 이 필드에서 가장 좋은 시야를 가진 대니 스콧이 여지없이 캐치해 냈다.
―대니 스콧, 공을 잠시 소유하다가 압박이 들어오자, 오오! 환상적인 마르세유 턴! 압박을 단숨에 풀어내고, 우측으로 길게 뽑아냅니다! 이런, 스탠리가 달리고 있습니다! 오버래핑, 아닙니다! 스탠리와 제임스의 위치가 또 바뀌었군요!
포레스트의 수비진 사이로 균열이 번졌다. 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언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포레스트의 수비가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스탠리 반대편으로 방향 전환! 길게 내줍니다! 오늘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한 톰 도허티가 받습니다! 그리고 스탠리는, 오, 이런 또다시 제임스와 위치를 바꿉니다!
“이 미친! 또 어디 갔어!”
“따라가지 마! 라인 지키라고!”
“아니, 잡아야 해! 대니 스콧이 공 잡았잖아! 잡아! 속지 마! 공간 점유해! 길목 지켜!”
혼란은 점입가경이었다. 이런 스위칭은 포레스트 선수들도 듣도 보도 못했다. 처음이었다.
끝도 없다. 규칙도, 타이밍도, 흐름도 모두 엇나가는 스위칭의 계속된 반복.
―톰 도허티의 패스! 중앙에서 대니 스콧이 받습니다! 다시 오른쪽으로, 이번에는 제임스네요! 제임스가 올라왔고, 스탠리가 뒤에서 후방을 지킵니다! 공을 받은 제임스! 달리고, 뜁니다! 오, 이런 또 보지 않고 노 룩으로 컷-백! 대니 스콧, 잡지 않고 그대로 때립니다! 골! 골! 골!
혼란으로 치닫는 포레스트의 수비진을 그대로 갈라 버리는 시원한 중거리 슛.
“이 미친…….”
수비 가담을 위해 내려왔던 맥 헤럴드는 순식간에 결정나 버린 공격 전개에 말을 잃었다. 그가 수비하기도 전에 이미 상황이 끝났다.
“저 무슨…….”
고개를 처박고 공만 바라보는 제임스의 노 룩 패스에, 대니 스콧의 환상적인 중거리포. 솔직히 말해, 맥 해럴드는 이 맨스필드란 팀이 자신이 있던 그 팀이 맞는가- 의문이 들었다.
선수들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필드 위에 절반 정도는 다 아는 얼굴이다.
“그런 선수들을 가지고, 그 형편없는 녀석들을 가지고…….”
안다. 저 선수들과 함께 경기를 뛰어 봐서. 답답한 플레이. 무얼 해도 움직이지 않는 선수, 한 박자 늦고, 패스는커녕 공도 다루지 못했던 삼류들.
“…….”
그런 선수들을 데리고, 지금의 맨스필드는 확연하게 바뀌었다.
두 번째 득점에도 그저 손뼉만 치고 있는 저 무심한 얼굴의 감독.
“그리고 저 작자.”
맥 헤럴드는 깨달았다. 필드 밖에서 이 모든 흐름을 제어하는 사람이 유진이라면, 필드 위에서 그 유진의 뜻대로 플레이를 펼치게 만드는 마술사는 단연코, 저 선수, 대니 스콧이라고.
순간 골을 넣은 대니 스콧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특유의 세레머니를 펼치곤, 맥 헤럴드를 보며 비웃듯 말했다.
“진짜 재능은 이런 거야.”
“……!”
맥 헤럴드는 흠칫했다. 그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서 제임스가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전반 18분.
맨스필드 2 : 0 포레스트 그린
@Professor_Jailson
축구 팬들은 당장 이 경기 중계를 틀어.
@Professor_Jailson
리그 투라고 우습게 여기지 마. 눈이 황홀할 환상적인 경기가 펼쳐지고 있으니까.
@Professor_Jailson
특히 여기, 노란색 유니폼의 맨스필드.
그리고 이 사람, 유진 감독.
잉글랜드 축구 팬이면, 그냥 중계 틀어서 지켜보라고.
@Professor_Jailson
분명 몇 년 안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너희들도 볼 거니까.
미리 예습해 놔.
* * *
“허, 이게 통하네.”
두 손을 번쩍 들고 괴성을 내지르던 막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왜, 능히 통할 만하다고 해서 반대 안 했잖아?”
“그야…… 어쩌다가 한두 번 통해서 허를 찌르는 정도로 생각했지. 스위칭을 그냥 반복한다고, 상대가 혼란에 빠진다는 게 말이 돼?”
“규칙이 없으니까.”
“……즉흥적이니까?”
“약속된 스위칭 플레이란 건 없어. 언제 서로 위치를 바꿀지, 공격할 때 그럴지, 수비할 때 그럴지, 그도 아니면 중원 싸움이 심할 때 그럴지, 하나도 약속하지 않았어.”
약속 없는 팀플레이는 제대로 성공하기 어렵다. 서로 포지션을 바꾸는 스위칭 플레이에는 사전 약속이 필수였다. 하지만 지금 저 둘에겐 없었다.
“오로지 스탠리의 즉흥이니까.”
약속된 건 없다. 오로지 경기 도중 스탠리의 마음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다.
“제임스는 정말…… 시킨 대로 잘하네.”
스탠리에게 신호를 받으면, 무조건 위치를 바꾼다는 지침 단 하나.
조금의 개인적인 판단도, 생각도 없었다. 신호를 받으면 즉시 움직인다. 팀플레이는 한 사람의 머리가 아니다. 여러 명의 머리가 협력하며 움직여야 하기에 어렵다. 하나 지금 제임스와 스탠리의 스위칭은, 오로지 스탠리 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못 따라가는 거야.”
선수들도 눈치가 있다. 공격할 때 스위칭하는구나. 볼을 점유할 때, 또는 압박이 심할 때, 이럴 때 스위칭하는구나. 보다 보면 눈에 익고,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대응하기 마련.
한데 그런 규칙 따위가 없다. 오로지 스탠리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니까.
제임스는 판단도 하지 않는다. 먼저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저 철저히 신호에 따라 움직인다.
“무엇보다도 스탠리는 포레스트를 잘 알아.”
“포레스트에서 뛰고 훈련했으니…….”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 습관, 패턴, 그 모든 걸 다 머릿속에 넣고 있어.”
한마디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무작위일지라도, 그걸 결정하는 스탠리는 가장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타이밍에만 이뤄지니 상대로서는 혼란이 심하리라.
안 그래도 스탠리를 막기 위해 대인 방어까지 펼치는데, 심할 땐 5분 사이에 여섯, 일곱 번의 스위칭을 해 버리니 수비진이 정비될 수가 없는 상태였다.
“팀플레이인데, 팀플레이가 아닌 느낌이야. 이게, 제임스의 장점이라고 해야 할지…….”
막스는 흘긋, 내 눈치를 봤다.
자신의 판단 따위는 개입하지 않는, 오로지 시킨 대로만 뛰고, 패스하는 저 플레이.
“쟤, 다음 시즌 안 데리고 갈 거지?”
“…….”
막스는 알았다. 그와 가장 많이 전술에 대해 공유하고, 토의하고, 선수단 활용에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니. 내 생각을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완벽한 지침, 제어된 움직임, 전술 속 철저함. 창의성이라곤 한 톨도 없는, 시킨 대로만 움직여야 제 몫을 하는 선수.”
“……리그 원에서는, 힘들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이 긍정이기만은 아니었다.
어쩐지, 아직 확답하고 싶지 않았다.
* * *
“와아아! 아주머니! 제임스가 벌써 어시스트가 두 개에요!”
경기장 전체가 들썩였다. 여기저기서 맥주가 엎어지고, 솟구치고, 전혀 모르는 옆에 앉은 사람하고 포옹하고, 어깨동무하고 고래고래 응원가를 불러댔다.
2대 0.
예상치 못할 정도로 전반 18분 동안 두 골을 몰아치면서 우세를 가져가다니.
지켜보던 릴리도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애써 침착하고 차분하려고 마음을 다스렸는데 정말 참기 어려웠다. 아직 2점 차다. 시간 많이 남았다. 승리의 샴페인을 뜯기에는 이르다.―라지만 릴리는 주위 분위기에 휩쓸렸다.
“두골, 두골, 우리가 이기고 있어어!”
선수단 가족, 이사회, 프런트 직원들이 함께한 공간.
모두가 정말 성큼 다가온 우승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봐요. 제임스 쟤가, 맨날 말로만 힘들다니, 자긴 부족하다느니, 겸손을 떨어 대지만 할 땐 제대로 하잖아요?”
엘라는 상기된 목소리로 연신 재잘거렸다.
제임스의 어머니도, 옆에서 듣고 있던 릴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의 노 룩 패스.
속사정이 어떻든 간에, 지켜보는 관중의 시선으로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우리 제임스가, 저렇게 잘했다니.”
제임스의 어머니도 눈을 동그랗게 뜯고 약간은 울먹거렸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아들이 일만 명이나 되는 관중들의 환호를 들으면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단 사실. 릴리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제임스…… 가족도, 널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그리고 이 많은 관중이 그 이름을 외치고 있어. 아마 오랫동안 기억하겠지.’
기억할 거다.
릴리의 시선이 필드 밖, 유진에게 향했다.
‘……지금 이 구단에서, 아무도 기억 못 하는 누구와는 달리.’
릴리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얼마 전, 유진이 찾아와 툭 내놓은 명단이 그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미리미리 준비할 거야. 다음 시즌에 우리 팀에서 제외할 선수들. 알고 있어.
그리고 그 명단에, 제임스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도.
“아, 그런데, 진짜 너무하네. 어떻게 여길 한 번도 안 봐 줄 수가 있어요? 그렇죠? 아주머니, 안 그래요? 어시스트 두 번이나 했으면, 여기 좀 봐주면서 손이라도 흔들어야지!”
엘라가 말은 그리 투덜대면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읽은 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임스가 결국 팀을 떠나게 된다면.
‘이것도 비슷한 걸까.’
다를 거다. 유진과 달리, 적어도 제임스는 이 무대에서 관중들에게 주인공처럼 비치고 있으니까. 릴리는 잘은 몰라도, 유진이 저 제임스를 이렇게 활약할 수 있게끔 만들었단 사실은 잘 알았다.
분명 다르다. 유진처럼 아무도 기억 못 하고 사라지고, 팀을 떠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자신과는 다를 거다.
‘어쩌면…….’
저 활약을 보고 유진이 생각을 달리할 수 없을까.
릴리는 엘라만큼, 제임스의 어머님만큼,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며 간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