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052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1052화(1052/1072)
제1052화
쿠와아아아아앙!
해랑이는 크라켄의 다리 하나를 걸레짝으로 만들고도 만족하지 못한 듯 앞발을 들어 올렸다. 녀석은 칼날 같은 발톱을 세워 크라켄의 몸통을 내리찍었다.
뻐어어어어어억!
크라켄은 머리가 찢겨나갔음에도 이대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듯 길쭉한 다리를 들어 해랑이의 턱을 후려쳤다.
파도를 두른 듯한 푸른 늑대와 백색 도시를 짊어지고 있는 고대 크라켄의 전투는 이 바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듯 격렬했다.
“캬아아아아!”
해랑이가 다시 이빨을 세워서 본인을 공격했던 크라켄의 다리를 물어서 뜯어버렸다.
쿠구구구구구!
크라켄은 그 틈에 남은 다리를 모두 들어서 해랑이를 휘감은 뒤 뱀처럼 조였다.
산조차 가루가 될 정도로 강대한 힘이 담긴 공격이었지만, 해랑이는 진짜 늑대가 아니라 바다의 기운을 지닌 정령이었다.
파아아아앙!
해랑이는 육체를 바닷물로 변화시켜서 조이기 공격을 흘려보낸 후 날카로운 발톱으로 크라켄의 다리를 세 개째 잘라냈다.
쿠우우우우웅!
크라켄의 육중한 다리가 땅으로 떨어지며 지축이 뒤흔들렸다.
“허….”
라온은 고대의 크라켄을 힘으로 제압하는 해랑이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해랑이가 저렇게 강했나?’
지금의 해랑이는 혈기에 중독되어 폭주할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본왕이 말하지 않았느냐. 저 멍멍이는 죽음을 넘어섰으니, 강해졌을 거라고.
라스는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과 공포를 이겨낸 결과라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정도의 힘을 숨기고 있을 줄은 본왕도 몰랐느니라. 네놈이 저 멍멍이를 각성시켰기 때문이겠지.
‘내가 해랑이를 각성시켰다고?’
-해랑이라는 유치한 이름을 지어주었지 않았느냐. 저 정령은 네놈에 의해서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은 찾은 것이니라.
녀석은 자신이 해랑이에게 새로운 생명과 힘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지금 보니 강한 것도 강한 거지만, 크라켄의 몸에 새겨진 주술이 해랑이에게는 통하지 않고 있어.’
크라켄의 몸에는 오러와 마법을 차단하는 주술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해랑이는 마법도, 오러도 사용하지 않기에 크라켄을 자신보다 더 쉽게 제압하고 있었다.
쿠우우우우웅!
해랑이는 그사이에 크라켄의 다리를 하나 더 잘라내서 네 개만 남기고, 몸통에도 다섯 줄기의 상처를 입혔다.
끼에에에엑!
크라켄의 본능이 강화된 만큼 고통도 심하게 느끼는 듯 전신에서 녹색 피를 흘리며 바다가 흔들릴 정도의 비명을 터트렸다.
“크르르르르!”
해랑이는 혈기를 지닌 크라켄의 숨통을 확실하게 끝내겠다는 듯 이를 갈며 바다를 박찼다.
키이이이….
크라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백혈교 본단과 해안을 잇는 다리 때문에 도망치지도 못했다.
퍼어어어억!
해랑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길게 솟은 발톱을 크라켄의 머리통에 박아 넣었다.
키아아아아아아!
크라켄은 지독한 고통을 느낀 듯 전신을 파들파들 떨며 등에 짊어지고 있던 백혈교 본단을 아예 던져버렸다.
본능 강화 마법 때문에 백혈교를 지켜야 한다는 세뇌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우선시된 것 같았다.
쿠와아아아아아앙!
백혈교 본단이 바다와 해변 사이에 추락하며 어마어마한 진동을 일으켰다. 모래와 파도가 치솟으며 사방으로 갈색 흙먼지가 뿌려졌다.
키에에에에에!
“캬오오오오!”
크라켄은 고대의 괴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도망쳤고, 해랑이는 놈을 확실히 끝내겠다는 듯 따라서 잠수했다.
“…저게 아까 내가 본 그 정령이 맞아?”
마탑주 라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부탁할게. 조금만 연구하게 해줘! 진짜 조금만!”
그녀가 부탁한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백혈교와의 전쟁 중에도 연구 이야기를 꺼내다니,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바다의 정령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설 중 하나야.”
아리스는 해랑이가 남기고 간 파도를 보며 진한 미소를 그렸다.
“수십 년 동안 바다를 돌아다녔어도 만나지 못했는데, 우리 조카는 대단하네.”
그녀는 해랑이를 죽이지 않고, 살린 선택이 좋았다며 자신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덕분에 백혈교가 가질 수성의 이점도 줄어들었어.”
백혈교 본단은 크라켄의 등에 올라가 있다가 땅으로 내려왔기에 성벽의 높이 자체가 크게 낮아진 상태였다. 이전보다 뚫는 게 훨씬 쉬어졌다.
다만 본단 자체에 방어 주술이 워낙에 강력하기에 땅에 추락했음에도 내부에 있는 혈귀들은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일어나라! 다시 성벽을 향해 달려들어!”
발데르는 혼란에 휩싸인 백혈교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네 개의 다리에 있는 검사들에게 돌격 지시를 내렸다.
“성벽을 넘지 말고! 부숴버려라!”
그는 선두로 나아가 강환이 깃든 연검을 내리쳐 성벽과 주술에 붉은 균열을 일으켰다.
“허….”
라온이 적의 호흡을 끊어버리는 발데르를 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냥 바보가 아니었군.’
백혈교 본단의 성벽에는 강력한 혈기의 주술이 깃들어 있다.
저 결계를 지우지 않고 내부로 들어가면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데, 발데르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성벽과 주술부터 부수려고 하고 있었다.
‘거기다 적이 약해진 틈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
머리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단순함이 전장에서는 짐승 같은 감각이 되어 적의 숨통을 물어뜯고 있었다.
“우리도 가자!”
“지금 성벽을 부수고, 내부로 진입해!”
“전력을 다해서 길을 열어라!”
자신을 대신하여 광풍전을 움직이는 버렌과 청풍의 무인들을 이끄는 라바윈 그리고 다른 무력대의 수장들도 발데르의 묵직한 기세에 힘을 얻은 듯 수하들과 함께 성벽으로 돌진했다.
쿠구구구구구!
추악한 성벽을 뚫어내겠다는 지그하르트 검사들의 의지는 하나의 검처럼 이어지며 백혈교주의 굳건한 주술에 깊은 상흔을 새겨넣었다.
우우우우웅!
하얀 성벽과 백혈교 본단을 수호하는 방어의 주술이 동시에 무너지려고 할 때 천지사방에서 새하얀 차원이 떠올랐다.
화아아아아악!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하얀 차원 속에서 백의에 핏방울을 묻힌 혈귀들이 무수히 튀어나왔다.
“악귀들이다!”
“악마들을 막고, 우리의 신을 지켜라!”
“절대로 성지에 들어올 수 없게 막아!”
“우와아아아아아아!”
대주교들은 하얀 차원에서 나온 혈귀들을 앞으로 보내 성벽과 주술을 부수려는 검사들의 길을 막았다.
“혈신을 위하여!”
“혈신을 위하여!”
혈귀들은 무기도 지니지 않은 채 검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은 검에 베이는 순간 심장에 응집시킨 혈공을 폭발시켜 자폭 공격을 해왔다.
쿠구구구구구구!
좁은 다리 위에서 연달아 혈기가 폭발하며 검사들의 육체 위로 저주받은 백색 핏물이 떨어졌다.
“끄아아아악!”
“내, 내 팔이!”
“오러로 막아지지가 않아!”
광풍전 검사들은 전원이 마스터였기에 어떻게든 방어를 해냈지만, 다른 다리에서는 검사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더러운 놈들이….”
마르타가 개미 떼처럼 올라오는 혈귀들을 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저 혈귀들은….”
라온은 끝없이 솟아나는 혈귀들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내부에서 온 게 아니야.”
“그 말대로….”
에블린이 탁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지역에 있는 혈귀들을 이곳으로 불러온 것 같아.”
그녀는 자폭을 시키기 위해서 이동 주술로 데려온 것 같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참으로 더러운 족속들이니라.
라스는 웬만한 마족들도 하지 않을 짓이라며 눈썹을 깊게 구겼다.
“이것도 숫자의 힘이라고 봐야 하나.”
성벽 위에 있는 백혈교도들은 혈기를 쏘아냈고, 차원에서 나온 교도들은 몸을 던지며 자폭을 해서 길을 막아섰다.
해랑이 덕분에 뚫어낼 것 같았던 성벽이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버러지 놈들이!”
발데르가 발을 구르며 연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낭창거리는 검날이 방울뱀의 꼬리처럼 흔들리더니, 눈앞에 있는 혈귀들을 수천 조각으로 찢어발겼다.
“루난! 트레빈!”
카룬의 외침에 뒤에서 검사들을 보조하던 루난과 트레빈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화아아아아아!
루난의 검이 비단결처럼 유려한 자태로 뻗어 나가자, 자폭을 하기 위해 몸을 던지려던 백혈교도와 놈들을 쏟아내던 차원이 함께 얼어붙었다.
치아아아아아앙!
트레빈은 루난이 벌어준 시간을 놓치지 않고 매섭게 검을 내리쳐 얼어붙은 혈귀와 차원을 동시에 갈라버렸다.
“오랜만에 힘 좀 써야겠군!”
라바윈이 지지 않겠다는 듯 두 손으로 검을 잡고 풍차처럼 휘둘리자, 웅대한 바람이 치솟으며 폭발하려던 혈귀들을 하늘과 바다로 날려버렸다.
각자의 다리에 선 검사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다시 백혈교 본단으로 달려갈 때 성벽 위에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짙고도 깊은 피 냄새가 흘러내렸다.
쿠와아아아아앙!
낫처럼 갈린 예리하게 갈린 혈기가 떨어지며 성벽으로 달려가던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모조리 밀려났다.
“냄새 나는 쓰레기들이 왔군.”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창백한 인상의 남자, 1사도가 지그하르트의 군세를 굽어보며 서늘한 안광을 번뜩였다.
“쓰레기가 아니라, 알아서 찾아와준 맛있는 음식들이죠. 하나같이 냄새가 좋네요.”
청발의 미남자가 하얀 장포를 걷어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하아, 지루해 보이는 아저씨들뿐이네.”
적색 머리카락으로 왼쪽 눈을 가린 미녀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은 좀 괜찮은데?”
그녀는 멀리 있는 라온을 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 그분이 오시기 전에 정리를 끝내야 한다.”
백발의 어린 소년이 적발의 여성을 보며 혀를 찼다.
“저것들….”
라온이 새롭게 나타난 혈귀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도야.”
얼굴을 아는 건 1사도뿐이었지만, 저들에게서 다른 혈귀들과는 격이 다른 무력이 느껴졌다. 사도가 분명했다.
‘숫자가 많군.’
새로 사람을 들인 건가?
죽은 사도의 자리에 새로운 인물을 넣은 듯 자신의 예상보다 사도의 숫자가 많았다.
-저 정도면 남은 숫자가 맞지 않느냐?
라스는 나타나지 않았던 사도를 생각하면 수가 맞다며 눈동자를 돌렸다.
‘저게 다가 아닐 테니까.’
지금 백색 차원을 열고 있는 놈도 사도일 테고, 혈귀들을 소환하고 성벽의 주술을 유지하는 놈도 사도일 테니, 새로운 사도를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문제는….’
초월자의 숫자.
1사도야 익히 알려진 대로 초월자였지만, 중앙에 있는 청발의 남자 역시 초월을 넘어선 무력이 느껴졌다.
‘저 둘은 나와 아리스 님이 상대할 수밖에 없어.’
초월자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초월자뿐이다. 이제는 자신과 아리스가 나설 때였다.
“이모님은 누구를 맡으시겠습니까?”
라온이 제천검에 손을 얹으며 아리스에게 물었다.
“내가 1사도를 맡을게.”
아리스도 싸워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모래를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저놈하고는 연이 있으니까.”
그녀는 1사도의 목을 확실히 베겠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럼 저는 파란 머리를 치겠습니다.”
라온은 이쪽을 보며 미소를 그리는 청발의 사도를 보며 손목을 풀었다.
“이모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합니다. 백혈교주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요.”
자신이 아는 백혈교주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뒤에 숨지 않고 앞으로 나오는 여자다.
사도들을 보내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본단 안에서 다른 술수를 생각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거기다 우리 쪽엔 지친 사람이 많으니까.”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나를 모두 소모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에블린 역시 백혈교의 하얀 안개를 지우느라 움직일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성벽을 부수고, 백혈교주를 끌어내야 오웬도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다만 어떻게 해도 희생이 커질 수밖에 없어.’
사도들이 나오기 전에 백혈교 본단의 성벽을 부수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혈귀들은 계속 불어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늘어날 것이다.
“마르타. 너는 공검대와 전검대 쪽을 지원….”
“미안하지만, 내 상대도 나왔어.”
마르타는 자신의 지시를 듣지 않고, 우측 성벽을 바라보았다.
“저 새끼는 내가 죽일 거야.”
그녀는 새롭게 나타난 10사도를 보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납게 뇌까렸다.
“안 돼.”
라온이 마르타가 노려보는 10사도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너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좋은 선택이다.”
기다리라고 말하려 할 때 뒤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수는 자신으로 손으로 해야지.”
데니어 지그하르트. 그가 현무전을 이끌고 푸른 차원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마르타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무전주님이 왜….”
라온이 평온한 데니어의 눈동자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외부의 혈귀들이 소환되는 것을 보고, 가주님께서 참전하라 명하셨다.”
데니어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라는 글렌의 지시를 받고, 지원을 나왔다며 검을 뽑아 들었다.
치아아아아아!
그를 주군으로 모시는 현무전의 검사들도 검을 세우며 혈귀들을 말살하겠다는 듯 웅장한 기파를 일으켰다.
“…….”
라온은 투지를 세운 데니어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 안쪽을 씹었다.
‘가주님이 보내셨다고?’
하긴 이상한 점이 없었으니까.
데니어는 대기 명령을 받았음에도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담담한 반응을 보였기에 글렌의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
데니어가 의심스럽기는 해도 지그하르트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글렌에게는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아들일 뿐이기에 이곳에 보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섯 번째 다리로 가서 시선을 분산시키겠다. 마르타. 내 뒤를 따라오거라.”
데니어는 마르타에게 길을 열어주겠다고 말하며 지금 비어 있는 다섯 번째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네!”
마르타는 데니어를 자신만큼이나 신뢰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쫓았다.
“모두 죽지 마라.”
아리스는 검사들에게 주문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서 1사도가 있는 좌측 성벽으로 뛰어올랐다.
“라온! 잘 다녀와!”
에블린이 자신만 믿고 있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니,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았다.
“저런 놈 따위에게 너무 힘을 빼지 마. 너는 백혈교주와의 전투에도 참여해야 하니까.”
라리안은 백혈교주를 상대할 때도 도와달라며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라온은 에블린과 라리안을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사람은 안 돼.’
에블린은 지쳐 있었고, 라리안은 백혈교주와의 전투를 위해서 힘을 아껴야 하기에 데니어를 견제해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에블린은 몰라도 라리안에게는 그 말 자체를 꺼낼 수 없었다.
‘그럼 딱 한 명뿐이지.’
라온이 묵직한 걸음으로 해변을 박차고 나아가 두 번째 다리로 올라갔다. 가장 앞에서 혈귀들을 뚫어내는 발데르의 옆에 붙었다.
“조카!”
발데르가 자신을 보며 히죽 웃었다.
“도와주러 온 거야?”
“예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죠? 만들어 달라는 검술 다 만들어드릴 테니….”
라온이 다섯 번째 다리에서 길을 여는 데니어를 가리켰다.
“꼭 지켜보세요.”
*
*
*
“…그가 나올 수 없게 견제만 해주시죠. 그 근처에 있지 않습니까.”
데루스 로베르트는 투명한 구슬에 비치는 드래곤의 투구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뚝.
구슬 속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통신이 끊어버렸다.
“말이 참 짧다니까.”
데루스가 어깨를 으쓱이고서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흑단목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지그하르트는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백혈교 본단을 어떻게 찾은 거지?”
그는 백혈교 본단과 지그하르트가 접전을 벌이는 해안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생각해 보니, 위치를 찾아놓고, 지금까지 기다렸다는 게 더 놀랍군. 딱 그놈의 솜씨야.”
데루스는 이번 일을 주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뻔히 보인다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바로 백혈교 본단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쿠바라가 데루스에게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아니.”
데루스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몸이 튼튼한 것들만 대충 던져줘.”
“예? 그게 무슨….”
쿠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벽이 뚫리지 않도록. 아니, 조금 늦게 뚫리도록 적당한 놈들만 보내놓으라고. 천족도 몇 정도는 필요하겠지.”
데루스는 백혈교의 지원 요청을 받았음에도 직접 갈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주인님은….”
“백혈교 본단에 사황이 모여 있다. 지그하르트, 마탑, 발카르 그리고 숨어 있는 오웬까지.”
그가 가는 웃음을 그리며 손을 들어 올리자, 성스러운 기운이 솟아오르며 백색의 문이 열렸다.
“이 틈을 놓치는 건 머저리도 하지 않을 짓이지.”
데루스는 만찬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입맛을 다시며 차원 속에 발을 밀어 넣었다.
“오늘 오황 중 셋이 사라진다. 연회를 준비 해놓고 있도록.”
데루스는 쿠바라가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하얀 차원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풍스러웠던 남색 카펫이 아닌 푸른 초원에 서서 눈웃음을 쳤다.
“초원의 왕이자, 야수들의 군주가 이리도 초라한 오두막에 숨어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데루스는 오래된 나무로 지은 듯 썩어 있는 오두막을 보며 눈썹을 내렸다.
“결국 여기까지 찾아왔군.”
야수연맹의 주인이자, 야왕이라는 이명을 가진 오그람이 삐걱거리는 오두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백혈교를 도우러 가지 않은 건가?”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지원보다 빈집 털이를 좋아해서요.”
데루스는 오그람을 조롱하듯 길쭉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 그 아이의 말대로 되었구나.”
오그람은 데루스를 만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
“내 손으로 네놈의 모가지를 분지르고 싶다만 오늘 네놈의 상대는 따로 있다.”
그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서자, 오두막 안쪽에서 다른 사람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음?”
데루스는 오두막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매를 찌푸렸다.
‘언제부터?’
저 오두막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줄 몰랐기에 가슴에 찌릿한 불길함이 떠올랐다.
흐으음!
가느다란 콧노래와 함께 오그람이 머물던 오두막에서 회색 무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두 눈을 가리는 검은 안대를 쓰고 있었는데, 꼭 눈이 보이는 것처럼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적발에 흑검….”
데루스는 검사의 허리에 매여 있는 흑검을 보며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흑야검신? 네놈이 왜 여기에….”
그는 이곳에서 다르칸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 눈을 부릅떴다.
“흑야검신이라….”
다르칸이 데루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을 저었다.
“그 이름은 버렸다.”
“뭐…?”
“나는 거지를 간신히 벗어난 장님 검사일 뿐이야.”
그는 데루스의 정면에 서서 흑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이라 불릴 때는 자유롭지 못했고, 눈을 버렸을 때는 여유롭지 못했다. 그놈 덕분에 진정한 거지가 되어 과거를 놓아주자, 새로운 길이 열리더군. 고맙다고 해야겠어.”
다르칸이 라온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흑검으로 데루스를 겨눴다.
고오오오오오!
바람 한 점 없던 초원의 하늘이 진동하고, 대지가 분노한 듯 울부짖는다.
이 초원이 아니, 이 세계가 데루스 로베르트를 적으로 여기는 듯 온 천하에 섬찟한 살의가 뻗어 나갔다.
눈을 잃고, 지위를 버린 대신 완성을 추구하는 검사의 의념은 이미 이 세계의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아이의 말대로 나쁘지 않은 검이 되었구나.”
다르칸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가 눈매를 찌푸린 데루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만찬을 즐기기 전의 입가심으로는 딱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