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1067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1067화(1067/1072)
제1067화
“스승님은 여전하시네요.”
라온이 당당하게 허리를 편 리메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건 연기가 아니야.’
백혈교주의 주술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다. 저렇게 대놓고 돈을 빌려달라고 할 수 있는 엘프는 오직 리메르뿐이었다.
-맞느니라!
라스가 큼지막하게 턱을 주억였다.
-저 양심 없는 면상은 주술 따위로 만들어낼 수 없느니라!
녀석은 진짜 귀때기가 맞다며 반가운 미소를 그렸다.
“스승? 마르타도 날 스승이라고 부르던데….”
리메르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다들 나한테 스승이라는 호칭을 쓰는 거야?”
그는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스승님이 마르타를 도와주셨군요.”
리메르의 말을 들어보니, 그가 검계 안쪽에서 마르타의 복수를 도와준 것 같았다.
“나는 등을 떠밀어주었을 뿐이야.”
리메르는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다며 손을 저었다.
“다리를 움직이고, 칼을 휘두른 건 마르타지.”
그는 마르타가 자랑스러운 검사가 되었다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동의합니다.”
라온은 끝내 목표를 이뤄낸 마르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고! 왜 날 스승으로 부르냐고!”
리메르는 궁금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달리 부를 말이 없잖아요. 이제 대주도 아니고, 부대주도 아니니까.”
라온이 리메르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옛날처럼 교관이라고 부르기에는 정이 없으니, 스승님이 맞죠.”
사실 다르게 부를 말도 있었지만, 리메르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호칭은 스승이었다.
“스승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게으름뱅이, 도박쟁이, 빚쟁이, 잠탱이라고 불러도 되는데요.”
라온이 고르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그냥 스승으로 하자.”
리메르는 뭐 하나 좋은 게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마주 보고 대화를 하니, 5 연무장에서 함께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죽었구나.”
리메르는 그래서 대주로도, 부대주로도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죠….”
라온이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헌데 진혼검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던 겁니까?”
우울해지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그동안 궁금했던 부분을 물어보았다.
“모르겠는데?”
리메르가 그걸 자기한테 왜 묻느냐는 듯 눈을 끔벅였다.
“예?”
“얘네들이 날 끌어당긴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스스로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잘 몰라.”
그는 본인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참 스승님다운 답이네요.”
라온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듣지 못했어도 즐거웠다.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것을 많이 봤어.”
리메르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네가 초월에 올라 내 복수를 해주었을 때도, 흑탑을 무너뜨렸을 때도, 타천의 영혼을 갈라버렸을 때도 그리고 오늘 백혈교주의 영혼을 찢어발겼을 때도 나는 계속
너희들의 곁에 있었어.”
그는 그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고 말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만 그런 대단한 활약들보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수련하고, 함께 잠을 자는.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리메르는 광풍전을 지켜보고 있던 것만으로도 좋았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결국 농땡이를 피우셨다는 거네요.”
라온은 계속 함께했는데, 왜 나타나지 않았냐고 말하며 옅게 웃었다.
“미안하다. 내가 잠이 좀 많잖아.”
리메르는 자신의 장난을 받아주며 용서를 구하듯 두 손을 모았다.
“사실 너였기에 광풍대를 맡긴 거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주님이 왔어도 애들을 넘기지 않았어. 역시 내 선택이 옳았네.”
그는 외부에 있는 광풍전 검사들을 한 명씩 살피며 그리움이 깃든 눈빛을 드러냈다.
“스승님….”
라온이 리메르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어?”
리메르는 지그하르트의 가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오른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뇨. 이제는….”
라온은 오늘 있었던 전쟁을 생각하며 흔들림이 가라앉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제 발로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데루스에 대한 복수를 이룬 후 떠나기에는 지그하르트의 사람들에게. 아니, 지그하르트 자체에 너무도 큰 정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주가 되어 글렌처럼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벽이 되고 싶았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거 네 옥좌라고!”
리메르가 시원하게 손뼉을 쳤다. 오랜만에 그의 박수 소리를 듣자,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노인네랑 카룬 같은 질투쟁이는 치워버리고, 빨리 올라가!”
그는 글렌이 들으면 수십 줄기의 벼락을 내리칠 말을 뱉으며 주먹을 흔들었다.
“카룬 님도 많이 달라졌어요. 이제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뭐, 그건 그렇지. 그 녀석이 그렇게 변할 줄은 나도 몰랐어.”
리메르는 사람을 고쳐 쓰는 법이 다 있다며 피식 웃었다.
“아, 잠깐! 너 임마! 돈 있냐고 물어봤는데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그는 돈을 달라고 했던 게 떠오른 듯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돈이야 많죠.”
라온이 리메르의 손바닥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댁 줄 돈이 없는 거지.”
아무리 도박에 미쳤다고 해도 원령들이랑 도박을 해서 속옷까지 잃을 줄은 몰랐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몸에 다시 활력이 도는 기분이었다.
“정말 원령들한테 돈을 잃은 거예요?”
“그렇다니까! 저놈들 타짜야! 타짜! 손에서 패가 막 변한다고!”
리메르는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트럼프 카드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저 모습을 보니, 정말 진혼검 내부에서 도박을 했던 것 같았다.
“하아….”
라온이 이마를 부여잡은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금화를 태워서 녹여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묻어야 하나?”
본래 죽은 사람에게 돈을 보내려면 태우거나, 땅에 묻어야 하기에 어찌해야 할지를 물어보았다.
“엥? 너 그사이에 바보가 됐냐?”
리메르는 미쳤다는 듯 머리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당연히 사람에게 보내야지! 주소도 있다고!”
그는 정신 차리라며 자신의 정수리를 툭 쳤다.
-아오 열받아!
라스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저놈은 죽었다가 살아나도 본왕을 열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느니라!
녀석은 오랜만에 봐도 화나게 만드는 귀때기라는 말과 달리 아주 연한 미소를 그렸다.
“주, 주소요? 영혼한테도 주소가 있어요?”
라온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당연히 실제 주소지! 요거 심검을 쓰더니, 많이 멍청해졌구만!”
“아니, 원령들 이야기를 하다가 실제 사람의 주소가 나오면 당연히 당황하죠!”
라온이 빽 소리를 질렀다. 리메르가 죽은 이후로 처음으로 사람의 말에 당황한 게 된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원령들 중에 마을 밖에 부모님이나, 자식이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 지인을 돕고 싶어 하는 애들도 있고. 그 사람들을 좀 챙겨줬으면 좋겠어.”
리메르는 그 말을 하며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투욱.
그의 손가락에서 연한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자신의 뇌리에 원령들의 사연과 그들이 챙겨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위치와 얼굴들이 떠올랐다.
“해줄 수 있지?”
리메르는 꼭 부탁한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스승님은….”
라온이 리메르의 손이 닿았던 이마를 만지며 부드러운 웃음을 그렸다.
“정말 똑같으시네요.”
자신의 스승은 인간쓰레기처럼 보이는 겉과 달리, 여전히 누구보다도 깊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불안하게 흔들렸던 마음이 편해졌다.
“알겠습니다. 스승님이 남겨 준 돈으로 전부 해결할게요. 지금도 그 보육원에 기부하고 있어요.”
라온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말 하면 민망한데….”
리메르는 본인의 비밀 금고가 떠오른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은 기부를 뿌듯하게 여기고, 도박을 민망하게 생각하는데요?”
라온이 반대로 행동하는 리메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잖아!”
“그건 또 그렇네요. 망할 엘프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가벼운 농담을 하는 것만으로 피로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음?”
리메르가 다른 말을 하려다가 점점 흐려지는 원령들을 보며 눈썹을 내렸다.
“아무래도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그는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며 입맛을 다셨다.
“원령들은….”
라온이 흐릿해지는 원령들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겠죠?”
“아니.”
리메르가 웃음기를 지운 채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억울하게 죽었다고 해도 이 녀석들은 세계의 근원을 무시하고, 이 땅에 남았어. 딱 거기서 멈췄다면 모르겠지만, 결국 복수까지 이뤄냈으니, 좋은 곳에 갈 수는 없어.”
그는 소멸만이 남았다며 탁한 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솔직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귀로 들으니 가슴이 아려왔다. 자신과 진혼검의 여정은 정말 여기가 끝인 것 같았다.
“그래서….”
리메르가 자신에게 한 발 다가왔다.
“이 녀석들이 네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단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원령들이 백혈교주를 노렸을 때처럼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후우우우웅!
다만 원령들은 백혈교주를 씹어먹을 때와 달리 이빨을 세우지 않은 채 자신의 영혼에 다가와 본인들이 지닌 순수한 기운들을 남겨주었다.
“자, 잠깐만요! 제게 이 힘을 남겨주면 저 녀석들은….”
라온이 떨리는 눈동자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들이 가져가도 의미 없는 힘이야. 전우들의 선물이니, 받아주는 게 예의다.”
리메르는 고마운 마음만 있다면 된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전우….”
라온은 점점 강해지는 자신의 영혼과 점점 약해지는 원령들을 보며 입술을 깊게 씹었다.
후우우우욱!
원령들은 본인들이 지니고 있던 순수한 기운과 영혼을 자신에게 넘겨준 후 다시 리메르의 뒤로 돌아갔다.
그들은 처음 진혼검에 들어갔을 때처럼 자주빛 기류를 두르고 있었다.
[원령들의 진심 어린 감사를 받았습니다.] [특성 <심검(령)>이 특성 <심검>으로 진화합니다.]라온은 이제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심검을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을 느끼며 원령들에게 지그하르트의 검례를 취했다.
“고맙다.”
원령들이 자신에게 진심을 보여주었듯이 자신 역시 원령들에게 진심을 드러냈다.
후우우우웅!
원령들은 본인들이 더 감사하다는 마지막 목소리를 보낸 후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리메르가 원령들처럼 흐릿해지는 몸을 보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스승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온이 리메르의 손을 붙잡았다.
“나도 원령들과 함께하며 영혼이 탁해졌기에 바로 세계수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리메르는 다른 엘프들처럼 자연에 녹아내기는 힘들 거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바람이 되어 세상을 떠돌며 영혼이 정화된다면 한 번 찾아가 봐야지. 정령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래도 자신을 계속 지켜보겠다며 잔잔히 손을 흔들었다.
“스승님….”
라온은 리메르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로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마르타의 복수도 이뤄주고 싶었고, 루난이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모습도 보고 싶었고, 버렌이 제 아비를 때려눕히는 것도 보고 싶었지만, 내가 가장 기대했던 건 네가 지그하르트의 옥좌에 오르는 모습이다. 꼭 지켜보고 있으마.”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가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손을 풀어냈다.
“이제는 작은 왕이라 부를 수도 없겠구나.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왕이 되거라.”
리메르는 그게 마지막 부탁이라고 말한 후 녹색 바람이 되어 하늘로 떠올랐다.
“광풍전 아이들에게도 본인이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라고 전해줘. 참으면 병 되니까.”
그는 한 명씩 찾아가서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는 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 마지막으로 셰릴한테 나 잊지 말고, 평생 기억하라고 전해! 무조건 혼자 살라고 해!”
리메르는 셰릴에게 꼭 전하라고 외친 후 원령들이 남긴 보랏빛 안개와 함께 북쪽으로 사라졌다.
-저, 저거 노처녀로 살라는 말이잖아!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가는 길에 저주를 걸다니! 정말 미친놈이니라!
녀석은 진정한 또라이라며 고개를 떨었다.
‘그게 아니야.’
라온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셰릴 님은 스승님의 말을 듣지 않으니, 반대로 본인을 잊고 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뜻이야.’
리메르는 셰릴이 본인을 잊어버리고,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꼭….”
라온이 리메르가 사라진 하늘을 보며 눈가에 맺힌 투명한 연녹색 물방울을 훔쳤다.
“꼭 와 주셔야 합니다.”
리메르가 기대하는 순간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제천검을 잡았다.
*
*
*
“…괜찮아?”
루난은 라온의 어깨를 잡은 채 동그랗게 눈을 떴다.
“진혼검의 자루에서 보라색 섬광이 터지더니, 전주님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버렌은 눈을 뜨고 기절한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응. 괜찮아.”
라온이 발밑에 떨어져 있는 목륜검을 주우며 힘이 빠진 웃음을 흘렸다.
“너희들에게 할 말이….”
“라온!”
마르타가 데니어를 살피다가 자신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나 그 게으름뱅이 엘프를 봤어! 네가 보낸 심검에서….”
“나도 만났어.”
라온이 다 알고 있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 게으름뱅이 엘프? 설마….”
“설마가 아니지! 게으른 엘프는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스승님을 본 거야?”
“어디에서, 어떻게!”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광풍전의 검사들이 전부 자신과 마르타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내가 먼저 말할게. 내 검계 속에서….”
마르타는 본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먼저 말해주었다.
“자, 잠깐. 그럼 나찰녀는 이제 검을 잡지 못하는 거야?”
루난은 마르타가 검사가 아니게 된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그래. 내 영혼에 제약이 걸려 있어. 내가 잡고 싶어도 아마 검술을 쓸 수 없을 거야.”
마르타는 피의 맹약이 본인의 영혼을 휘감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아니. 허….”
버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난 괜찮아. 덕분에 복수를 끝낼 수 있었으니까.”
마르타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흐윽!”
“단주님….”
“마르타….”
광풍전 검사들은 마르타의 의지를 느낀 듯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 뒤는 내가 말할게. 진혼검의 자루가 부서지면서….”
라온은 무거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리메르와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원령과 도박? 그 엘프는 여전하네.”
버렌은 리메르의 한심한 표정이 떠오른 듯 피식 웃었다.
“응. 그대로 바보야….”
루난은 아주 작게 입매를 올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스승님이 가르칠 때가 참 편했는데….”
크레인은 지나고 보니 리메르의 소중함을 알겠다며 눈을 내리감았다.
“최소한 죽이려고 하지는 않으셨으니까. 여긴 지옥이야….”
도리안이 훈련의 격이 다르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지옥 같은 전주님의 훈련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거다.”
마크 괴튼은 심검을 마주한 덕분에 백혈교주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었다며 도에 손을 얹었다.
“그건 그렇지.”
마르타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훈련이 아니었다면 나도 진즉에 죽었을 거야.”
그녀는 힘든 훈련을 겪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며 가늘게 웃었다.
“거기다… 아!”
마르타가 옆에서 들린 신음에 다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정신이 든 거야?”
그녀는 쓰러져 있던 데니어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마, 마르타….”
데니어가 말라붙은 듯한 목소리로 마르타의 이름을 읊조렸다.
“괘, 괜찮아?”
마르타 데니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절실함이 흐르는 것을 보니, 지금도 데니어를 아버지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데니어는 꺼끌거리는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말하지 마! 조금만 기다리면 의료대가 올 거라고!”
마르타는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외치며 데니어가 움직일 수 없도록 어깨를 붙잡았다.
“나, 나는 거짓된 곳에서 태어났지만, 네 덕분에 마지막에나마 진실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데니어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정말 고맙다.”
그는 하얗게 빛나는 손가락으로 마르타의 이마를 툭 쳤다.
“혈기?”
루난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아니야.”
라온이 팔을 들어서 루난을 막았다. 저건 리메르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상대에게 본인의 기억을 전하는 기예였다.
“아, 아아….”
마르타는 데니어의 기억을 읽은 듯 멍하니 앉아 있다가 헉 소리와 함께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 당신은 어떻게 그런….”
그녀의 눈가에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물기가 차올랐다.
“네 덕분에 나는 사람으로 죽을 수 있게 되었으니….”
데니어는 스스로 사람이라 말한 것을 증명하듯 다정한 아버지의 미소를 그렸다.
“네게 남은 업보는 내가 가져가마.”
그는 본신의 힘이 돌아온 듯 거칠게 손을 뻗어 마르타의 손목을 잡았다.
우우우우웅!
마르타의 영혼을 휘감고 있는 맹약의 핏물들이 데니어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놔! 놓으라고!”
마르타가 악을 지르며 데니어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죽기 전에 피어나는 회광반조의 활력을 모두 사용하는 것 같았다.
‘맹약이 저주가 되었군.’
약속을 지키는 마르타와 달리 그녀의 맹약을 본인의 영혼에 옮기려는 데니어는 지독한 고통을 받게 된다. 아마 죽어서도 저 고통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커헉….”
데니어는 참기 힘든 고통을 느낀 듯 연달아 피를 토했지만, 끝까지 마르타의 손목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굳은 의지가 붉은 눈동자 위로 불길처럼 타올랐다.
찌지지직!
결국 데니어는 마르타의 영혼을 옥죄이던 피의 맹약을 몇 배나 부풀려서 본인의 영혼으로 끌고 왔다.
“대, 대체 왜….”
“네가 내 삶의 빛이었단다.”
데니어가 떨리는 손을 들어 마르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내리감았다. 물기에 젖은 손이 바위처럼 무겁게 땅을 쳤다.
“이, 일어나….”
마르타가 데니어의 소매를 말아쥔 채 턱을 떨었다.
“일어나라고! 나한테 사정을 말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 따위 말고, 당신의 입으로 말하라고!”
그녀가 피가 흐르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데니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