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36)
제236화
도괴가 지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손에 든 금화 자루를 단상 위에 올려놓고 거친 숨을 뱉었다.
“네가 저 멍청이에게 받아야 할 이자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금화 자루를 안쪽으로 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음.”
라온이 뒤에 자빠져서 헐떡이는 리메르를 보았다.
두 사람은 당연히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늘 처음으로 온 도괴에게 리메르가 한발 양보한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옅게 웃으며 금화 주머니를 도로 밀었다.
“말씀했던 대로 이건 광풍단 운영 자금으로 써주십시오.”
라온은 도괴가 가져온 금화를 전부 넘겨주었다.
“나중에 딴소리 하진 않겠지?”
“물론이죠.”
도괴는 돈을 불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에게 맡겨둔다면 저 돈은 몇 배로 불어 광풍단을 풍족하게 만들 것이다.
“첫날부터 아주 지랄맞군.”
도괴가 이를 바득 갈고서 허리를 폈다.
“저 멍청이 엘프놈. 약해진 주제에 거머리처럼 끈길기기는 더 해졌어.”
“그건 영감도 마찬가지야. 다 늙어 빠져서 검도 놓은 주제에 왜 더 세졌지?”
리메르가 몸을 일으키며 피식 웃었다. 찰나의 순간에 호흡이 가라앉은 걸 보니 역시 둘 다 여유를 한참 남겨둔 상태였다.
두 사람은 원치 않은 싸움을 벌였어도 그리 싫어하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원하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네 지시대로 움직여줬으니, 난 이만 가보겠다. 이 거지 같은 곳을 바꾸려면 할 일이 많….”
“오늘 일과는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뭐?”
도괴의 턱이 떨린다. 도박을 안 할 때의 표정은 꽤 다양했다.
“다른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급선무는 광풍단의 무력을 끌어 올리는 일입니다.”
라온은 훈련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는 광풍단원을 가리켰다.
“이제 훈련이 시작되는데 교관님이 어딜 가시려구요.”
“이 늙은이를 아주 뼛속까지 우려먹을 생각이로구나.”
“어렵게 얻은 귀인인데, 잘 써먹어야죠.”
“후우.”
도괴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단상에 등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빨리하라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도괴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광풍단원 앞에 섰다.
“교관님의 무력은 봤을 터. 처음으로 너희의 실력을 보이는 자리이니 최선을 다하도록!”
“알겠습니다!”
검사들은 리메르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무력을 보여 준 도괴에게 감탄했기에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라온은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았다.
“정규 훈련을 시작한다.”
* * *
라온은 개인 검술과 보법, 검진 운용과 상황파악 훈련까지 끝낸 뒤 단상으로 다가갔다.
도괴는 처음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단상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리메르는 단상 위에 누워 골골댔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다 네놈 또래겠지?”
“그렇습니다.”
“나름 봐줄 만하구나. 특히 저 셋이 괜찮아.”
도괴는 버렌과 루난, 마르타를 차례로 턱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르익으면 대륙 전체에 이름을 떨칠 만한 그릇이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한눈에 조장들의 실력을 파악했다.
“다른 놈들도 나쁘지 않아. 지그하르트라고 해도 나이에 비해 뛰어난 무력과 경험을 가졌어.”
그는 나머지 검사들도 괜찮다며 의외로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저 녀석들을 가르치면 심심하지는 않을 듯싶구나. 그런데….”
도괴가 라온을 위아래로 훑으며 눈매를 찡그렸다.
“네놈은 대체 어찌 된 것이냐.”
“예?”
“저 녀석들과 같이 컸는데 왜 너 혼자 그런 괴물이 된 거지?”
“전 딱히 괴물이 아닙….”
“열여덟에 마스터 하급에 오른 미친놈이 괴물이 아니면 대체 누가 괴물이냐!”
그는 웃기지 말라는 듯 크게 손을 저었다.
“그야 내 덕분이지.”
단상 위에서 뒹굴던 리메르가 고개를 쏙 들었다. 돈을 뺏겼기 때문일까. 얼굴이 홀쭉해졌다.
“이 몸이 잘 가르쳤으니, 라온이 저런 무식한 괴물이 된 거라고.”
“웃기지 마라. 네놈 같은 거렁뱅이가 저런 괴물을 어떻게 키워!”
“아, 진짜라니까! 그치 라온?”
“틀린 말은 아닙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과 오러에 이어 마음가짐까지. 도박만 제외하면 리메르는 분명 훌륭한 스승이었다.
“아까는 악귀처럼 굴더니, 이젠 예의를 챙기는군. 어떤 게 네놈의 진짜 모습인지 모르겠다.”
“예의는 항상 챙겼습니다.”
“흥. 예의를 스튜 그릇에 말아 먹어놓고선!”
도괴가 팔짱을 풀며 코웃음을 쳤다.
“볼 건 봤으니, 네놈들에게 필요한 훈련을 생각해보지.”
그가 떠나려는 듯 단상에서 몸을 떼고, 목을 풀었다.
“제 검술은 아직 안 보셨는데요.”
“네놈의 검은 어제 충분히 봤다. 네게 가르칠 건 없으니, 알아서 해라.”
“그럼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라온이 떠나려는 도괴의 앞을 막고, 진중한 눈빛을 빛냈다.
“말해봐라.”
“환검이 뭡니까?”
“음….”
도괴가 눈을 내리감은 채 이마를 찌푸렸다.
“후우, 넌 질문도 참 지랄 맞게 하는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환검을 알려달라던가, 환검을 잘 펼치는 방법 혹은 환검에 중요한 요소를 물어봤다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 녀석은 질문으로 이쪽의 삶을 관통했다.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는 적에게 보여주는 환상이라 생각한다.”
“환상?”
“아무리 화려하고 멋들어진 검술이라고 해도 목적은 결국 적의 목숨. 적의 시선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보여준 뒤 목을 베는 게 바로 환검이다.”
“적의 시선….”
“처음 환검을 익히는 자들. 아니, 환검을 오랫동안 수련한 자들도 착각하는 게 있다.”
도괴가 검을 뽑았다. 준비 자세조차 없이 뻗어 나온 칼날이 둥글게 회전하며 아름다운 톱니의 꽃잎을 피워냈다.
“이렇게.”
그는 검을 회수하며 턱을 옆으로 틀었다.
“내가 아니라, 적의 입장에서 내 검술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환검의 요체다.”
“음.”
라온이 아직 허공에 남아 있는 오러 잔재를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머리가 깨진 기분이다. 내가 아니라 적. 적에게 어떻게, 어떤 방식의, 어떤 의도의 환상을 보여주는지를 생각하는 게 바로 최고의 환검을 펼칠 수 있는 진의였다.
‘이건 다른 검술에도 적용할 수 있겠는데.’
환검만이 아니라, 쾌검을 비롯한 다른 검술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도괴의 어조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는 그가 수십 년에 걸쳐 습득한 환검의 묘리가 깃들어 있었다.
“거울을 쓰는 게 좋겠군요.”
“그래. 환검을 익힐 때 가장 필요한 물건은 검보다도 거울이니라.”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라온이 도괴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진심을 담아 조언해줄 줄은 몰랐기에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됐다. 별것도 아니니까.”
“아뇨.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다시 한번 머리를 꾸벅였다.
“음….”
진심을 담은 인사가 마음에 찼는지 퉁명스러웠던 도괴의 반응이 살짝 녹았다.
“저도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만약에 총관님이 제게 술이나 도박을 이기신다면 바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이냐?”
“그럼요.”
라온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당장….”
“어제 끝났는데 바로 하는 건 좀 아니죠. 올해는 지났고, 내년에 도전하십시오.”
“끄응!”
그는 올리려던 손을 다시 내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허어.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오며 탄식을 흘렸다.
-저 영감이 네게 도박과 술로 이길 가능성은 없지. 희망이라는 먹이를 줘서 저 영감탱이가 제 역할을 훌륭히 완수하도록 만든 것이군. 지독하고도 지독한 놈이니라.
녀석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본왕이 배우고 싶을 정도다. 강의할 생각 없느냐?
‘아니야.’
라온은 피식 웃고서 도괴 앞에 한 발 더 다가갔다.
“하나 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총관님의 기대를 못 채운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떠나셔도 됩니다.”
“기대를 못 채운다?”
“예.”
“네 말대로라면 난 당장 떠나도 괜찮다는 건데?”
“물론 그렇죠. 하지만 안 그러실 거라는 걸 압니다.”
라온이 옅게 웃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지.’
도괴는 도박에 속임수를 쓰고, 상대를 조롱하지만 패했을 때 심한 페널티를 주지는 않는다.
옷을 벗긴 채 쫓아낼 뿐이고, 기회도 계속 내어준다. 자신과 싸울 때도 생명에 위협을 가하거나, 치명적인 곳은 절대 공격하지 않았다. 본인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온 걸 보면 그는 인간적으로 사귈 만한 사람이었다.
“크으.”
도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온이 빙긋 웃고서 훈련을 끝내기 위해 광풍단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오!
라스가 펄떡이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이번엔 마음을 빼앗는 작업이로구나! 역시 네놈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 어울리느니라! 본왕에게….
‘진짜 아니라고.’
헛웃음을 흘리고 라스를 밀어냈다.
“저놈.”
도괴는 라온의 뒷모습을 보며 탁한 숨을 뱉어냈다.
“저놈 대체 뭐냐. 어떤 모습이 진짜야.”
도박장에서 보여준 노련한 도박꾼의 모습과 이곳에서 술수를 부린 악마 같은 모습 그리고 조금 전에 보여준 예의 바르고 정중한 모습은 전부 다른 사람 같았다.
어떤 게 진짜 라온 지그하르트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전부 라온이야.”
리메르는 익숙한 듯 손을 저었다.
“저 녀석은 본래 저렇지. 말하는 걸 보니, 영감도 마음에 들었나 본데?”
그는 킬킬 웃으며 도괴의 어깨를 툭 쳤다.
“흥! 저런 어린놈이 뭘 하든 상관없다.”
도괴는 짜증이 돋아난 표정으로 단상에서 등을 뗐다.
“여기 있으니 속이 답답해지는군. 이만 가겠다.”
“잠깐.”
떠나려고 할 때 리메르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나랑 갈 곳이 있어.”
“갈 곳?”
“가주님이 영감을 부르시더라고.”
리메르가 멀리 보이는 가주전을 가리켰다.
“네놈이 말한 거냐?”
“내가 귀찮게 그런 짓을 왜 해. 영감이 복귀했는데 가주님이 모르시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음, 인사를 드리긴 해야겠지.”
도괴는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그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리메르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며 히죽였다.
“열 좀 받았을지도 모르니까.”
* * *
“가주님을 뵙습니다.”
도괴가 글렌 지그하르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글렌이 괴고 있던 손을 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은 일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도괴가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좋은 일?”
“예전보다 훨씬 생기 넘쳐 보이십니다.”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며 뛰쳐나간 자네만 하겠는가.”
글렌이 차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옛 생각이 나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더니, 왜 다시 온 거지?”
“후우….”
도괴가 깊은 한숨을 흘리고 글렌을 올려보았다.
“가주님이 손자를 아주 자알 두신 덕분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라온 지그하르트. 그 맹랑한 꼬맹이가….”
그는 라온에게 당했던 울분을 풀듯 글렌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리메르는 하소연하는 도괴와 그의 말을 경청하는 글렌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괴는 가주님이 왜 저 말을 들어주는 건지 모르겠지.’
글렌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전부 알고 있다. 그는 도괴의 사정이 궁금한 게 아니라, 라온의 활약상을 도괴의 입에서 듣고 싶을 뿐이다.
‘참 대단한 손주 사랑이야.’
저리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내치는 걸 보면 글렌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원치 않게 별관의 총관이 되었습니다.”
민망한지 도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도박을 잘하던가?”
글렌이 입매를 살짝 끌어 올리며 물었다.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입니다. 대륙에 이름을 떨친 도박꾼과 붙어도 절대 지지 않을 겁니다.”
도괴는 라온과 도박을 할 때 절망을 느꼈다고 중얼거렸다.
“그럼 저놈에게 배웠을 리는 없겠군.”
글렌이 뒤에 멀뚱히 선 리메르를 가리켰다.
“청출어람이라는 게 있지만, 저 멍청이는 호구 중에 호구. 라온과는 결 자체가 다릅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하! 제가 말했죠!”
리메르가 앞으로 걸어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호구라니까 기분이 좀 더럽긴 한데, 정말 나 아니라고! 라온에게 도박 가르친 건 제가 아니라구요!”
“크음….”
“사과하십시오! 그걸로 몇 번을 팼는지 아직도 뼈가 쑤십니다!”
라온에게 도박을 가르쳤다는 오해로 인해 벼락을 세 번이나 맞았다. 증인이 나타났으니,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사과해! 사과해! 사과해!”
리메르는 항쟁을 하듯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미안하다. 내가 오해를 했군.”
“말로만! 말로만! 말로만!”
이 기회에 다른 걸 뽑아내기 위해 더 크게 소리를 높였다. 목적은 당연히 금화였다.
“입에 발린 소리는 됐으니, 제대로 보상….”
콰르르릉!
리메르가 돈을 요구하기 위해 손을 뻗을 때 허공에 한 줄기 벼락이 일어나 그에게 떨어졌다.
“끄아아악!”
말 그대로 찰나에 발동된 벼락에 리메르는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비명을 지르며 넘어갔다.
“아, 악마 같은….”
리메르가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랑 손자가 똑같다니까.’
라온이 조금 더 뻔뻔해지면 글렌처럼 될 것 같다. 괜히 조손 관계가 아닌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해리안.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글렌은 리메르를 보지도 않고 해리안에게 턱짓했다. 평소와 다른 불편함으로 가득 찬 기세가 파도가 되어 알현실 전체를 덮쳤다.
“마, 말씀하십시오.”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에 도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라온과 마신 술은 맛있었느냐.”
“예?”
“라온과 마주하며 먹은 술이 맛있었냐고 물었다.”
“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도괴의 눈동자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흐읍.”
리메르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손자의 첫 술자리를 뺏겨서 화나셨군.’
글렌의 기세가 불편해진 이유는 라온의 첫 술자리를 도괴가 가져갔기 때문이다. 기대하고 있던 손주의 첫 술자리를 옛 부하에게 빼앗겨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음,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도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았다?”
글렌의 목소리에 분노와 같은 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본래 제가 술 마시는 속도를 따라오는 녀석이 없는데, 그 아이는 오히려 앞서면서 절 도발했죠.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신기하면서도,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사람과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그 녀석에게 당한 입장에서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손주를 정말 잘 두셨습니다.”
아까와 달리 진심이 깃든 칭찬이다. 도괴가 갑작스럽게 라온을 추켜세우자, 글렌의 막대한 기세가 촛불처럼 훅 꺼졌다.
“처음엔 주제를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젊은 나이임에도 산전수전 다 겪고 산의 주인을 노리는 대호처럼 보입니다. 대륙을 떠돌며 많은 재능을 마주했지만, 진짜는 이곳에 있었더군요.”
도괴가 옅은 미소를 흘리며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전 주인이신 가주님께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한동안은 어린 주인을 모셔야 할 듯합니다. 제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깰 순 없으니까요.”
그가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허….”
리메르가 헛바람을 흘렸다.
‘이렇게 바로 받아들였다고?’
라온이 방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도괴는 진심으로 라온을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정말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옛 생각이라도 난 건가.’
아무래도 도괴는 라온을 보며 모두와 함께 있을 때를 그린 것 같았다.
‘그 녀석은 진짜….’
아마도 마지막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도 좋다는 말이 도괴에게 크게 울렸던 것 같다.
라온이 알 리는 없지만, 그 말은 예전 글렌이 도괴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크음.”
고개를 들어 글렌을 보았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고 있었다.
리메르가 피식 웃었다.
‘이럴 땐 단순하시다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자의 첫 술자리를 빼앗겨 분노했다가 진심으로 라온을 인정을 해주니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팔불출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그럼 자네는 지그하르트에 돌아온 게 아니라….”
“예. 전 별관 소속입니다. 그쪽의 말을 들어야 하겠죠.”
도괴는 담담하게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라온의 밑에 들어갔음을 말했다.
“그렇군.”
글렌의 입매와 눈동자가 파도처럼 크게 출렁였다. 더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자네를 보내준 건 나였으니, 어쩔 수 없겠지.”
글렌이 눈매를 찡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입을 손으로 가렸다.
“감사합니다.”
도괴는 아직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리메르.”
글렌은 한껏 기분이 고조된 눈빛으로 리메르를 불렀다.
“네게도 할 말이 있다.”
“감사합니다. 주신 보상금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저었다.
“돈이 아니라, 광풍단의 임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