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256)
제256화
라온은 강대한 요기와 냉기가 터져나간 기류 사이를 보았다. 4사도의 좌측 상반신은 짐승에게 먹힌 것처럼 거칠게 뜯겨나가 있었다.
푸카아악!
가슴과 어깨를 톱으로 도려낸 듯한 상처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의 회색 핏물이 쏟아졌다.
“큭….”
4사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그의 호흡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후우….”
라온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호흡을 멈춘 시간은 짧았지만, 힘을 단번에 터트렸기에 몸이 나른했다.
‘오랜만이라 나도 긴장했나 보네.’
전생에선 밥 먹듯이 했던 암살이지만, 지금 하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다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암살자보다 검사에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였으니까.
라온은 회색 피가 묻은 진혼검을 내려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처음이군.’
데루스 로베르트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적을 암살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녹전귀가 있긴 하지만 실패했으니, 예외로 치기로 했다.
-네놈….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와 라온을 노려보았다.
-언제 암살 기술을 배운 것이냐.
예전에 투구 쓴 놈의 목을 베려다가 어깨만 베었을 때는 어설퍼서 웃음도 안 나왔지만 지금 보여준 암살은 다르다.
숙련된 암살자처럼 적이 반응하기 전에 심장을 찌르고 웅크리고 있던 힘을 폭발시켰다. 방어 능력이 뛰어난 마스터를 잡기에 제격인 암살 방법이었다.
-초보가 쓸 방법이 아니었느니라.
이번이 두 번째 암살인 라온이 이런 대담한 공격을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암살 기술을 배운 게 분명했다.
‘당연히 독학이지.’
라온은 진혼검을 잡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잖아. 검술 실력이 오르니, 암살도 되는 거지.’
라스에게 전생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매일 느끼지만, 네놈은 정말 미친 놈이니라.
‘칭찬인가?’
-당연히 욕이니라! 그리고….
‘그리고?’
-흥. 아니니라.
라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무언가를 아는 듯 은근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이쪽도 파악하고 있었다.
“너….”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모렐이 핏물이 흘러내리는 목을 잡은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대, 대체 언제, 어떻게….”
당황했는지 질문이 이상했다.
“많이 위험해 보이길래 끼어들었습니다. 괜한 참견은 아니었겠죠?”
“후우, 물론이다.”
모렐이 피곤한 눈빛으로 피 내음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본인만 구해준 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발카르 모두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 같았다.
“고맙다?”
라온이 턱을 모로 틀었다.
“어?”
“고맙다가 맞나요?”
“고, 고맙습니다… 아니! 존댓말은 포르반 시에서 끝난 거잖아!”
“아, 그러네요.”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오랜만에 보아도 정말….”
“이거 바르세요.”
라온은 피식 웃고서 상처약을 던졌다. 모렐은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싸가지 왕녀처럼 나쁜 이미지가 아니었다.
후우우우!
모렐이 상처약을 받자마자 요기와 냉기가 일으킨 오러의 폭풍이 가시고, 바닥에 쓰러진 4사도의 모습이 모두에게 드러났다.
“으아아아악!”
“사, 사도시여!”
“이게 무슨!”
“마, 말도 안 돼!”
4사도가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자, 백혈교도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라, 라온 님?”
“라온 지그하르트!”
“저자가 왜 여길….”
“자, 잠깐 지금 저 사람이 사도를 쓰러뜨린 거야?”
반면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와 기사들은 사도 앞에 서 있는 라온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으헉….”
특히나 제이나 왕녀는 대주교에게 당할 때보다 더 놀라서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모두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저놈 7사도님을 쓰러뜨렸던 놈이다….”
“대, 대체 언제 온 거지?”
백혈교는 라온의 정체를 파악하고 눈에 시뻘건 불길을 일으켰다. 그들은 7사도에 이어 4사도를 쓰러뜨린 것에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었다.
“해, 해치웠나?”
뒤늦게 공동에 들어온 도리안이 쓰러진 4사도를 보고 외쳤다.
‘하여튼 저 녀석은….’
-저 멍청한 놈!
[허허. 이것 참….]
적을 쓰러뜨리고 가장 해서는 안 될 말 1위에 라온과 라스 그리고 로엔그린이 동시에 도리안을 노려보았다.
“해치우셨군요! 역시 부단주님이십니다!”
도리안은 또 한 번 해선 안 될 말을 외치며 히죽였다.
“놈들을 죽여! 모조리 죽여라! 절대 살려 보내지마!”
대주교가 지팡이로 혈기의 창을 뿌리며 소리쳤다. 이곳저곳에 퍼져 있던 백혈교도가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의미 없을 텐데.”
라온이 백혈교가 아니라, 쓰러진 4사도에게 희미한 시선을 보내며 진혼검을 고쳐잡았다.
‘너희들이 하는 거 모두.’
* * *
도리안의 저주대로 4사도는 죽지 않고, 숨죽인 채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죽을 뻔했어.’
판단이 조금만 늦었어도 정말 죽었을 거야.
붉은 칼날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순간 혈기로 심장을 이동시킨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왼쪽 어깨와 상반신 날아가고, 죽기 직전일 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괜찮다. 저놈만 죽인다면 모든 게 해결되니까.
고오오오.
4사도는 혀를 씹어서 고통을 참았다. 숨이 끊어진 시체에 남은 기운이 흩어지듯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아주 천천히 혈기를 운용했다.
‘똑같이 죽여주마.’
자신이 뒤에서 기습을 당했듯이 라온의 뒤에서 놈의 심장을 터트려버릴 것이다. 장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참고 때를 기다렸다.
“놈을 죽여라!”
대주교는 복수를 외치며 혈기를 뿌리고, 공격을 지시했다.
혈기가 요동치고, 교도들이 라온이라는 놈에게 달려드는 게 느껴졌다.
터억!
라온의 발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서 대주교에게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4사도가 모아둔 혈기를 폭발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단숨에 라온의 심장을 찌르기 위해 장도를 뒤로 젖혔다. 그런데….
“어?”
이놈이 왜 날 보고 있지?
대주교에게 시선이 돌아갔어야 할 라온 지그하르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죽은 척은 벌써 끝이야?”
나지막한 말과 함께 솟구치는 입꼬리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 이놈 다 알고 있었… 커헉!’
젖혀둔 장도를 내지르기 전에 라온이 들고 있던 단검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감각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왜….”
4사도가 하나 남은 손으로 목에서 그어지는 붉은 실선을 잡으며 턱을 떨었다.
“왜 알면서….”
라온은 뒤로 넘어가는 4사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짐승은 사냥할 때 가장 빈틈이 많은 법이니까.”
“끄윽….”
4사도가 사용하지 못한 혈기를 휘돌려 재생의 공능을 일으켰다. 모든 힘을 재생에만 사용하고 있음에도 뜯겨나간 살점과 목의 검흔은 회복되지 않았다.
“뭐, 뭐야. 왜 재생이….”
자신의 백혼의 오러라면 강기로 인한 상처도 재생할 수 있건만, 이상하게도 저 단검이 만들어낸 상처는 재생이 되지 않았다. 혈기와 혈기 사이를 가닥가닥 끊어놓고 있었다.
“재생이 잘 안 되지?”
“그, 그 검은 대체….”
“이 녀석은 너희를 죽이기 위해 숨 쉬고 있다. 혈기 따위로는 못 막아.”
“자, 잠… 끄헉!”
라온이 진혼검을 역수로 잡았다. 분노의 마안으로 우측으로 치우친 사도의 심장을 확인한 뒤 그대로 내리찍었다.
푸카아악!
진혼검의 검극에 모여 있던 요기가 4사도의 심장에서 타오르며 회색 핏물과 심장에 가득 찬 혈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흐어….”
4사도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심장에 모아둔 백혼의 오러가 모조리 빨려 나가 백혈교주가 와도 살릴 수 없었다.
“와아, 살아 있었네….”
도리안이 맹한 눈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해치웠냐’ 같은 말은 하는 게 아니야. 저주라고 저주.”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 사도시여!”
“사도님을 구해라!”
“마, 막아!”
“으아아아아!”
백혈교도들은 사도가 진정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모든 혈기를 일으키며 몸을 던졌다.
스르릉!
라온이 진혼검을 납검했다. 탁해진 요기와 글래시아의 기운을 불의 고리로 정화한 뒤 다시 진혼검을 뽑았다.
찌이이이잉!
붉은 칼날 위로 피어나는 혈우의 선율이 공동을 뒤덮었다.
“컥!”
“끄억….”
“아윽….”
백혈교도들은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유일하게 서 있는 건 대주교 한 명뿐이었다.
반면 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혈우는 말 그대로 백혈교도에게만 치명적인 검술이었다.
“그, 그 검은….”
대주교는 지팡이를 쥔 손을 떨며 입을 열었다. 가늘게 드러난 입안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너희만을 위한 무학이지.”
라온이 진혼검을 휘돌리며 대주교를 향해 다가갔다.
“오, 오지 마!”
대주교가 뒷걸음질을 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지팡이에서 허연 혈기의 칼날이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
‘대중없이 떨어지는군.’
혈기의 칼날은 목표를 노리는 게 아니라, 비처럼 한 공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피하거나 쳐내기 쉬웠다.
후우우우!
라온의 혈기의 방향을 읽어낸 뒤 땅을 박찼다.
“멍청한 놈!”
대주교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혈기의 방향을 바꿨다. 부채꼴로 퍼져나가던 혈기의 칼날들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모여들어 전신의 급소를 노렸다.
‘방향을 바꿀 수 있었군.’
공간 자체를 덮는 혈기 폭풍의 궤도를 찰나의 순간에 바꾸는 걸 보면 포르반 시에서 만났던 대주교보다 강한 것 같았다.
다만.
‘그래서 어쩌라고.’
라온이 차게 웃으며 만화공을 일으켰다. 진혼검의 칼날이 불에 달군 듯 뻘게지며 화염의 꽃 무리가 치솟았다.
만화공 백화.
화령.
칼끝에서 피어난 염화의 꽃잎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 혈기와 맞부딪쳤다.
콰과과과광!
요기의 힘이 깃든 만화공의 조각들은 대주교의 혈기를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녹여버렸다.
화아아아!
공동에 남은 건 장대한 빛을 뿌리는 화령의 조각뿐이었다.
“다 한 건가?”
라온은 가라앉는 화령 사이를 걸어 대주교 앞에 섰다.
“아….”
대주교는 턱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끝을….”
“죽어라!”
대주교가 물러서다 말고, 앞으로 뛰어든다. 손에 든 지팡이에 남은 혈기를 모조리 담아 심장을 찔러 들어왔다.
“역시.”
라온이 서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야 백혈교지.’
백혈교는 죄를 고하지 않고, 빌지도 않으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본인들만이 정의고, 본인들만이 옳다고 믿는 전형적인 미친놈들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피를 빨고, 살점을 뜯겠지.
라온이 가람보법을 밟았다. 대주교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진혼검으로 심장을 찔렀다. 사도보다는 탁하지만 허연 핏줄기가 바닥을 적셨다.
“끄으윽….”
대주교는 원망이 아니라, 분하다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쓰러졌다.
[진혼검이 막대한 양의 혈기를 흡수했습니다.] [진혼검이 혈기를 정화합니다.]
진혼검에서 강대한 떨림이 일었다.
‘이 정도 혈기를 얻은 건 처음인데.’
사도와 대주교의 혈기를 흡수했기에 이번에 오를 능력치가 어느 정도일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얼마나 오를지 기대되네. 그치?’
-닥치거라! 그건 전부 본왕의 것인데. 크으….
라스는 벌써 걱정이 되는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라온은 진혼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공동은 짙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미, 미쳤어….”
“사도와 대주교를 저리 쉽게 죽이다니….”
“라온 지그하르트. 설화검협이라 불리는 그 천재인가?”
“저, 저건 천재 수준이 아니야. 괴물이다.”
“20살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발카르 왕국, 중소세력의 무인, 그림자 모두가 눈을 부릅뜬 채 경악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라온 홀로 공동에서 가장 강했던 백혈교를 모조리 쓰러뜨린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저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라, 라온 님!”
자티스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구김 없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세력과 세력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상황에 대한 고마움만을 말했다.
“매번 도움을 받으니 정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자티스는 면목이 없다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닙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자티스도 포르반에서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성장해 있었다. 저 정명한 성격만 유지한다면 분명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공동이 울리도록 진각을 밟자, 발카르, 중소세력, 그림자 모두가 몸을 움찔하고서 뒤로 물러섰다.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지그하르트는 로엔그린의 유산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불만이 있으시다면 여기서 끝을 봅시다.”
“으음….”
“끄윽….”
당연하게도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혈교 사도를 단숨에 베어버린 괴물에게 누가 반항하겠는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맞상대할 수 있는 모렐조차 구명의 은을 입었으니,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 그걸 전부 지그하르트가 챙기겠다는 말씀이시오?”
짧은 침묵 끝에 중소세력에서 회색 머리칼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왔다. 익스퍼트 최상급. 이 자가 중소세력의 대표자인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라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너무한 것 아니오? 발카르도….”
“후우!”
모렐이 한숨으로 중년인의 말을 끊었다.
“살라만은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구명의 은을 입었다.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지.”
그는 앞으로 다가와 상처약을 돌려주었다.
“그 말 하나로 퉁치시려는 건 아니겠죠?”
“날 뭘로 보는 것이냐. 너희 단장처럼 추잡하게 살지는 않는다.”
“그리 말씀하시니 믿음이 가네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렐이 인상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돌아간다.”
“자, 잠깐만요!”
제이나 왕녀가 안 된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는 건….”
“왕녀. 지금은….”
“아, 제이나 왕녀님.”
라온이 모렐의 말을 멈추고, 제이나 왕녀에게 다가갔다. 빙긋 웃으며 ‘계약서’라고 입을 벙긋거렸다.
“끼익!”
그제야 특별 계약서에 서명한 게 생각났는지 제이나 왕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
“오랜만?”
“오, 오랜만이네요.”
제이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 제안에 무슨 문제라도?”
“없어요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도 않은 채 코를 훌쩍였다. 부끄러움과 분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음, 이걸로 제가 왕녀님을 구해드린 게 2번째네요. 이거 뭐 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게 아닐지.”
“끄윽….”
“그렇지 않나요? 발카르의 금지옥엽이라는 왕녀님을 두 번이나 구했는데, 선물이든 신패든 하나 줘야….”
“발카르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곳이 아니다. 목숨값에는 목숨값을 갚고, 피 값에는 피 값을 갚는 곳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렐의 말과 시선에 왕녀가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품에 손을 넣은 뒤 금색으로 된 패를 하나 꺼냈다. 제이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기….”
제이나는 중풍이 걸린 환자처럼 손을 떨며 신패를 내밀었다.
“역시 왕녀님은 시원하시네요.”
라온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의 패를 바로 챙겼다.
‘약점을 잡아두길 잘했네.’
이건 왕녀가 아니라, 발카르 국왕에게도 통하겠지.
발카르 국왕이 제이나를 아끼는 건 널리 퍼진 이야기다. 꽤 좋은 보물이 손에 들어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것도 받아라.”
라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때 모렐에게서 붉은색 패가 날아왔다. 육각형에 중앙에 뱀이 그려진 패였다.
“이건….”
“내 것이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쓰도록.”
“감사합니다.”
“거절은 없나?”
“보물을 두고 왜 거절을 합니까?”
“그렇군.”
모렐이 피식 웃고서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왕녀님을 부축하도록.”
“예!”
그의 외침에 여기사들이 제이나를 부축했다. 그는 공동을 나가다 멈춰서 뒤를 돌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지.”
그는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하고서 위로 올라갔다. 자티스도 옅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제이나는 이를 가는 소리만 들려왔고, 이닐드는 아예 모른 척했다.
“우, 우리도 가겠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어떡해서든 보답하겠습니다.”
중소세력의 무인들은 믿고 있던 발카르가 떠나자마자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꾸벅였다.
“고맙다고요?”
“그럼요!”
“은혜를 갚으신다는 거죠?”
“물론입니다!”
“아, 그래 주시면 고맙죠. 도리안!”
“예?”
입구에 서서 발카르가 나가는 걸 보고 있던 도리안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분들 나가신단다. 이름이랑 소속 좀 적어.”
“아, 예!”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책상을 입구 앞에 내려놓고 종이와 펜을 꺼냈다.
“저, 저기 이름은 왜….”
“조금 전에 은혜를 갚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겠죠.”
라온이 중소세력의 무인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웃음 속에 얇지만 차가운 기세가 실려있었다.
꿀꺽!
중소세력의 무인들은 라온의 미소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거 설마….’
‘맞아. 돈이나, 선물을 가져오라는 거야. 아까 발카르처럼….’
‘미, 미친….’
‘설화검협이라며! 협사라며!’
‘그, 그런데 안 가져오면 죽일 기세인데?’
‘그러니까 아까 왜 나서 가지고! 그냥 고맙다고만 했으면 끝났는데!’
무인들은 라온의 의도를 파악하고서 식은땀을 흘렸다.
“가시죠.”
“흐윽….”
“끅!”
라온이 빨리 가라는 듯 턱짓을 하자, 중소세력의 무인들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도리안에게 걸어갔다.
“예! 첫 번째 분! 이름이요!”
도리안은 어느새 백목으로 만든 의자를 꺼내 백목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시체로 가득한 공동에 하얗게 반짝이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게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저는 보라매 길드의 리킬이고….”
“예. 리킬 님. 보라매 길드시고….”
그는 익숙한 듯 이름과 소속을 빠르게 적었다.
라온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남은 세력을 보았다. 데루스 로베르트의 그림자. 전생의 자신과 같은 눈빛을 한 암살자들과 눈을 마주했다.
‘이걸 그립다고 해야 하나?
그림자들의 눈빛을 보자, 옛 생각이 난다. 임무의 성공을 위해 인간을 버리고, 사냥개가 되었던 지옥의 나날이.
그때를 생각하니,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모두 전생의 자신처럼 납치되고, 팔려 와서 세뇌를 당했을 뿐이니까.
‘돌려보내 볼까.’
그림자의 행동 방식은 간단하다. 0.1%라도 성공 가능성이 있다면 목숨이 어떻게 되던 덤벼들고, 가능성이 아예 제로라면 몸을 뺀다. 그들은 몸과 머리에 박힌 감각으로 임무에 가불가를 판단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쩔 거지?”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고, 만화공을 일으켰다. 마스터에 오른 강대한 기파가 끝없이 타올랐다. 천장에서 돌 잔해가 떨어지고, 바닥이 파스스 뭉개지기 시작했다.
“허억!”
“윽!”
“끄으으….”
그 강대한 기세에 그림자들이 모두 몸을 떨었다.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흔들렸다.
타아악!
그림자들은 라온을 이길 가능성이 제로라는 걸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도리안 앞에 줄을 선 중소세력의 무인들을 단숨에 뛰어넘어 통로로 빠져나갔다.
“어어?”
“저, 저들을 그냥 놔주시는 겁니까?”
“암살자들이잖습니까!”
중소세력의 무인들은 암살자들을 놔줄지는 몰랐는지 입을 떡 벌렸다.
“저는 살인마가 아닙니다. 덤비지도 않는 놈들을 죽일 순 없죠.”
라온이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럼 우리처럼 이름이라도 적어야죠!”
“암살자 놈들이 이름을 말하겠습니까? 자결 안 하면 다행이지.”
“끄응….”
“그렇다고 가짜 이름이나 소속을 쓰시진 마세요. 전 기억력이 좋거든요.”
얼굴 다 기억하고 있다고 중얼거리자, 조금 전에 펜을 놓았던 사람들이 다시 도리안에게 달려왔다.
“나, 나 좀 실수했는데!”
“저도요! 실제 제 이름은….”
라온은 피식 웃고서 몸을 돌렸다.
-사악하느니라! 정말로 사악하느니라! 네놈은 다른 차원의 마왕이라도 했던 것이냐!
라스는 감격인지, 경악인지 모를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허허허, 역시 신관님이십니다. 제 준비 따윈 필요도 없었군요.]
로엔그린도 감탄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별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음?”
라온이 말을 멈추고 손에 든 진혼검을 보았다. 혈기를 흡수하느라 조용하던 검신에서 강한 떨림이 일어났다.
우우우웅!
진혼검은 울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이끌었다. 녀석의 안내를 따라가자 4사도의 시체가 보였다.
“혈기는 다 흡수했잖아.”
우우웅!
진혼검은 그게 아니라며 4사도의 손을 가리켰다.
“저건….”
그 방향에는 4사도가 휘두르던 장도가 있었다.
우우우웅!
라온은 장도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장도의 힘도 네 것이 될 수 있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