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367)
제366화
라온은 암시장을 떠나 세피아 상회로 향했다. 상회 소속 상가를 지날 때 상인들의 시선들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사, 살벌하게 쳐다보는데요?”
도리안이 상인들의 눈빛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들 저렇게 보는 거죠?”
“네가 드레이크를 가져왔나 확인하는 거지.”
아디스 세피아가 후계자를 고르기 위해 드레이크를 가져오라는 시험을 내렸다는 정보는 상회 전체에 퍼져 있다.
상회의 차기 주인을 결정하는 일이니, 상인들이 저렇게 쳐다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안 가져왔는데.”
“아공간 주머니에 있겠지.”
“그럼 셋째 아가씨처럼 발톱이나, 손톱, 뼈 정도인가?”
“그것도 못 가져왔을 수도 있고.”
“그래도 백검룡이랑 갔는데, 그 정도는 구했겠지.”
상인들은 총단으로 향하는 라온과 도리안을 보며 드레이크가 아니라, 드레이크의 몇 가지 부위만 가져왔다고 확신했다.
“결국 후계자 자리는 둘째 도련님 차지인가?”
“그렇겠지. 일주일만에 드레이크를 구해 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역시 그분의 인맥은 대단하다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물이지.”
도리안의 둘째 형 디알룬을 따르는 상인들은 이미 끝난 싸움이라는 듯 미소를 흘렸다.
“헛소리들 하네.”
“아직 첫째 도련님이 안 오셨잖아.”
“벌써 설레발치면 곤란해.”
“맞아. 제세르 님이라면 박제된 드레이크 그 이상을 가져오실 거라고.”
“나중에 눈물 흘리지나 마라.”
첫째 제세르를 따르는 상인들이 디알룬의 뒤에 선 상인들을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첫째 도련님이라면 드레이크를 통째로 잡아 오실지도 모르지.”
“그래. 그것도 박제랑 비교 안 되게 큰 놈으로.”
“후계자 시험이 어떻게 끝날지 기대되네.”
제세르가 드레이크를 잡아서 오는 정보를 들었는지 여유롭게 웃으며 승리를 확신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결국 첫째 도련님과 둘째 도련님 사이에서 결정되겠네.”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잖아.”
“셋째 아가씨가 너무 쉽게 떨어진 게 좀 아쉽네. 그렇게 허무하게 질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백검룡을 모셔왔다고 해서 도리안 도련님도 살짝 기대해봤는데, 역시 너무 어리신가 보네.”
“어쩔 수 없지. 지그하르트에서 검술만 단련했을 테니까.”
상인들은 이미 후계자 선정이 제세르와 디알룬으로 좁혀진 것처럼 그 두 사람에 관해서만 떠들어 댔다.
“으욱….”
도리안이 총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떨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분해서 안 되겠어요! 우리가 잡은 것도 보여주고 와야지!”
녀석은 상인들에게 드레이크를 보여주겠다며 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를 돌았다.
“에휴.”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도리안의 뒤통수에 딱밤을 날렸다.
빠아악!
수박이 깨지는 듯한 시원한 울림이 터지고, 도리안이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끄아아아악!”
녀석은 울상이 되어서 고개를 들었다.
“왜, 왜 때려요!”
“기껏 정보를 감췄는데 그걸 왜 보여줘.”
라온이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막은 뒤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예?”
“지금 네가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 없지? 시험이 안 끝났는데도 다들 네 형들이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기고 있잖아.”
“그, 그렇죠. 그러니까 가서 말을….”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문지르며 눈매를 찡그렸다.
“아니지.”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네 형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다른 상인들이 축하하려는 그 순간에 네 배때기에서 그 35m짜리 드레이크가 나온다고 생각해봐. 어떨 거 같아.”
“너, 넋이 나가겠죠.”
“그 넋이 나간 표정 보고 싶지 않아?”
“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습니다! 보게 해주세요!”
도리안은 배고픈 라스처럼 눈동자를 둥글게 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참아. 지금 굴욕은 돌아올 희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라온이 도리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 충격은 줘야 이 상회를 먹지.’
후계자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날에는 총단의 직원만이 아니라, 인근 상인들이 모조리 모일 것이다.
제세르가 후계자가 될 거라고 모두가 확신할 때 그 드레이크를 꺼낸다면 지금까지 도리안을 무시하던 상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즉, 이 상회를 먹는 데 큰 걸음이 될 것이다.
-말하는 것만 보면 이미 네 상회나 다름없구나.
라스가 라온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실제로 내 것이. 아니, 도리안의 상회가 될 거니까.’
-봐! 또 지 거라고 하잖아!
‘너 오랜만에 제정신이네. 마카롱이 맛있었나 봐?’
암시장에서 데닝로즈가 함께 먹자며 마카롱을 건네줬는데, 그게 맛있었는지 라스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끝내주더구나. 그 일만 아니었다면 그 아이를 본왕의 하인으로 삼았을 텐데.
라스는 촌장의 손녀 루시가 마카롱을 먼저 주었던 선택이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진짜 맛 표현 못 하네.’
라온이 라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맛 표현을 할 거면 아까 데닝로즈 님처럼 해보라고. 음식을 주는 보람이 있잖아.’
데닝로즈는 산딸기 파이와 마카롱의 맛을 미식가처럼 고급스럽게 표현했다.
공감 가는 바도 있었기에 다른 디저트 선물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본왕도 하면 잘 할 수 있느니라!
‘그럼 해봐.’
-끄으응….
라스가 동그란 주먹으로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마카롱의 쿠키는 나무껍질처럼 바삭했고, 산딸기 크림은 헝겊처럼 부드러웠느니라!
‘…….’
데닝로즈가 말한 것을 기억하고 비유를 따라 한 것 같은데 천지 차이다.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넌 재능이 없다.’
-어흑….
‘때려치워.’
* * *
라온은 도리안에게 쉬라고 말해놓고, 팔렌의 방을 찾아갔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그에 못지않게 짜증이 어린 발걸음 소리가 들린 뒤 문이 열렸다.
“찾아오지 말라고… 헉!”
머리가 풀려 있는 팔렌이 소리를 지르다 말고 입을 꽉 다물었다.
“오, 오셨군요.”
사나운 맹수처럼 굴던 팔렌은 라온의 얼굴을 보자마자, 초식 동물이 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라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팔렌이 사람을 물린 덕분인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집처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 가신 일은 잘되셨나요?”
“질문은 제가 하겠습니다.”
라온이 팔렌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팔렌의 눈동자는 여전히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제가 돌아오기 전에 흑사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았습니까?”
“아, 아무런 연락도 없었어요. 창문에 천을 걸었지만 오지도 않았고….”
팔렌은 정보를 보낸 이후 연락이 뚝 끊겼다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사를 지우려는 모양이군.’
본래 암살 단체는 임무에 실패했을 시 위약금을 물거나, 실패했다고 연락한 뒤 추가로 암살자를 보내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 둘 모두를 하지 않는다는 건 데루스가 흑사라는 이름을 지우겠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움직일지 뻔히 보이네.’
나한테만 3번을 당했으니 한동안 멈추겠지.
자신에게 3번을 당했고, 보육원과 해저 던전까지 빼앗겼으니 데루스의 성격이라면 너무 화가 나서 오히려 냉정해진 상태일 것이다.
흑사까지 없애려는 걸 보면 자신에게 당분간 관여하지 않고, 정보를 모은 뒤 어두운 부분이나, 약점을 기습적으로 파고들 게 분명했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되지.’
데루스는 지독하리만큼 집요하고 냉철한 인간이다. 아무리 그의 생각이 파악된다고 해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라온은 생각을 정리한 뒤 팔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험에 낼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까?”
“네. 다만 이미 다 끝난 모양이에요.”
팔렌이 입술을 질겅 씹었다.
“둘째 오빠가 드레이크를 통째로 가져오고 있고, 큰오빠도 그에 못지않을 걸 가져올 테니. 저희가 이기긴 불가능할 거예요.”
그녀는 도리안이 빈손으로 온 것을 확인했는지, 자마리 산맥에 있던 드레이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겠죠.”
딱히 팔렌에게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이제 당신을 따로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잊으라는….”
“똑똑하네요.”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팔렌의 턱을 잡았다.
“술을 마셔도, 세뇌를 당해도 입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잊어야 할 겁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그녀가 다시 찾아올 테니까.”
“히이이익!”
멀린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말을 하자마자, 팔렌이 기겁하며 버둥거리다가 뒤로 넘어갔다.
“저, 절대 안 할게요! 그러니 제발! 제발….”
팔렌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입만 조심하면 됩니다.”
라온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서 그녀를 굽어보았다.
“네. 네! 절대!”
팔렌이 핏줄이 돋아오른 눈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공포에 질린 상태를 보아하니, 평생 이 일을 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멀린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걸까.’
라온이 팔렌의 방을 나서며 헛웃음을 흘렸다.
-보, 본왕은 별로 알고 싶지않느니라.
라스는 멀린을 떠올렸는지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 광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약이니라!
녀석은 알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너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했었지?’
-그렇느니라! 아주 거머리 같은 게 있었느니라.
‘거머리라….’
라스와 대화를 하며 숙소로 가는데, 문 앞에 도리안과 아디스의 집사 리그윈이 서 있었다.
“라온 님. 상회주님이 뵙고 싶어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리그윈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가시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기에 리그윈의 뒤를 따라 상회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디스 세피아가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판에 박아놓은 듯 이전과 같은 모습, 같은 자세였다.
“오랜만에 뵙는구려.”
아디스가 서류 위에 펜을 내려놓고 시선을 들어 올려 라온을 바라보았다.
“가신 일은 잘되었소?”
“저보다는 당사자에게 물어보시죠.”
라온이 미소를 흘리며 도리안을 가리켰다.
“흠….”
아디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도리안에게 눈동자를 돌렸다.
“물건은 구해왔느냐?”
“네에….”
도리안은 조금 전에 말해준 걸 잘 알아들었는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걸 보니, 원하는 걸 구하진 못한 모양이로구나.”
“으음….”
제대로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보니, 거짓말을 잘 못 하는 녀석답게 말을 아끼기로 한 모양이다.
“드레이크는 강하기도 하지만 희귀한 몬스터지. 원형을 구하거나, 잡지 못하는 게 그리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아디스가 도리안을 보며 서늘한 눈매를 쏘아냈다.
“그건 평범한 상회에서나 할 법한 말. 이 세피아의 꼭대기에 서려면 없는 드레이크라도 만들어 와야 한다.”
“그, 그렇죠.”
도리안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어진 뺨을 보니, 당장 드레이크를 꺼내서 자랑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당연하겠지.’
뭔 일만 있으면 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녀석이고, 무시하던 아버지에게 자랑할 기회이니 당연히 간질간질할 것이다.
다만 지금 참아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
“네가 가져온 물건을 꺼내 봐라. 어느 정도인지 내가 보도록 하지.”
아디스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손짓은 부드러웠다. 조언을 해주려는 것 같았다.
“아, 안 돼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꽉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왜?”
“기대감을 채워야 하는데….”
“기대감?”
“그, 그게 아니라! 어흑!”
그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어휴….’
라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네가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알아야….”
“상회주님이 제 물건을 보고, 다른 후계자 후보에게 정보를 흘릴 수도 있어서 안 돼요!”
도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빽 소리쳤다.
라온이 그런 도리안을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건 괜찮군.’
생각나는 대로 한 말 같은데, 아디스에게는 꽤 좋은 거절 방법이었다.
“내가 네 적일 수도 있다는 건가?”
“마, 맞습니다.”
“흐음….”
아디스가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더 가라앉았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 깃든 열기는 오히려 뜨겁게 타올랐다. 도리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알겠다. 그럼 나가도록. 시험 날 보도록 하지.”
아디스는 신경 안 쓰겠다며 손을 휘저었다.
“아….”
도리안은 그 차가운 반응에 입술을 떨며 배 주머니를 문질렀다.
“저기….”
“가자.”
라온은 도리안이 사고를 치기 전에 아디스에게 인사를 한 뒤 그를 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흐음….”
리그윈은 도리안과 라온이 나간 문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막내 도련님이 확실히 성장하셨군요.”
“그래. 날 적으로 보고, 그렇게 당찬 말을 하다니. 많이 변했군.”
아디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듯 하군요. 백검룡. 나이와 무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그윈은 대견함이 깃든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인연이라는 게지.”
아디스가 내려놓은 펜을 잡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험날이 기대되는군. 아주 재밌는 걸 준비한 모양이야.”
* * *
회색 망치 길드가 찾아오는 당일이자, 후계자 시험 마지막 날.
라온은 가벼운 걸음으로 상회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내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대륙 전체에서 모여든 세피아 상회의 상인들로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상회에 상인들이 진짜 많기는 하네요.”
도리안이 연무장을 가득 채운 상인들을 둘러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차기 상회주가 될 사람을 정하는 시험이니 당연히 와야지.”
후계자 선정은 세피아 소속 상인들의 미래가 좌지우지될 수 있는 중요한 일이기에 모두가 바쁜 시간을 쪼개서 찾아온 것이다.
“상회주가 되면 이 사람들이 전부 제 밑에 있는 건가요?”
“그래. 저들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는 거지. 할 수 있겠어?”
“소,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그런데….”
라온이 도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뒷목을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도리안이 슬쩍 얼굴을 든다. 떨리지만, 신뢰가 깃든 눈동자에 은은한 정광이 어려 있었다.
-저 겁쟁이 꼬맹이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군.
라스는 드물게도 도리안을 칭찬하며 대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용기니까.
“좋은 대답이다.”
라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모자라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좋은 방법이지.”
“가, 감사합니다! 부단주님도 도와주실 거죠!”
“근데 난 비싸. 그것도 많이 비싸. 알지?”
“어….”
“미리미리 친구비도 좀 주고.”
“아, 예에….”
도리안의 양쪽 눈썹이 축 처지고,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왜 또 본왕 수하의 기를 죽이느냐!
라스가 소매를 부여잡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재밌잖아.’
도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서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둘째 디알룬과 셋째 팔렌이 와 있었다.
디알룬의 앞에는 20m가 조금 안 되는 드레이크가 통째로 놓여 있었고, 팔렌의 앞에는 드레이크의 발톱과 이빨, 뿔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제세르는 오지 않았군.’
첫째인 제세르는 아직도 상회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팔렌의 옆에 가서 섰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팔렌이 어색하게 인사를 해왔고, 디알룬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모두 재료를 구해왔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세르가 무엇을 가지고 오는지 다 알려진 것 같았다.
“저희는 들러리입니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죠. 형의 승리입니다.”
디알룬은 드레이크의 박제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디알룬 도련님 표정이 왜 저렇게 어두워?”
“그러게. 드레이크를 그대로 가져왔는데 왜 이미 진 얼굴이시지?”
“소문이 늦네. 제세르 도련님이 저것보다 훨씬 큰 드레이크를 가져오시는 중이라고!”
“정말? 근데 왜 안 와?”
“기다리는 거지. 가장 좋은 때를.”
사람들에게도 소문이 퍼졌는지 다들 첫째인 제세르가 후계자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쿠우웅!
해가 하늘의 중심에 서기 전 연무장 문이 시원하게 열리고 세피아 상회의 주인 아디스가 들어왔다.
그는 차분하지만, 힘 있는 걸음으로 세 후계자 후보 앞에 섰다.
“곧 회색 망치 길드에서 손님들이 오신다. 그분들이 도착하기 전에 너희가 가져온 물건들을 확인하도록 하지.”
아디스가 뒷짐을 진 채로 세 명의 후계자 후보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상회주님.”
디알룬이 손을 들어 올리며 눈매를 좁혔다.
“아직 제세르 형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시간 약속 또한 상인의 필수 덕목이다. 정오까지 오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드레이크를 가지고 왔다고 해도 실격….”
“그건 좀 참아주시죠.”
아디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디알룬의 얼굴이 붉어지려고 할 때 제세르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 뭐야!”
“어디지?”
“위다!”
“위에서 오고 있어!”
상인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낮에 뜬 별처럼 태양 옆에 붙어 있던 시꺼먼 점이 점점 거대해지며 연무장의 중앙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와아아아앙!
마법을 사용했는지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황색 모래 먼지가 연무장 위로 짙게 솟아올랐다.
후우우우욱!
리그윈이 손짓을 하자 모래 먼지가 가라앉으며 연무장 중앙에 떨어진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30m가 넘어가는 듯한 회색 판자 위에 놓인 거대한 무언가가 두꺼운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아직 정오가 아니니 늦은 건 아니겠죠?”
판자 위에 타고 있던 제세르가 아디스의 앞에 가서 섰다.
“흠….”
아디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맞게 왔구나.”
“감사합니다.”
제세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세와 표정에 이미 승리했다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꺼낸 모양이군요. 그럼 제가 가져온 것도 보여드려야겠죠.”
그는 뒤로 돌아가 판자 위에 씌워진 검은 천을 들어서 날렸다. 깃발이 펄럭이듯 천이 하늘 높이 솟구치고 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드레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세르의 수하들이 다가와 드레이크의 머리와 꼬리를 길게 펼쳤다. 연무장의 반을 채우는 듯한 웅장한 크기. 25m가 한참 넘는 거대한 드레이크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저, 저게 드레이크라고?”
“왜 저렇게 커? 드래곤 아니야?”
“미, 미쳤다. 이건 보나마나잖아. 끝난 결과라고!”
“제세르 도련님이 후계자가 되겠네.”
연무장을 가득 채운 상인들이 환호를 질렀다. 하늘을 울리는 함성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제세르를 따르는 상인들이 다른 후계자 후보보다 훨씬 많았던 것 같다.
“크윽….”
“빌어먹을….”
디알룬과 팔렌은 제세르가 가져온 드레이크를 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기에 겨뤄볼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흐음.”
제세르는 당당히 서서 오로지 그에게만 주목되는 시선을 즐겼다.
라온이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예상대로네.’
이 연출을 위해서 지금까지 오지 않은 거야.
제세르의 인맥이라면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당일까지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화려한 연출을 이용해서 상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 게 분명했다.
‘대단했어. 다만….’
결국 들러리는 네가 될 거야.
그가 만들어낸 상황 덕분에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이제 승부가 났군요.”
제세르가 거만한 시선으로 다른 후계자 후보를 내려보았다.
식당에서처럼 도리안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동생이나, 경쟁자로도 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들여보내는 게 어떻겠….”
“아니.”
아디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제세르의 말을 막았다.
“아직 도리안은 꺼내지 않았다.”
“안 가져온 게 아닙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군.”
아디스가 도리안과 그 뒤에 선 라온을 바라보았다.
“네가 가져온 게 있다면 꺼내 보아라.”
“네.”
도리안은 마른침을 삼키고 앞으로 나갔다.
“전부 뒤로 좀 물러나 주세요.”
그는 팔렌과 디알룬 그리고 제세르와 그 뒤에 있던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구경하러 앞에 나온 사람들까지 물러나게 했다.
“뭘 하려고 저러는 거야?”
“허세 부리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마지막 발악처럼.”
“저렇게라도 해야 시선을 끌지.”
사람들은 아디스의 앞이라 일단 물러서 주었지만 도리안을 비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도리안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해봐.”
“넵!”
그가 허락하듯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처음에 나오는 건 도마뱀처럼 작은 파충류의 머리였다.
“크하하하하하!”
“뭐야! 저게!”
“드레이크를 잡아 오랬지 도마뱀을 잡아 오랬냐고!”
“다 끝났… 어?”
“어허헉!”
하지만 배 주머니에서 나오는 순간 파충류의 머리가 부풀어 오르며 인간 몇은 통째로 삼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드레이크의 머리통이 되었다.
“아아아….”
“저, 저게….”
“허어억!”
도리안의 배 주머니에서 35m가 넘는 드레이크의 몸체가 완전히 드러난 순간 제세르를 포함한 후계자 후보들과 상인들의 턱이 빠질 것처럼 벌어졌다.
제세르의 승리를 축하하며 크고 작은 소리로 가득했던 연무장이 도서관이 된 듯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라온은 그 고요함을 두 눈에 담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 표정들이 보고 싶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