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07)
제407화
글렌 지그하르트가 앞으로 내밀고 있던 오른손을 거두었다. 그의 손이 사라진 틈으로 라온을 지탱하는 리메르가 보였다.
“어떻게든 마무리됐네요.”
셰릴이 글렌의 옆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라온이 해결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녀는 뽑아 들었던 쌍검을 검집에 넣으며 라온이 점점 괴물이 되고 있다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 역시 저리 빠르게 성장하는 무인은 처음 봅니다.”
로엔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높은 무위에 오를수록 더 높은 언덕에 걸리는 법인데, 라온 도련님은 평지를 걷는 듯 어느 구간에서도 막힘이 없더군요.”
그는 부러운 기분이 드는 재능은 처음이라며 대견한 미소를 그렸다.
“크흠, 라온이 이번 일을 해결한 건 내게도 의외였네.”
글렌이 솟구치는 입매를 내리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는 저들로 해결할 수 없는 규모였으니까.”
라온은 오러와 체력이 남았지만,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고, 리메르는 검계현신을 사용한 여파로 녹초가 되었으며, 아리안 가문의 후계자는 처음부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실력이었다.
셋이 힘을 합쳐도 사기의 구체를 지울 수 없다고 여겨서 도와주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했다.
‘찰나의 순간에 성장하다니….’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두고, 집중력이 극에 도달하여 무아지경에 빠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존재한다.
하지만 조금 전 라온은 10초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육체와 정신이 모두 성장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무아지경이 무인의 경지를 급격하게 올려주는 건 맞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
10초라는 시간은 아무리 무아를 이룬다고 해도 너무 짧은 순간이었다.
‘다만 눈앞에서 보았으니, 뭐라 할 수가 없군.’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거짓이라 여기며 무시했겠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았고, 그 기적을 이뤄낸 사람이 소중한 손자였기에 그저 기분이 들뜨기만 했다.
“저 괴물 녀석이 어디까지 성장할지 기대되네.”
“라온 도련님이라면 정말 22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올라 부왕과 결투를 벌일지도 모르겠군요.”
셰릴과 로엔은 리메르가 등에 업는 라온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요.”
“혹시 모르니 칼은 갈아두어야죠.”
“안 그래도 남북맹의 위치와 인원에 관한 정보는 꾸준히 수집하고 있어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원로원 빼고는 많은 정보를 모아 놨죠.”
글렌은 라온을 위해 남북맹을 파악하고 있다는 셰릴과 끝까지 칼을 갈겠다는 로엔을 보며 참고 있던 미소를 드러냈다.
“흐음!”
칭찬에 인색한 두 사람이 라온의 재능에 감탄하고, 그를 진심으로 아끼는 모습에 입꼬리가 광대뼈까지 올라갔다.
“로엔.”
“예. 가주님.”
로엔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림은 제대로 그렸나?”
“물론입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던 책자를 앞으로 들어 올렸다.
“라온 복음 3권에 이번 임무에서 라온 도련님이 활약하신 모습을 스케치해두었습니다. 명언도 적었으니, 나중에 읽어보십시오.”
“스케치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셰릴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물론 돌아가는 대로 채색까지 할 생각입니다.”
“좋군!”
채색을 한다는 말이 나오고서야 글렌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으음, 천검대주님도 피곤하실 테니, 저 혼자서….”
“저도 라온 복음에 이바지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사양할 필요 없어요!”
“허허허.”
로엔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할 때 글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천검대주는 빠지도록.”
“네?”
“그림 못 그리지 않나.”
“그래도 색칠 정도는 가능….”
“그 색칠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네.”
글렌은 라온의 그림을 망치는 건 절대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끄응….”
셰릴은 할 말이 없는 듯 앓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그럼 우리는 돌아가도록 하지.”
글렌이 축 처진 셰릴의 어깨를 두드리며 몸을 돌렸다.
“안 내려가 보실 겁니까?”
“괜히 내려가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지 않나.”
셰릴의 물음에 글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오늘 승리는 저 아이들만의 승리야. 우리는 이곳에서 박수를 보내는 정도로 충분하네.”
“그럼 리메르 님에 대한 징계도 없는 겁니까?”
로엔이 조심스럽게 리메르의 이름을 꺼냈다.
“음….”
글렌이 라온을 업고 있는 리메르를 보며 턱을 긁적거렸다.
“이번에는 나름 스승의 역할을 해주었으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럼 리메르 님을 패는 예정은 빼놓겠습니다.”
“그러도록… 아니, 잠깐만. 저놈 늦게 온 이유가 뭐지?”
리메르가 기둥 뒤편에서 대기하다가 나가서 라온을 구한 건 맞지만, 그는 한참 전에 아리안 가문에 도착했어야 했다.
늦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음, 그게….”
“망나니짓하다가 늦었습니다.”
로엔이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셰릴이 대신 입술을 뗐다.
“폐관 수련이 힘들었다고 주점에 가서 밤새 술 처먹고, 저녁에 일어나서 도박장 순례까지 마치고 출발했으니, 늦는 게 당연하죠.”
셰릴은 서늘한 미소를 흘리며 리메르의 행적을 낱낱이 밝혔다.
“이곳에 와서도 언데드와 싸우는 것도 귀찮고, 사기로 가득 찬 땅을 밟는 것도 싫어서 덩굴 위에서 농땡이를 부리다가 마지막에 똥폼 잡으면서 나타난 겁니다.”
그녀는 글렌도 아는 사실까지 말해서 그의 화를 돋우었다.
사아아아.
라온을 바라보며 따스하게 무르익었던 글렌의 눈동자에 차디찬 분노가 차올랐다.
“로엔.”
“예.”
“저 망나니 놈 가문으로 복귀하자마자 연무장으로 부르도록.”
“아, 알겠습니다.”
로엔은 전쟁이 끝났다는 생각에 히죽이는 리메르를 보며 낮은 숨을 흘렸다.
‘연무장이라….’
가주님이 연무장으로 불렀다는 건 제대로 후려 패겠다는 뜻이었다.
“허허허.”
그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명복을 빕니다.
* * *
“후욱….”
웬디 아리안이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밝아. 하늘이 보여!’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을. 아니, 이 세상을 무너뜨릴 것처럼 부풀어 오르던 거대한 사기의 구체가 사라지며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해내시다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 친다.
라온은 호언장담을 했던 대로 악의로 가득 차 있던 사기의 구체를 태우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해냈다.
‘거기다….’
나도 성장시켜 주셨어.
라온과 함께 사기의 구체를 지웠기 때문인지 스스로의 격과 무력이 벽을 넘어섰다는 게 느껴졌다.
몇 년째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던 문을 아예 깨부수고, 다음 경지로 나아간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웬디가 리메르의 등에 업혀 있는 라온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
라온은 6일 동안 총사령관 역할을 하며 이 전쟁을 이끌었다.
한숨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은 채 싸웠으니 진즉 쓰러져야 했건만, 그는 끝까지 버텨낸 후 본인의 손으로 이 전쟁을 끝내버렸다.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이루기 힘든 위업을 스무 살의 어린 무인이 해냈다는 것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감격스러웠다.
지금에 와서는 라온이 같은 사람처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리메르가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지친 듯 손을 떨면서도 라온이 떨어지지 않게 다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라온 님이 다 하셨지 저는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해내셨을 거예요.”
진심이었다. 내가 없었다고 해도 라온은 혼자서 그 구체를 지워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건 아니에요.”
리메르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요놈이 고집불통에 진짜 망나니거든요.”
그는 턱짓으로 등에 업혀 있는 라온을 가리켰다.
“이 독불장군이 도와달라고 한 건 진짜 필요할 때뿐이에요. 당신이 없었다면 절대 그 사기를 지우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을 가져도 돼요.”
리메르는 한쪽 눈을 깜빡이고서, 다른 일행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
웬디가 검을 쥐고 있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라온이 보여주었던 신뢰와 리메르의 진심이 어린 말을 듣자, 가슴을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럼 정말 날 믿고 가주를 맡기셨다는 건가.’
사람이 없어서 임시 가주를 맡겼다고 생각했는데, 리메르의 말대로라면 라온은 자신을 신뢰하여 가주 직을 맡긴 것 같았다.
갑자기 가주가 되어서 가문을 제대로 운영할 자신이 없었는데, 조금이지만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라온!”
“저 또라이 자식!”
“라온. 괜찮아?”
광풍단 조장들은 비틀거리면서도 전력으로 라온에게 달려갔다.
“부단주님!”
“진짜 그 사기를 베어버리다니! 우리 부단주는 미쳤어!”
“저 인간은 안 미친 적이 없었지! 진짜 광견은 저 인간이라고!”
“우와아아아아!”
광풍단도 조장들의 뒤를 따라 달리며 환호를 질렀다. 모두의 얼굴에는 감격과 환희가 함께 했다.
“허, 진짜 괴물이 되었군.”
“원래부터 성격은 괴물이었는데….”
밀랜드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모렐은 앞으로 괴롭겠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보지?”
“이제 저는 상대도 안 될 듯합니다. 다만 다시 붙어보고 싶군요.”
삼왕자의 질문에 보리니 키튼이 턱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 배려심 없는 놈. 여기까지 와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나?”
트레빈은 기절한 채 작은 미소를 흘리는 라온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야! 나는 안 챙기냐! 어떻게 날 찾는 놈이 하나도 없어! 내가 너희를 구했다고!”
리메르가 달려드는 광풍단에게 인상을 구기며 악을 질렀다.
꾸욱.
웬디는 라온과 리메르 그리고 광풍단을 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광풍단….’
처음에는 광견이라는 소문대로 정신 나간 집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들을 보고 있으니 아리안 가문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웬디는 기절한 라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평생 당신의 뒤를 따르며 갚도록 하겠습니다.’
* * *
라온이 이마를 찌푸리며 눈을 떴다. 조금 습기가 차오른 회색 천장이 보였다.
‘어우….’
정신을 차리자마자, 전신에서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근육과 피부만이 아니라, 단전과 마나 회로에서도 고통이 느껴졌다.
‘엉망이네.’
의 회복 효과가 있음에도 이 상태인 것을 보면 정말 무리를 하긴 한 모양이다.
-멍청한 놈!
한숨을 내쉬는데, 눈앞으로 푸른 솜사탕이 날아들었다.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몸을 험하게 굴리라더냐!
‘어쩔 수 없었잖아.’
-어쩔 수 없기는 무슨.
라스는 그렇게 무리할 필요 없이 알아서 해결되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다만 왜 그런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무리한 덕분에 강해졌잖아.’
-끄으응….
라온이 미소를 짓자, 라스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네가 얼마나 퍼줬는지 확인 좀 해볼까?’
-비, 빌어먹을!
머리를 부여잡는 라스를 보며 지나간 메시지를 불러오려고 할 때 우측에서 뭔가를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고개를 들어 올리니, 도리안이 테이블 위에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어? 부단주님!”
도리안은 먹고 있던 과자를 던지기는커녕 소중하게 안아 들고 느릿하게 걸어왔다.
“정신이 드셨군요! 다행이에요!”
그는 다행이라며 과자 가루가 묻은 손으로 어깨를 잡았다.
“그래….”
라온은 가루가 흐르는 어깨를 툭툭 쳐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오늘로 딱 3일째에요.”
그는 해가 지기 시작해서 어두워지는 창밖을 가리켰다.
“3일이라….”
그렇게 무리해놓고, 3일이면 나름 빨리 일어난 축에 속한다. 아직 통증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뭐, 특별한 일은… 음?”
몸을 일으키려는데, 옆에 뭔가가 걸렸다. 고개를 돌리니, 루난이 침대에 엎어져서 잠을 자고 있었다.
“얘는 왜 여기 있어?”
“복귀했을 때부터 당번도 아닌데 여기서 주무시던데요. 잡아끌어도 안 떨어집니다.”
그는 허리가 아플 텐데 잘도 잔다며 신기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런가.”
라온이 옅게 웃으며 루난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돌아가면 아이스크림 좀 사줘야겠네.’
-아이스크림을 먹기 전에 본왕과의 약속부터 지켜라! 일단 블루베리 파이부터 시작….
라스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먹고 싶었던 메뉴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있기는 해요.”
“뭐?”
음식 이름을 외치며 춤을 추던 라스를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리안 가문에서 특별한 일이라고 하면 언데드와의 싸움뿐이다. 불길함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 부단주님이 걱정할 만한 건 아니에요.”
도리안은 그 생각을 알아차린 듯 나쁜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저희가 싸울 때 가문의 간부들이 도망쳤잖아요.”
“그랬지.”
라온이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죽일 놈들.’
위겐 아리안과 간부들은 가문의 위기에 발 벗고 나서서 백의종군하기는커녕 가솔을 인질로 잡고 도망쳤다.
이 망가진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놈들만큼은 무조건 찾아낼 것이다.
“그놈들 잡혀 왔어요.”
“뭐라고?”
“어제 손님이 오셨는데, 어쩌다 보니 그놈들을 데리고 왔더라구요.”
도리안은 특이하고 대단한 손님이라고 말했다. 다만 라온의 귀에는 그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능력치나 확인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 망할 놈들부터 처리해야 해.
웬디는 간부들과 가족이기에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없다.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
침대 옆에 놓아둔 제천검을 쥐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부, 부단주님?”
“가자.”
라온의 눈동자에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그 빌어먹을 놈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 * *
“웬디.”
아리안의 가주였던 위겐 아리안은 무릎을 꿇은 채로 웬디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정말 이 가문을 운영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는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도망을 쳐놓고서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 풍족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나와 간부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력보다 더 강한 금력에 집중했기에 모두가 안정적으로 살아갔고, 네가 마음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었지. 하지만….”
위겐이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너희들은 아니다. 너와 새로운 간부들은 가문 운영을 배울 시간에 검만 휘둘렀지. 지금도 이 가문을 어떻게 굴려야 할지 모를 것이다.”
“…….”
웬디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위겐은 그런 웬디의 표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먹히고 있군.’
그 괴물 때문에 이곳에 잡혀 오면서 죽을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준비한 말이 먹혀들고 있었다.
라온 놈이 기절한 상태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가 잘못한 건 맞으니, 가주와 간부직에서 깔끔하게 물러나마. 대신 뒤에서 너희들을 받쳐줄 수 있게 해다오. 가문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날개가 되어주고 싶다.”
위겐은 압박을 하다가 부드럽게 풀어주어 웬디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가문을 버리고 도망친 것에 대해 할 말은 없는 겁니까?”
웬디는 갈라진 목소리로 참고 있던 물음을 던졌다.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대신 지금부터 가문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
“황전대주. 이 늙은이를 받아주시오. 가문의 구할 기회를 놓쳤으니,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바치고 싶소.”
“한 번만 봐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아리안을 키워보겠습니다.”
“죄는 달게 받으마. 다만 그건 이 망가진 가문을 살린 이후에….”
간부들은 위겐이 만든 분위기를 그대로 이용하며 머리를 숙였다.
누구 하나 왜 도망쳤는지, 어떤 벌을 받을 건지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
“웬디야. 이 못난 아비를 한 번만 용서해다오.”
웬디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지만, 위겐은 그걸 모르는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너에게도 그리고 이 가문에도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콰아아아앙!
위겐이 부르르 떨고 있는 웬디의 손을 잡으려 부를 때 알현실의 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열렸다.
후우욱.
황색 연기 사이로 붕대를 감고, 환자복을 입은 라온이 들어왔다.
“어?”
“라, 라온 님!”
“괜찮으십니까?”
웬디와 새로운 간부들은 깜짝 놀라서 라온에게 달려갔다.
“괜찮습니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가장 바깥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재정관에게 다가갔다.
“재정관이라고 했었지.”
라온이 재정관의 앞에 선 채로 턱을 치켜들었다.
“가문을 버리고 도망친 것에 대해 할 말은 없나?”
그는 아직 부상이 심한지 목소리가 뚝뚝 갈라졌다.
“그건 어쩔 수 없었소!”
“무엇이 어쩔 수 없었지? 누가 잡아서 끌고 가기라도 했나?”
“어, 그, 그건….”
핑계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제정관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다.
“기, 기회만 주신다면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 한 번만 믿어….”
“네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기회는 끝났다.”
라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오른손에는 제천검이 들려 있었고, 제정관의 목에는 뻘건 실선이 그어졌다.
“어? 어어…?”
재정관은 본인의 목을 부여잡았다. 선이 굵어지며 핏물이 치솟았다.
“끄으읍….”
그는 마지막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 목이 갈라져 쓰러졌다.
라온은 서슬 퍼런 눈동자를 빛내며 제천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