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incarnated Assassin is a Genius Swordsman RAW - chapter (468)
제468화
자줏빛 새벽하늘이 커튼처럼 찰랑이는 5연무장.
라온이 연무장의 중심에서 제천검을 뽑았다. 소리 없이 드러나는 은빛 칼날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쳤다.
그대로 떨어지는 일검. 힘을 주지 않은 검격임에도 강렬한 파동이 일어나며 연무장 바닥에 두꺼운 선이 그어졌다.
그는 살짝 입매를 굳히며 다시 검을 내리쳤다. 두 번째로 뻗어나간 검격이 처음보다 더 얇은 검흔을 새겼다.
라온은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달아 수직 베기만을 반복했다.
손가락 마디처럼 두꺼웠던 검흔이 점차 얇아지더니, 결국 머리카락 한 올처럼 얇디얇은 선을 그렸다.
그 이후에 계속해서 검을 내리쳤지만 더이상 검흔은 늘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수직 베기가 같은 힘과 속도로 떨어지며 마지막에 새겼던 검흔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라온은 서늘한 기운을 흘리는 검흔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봐줄 만하네.’
오러와 능력치가 오른 덕분에 처음에는 힘 조절이 되지 않았지만, 기본 검술을 백 번 넘게 휘두른 덕분에 강해진 육체와 오러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수련을 해봤지만, 달라진 몸에 적응하는 건 기본 검술이 최고였다.
-쯧쯧.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매번 능력치가 올라갈 때마다 쇼를 하는구나. 귀찮지도 않느냐.
녀석은 인간이란 참으로 어설픈 종족이라고 중얼거렸다.
‘전에도 말했잖아.’
라온이 제천검을 아래로 내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전에서는 이 한 끗 차이가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고.’
처음에 새겨진 두꺼운 검흔과 마지막에 그어진 실처럼 얇은 흔적을 가리켰다.
‘육체와 오러를 조율하는 훈련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지 않아.’
육체와 오러가 강해졌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그 강함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면 성장이 오히려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마왕이 되면 그딴 거 안 해도 바로 적응할 수 있느니라.
‘마왕?’
-그렇느니라. 강해졌다고 수련할 필요 없이 알아서 몸이 적응하느니라.
라스는 마왕이 되어보고 싶지 않냐며 입을 붕어처럼 뻐금거렸다.
‘너나 해.’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끄으응….
‘넌 대체 나한테 뭘 시키고 싶은 거야. 언제는 마계를 불태워버릴 놈이라고 하고, 언제는 마왕이 되라고 하고.’
-그게….
라스가 둥그스름한 눈동자를 데루룩 굴렸다.
-네놈이 오면 마계가 망하겠지만, 다른 놈들도 당해봤으면 좋을 것 같아서.
녀석은 마계가 망가지는 건 별로지만, 다른 건방진 마왕과 마족들을 홀라당 벗겨 먹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나 혼자만 당할 수는 없다? 하여튼.’
이럴 때 보면 분노의 군주는커녕 좀생이만도 못했다.
-그게 아니니라! 본왕은 그저 마계의 새싹들에게 본보기를….
‘됐구요.’
라온은 투덜거리는 라스를 쳐내고, 광아검, 설풍검결, 만화공의 검술까지 차례로 운용한 뒤 시선을 들었다.
별빛이 반들거렸던 새벽하늘이 내려서고, 어느새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제천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검으로 하늘을 겨누며 영혼의 격을 끌어 올렸다.
고오오오오!
육체와 영혼을 잇는 기둥이 뜨겁게 진동한다. 제천검에 깃들어 있던 오러가 연무장으로 퍼져나가며 거대한 흐름을 일으켰다.
‘하늘을 베겠다.’
라온은 붉게 달아오른 칼날 위에 오러보다 선명한 의지를 담아서 검을 내리쳤다.
몽둥이로 물살을 가르는 듯한 반탄력이 손아귀에 밀려왔지만, 끝까지 팔을 휘둘렀다.
쿠우우우웅!
검극에 깃들어 있던 영혼의 격과 베겠다는 의지가 하나가 되며 연무장 전체에 장대한 중압을 일으켰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창궁검의 첫 번째 초식 대연중천이 이 공간 자체를 지배한 것이다.
“후우….”
라온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소매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달라.’
기본 검술부터 만화공의 검술을 끝낼 때까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창궁검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전신에 피로가 밀려왔다.
이게 의지를 담는 검술의 차이인 것 같았다.
‘그만큼 강하기는 하지만.’
창궁검은 단순히 위력만 뛰어난 검술이 아니다.
공간을 장악하여 상대를 억죄는 초상승의 검술이었기에 체력과 정신력이 급속도로 빠지는 건 당연한 반동이었다.
‘그랜드 마스터들은 이런 걸 기본 검술처럼 사용하는 건가?’
왜 그랜드 마스터들이 자연재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본인의 능력에 의지를 담아야 살아남을 수 있느니라. 그걸 못한다면 밑에 처박힐 뿐이니라.
라스는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네놈이 익히는 그 검술은 의지를 담는 게 다가 아니니라. 공간을 먹어 치우는 방식이니, 검의 결계 습득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녀석은 창궁검이 단순히 그랜드 마스터의 길을 열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검계현신에도 영향을 줄 거라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라스만이 아니라, 글렌도 그 말을 했었다.
‘검계현신이라.’
심상의 세계의 씨앗들이 싹 트기 시작했기에 이젠 검계현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둘 때가 되긴 했다.
‘어떤 속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야 할까.’
지금 가지고 있는 건 검술과 불, 냉기 그리고 전생에서 이어온 그림자다.
넷 모두를 하나의 검계에 담는 건 무리다. 그릇이 깨지게 될 게 분명했다.
‘하나. 혹은 두 개 정도인가.’
스스로 만들 검계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부대주님! 가시죠!”
그는 빨리 가자며 손을 흔들었다.
“어딜?”
“예? 오늘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요! 저보고 아침에 바로 오라고 하셔놓고!”
도리안은 휴일에 불러놓고 무슨 소리냐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 맞다.”
-인성….
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때문이잖아.’
라온이 도리안에게 다가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데 제가 꼭 필요한 중요한 일이 뭐예요?”
“너 애들 좋아하지?”
“좋아하죠!”
도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됐어. 따라와.”
“엑?”
어벙한 얼굴의 도리안을 데리고 연무장을 나섰다.
-제발. 제발! 천지신명이시어!
이제 마신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기원하는 마왕과 함께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에 갈 때마다 계속 문제가 터졌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부에 불이 켜져 있었고, 점장도 보였다.
-이야아아아!
라스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울부짖었다.
-드디어 있느니라! 천지신명이시여! 보답하겠습니다!
녀석은 새로운 신을 모시겠다고 중얼거리며 두 손을 모았다. 참으로 간사한 신도였다.
“아이스크림? 여기 맞아요?”
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근데 제가 왜 여기에 필요….”
“정말 필요하니까. 들어가자.”
라온이 도리안의 등을 밀며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 헉!”
볼 때마다 콧수염부터 눈에 들어오는 점장이 입을 떡 벌렸다.
“라온 님? 라온 님 아니십니까!”
그는 카운터를 박차고 뛰어나와 손을 떨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주신 겁니까!”
점장은 찾아주질 않아서 서운했다며 눈썹을 내렸다.
-이 새끼가?
라스가 빛살처럼 튀어 나가 점장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맨날 자리를 비웠잖아! 사회에 관심 좀 그만 가지고, 가게나 지키라고!
녀석은 지가 술 처마시고, 욕하러 가놓고 무슨 소리를 하냐며 돈 벌 생각 없냐고 떠들어댔다.
“사실 계속 라온 님의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백련대주와의 검투는 직접 가서 보기도 했고, 희극제의 뒤통수에 욕도 박았죠!”
점장은 요즘 라온 덕분에 너무 상쾌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특별히! 라온 님께 저희 매장을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는 특권을 드리려고 합니다! 얼마든지 고르세요!”
그는 양손을 펼쳐서 원하는 아이스크림을 선택하라고 외쳤다.
“정말이십니까?”
라온이 점장 뒤편에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럼요! 저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콧수염을 걸지요!”
그는 잘 가꾼 콧수염을 툭툭 건드렸다.
“말씀만 하세요.”
“그렇다면야.”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 주세요.”
“예?”
“여기 있는 거 전부 다요.”
“어, 그니까….”
점장은 잘못 들었다는 듯 눈동자를 빠르게 껌뻑였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다. 이곳에 있는 아이스크림 전부 다 포장이요.”
심술을 부리려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모두 사기 위해서 도리안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푸헤헤헤헤!
라스가 당황하여 숨조차 멈춘 점장을 보며 헤죽거렸다.
-쌤통이니라! 그러게 누가 가게를 비우래? 사회에 관심 좀 그만 가지거라!
녀석은 점장의 머리 위에서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저, 저기 사실 어….”
라온은 말을 잇지 못하는 점장을 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료로 해주실 필요 없으니까.”
그 말을 하면서 카운터에 금화를 올려놓았다. 당연히 아이스크림의 값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아, 아이고! 이거 괜찮은데!”
점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수보다 빠르게 금화를 챙겼다.
“바로!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면 아이스크림들을 통째로 빼기 시작했다.
“도리안.”
“왜 불렀는지 알겠네요.”
도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걸어왔다.
“그냥 짐꾼이네…. 이게 중요한 일이었어요?”
“당연히 중요하지. 이 아이스크림을 녹지 않게 별관까지 옮길 사람은 너뿐이니까.”
“별관이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은….”
“꼬맹이들도 있잖아.”
꼬맹이라는 말에 도리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데루스가 만든 보육원에서 함께 아이들을 구했기에 그는 어떤 아이들을 말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다 네 이름만 외칠걸?”
“오! 그러네요! 중요하네!”
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알아서 아이스크림과 컵을 챙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귀신 같은 혓바닥이니라.
라스가 질렸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본왕은 절대 네놈에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라!
지금도 넘어가고 있지만, 알아서 생각하도록 놔두었다.
“후우….”
점장은 아이스크림과 컵을 비롯한 사은품까지 모두 꺼낸 뒤에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감사합니다! 평생 응원하겠습니다!”
그는 앞으로 VIP로 모시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그런데….”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점장의 콧수염을 가리켰다.
“그거 미실 거죠?”
“예?”
“아까 콧수염을 걸겠다고 하셨잖아요.”
“오….”
그 말에 점장의 콧수염이 불안한 듯 파르르 떨렸다.
“다음에 올 때는 코밑이 깔끔하기를 기대할게요.”
라온은 손을 흔들고 매장을 나섰다.
“우와, 인성이….”
-마귀 그 자체이니라….
도리안과 라스는 동시에 지독한 인성이라고 중얼거렸다.
“본인이 한 말이 있으니까.”
라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별관으로 돌아가려 할 때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루난?”
루난이 평소보다 맑아 보이는 눈으로 다가왔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루난은 휴일이면 거의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데, 이 이른 시간에 이곳에 있는 게 신기했다.
“아이스크림 사러 왔어.”
루난이 나무늘보가 그려진 동그란 지갑을 들어 올렸다.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인가.’
루난을 일찍 일어나게 만드는 건 아이스크림과 훈련뿐이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온 것 같았다.
“라온도 갈래? 사줄게.”
그녀는 돈이 많다며 지갑을 흔들었다.
“음, 아니 난 됐어.”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아이스크림 매장을 달려갔다.
그리고.
“꺄아아아아악!”
처음으로 루난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 * *
별관 정원 앞에 구슬 아이스크림 통 33개가 주르륵 깔렸다.
라온이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도록 바닥에 냉기를 뿌렸을 때 정원으로 아이들이 들어왔다.
“우와아아아!”
“아이스크림이다!”
“맛도 엄청 많아!”
파인을 비롯한 아이들은 환한 웃음을 그리며 아이스크림 통 앞으로 달려갔다.
라온은 배꼽 인사를 하고서 아이스크림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많이들 밝아졌네.’
저 아이들은 오랜 기간 암살자 훈련을 받았기에 이곳에 왔을 때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페드릭의 치료를 받고 별관 식구들에게 정을 느끼며 그 나이대 아이들처럼 밝아진 상태였다.
-우와아아아악!
라스는 아이들보다 더 신났는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함성을 질렀다.
-빨리! 빨리 본왕부터 떠주거라! 어서!
‘애들이랑 정신 연령이 똑같아.’
라온은 미쳐 날뛰는 라스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도리안 형!”
“도리안 오빠!”
“오냐! 차례로 줄 서!”
도리안은 아이들을 자주 만났기에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컵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주었다.
“줄.”
사실을 듣고 따라온 루난도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고는 있는데, 본인의 입에 들어가는 게 더 많아 보였다.
‘일단 퍼주고 먹었으면 좋겠는데.’
라온이 어처구니없이 웃을 때 라스가 어깨를 북처럼 두드렸다.
-뭐 하는 것이냐. 네놈도 빨리 먹거라.
‘어차피 양은 많아. 다 주고도 남는다고.’
-무슨 소리냐! 아가들은 아이스크림 앞에서 글러트니와 다를 게 없느니라!
녀석은 늦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알겠다. 알겠어. 민트초코지?’
-이제 좀 아는군!
‘한 달 내내 외쳤는데, 모를 수가 있나.’
라온은 아이스크림 두 개를 푼 뒤에 하나를 성자 페드릭에게 건네주었다.
“성자님도 드세요.”
“고맙다.”
다정한 눈으로 아이들을 살피던 페드릭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을 했구나.”
그는 잘도 이런 이벤트를 생각했다며 웃었다.
“가끔은 괜찮으니까요.”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민트초코를 입 안에 넣었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화함과 약간의 단맛이 동시에 혀를 자극했다.
-크으으으!
라스는 실성한 듯 머리를 부여잡은 채 어깨 위에 축 늘어졌다.
-그래! 이게 민트초코고, 이게 아이스크림이지! 무슨 나딘빵이야!
녀석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근데 너 빼고는 인기가 없다?’
아이들은 초코와 딸기, 바닐라처럼 단순한 맛이 더 좋은지 그쪽에 몰려 있고 민트초코를 먹는 건 루난 뿐이었다.
-흥! 어려서 아직 맛을 모르는 것이니라!
라스는 아이들이 나이가 어려서 진짜 맛을 모른다며 콧잔등을 구겼다.
‘그러냐.’
정신 연령은 네가 더 어려 보이지만.
라온이 나오려는 말을 내리누르며 남은 민트초코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번엔 뭐?’
-민트초코.
‘방금 먹었잖아.’
-민트초코에 한계 따위는 없느니라!
‘컵을 괜히 바꿨네.’
입맛을 다시며 새 컵에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담았다.
다시 자리로 가서 먹으려고 하는데, 본관 쪽에서 거대한 백마 두 필이 황금빛 마차를 끌고 오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로엔이 인자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지 모른 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지만, 실비아를 비롯한 시녀들은 우뚝 선 채 손을 떨었다.
마차가 정원 앞에 멈춰서고, 고아한 형태의 문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고오오오!
등장만으로 그곳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존재. 글렌 지그하르트가 마차에서 내렸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실비아를 시작으로 별관의 시녀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아이들만 멍하니 서 있었다.
“쓸데없이 무릎 꿇을 필요 없다.”
글렌은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저었다.
“모두 일어나도록.”
“예!”
실비아와 시녀들이 옷매무새를 갖추며 몸을 일으켰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실비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줘야 할 게 있어서 잠시 들렸으니, 긴장할 필요 없다.”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정원의 상공에 금빛 차원이 열렸다.
마름모꼴로 벌어진 차원에서 금괴와 보석, 영약과 무구가 쏟아져 내렸다.
어제 따로 보내겠다고 했던 희극제의 재물들 같은데, 생각보다 그 양이 많았다. 넘친다고 할 정도였다.
“약속했던 보상들이다.”
“헉!”
“아….”
“와….”
실비아와 시녀들은 라온과 금빛으로 번쩍이는 재보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녀들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대견함이 동시에 피어났다.
‘음….’
이런 게 민망하여 받아도 숨길 생각이었는데, 뺨이 붉어질 정도로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네 덕분에 오랜만에 재밌는 유희를 보았다. 그에 대한 보상이니, 부담 없이 받도록.”
그는 거절은 없다는 듯 손을 뗐다. 이런 칭찬은 처음이었기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글렌은 남은 시간을 잘 즐기라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이대로 떠날 생각인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 본 그의 눈이 왠지 모르게 아련해 보였다.
“음….”
어떻게 할지 눈동자를 돌릴 때 유아가 보였다.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니 예전 생각이 떠올라서 바로 아이스크림을 든 손을 뻗었다.
“가주님. 아이스크림 좀 드시겠습니…아!”
라온은 뒤늦게 손에 올려져 있는 구슬 아이스크림의 색을 보며 눈꺼풀을 떨었다.
하필 민트초코였다.